▷ 크로넨버그의 귀환: 폭력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

1) 두 인물이 저지른/저지르는 범죄와 폭력의 동선을 보여주는 초반부는, 어쩌면 히치콕(Hitchcock)에 대한 오마주, 혹은 타란티노(Tarantino)에 대한 패러디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돌아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감독의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의 이러한 도입부는, 사실 히치콕의 저 '맥거핀(MacGuffin) 효과'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실로 오랜만에, 영화 <사이코(Psycho)>의 저 유명한 도입부 시퀀스들을 떠올려보라). 사실 타란티노도 과거 자신의 각본(로드리게즈(Rodriguez)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From Dusk till Dawn)>)에 히치콕의 '맥거핀'을 멋지고 황당한 방식으로 도입했던 '전과'가 있다. 이 '맥거핀'에 이끌려온 관객에게 크로넨버그가 던지고 있는 '영화적' 질문은,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과연 저렇게 총을 잘 쏠 수 있을까'라는 질문 한 자락. '일반적인' 액션 영화의 문법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는 않는다: '왜, 주인공은 수백 발의 총알을 남김 없이 피해가는데, 나쁜 놈들은 맞은 것 같지도 않은 총알에 온몸을 날리며 오버 하면서 죽어가는 거지?', '왜, 주인공은 팔이나 다리에 총알을 맞았을 때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스토리를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거지?' 사실 <폭력의 역사>의 주인공 '톰'의 영웅적인 행동에서 관객이 처음으로 놓치게 되는[혹은 '놓쳐야만 하는'] 포인트는, 이런 '당연한' 질문들의 '자연스러운' 부재, 영화가 영화가 될 수 있는 그 지극히 당연한 '부재'의 조건들에 대한 물음이다. 간과하고 지나가는 그 '가능조건'에 대한 물음들 속에 이미 '톰'의 정체가 숨겨져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크로넨버그는 장르의 '문법' 자체로 이미 하나의 '트릭'을 실행하고 있는 것.

   

▷ 크로넨버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먼저 히치콕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던 것들: '맥거핀'과 '오인'.


2) 영화의 중심에는 하나의 오해가 있다. 왜 우리의 '적'들은 우리의 주인공 '톰(Tom)'을 '조이(Joy)'로 '오해'하는가? 사실 <폭력의 역사>의 중심선을 이루는 이러한 '오해'는ㅡ또 다시 한 번 더ㅡ히치콕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의 '오해'와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 두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대척점들은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인 사람을 바로 '그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 크로넨버그가 다루고자 하는 오해는 바로 후자의 '오인(méconnaissance)'이다. 이 문제는 사실 '도펠갱어(Doppelgänger)'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 사람'으로 '오해' 받는 바로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또 의식하고 있다. <폭력의 역사>가 제기하고 있는 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식/무의식의 이항적 문제 혹은 어떤 병리적인 성격을 띠는 '신비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름[들]'이라고 하는 지극히 '물질적' 기호들 안에 놓여 있는 어떤 '신비'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비유하자면, 이는 '지킬과 하이드'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마르크스의 '화폐론'과도 같은 문제라는 것. 영화 안에서 '톰'과 '조이'라는 이름, 그리고 '스톨(Stall)'이라는 성(姓)에 대한 대사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neo-nominalism(?) 철학자'로서의 크로넨버그는 이 문제를 그리 쉽사리 놓치지 않는다. '정체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균열이 일어나는 '가족'의 모습 또한, 예를 들자면, 큐브릭(Kubrick)의 <샤이닝(Shining)>에서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실재적'인 것으로 노출되고 있는데, 이 문제 역시 <폭력의 역사>의 주인공 '톰'이 갖고 있는 두 개의 이름, 곧 '두 얼굴 아닌 두 얼굴'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크로넨버그는 <스파이더(Spider)>(2002)ㅡ그 '심각한 무게감'에 호응하는 '재미'는 떨어졌던ㅡ이후 조금 '쇠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느낌을 갖고 있는데, <폭력의 역사> 역시 '전성기'의 크로넨버그를 떠올려본다면 조금 '약한' 감이 없지 않다. 

       

▷ 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66.
▷ Slavoj Žižek, Enjoy Your Symptom!, New York, London: Routledge, 2001(1992¹).
▷ Jacques Derrida, La carte postale
    Paris: Flammarion(coll. "La Philosophie en effet), 1980.

3) 하나의 '절대적' 명제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편지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une lettre arrive toujours à destination)"는 것(Écrits, p.41). '빚'은 반드시 청산해야 하고, 또한 반드시 청산될 수밖에 없다. 톰이 피하려고 했으나 다시 만나게 되는 저 '살의의 단층' 역시 바로 이러한 '채무의 청산'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편지는 언제나 수신자에게 도착한다, 도착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만을 지적하자면, 지젝(Žižek)이 '단순화'하고 있는 것처럼, 데리다(Derrida)가 꼭 '편지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다면?'이라고 순진하게 묻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데리다의 저작들 중에서도 특히나 그의 '뇌'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의 '절창(絶唱)'이라 해야 할 저 '우편엽서'ㅡ이 '우편엽서' 역시, 언제나, 언젠가, '수신자'에게 도달할 것이 아닌가ㅡ의 내용은 그저 그렇게 '단순화'시켜 요약할 수 없다는, 짧은 반론 한 자락만을 언급한 채 지나가기로 한다(언제나처럼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각각의 저자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의도된 '단순화'라는 오류에 대한 '본능적' 경계, 그리고ㅡ그러한 '경계'의 일환으로ㅡ각각의 저자를 '무식하리만치' 또박또박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독서하기의 지난함, 바로 그것이다).

▷ Serge Grünberg, David Cronenberg, Paris: Cahiers du cinéma, 2000.

4) 이 영화는, 물론, 폭력에 대한 '일반사(一般史)'가 아니다. 제목 그대로 폭력에 대한 '하나의(a)' 역사/이야기(history/story)일 뿐이다. 폭력의 역사/이야기는 곧 '그의 이야기(his story)'가 된다. 이 영화가 폭력 이야기로서의 '보편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체성' 안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떠올려보자면, 크로넨버그의 '보편성'이라 할 것은 사실 언제나 크로넨버그 영화들의 저 지독한 '단독성'으로부터 연유하고 있었다는 생각 한 자락. 크로넨버그에 대한 책으로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위의 인터뷰를 추천한다. 고향인 캐나다에서 찍었던 그의 초창기 영화들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당시 최신작이었던 <엑시스텐츠(eXistenZ)>(1999)에 이르기까지, 크로넨버그의 육성 그대로 영화에 대한 그의 '사유'를 읽어낼 수 있는 소중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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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어려워서 잘 모릅니다만;; 크로넨버그 감독은 좋아하죠 :)
영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

람혼 2007-08-1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나 좋아하는, 거의 '사모'하는 감독입니다.^^ 크로넨버그는 언제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는...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hilocinema 2007-08-1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일독을 위해 독일행 여름여행 계획을 취소라도 해야겠군요.ㅎㅎㅎ

람혼 2007-08-1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또한 '일독'이 아니겠습니까? ^^ 부러울 따름입니다.

philocinema 2007-08-13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부러워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낱말우스개를 쫌 떠느라 "독일행"이라는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하시길...

람혼 2007-08-1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셨군요... 일독... 독일... 제가 유머에 둔감했습니다.^^
(앗, 그런데, 유머를 인지하자마자 부는 이 한여름의 서늘한 바람! 감사합니다! ^^;)

philocinema 2007-08-13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댓글 달아주시니 고맙네요!
제가 사는 이곳 부여는 찜통입니다.
무더운 여름 더위"중독" 조심해가며 지내시길....

람혼 2007-08-1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중독'은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13) 마을 사람들은, 섬돌이의 목을 매달았던 바로 그 나무의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 곧  "백송 껍질의 맛을 알았던 사람들"(『열명길』, 100쪽)이다. 그들의 '몰락'은, 우리가 「열명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이후 「숙주(宿主)」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듯이, '반드시 필요했던' 하나의 몰락이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한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여두고자 한다.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 황제 엘리오가발의 가계(家系)와 '치적(治績)'에 대한 아르토의 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몰락'의 방향성을, 곧 카오스의 영점을 향해 치닫는 '발효'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 Antonin Artaud, Héliogabale ou l'anarchiste couronné, etc. Œuvres complètes VII
    Paris: Gallimard, 1982. 

14) 바로 이 영점으로부터 인물들은 제 각기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 역병 이후에, 이 말의 죽음 이후에 두 종류의 생물이 탄생하고 두 방향으로의 '진화(進化)'ㅡ'역진화(逆進化)'일 것인가?ㅡ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진화'의 두 길들은 각각 2부와 3부로 이어질 것이다. 마치 박상륭의 「숙주」에서 어릿광대가 아편의 혼돈 속에서 다시 왕국의 코스모스(질서)를 세워가듯이. 그리고 「뙤약볕」 1부의 마지막에 제시되었던 시원의 이미지와 맞물려 있는 3부의 말미, 그 속에서 점쇠가 어떤 '경지'ㅡ'지경'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ㅡ에 도달하게 되듯이. 마치 독이 거꾸로 약이 되고 이미 썩은 것이 도리어 다시 곰삭아 피어나듯이. 다시 찾은 '말', 그것은 이미 '말'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 말은 사실 말 '이전의' 어떤 것이다(다시 한 번,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직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의미에서, '사후적으로(nachträglich/après coup/retrospectively)', 그리고 오직 '사후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나 우리는 말을 겪고서만, 말과 몸을 끌어안고 가서만, 다시 이 '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점쇠가 다시 찾은 '말'은, 말 이전의 말이지만, 시기상으로는 필연적으로 말의 삶과 죽음 이후에 도래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점쇠가 겪었을 저간의 과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성이 혼재된 채 하나의 이미지로 묶여 있던 세 명의 인물(섬돌이, 천치녀, 젊은 당굴)은, 누이를 살해하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을 획득한 점쇠 안에서 비로소 제 몸을 입어 피어난다. 이렇게 얻은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마음은 언제나 이렇게 몸과 함께 올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육화(肉化, incarnation)'로 되새겨볼 수 있을 터. 흔히 「요한시집」 등의 작품을 통해 1950년대의 '실존주의' 작가로서만 알려져 있는 장용학의 단편 「비인탄생(非人誕生)」은, 저러한 '육화'와 '진화'의 의미를 되새김질해 볼 때, 특히나 재독을 요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하 두 권의 판본 모두 이 작품을 싣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일종의 '독특한' 선을 그리는 하나의 문학적 계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 계보는 장용학에서 시작하여 박상륭을 지나 아마도 백민석에, 가장 최근에는 어쩌면 편혜영에까지도 가닿을 것이라는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이 점에 관해서는 차후 따로 독립된 평론 하나를 준비해보도록 하겠다.

   

▷ 장용학, 『 원형의 전설 外 』(한국소설문학대계 29), 두산동아, 1995.
▷ 장용학, 『 장용학 대표작품선집 』(살아 있는 한국문학 9), 책세상, 1995. 

15) 2부의 시간 규정인 '하원갑(下元甲)'이라는 시기는 순환적 시간관에 있어서 하나의 기운이 쇠락하고 다음 세상의 기운이 생성되는 시기를 뜻한다. 따라서 '하원갑 섣달 그믐'은 어떤 세기말의 시간, 한 기운과 시대가 몰락하는 마지막 날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뙤약볕'은 이와 관련하여 어떤 '시간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말의 죽음이 고지된 상황, 신의 죽음 이후 인간이 놓인 상황, 역병의 창궐과 지극한 혼란을 드러내는 1부의 말미는, 인간을 향해 따갑게 내리쬐는 한낮의 뙤약볕이다. 곧 태양을 가려주었던 말의 차양과 신의 구름이 걷힌 것이다. 그 태양을 참을 수 없어 2부에서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은 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 한다. 그들의 시간이 아마도 '하원갑 섣달 그믐'쯤이 되려나.

16) 섬을 떠나 새 세상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선상에서 펼치고 있는 2부의 장면들은 여러모로 서양 사회의 역사에 대한 비유, 곧 '근대'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해석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다만, 이러한 해석이 쉽게도 '오리엔탈리즘적' 자족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 먼저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항해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렇다. 이는 신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 근대라는 시간의 탄생을 특징짓는 역사적 사실들 중 하나인 이른바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이라는 그네들의 정복 활동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또한 이는 신이 없는 상황에서 현세주의와 물질주의를 추구하게 된 근대적 항해 자체에 대한 비유로도 읽힐 수 있다. "공화국"(『열명길』, 126쪽)이라는 표현도 근대에 등장한 부르주아 정치체제에 대한 '비유'ㅡ'공화국'은 곧 말 그대로 '공화국'인 것인데, 이 '동어반복'이 하나의 '비유'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요한다ㅡ로 읽을 수 있는, 결코 쉽게 간과되어서는 안 될 표현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항해의 끝에서 "제국주의적인 맹아"(『열명길』, 127쪽)가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은 단순한 기우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17) 물론 「뙤약볕」의 2부 전체가 단지 '서구의 몰락'이라는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단순 요약될 수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렇게 도매금 짓는 것은 심지어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종일 개연성이 크다(이와 관련된, '의상'에 대한 여담 한 자락: 지금까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각각 한 번씩 '연극화'되었던 <뙤약볕>은 의상을 통해 '원시'라는 공간에 대한 특정한 선입견을 드러내고 있는데, 선입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야 무슨 문제일까마는, 그러한 의상이 마치 '당연한' 듯 규정되고 있는 시대 설정은 사실 지극히 임의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며, 문제는 사실 그 '당연함'에 있다는 것, 그리고 '고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증'이라고 하는 '헛된' 노력과 '헛된' 고민 없이 쉽게 이루어진 의상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훨씬 더 '헛되다'는 것). 그러나 한편 '서양'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현대 사회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거대서사'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2부 전체가 단지 '역사적' 서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여전히 '서양'이라는 기표로 대변되는 상징적 질서 전체에 대한 가장 유효하고도 효과적인 비유로 기능할 수 있는 것. 곧 나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적' 동양은 사실 저 상징적 '서양'의 질서 안에 이미 편입되어 있는 것이라는 '철지난' 진단, 그래서 2부 전체는 나와 당신이 속해 있는 '현대'라는 시공간 일반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 있으리라는 '진부한' 판단을 여기서 따로 내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18)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마지막에 남겨진 섬순이가 가진 아기가 누구의 아이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것은 바람쇠의 아이일까, 아니면 족장의 아이일까. 바람쇠의 아이라면, 그 아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제국주의적인 맹아'로 자라날 것인가? 족장의 아이라면? 족장은 이 항해를 시작하고 이끈 사람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간에 다시 나무토막 하나로 말의 사당이 지녔던 외형인 오각형 모양을 깎는 행위를 보여준다. 끝간데 없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듯 보이는 배 위의 인간 군상 속에서 작가는 어떤 '희망'의 희박한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는 더 이상 절망할 수 없는 극한 절망의 한 형상화일 것인가? 어쩌면 이는 족장이 마지막까지 차마 완전히 놓아버릴 수 없었던 하나의 '회의'를 드러내주는 것? 「뙤약볕」의 3부는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인' 문제 제기에 대한 하나의 '비역사적' 해답일 수 있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X, Paris: Gallimard, 1979.
▷ Georges Bataille, La littérature et le mal,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0.
▷ 조르주 바타이유, 『 문학과 악 』(최윤정 옮김), 민음사, 1995.

19) 「뙤약볕」의 2부와 3부는 일차적으로 성(聖)과 속(俗)의 개념쌍에 입각해서 독해될 수 있다. 속의 세계는 생산, 노동, 삶, 교환, 일상, 도덕의 세계임에 반해, 성의 세계는 소비, 유희, 죽음, 증여, [도덕을 넘어선] 윤리의 세계이다. 바타이유는 『문학과 악(La littérature et le mal)』의 서문(전집판 9권, p.171)에서 이러한 도덕을 "초(超)도덕(hypermorale)"이라 명명한 바 있다. 바타이유의 가장 정치하면서도 열정적인 문학 비평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일전에 국역본이 나온 바 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태.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바타이유의 '이론서' 국역본들 중에서는 번역의 질이 가장 나았는데, 아쉬운 일이다.   

20) 먼저 2부에서의 난교(orgy) 장면은 일견 성적인 일탈과 광기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행위, 곧 가장 기본적인 종족보존의 행위라는 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성행위의 생산/재생산적인 측면과 관련된 행위이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죽임의 행위도 사실은 지극히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일견 미신을 좇는 행위처럼 보이는 일들, 예를 들어 배의 선장을 용왕께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나 여자는 항해에 액운을 준다는 생각 등은, 먹여야 할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와 정당성에 입혀진 '비합리적인' 구실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그 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실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자체가 중요하다. 바람쇠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바람쇠의 '논리적인' 답변에 의해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난 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행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말이 죽은 이후의 세계, 곧 성스러움의 질서가 없어진 속만의 세계에서는 이 가장 현세적인 욕망, 곧 생존의 욕망만이 꽃을 피운다. 박상륭의 단어를 차용하자면, 이른바 '축생도(畜生道)'의 세계가 바로 그것. 그들에게 죽음이란 단지 생명활동의 끝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며, 이는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질서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생물학적, 의사(擬似, pseudo)-유물론적 귀결이다. 바람쇠가 자기 자식에 대해 그렇게 애착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종의 보존과 개체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어쩌면 합리주의 가장 먼 극단을 항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것은 '바보들의 배(Narrenschiff)'일 것인가?

21) 반면 3부에서 점쇠의 누이 살해는 일견 이해되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속의 질서로 판단의 잣대를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이후부터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카트린드리야[四官動物]에게 하나의 감관이 더해져 판켄드리야[五官動物]가 되었을 때, 그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났던 하나의 감관은, 다름 아닌 '죽음'을 응시할 수 있게 된 감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 벌의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감관이었을 것. 다시 말해서, 자신 안에 깊고 깊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 심연과도 같은 우주를 발견한 인간, 그 인간이 바로 판켄드리야의 탄생 설화를 이루는 구조적이고 논리적인 '시조'가 되는 것이다. 바타이유를 차용하자면, 여기서 성스러움에 대한 인식과 추구란 곧 연속성에 대한 갈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연속성에 대한 추구란 유한한 삶을 넘어 무한에 가닿고자 하는 종교적인 갈구이다. 곧 '삶 속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그러한 갈구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른, 실로 다양한 형태의 술어들로 표명되어 왔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적으로는 '신과의 합일', '천국의 약속' 등의 예를, 불교적으로는 '아상(我相)과 윤회의 고리를 끊고 이를 수 있는 해탈' 등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부에서 보여지는 '죽임'의 행위들이 속(俗)의 질서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누이를 죽이는 점쇠의 행위는 성스러움의 질서를 체험하기 위한 행위, 곧 유한한 삶 속에 무한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끌어들이고 존재가 처한 불연속성을 넘어 어떤 연속성에ㅡ순간적으로나마, 아니, 순간으로서만ㅡ가닿기 위한 행위로서 성(聖)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개념화가 가능하다. 바타이유가 말하듯, "존재를 불연속성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은 언제나 가장 폭력적"(L'érotisme, p.23)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점쇠가 누이를 살해하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성스러운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죽음의 한 연구』의 '살해' 또한 마찬가지인 것). 여기서 '성스러운 폭력'이란, 한 존재가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한계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비록 순간으로나마ㅡ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오히려 '순간으로서만'ㅡ무한과 죽음의 질서인 연속성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신공희(人身供犧)나 희생제의에 있어 제물과 제의참석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교적인 '교감 작용'은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이 지닌 특징에 근거하고 있다.

22) 「뙤약볕」 안에서 남성의 계보와 여성의 계보가 갖는 의미에 대한 '가벼운' 분류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남성 인물들의 계보는 일종의 '발전 단계'를 전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계보는 곧 노당굴에서 새 당굴로, 그리고 다시 바람쇠 또는 점쇠로 이어지는 선이다. 노당굴은 최초의 균열을 의미하며 그 균열과 회의를 물려받아 한 시대를 닫는 이가 바로 새 당굴임은 이미 앞서 지적했던 바. 그가 그렇게 닫은 한 시대로부터 다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인물들이 바로 바람쇠와 점쇠일 것. 이 두 인물은 신이 죽고 말이 없어진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 위에서 각각 인간이 갈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길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족장과 점쇠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이지만(『열명길』, 106-107쪽), 족장이 이끄는 배 위의 집단은 신의 죽음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물질주의와 현세주의를 대변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무신론에 기반한, 그로부터 발원하는 발전 방향이다. 이러한 방향의 가장 첨예한 극단에 바람쇠가 서 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반면 점쇠는 '다시 [이미 알았던 것을] 찾으려' 섬에 남는다. 바람쇠의 행동선이 개척과 개발, 집단과 외재적 혁명을 통해 나아가는 직선의 선이라고 한다면, 점쇠의 행동선은 갱생과 순환, 개체와 내재적 회귀로 나아가는 나선형의 곡선이다. 분명 박상륭의 강조점은 이러한 후자의 나선형 곡선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23) 천치녀를 여성과 남성의 구분도 없는 존재, 언어와 언어 아닌 것의 구분도 없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문제일 뿐이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제도와 법의 체계라는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그녀는 분명 하나의 여성, 그리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천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그녀는 하나의 '시원'이라는 이미지로 왔지만, 그 의미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고 파악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거나 심지어 귀찮아하는 이 천치녀를 젊은 당굴이 사당까지 데리고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을 법하다. 이러한 이미지의 제시는 바로 그 이미지 자체가 지니고 있는 '본원적인 이해불가능성'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역설. 이 천치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단지 무질서와 비이성만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천치'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 말, 말씀이 신화와 역사 속에서 거의 언제나 '남성'의 전유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질서에서 볼 때 언어를 '결여'하고 있는 여성은 단지 '천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그렇다면 이 천치녀가 섬돌이나 새 당굴에게는 어째서 "말의 따님"(『열명길』, 96쪽)일 수 있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시 한 번 천치녀를 남성과 여성 또는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 '아직' 분절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모태(母胎)'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모태', 이 '매트릭스(matrix)'가 '여성명사'라는 것, 이를 '단순히' 수사학적 비유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의 따님'인 이 '어머니'는 실제로는 말을 '모른다'. 말과 그 따님은 이미 말/말씀 이전의 어떤 것, 언어와 언어 아닌 것 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어떤 구조적 시원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ㅡ혹은 그래서ㅡ그 어머니는 단순히 포근한 모성(母性)의 어머니만은 아니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 천치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자궁 안에 혼돈을 품어 질서와 안정과 이성을 의미할 뿐인 제도로서의 말을 깨뜨려 죽이고 새로 태어나게 해주는 어떤 '광포한' 모태를 의미한다. 이 시원, 이 어머니를 버리는가 아니면 되찾으려 하는가 하는 선택이 바로 2부와 3부의 갈림길, 혹은 바람쇠와 점쇠 사이에 놓인 간극일 수 있다.

   

▷ 칼리(Kali), 혹은 '버마재비의 암컷'... 어쩌면, '신성을 지닌' femme fatale?

24) 덧붙여 이 천치녀라는 인물을 좀 더 '세속적으로' 확대시켜ㅡ'축소시켜'라고 할 것인가ㅡ생각해보자. 어느 마을에나 '미친년' 하나쯤은 살고 있다(정말?). 마을의 소년(남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여자에 대한 성적 호기심을 품기도 했었을 것이다(진짜?). 흥미로운 것은, 범하기 쉬운 어떤 범속함과 범하기 두려운 어떤 성스러움이 이 여자 안에서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여자는 단순히 바보나 광인일까?ㅡ정말? 진짜? 혹시...? 이러한 맥락에서 천치녀를 바라보았을 때ㅡ섬돌이의 경우처럼ㅡ그/그녀는 천치와 성자가 한 몸 안에 공존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성(聖)과 성(性)이 혼재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25) 2부에 등장하는 섬순이는 속의 질서 속에서 교환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무엇보다 대를 잇고 종족을 보존할 여성성의 이미지 그 이상으로 기능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생물학적 여성에 충실한 인물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대지'는 수동적인 여성 또는 풍요로운 어머니로서만 드러난다. 풍랑이 불어닥치는 험난한 바다 위에서도 어쨌든 그 여성은 새로운 씨앗을 품고 보듬어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할 모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섬순이는 마지막까지 배[船/腹] 위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반면, 3부의 누이는 성의 질서 속에서 일방향으로 증여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증여의 의미는 생산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순수한 소비와 낭비, 소진 또는 과잉, 넘침이다. 곧 누이는 '희생'되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이 된다. 그 여성은 풍요롭고 넉넉한 대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유혹적이고 잔혹한 '자연'으로서의 어머니이다. 그 '상극'의 질서 속에서, 죽음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잔혹한 세계 속에서, 점쇠는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신을 가진 인간, 자기 안에 남성과 여성을, 말과 말 아닌 것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간, 자기 안에 온전한 우주와 시커먼 심연을 한 벌씩 안고 있는 인간, 곧 '인신(人神)'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인신이 등장하게 되는 광경은 앞서 1부의 말미에 제시되었던 '천치녀-섬돌이-새 당굴'이라는 어떤 '존재 덩어리'의 이미지가 비로소 몸을 입고 현현하는 장면에 다름 아닌 것. 같은 곳을 향해, 다른 모습으로, 점쇠는 그렇게 '누이'를 통과하여 '어머니'로 돌아오는 것.

26) 비슷한 맥락에서 점쇠의 어떤 '깨달음'이 목적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점쇠가 겪는 경험의 의미 자체가, 보려고 하는 의식적이고도 지향적인 태도에서가 아니라, 보여지고 내던져지고 남겨지는 어떤 '피험(被驗)'의 체험으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깨달음과 합일(合一)이라 할 것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체험이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의도와 목적은 이미 하나의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오히려 점쇠가 마지막에 도달한 어떤 '상태'는 그런 의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의도와 목적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는 이 부분에 대한 몇 가지 '문학적 장치'들이 엿보인다. 먼저 점쇠는 말을 다시 찾기 위해 사당을 복원한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방식이기는 하나 그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 말의 어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이고 목적의식을 갖는 시도, 하지만 막연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무위에 그치고 점쇠는 누이를 만나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듯 하면서 본래 스스로 가졌던 의도와 목적을 포기하는 듯이 보인다(여기서 카잔차키스(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나오는 저 '최후의 유혹'을 떠올리는 이는 오직 나뿐일까). 그런데 누이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나서 그는 어딘가 '변하게' 된다. 그는 말의 사당을 허물어뜨리고 누이를 살해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점쇠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누이의 살해와 그를 통한 '구도'의 과정이 자칫 처음부터 필요했던 과정, 의도했던 행위, 예정되어 있던 일정으로 비쳐질 위험은 언제나 있다. 물론 점쇠가 누이의 살해를 거쳐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깨달음이 어떤 '필연적인' 과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은 원래 점쇠가 지녔던 목적이나 의도와는 얄미울 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곧 그 깨달음의 과정 자체는 '필연적인' 것이나 '목적론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점쇠가 처음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했던 행위들이 지극히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데에 반해, 나중에 그가 얻는 일종의 '깨달음'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놓아버린 듯 보이는 상황에서, 마치 우연이나 축복 혹은 기적처럼, 그러나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하나의 필연이자 거대한 저주처럼, 그렇게 그에게 다가온다. 그가 찾은 것은 신이지만 그것은 신이 아니었고, 그가 찾은 것은 또한 말이지만 그것은 말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돌아가 되찾은 것은 무엇인가, 그가 깨달았다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신성(神性)이 없는 어떤 성스러움(un sacré sans divinité)'은 아니겠는가?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아도나이 1 』(정순희 옮김), 심지, 1991.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아도나이 2 』(정순희 옮김), 심지, 1991.
*) '아도나이'라는 제목은 이 국역본이 선택한 일종의 '안전한 번안' 제목인 셈인데, 원제를 그대로 달고 고려원에서 출간되었던 또 다른 국역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또한 현재는 절판인 것으로 안다. 1991년에 나를 처음으로 카잔차키스의 소설 세계로 인도해줬던 이 책은, 그해 겨울 나를 말 그대로 '펑펑 울렸다'는 고백 한 자락.

27) 이러한 점쇠의 '변성(變性)'에서 연금술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연금술적인 변성은 흔히 남자와 여자가 각각 반씩 결합된 이미지로 자주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결혼'의 이미지이다. 두 개의 성이 뒤섞이고 그로 인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제 3의 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하나의 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점쇠의 경우도 그러한 변성, 다시 말해서 말 그대로 성(sex)이 바뀌고 성질(quality)이 바뀌는 과정을 겪는다. 점쇠는 남성이지만 그는 "버마재비의 암컷"(『열명길』, 147쪽)이 되는 것이다. 점쇠가 누이를 살해함으로써 둘은 한 몸 안으로 섞이면서 어떤 '화학적' 작용을 겪게 된다(그렇다면 살해한 시신의 어떤 부분을 말 그대로 '먹는' 어떤 연쇄살인마의 행위는 단순한 '엽기'일 뿐일까). 연금술의 본래 의미에 따라서 점쇠는 하나의 '금(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곧 점쇠는 신성한 연금술적 결혼/결합을 통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죽었던 애를 되살려야겠"(『열명길』, 145쪽)다는 점쇠의 의지는 이제 그 자신의 갱신과 재생의 결과로 꽃피우고 발효되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질적인' 변화이다. 질적인 변화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내가 그의 '깨달음'이라고 범박하게 부르고 있는 그 순간 이후에 그에게서 어떤 '눈에 띄는' 변화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불순한 몸이 제거되고 이른바 정신의 순수함만이 남는 상황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몸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깨달았다고 해서 그 몸이 갑자기 어디로 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몸은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다. 단순한 광기와 복합적인 성스러움은 서로 섬세하게 구분돼야 할 필요가 있다. 점쇠가 이러한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몸 입은 '정상적인' 삶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그래서 오히려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 이러한 성(聖)의 체험은 속(俗)의 삶 속에서 순간으로 나타나고 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지속되며, 무엇보다 그러한 체험 자체가 이렇게 지속되는 삶 속에서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점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Alexander Roob, Alchemy & Mysticism: the Hermetic Museum
    Köln, Lisboa, London, New York, Paris, Tokyo: Taschen, 1997.
▷ Frances A. Yates, Giordano Bruno and the Hermetic Tradition,
    Chicago,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1964¹].
*) 로프(Roob)의 책은 연금술에 관한 다양한 도판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자료의 가치가 높고 여러모로 유용한 면이 많다. 덧붙여, 예이츠(Yates)의 위 책은, 이른바 '연금술적' 혹은 '헤르메스적' 전통이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자연관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논파한, 실로 명저라 이름할 만한 책이다. 일독을 강권한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의 이른바 '플라톤적 신학' 체계에 관해서는 이후 따로 글을 하나 마련해볼까 한다.

28) '자정(子正)'이라는 시간이 지닌 의미는 바로 이러한 체험이 갖는 순간과 경계라는 특성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도출되고 있다. 자정은 곧 회귀의 순간, 초월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시간과 대비되면서 또한 낮과 밤을 이어주는 어떤 '칠흑 같은 섬광'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점쇠에게 시원으로의 회귀, 곧 같은 곳을 향해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는 저 초월의 과정을 가능케 해준 것이 누이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자정녀(子正女)'라고 불러보자. 하지만 그 이름은 동시에 그러한 변성의 과정을 겪고난 후의 점쇠를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점쇠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점쇠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가 자정녀가 되는 순간과 경계를 체험하면서 찰나 안에 영겁의 시간을 담는다. 그는 누이를 살해하고 그의 죽음을 보는 그 유한한 순간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지닌 무한성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29) 마음은 몸과 말을 떠나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랬을 때만이 비로소 유한한 삶 속에서 체험하는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띨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체험된 무한과 죽음만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효하고 유의미한 무한이고 유일무이한 죽음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 갈구란 이러한 무한성의 죽음을 유한성의 삶 속에 담아보고 체험해보려는 일종의 'mission impossible'이 아니었던가. 몸을 몸으로써 넘어도 몸은 그대로 남고, 말을 말로써 넘어도 말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삶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윤회생사(輪廻生死)의 세계인 바르도(Bardo), 곧 모든 유정(有情)이 태어남으로 인해 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유형지(流刑地)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몸을 입음으로 인해 치뤄내야 할 형벌, 곧 유형(有形)은 또한 유형(流刑)이기도 한 것. 그러나 오히려 몸을 그렇게 남긴 채 몸 안에서 몸을 넘음으로써만이 몸을 온전히 넘어 살아냈다고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 사실 안에 초월의 드물고 고귀한 역설이 숨어 있다, 아니, 숨어 있지 않고 드러나 있다. 이러한 초월의 공간은, 몸짓을 통해 말씀이 발화되고 그 말씀을 넘어 마음으로 넘어가려는 열반에의 시도가 다시금 몸짓으로 돌아와 그 몸 안에서 체현(體現)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에, 또한 가장 '인간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 박상륭, 『 七祖語論 1: 제 I부 中道[觀]論 (Madhyamika) 1』, 문학과지성사, 1990.
▷ 박상륭, 『 七祖語論 2: 제 I부 中道[觀]論 (Madhyamika) 二/間場 』, 문학과지성사, 1991.
▷ 박상륭, 『 七祖語論 3: 제 II부 進化論 』, 문학과지성사, 1992.
▷ 박상륭, 『 七祖語論 4: 제 III부 逆進化論[Nivritti] 』, 문학과지성사, 1994.

30) 만약, 이 네 권의 책을 완독(完讀)한 사람이 국내에 열 손가락도 안 될 것이라는 몇몇 패관(稗官)들의 다소 과장된 풍문(風聞)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완독'이라는 '무식한' 행위가  곧 바로 '완벽한 이해'라는 '기민한' 결과를 낳을 수만은 없다는 슬픈 사실이 언제나 독서하기의 또 다른 지난함과 고단함으로 남아 있다는, 어떤 '씁쓸한 희망' 한 자락만을 밝혀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독은 함께 나누면 약이 된다(정말? 혹여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심보는 아니고?).

   

▷ 박상륭, 『 평심 』, 문학동네, 1999.
▷ 박상륭, 『 小說法 』, 현대문학, 2005.

31) 1994년에 『칠조어론』의 4권(3부 逆進化論[Nivritti])이 나온 이후 5년만에 박상륭의 '신작' 두 권ㅡ『평심』과 『산해기』ㅡ이 동시에 출간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열광했던가. 흥미로운 점은 '평심'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소설집'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반응이었다. 그 반응의 요지는, 이 '자이나교도' 박상륭에 대해서도 비로소 '소설 비평'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김윤식 선생에게 있어 그 이전의 박상륭 '소설'들은 소설이 아닌 것이 되고 있는데ㅡ어쩌면 박상륭 자신의 말 그대로 하나의 '잡설'일 뿐일 것?ㅡ, '근대 소설'의 형식과 미학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오랜 천착이 낳은 기준과 그 [헤겔적?] 엄격함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없지 않다). 특히 이 소설집의 백미라 할 세 연작 소설들(「로이가 산 한 삶」, 「왈튼 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 「미스 앤더슨이 날려보낸 한 날음」)을 통해, 가장 '근대적인' 형태의 소설 형식이라는 자리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박상륭의 행보가 그 반응의 이유였다. 일독을 권한다. 박상륭은 가장 최근작인 『소설법』에서 이번엔 『莊子』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小說 - 法'으로 읽을 수도, '小 - 說法'으로 읽을 수도 있는 제목은, 그대로 이 책에 대한 독서의 두 가지 방법이 되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여러 개의 이야기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단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도 있다. 박상륭은 물론 후자에 해당하는 작가이다, 그것도, 단 하나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책들로 쓰고 있는, 그런 마하바라타의 '패관'이자 천일야화의 '잡설가'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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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8-09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대단하십니다. 박상륭의 책은 저도 읽어보려고 몇번 시도하다가 중도에 좌절하고 말았다는..ㅜ.ㅜ 그런데 칠조어록같은 책을 모두 완독하시다니..^^ 함께 독을 먹을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님이 올려주신 이 포스트라도 대신 프린트해서 완독해 보겠습니다..(모니터로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내용들이네요..^^;;)

람혼 2007-08-0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린트까지 해서 완독해주신다고 하시니 영광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독을 먹는 일이 '동반자살'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시너지 효과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Sweet Summer Night~!
 

1) 말이 말을 말로 넘어가려 하듯, 몸은 몸으로 몸을 넘어가려 한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말은 오직 말로써 넘어가야 하고, 그와 똑같이, 혹은 평행하게, 오직 몸은 몸으로써만, 몸을 씀으로써만, 넘어갈 수 있다. 초월(超越)은 그렇게 넘어가는 것, 곧 언제나 하나의 이행이자 이동하는 몸짓이지만, 무엇보다 그 초월의 몸짓은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 재귀적이며 회귀적으로, 매번 같은 곳을 향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다. 예를 들면, 그래서 김진석의 철학적/수사학적 행마법(行馬法)은, 더욱 쉽게 잊혀져서는 안 될 드물고 고귀한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탈-'이라는 접두어를 춤사위로 삼아 일종의 '탈-춤'을 추는 춤꾼의 책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1992)에서부터, '초월'의 개념을 '포월(匍越)'로 대체하고 삶의 변속기를 조절하는 『초월에서 포월로』(1994), '초인'에 대해 '넘어가는 인간'을 맞서 세우며 '기우뚱한' 균형을 탐색하는 『니체에서 세르까지』(1994)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초반에 이미 독자적인 개념어들과 고유한 문체를 창안해냈던 이 '가장 한국적인' 철학자에 대한 [재-]기억과 [재-]전유를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소망 한 자락.

      

▷ 김진석, 『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 문학과지성사, 1992.
▷ 김진석, 『 초월에서 포월로 』, 솔, 1994.
▷ 김진석, 『 니체에서 세르까지 』, 솔, 1994.

2) 그런데 이 '초월'이라는 움직임의 모습은 자주 '구도(求道)'나 '깨달음'이라는 말의 습관 속에서 쉽게 잊혀지거나 곡해되곤 한다. 그 습관 속에서 말은 어딘지 모를 높을 곳으로 고양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육체나 물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떤 정신만이 투명한 '유령'처럼 나의 몸과 말을 짓누르며 배회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고 상승만을 하거나 추락하며 하강만을 할 뿐이며, 순환의 궤적이 아닌 편도의 직선을 그린다. '구도'는 더 이상 떠나거나 걷지 않고 어느 구석 마을에서 아내 하나쯤 얻어 틀어박히고 뿌리내린다. '깨달음'은 더 이상 달리거나 미치지[狂/至] 않고 웅덩이 하나에 똬리 틀고 앉아서는 짐짓 점잖은 듯 고여서 썩은 냄새를 풍기거나 흉물스런 돌로 굳어진다. 바로 이 마을, 이 웅덩이 속에는, 뿌리 깊은 목적론적 귀신이 서식하고 있으며, 드물고 고귀한 것의 비의(秘意)가 숨이 틀어 막힌 채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숨어 있지만 숨은 것이 아니고 또한 일종의 비의이긴 하나 '신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숨은 신'일 것? 그것은 드물지만 어디에나 널려 있으며, 고귀한 성스러움이지만 동시에 가장 낮은 곳의 속됨이기도 하다.

   

▷ 박상륭, 『 열명길. 박상륭 작품집 I 』, 문학과지성사, 1986.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박상륭 작품집 II 』, 문학과지성사, 1986.

3) 박상륭 문학의 출발점과 종착점ㅡ하지만 그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ㅡ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모순어법 안에 위치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 완고하게 서 있는 벽, 마주 대면해 면벽해야 할 이 벽이, 먼저 하나의 '어법(語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은 그렇게 끈질기게 끈적거린다. 말을 말로써 넘어야 하는 말하는 운명의 지난함, 몸을 몸으로써 넘어야 하는 몸 입은 존재의 고단함은, 단순한 정신의 '순수한' 고양과 상승 작용으로써만 해결될 수 없는 어떤 뒤척임과 끈적거림이다. 이 말 앞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어눌한 말더듬거림이 될 수밖에 없고, 이 몸 앞에서 몸짓은 언제나 고꾸라지는 불구의 움직임이 되어버린다.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고 싶은데, 그만 그 더듬거리는 말끝에 들러붙거나 말 안 듣는 몸끝에 억지로 목발을 덧댄다. 말을 말로써 몸을 몸으로써 온전히 살아내기도 전에 말과 몸의 저 천근 같은 무게에 먼저 짓눌리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 이 '어법'만이 자아(自我)에로 열린 말의 저 가장 깊은 굴을 뚫을 수 있었고,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다'는 몸에 대한 자각(自覺)을 비로소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이미 오래 전에 자신 안에서 한 벌의 우주를 발견했던 생물, 판켄드리야[五官動物]로서의 인간의 탄생이 놓여 있다. 지금, 그 어두운 굴은 밖으로 드러나 밝은 땅이 되었고,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했던 자각의 빛은 지극히 당연한 나날의 햇살이 되었다. 슬프고도 경이롭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개체와 종을 아우르는 발생론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상징계의 모습, 거짓말 같은 진실, 진실 같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나는, '몸'의 단계를 졸업하고 '말'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말, 말로 말 되어질 수도 없는 '마음'인데 하물며 그것에 '몸 담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 몸, 그러한 말과 몸을 '가진'ㅡ가지고 있다고 '상정된'ㅡ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

     

▷ 박상륭, 『 아겔다마 』, 문학과지성사, 1997.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上 』, 문학과지성사, 1997.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下 』, 문학과지성사, 1997.
*) 『죽음의 한 연구』는 1997년에 두 권으로 분책되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총서의 일환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4) 「뙤약볕」이 시작되는 공간은 일견 안온하고 정돈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어떤 불모(不毛)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매일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태양 아래에서 일상의 경작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회'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득한 태초였을 뿐이다. 이 사회는 태초의 '말씀'이라는 종교적 체험이 하나의 제도, 하나의 법이 되어버린 체계이다. 이 체계는 하나의 '질서'를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이 질서 안에서 말은 존재를 가진 하나의 신(神)이 되며 그 신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이 질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분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형법에 기초해 있다. 사회 안에서 이러한 질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열명길』, 82쪽)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한 체계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가장 '자연스러운' 법률을 구성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그러므로 모든 '이야기', 모든 '서사'의 시작에는, 하나의 균열, 하나의 흠집이 있다). 이 균열은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노당굴의 회의, 새 당굴의 번뇌, 섬돌이의 죽음 등이 그러한 균열의 중요한 기호이자 현상들이다.

5) 노당굴의 회의는, 새 당굴의 눈에서 "맹렬한 어떤 혼돈"(『열명길』, 83쪽)을 보고 그 혼돈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삼는 행위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가 감지했던 것은 세습적인 당굴의 지위와 말의 법으로써 유지되는 인간의 사회가 인간에게 있어 결코 본질적일 수 없다는 어떤 예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젊은 시절에 새 당굴이 일삼았던 이른바 '패륜적' 행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에게 당굴은 사회의 도덕적 중심으로서 하나의 구조를 가능케 하는 지위를 의미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그 구조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 새 당굴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서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반면 노당굴이 새 당굴의 눈빛 속에서 본 어떤 혼돈, 그리고 그러한 혼돈을 바라보는 노당굴의 시각은, 이러한 사회 체계의 존속과 안녕이라는 문제로부터 이미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투. 이 불안과 혼돈은, 깨지기 위해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살해(meurtre)'의 씨앗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ㅡ마을 사람들의 것과 노당굴의 것ㅡ은 사실 새 당굴의 '패륜적' 행위, 곧 '악(惡, le mal)'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질서를 파괴하며 기존의 사회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악행'을 지극히 위험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한 사회의 도덕적인 체계 안에서 습득되고 유포되는 것이다. 반면 노당굴은 무질서와 방황 또는 악과 혼돈 속에 어떤 '깨달음'의 씨앗이 있다는 기본적인 시각에서 그러한 '악행'을 기존의 도덕적인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단초 혹은 전조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을 넘어서 있는 것, 그러한 구분을 가능케 한 도덕 체계 전반에 대한 회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당굴이 꿈꾸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기존해 있는 '사회'와는 어떻게 다르고 어디서 어긋나는가. 아래의 책 몇 권이 그에 대해 답하고 있다는 생각이다(바타이유와 블랑쇼, 낭시가 생각했던 '공동체'의 개념,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이 마르크스의 개념인 '교통(Verkehr)'에 근거하여 펼치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 사이의 구분법에 관해서는 각각 후일 따로 글을 마련해볼까 한다). 일독을 권한다.

       

▷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désœuvrée
    Paris: Christian Bourgois(coll. "Détroits"), 1999³[1986¹].
▷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Paris: Minuit, 1983.
▷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affrontée, Paris: Galilée, 2001.

▷ 모리스 블랑쇼 / 장-뤽 낭시,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 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이산, 1999.
▷ 가라타니 고진, 『 은유로서의 건축 』(김재희 옮김), 한나래, 1998.
▷ 가라타니 고진, 『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6)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홀로 덩그러니 '던져진(geworfen)' 새 당굴은 이러한 노당굴의 회의를 자신의 짐으로 떠안는다. 그에게 더 이상 말은 현현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말의 죽음을 몸으로 먼저 깨닫고 있다. 새 당굴이 처한 번민은 과거 자신이 했던 행위들에 대한 참회 때문이 아니다. 그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황할 뿐이다. 하지만 이 방황 역시, 마치 『파우스트(Faust)』의 프롤로그에서 주(主)께서 말씀하시듯, 그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 lange er strebt)"고만 말하고는 안심하고 우쭐해 할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말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린 인간, 곧 신이 없음을 어느새 알아채버린 인간의 혼란이다. 새 당굴도 처음에는 단지 세습적인 계급으로서의 당굴의 권위를 거짓으로 흉내내보려고 하지만 곧 그 모든 것이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는 곧 새 당굴이 안고 갈 화두의 탄생을 의미한다. 하지만 새 당굴은, 그가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지도자격인 '당굴'이기에, 재판을 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바로 여기에 그가 느낄 수밖에 없는 괴리의 원인 한 자락이 놓여 있다. 이는 앞으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중요한 의미망 중 하나로 작동하게 될 성(聖)과 속(俗) 사이의 어떤 괴리라고도 할 수 있다. 새 당굴이 느끼는 이러한 괴리는 그가 섬돌이의 사형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새 당굴이 사당 벽을 내리치며 "말을 해라, 말을!"(『열명길』, 86쪽)이라고 발악할 때 그는 아직 말이라는 것을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말에게 '말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말이 단지 "우연의 자존자(自存者)"(『열명길』, 87쪽)일 뿐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부터 그는 외재적인 실체로서의 말에 회의를 품고 그것을 '넘어가기' 위해 고민하며 비로소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에게 섬돌이의 죽음이 섬광처럼 내리친다. 그 죽음은 말의 죽음을 결정적으로 고지함으로써 장차 마을을 휩쓸 저 거대한 정신적 공황, 곧 역병의 창궐을 예고한다. 안온히 내리쬐던 햇살이 고통스러운 뙤약볕으로 돌변하는 순간인 것. 그것은 동시에 평온해 보이던 상징계를 순간적으로 침범해오는 잔혹한 실재, 곧 '불가능성의 사막'이 지닌 모습이기도 하다.

   

▷ Jacques Lacan, Les écrits techniques de Freud. Le séminaire I
    Paris: Seuil(coll. "Champ freudien"), 1975.
▷ Jacques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Le séminaire XI, Paris: Seuil(coll. "Champ freudien"), 1973.

7) 실재에 관한 라캉의 무수한 논의들 중 가장 '원론적인' 두 구절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세미나 1권의 80쪽: "실재(le réel), 또는 실재로서 지각되는 것이란, 곧 상징화(symbolisation)에 대해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미나 11권의 152쪽: "불가능한 것이 반드시 가능한 것의 반대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것에 대립되는 것은 확실히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후자의 문장은, 바타이유와의 접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부분으로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논의이다. 사실 라캉의 '실재'나 '상징' 등의 개념에 관해서는 뭔가 더 말을 덧붙이는 일이 어색하고 쑥스러울 정도로 이미 이곳저곳에 많은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다만 한 사람의 지독한 '원전주의자' 혹은 '텍스트주의자'로서 첨언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먼저 원전ㅡ원본이든 번역이든ㅡ을 또박또박 읽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라캉의 책들은 현재 오랜 기간 동안 꼼꼼한 번역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에크리(Écrits)』는 작년에 브루스 핑크(Bruce Fink)의 훌륭한 번역으로 영역본(완역판)이 나온 바 있으며, 세미나들 중의 몇 권도 이미 영역된 바 있다(불어판은 전 26권 중 현재까지 열세 권이 출간된 상태이고, 영역본은 현재까지 다섯 권이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는데, 이들 판본에 대해서는 이후 라캉에 대한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8) 「뙤약볕」에서 아마도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당굴이라는 존재가 노당굴에서 새 당굴로 이어지면서 그 의미와 가치가 변성(變性)하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먼저 그것은 단지 세습되는 하나의 계급이었으며 또한 어떤 회의나 의심도 없이 단순히 전래되어 오기만 했던 하나의 사회적 구성요소였다. 따라서 이 때의 당굴이란 한 사회를 통합하고 그 사회의 도덕적 장치로 기능하는 어떤 지표로서의 의미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노당굴이 이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일말의 회의와 의심은, 그가 새 당굴의 눈빛 속에서 목격했던 혼돈에서 다른 씨앗을 찾아낸다. 노당굴의 회의가 새 당굴의 번뇌에 씨앗을 뿌린 셈이고, 이는 곧 말이란 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치달아간다. 따라서 이와 함께 인간이 의지할 절대적인 도덕이 사라져버림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절대적 불안의 지점으로부터 터벅터벅 걸어가야 할 구도의 길이 열리고 있다(이 구도의 과정은 다시 3부의 점쇠에게로 이어질 것이고, 점쇠는 말의 죽음 이후에 다시 말을 되찾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도드라진 발화점(發火點/發話點)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섬돌이의 죽음이다. 섬돌이의 죽음은, 서구의 축제/희생 이론에서 희생제의(sacrifice)의 가장 근원적인 기능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바타이유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L'érotisme, p.29): "성스러움(le sacré)이란, 어떤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인(discontinu)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들 앞에 드러난 존재의 연속성(continuité), 바로 그것이다." 『에로티즘』의 판본으로는 다음의 두 권을 추천한다. 미뉘(Minuit) 출판사의 원판본과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전집판 10권이다. 두 권의 텍스트는 동일하며, 미뉘 판본이 도판을 텍스트 사이 사이에 삽입하고 있는 반면에 갈리마르 판본은 도판만을 따로 모아서 묶고 있다는 차이만이 있다.

   

▷ Georges Bataille, L'érotisme,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57.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X, Paris: Gallimard, 1987.

9) 한편, 섬돌이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른다. 그는 '단지'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고 그 죄에 대한 벌로 사형을 받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죄와 벌의 관념 자체가 한 사회 체계의 질서, 곧 도덕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섬돌이는 죽음에 직면한 섬광 같은 순간, 죽음을 생물적으로 거부하는 몸부림의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온 어떤 차분하고 고요한 순간에, 한 어머니를 만난다. 그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다. 섬돌이가 어렴풋이 감지했을, 그러나 완벽하게는 알 수 없었던 것,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를 어딘지 모르게 변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시원(始原)'으로서의 어머니이다(이러한 '시원'은 물론 하나의 '기원 없는 기원',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원점'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원점'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이 '어머니'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먼저 그 어머니는 남성과 여성 등의 성(性)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남자도 여자도"(『열명길』, 96쪽) 아닌, 무성(無性)이면서 동시에 양성(兩性)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편의상 섬돌이를 따라 그/그것을 여성 명사인 '어머니'로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머니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여성은 없다. 다만 여기서는 '어머니'라는 단어의 상징적 느낌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할 터. 여기서 어머니로 '상징'되는 시원은, 언어와 언어 아닌 것, 여성과 남성 등이 분화/분절화(articulation)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섬돌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성이 규정되지 않은 채 모호한/양가적인 상태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섬돌이에게 뚝쇠의 아내가 어떤 어머니의 이미지로 기능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섬돌이는 남자인 새 당굴을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섬돌이가 어머니의 생김새를 모른다는 사실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10)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혼재되어 있는 성(性)과 가계(家系)의 기이한 모습을 보게 된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새 당굴과 섬돌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 곧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볼 수 있다. 또한 노당굴의 어떤 회의에서 시작된 저 구도의 계보 상에서, 그리고 가장 표면적으로는 마을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제도적인 당굴의 계보 상에서, 노당굴과 새 당굴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아들 관계이다(이 부자 관계는 두 인물이 공히 서로 느끼고 인정하고 있는 가장 표층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어떤 신비한 과정에서인지' 섬돌이는 당굴에게서 어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데 섬돌이는 이 '모자(母子) 관계'를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관계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와 이성과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란 점에서?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렇다. 한편, 천치녀(天痴女, 뚝쇠의 아내)와 섬돌이 또한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이고 있다(뚝쇠의 아내를 '천치녀'라고 편의상 부르는 것은 이 인물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 비추어볼 때 자칫 편협하고 곡해된 규정이 될 위험이 있으나, 무엇보다 이 '옌네'가 천치로 보이는 것은 앞서 밝혔던바 일차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서와 안정이라는 시각 혹은 남성중심적인 시각 때문이라는 점만을 부기하기로 하고, 이하에서는 말 그대로 단지 '편의상'의 이유에서 '천치녀'로 불러보기로 하는데, 다소 괴이한 형태로 유행하고 있는 이 '~녀'라는 명명법을 버리고 차라리 '미친년'이라고 직설적으로 부르는 일을 망설이게 만드는 나의 이 심리적 방어기제 혹은 '초자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이 '모자 관계' 역시 둘 사이에 의식적으로 인식되는 관계는 아닐 것이며 오히려 상징적인 관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 당굴과 천치녀와 섬돌이의 삼자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천치녀와 그녀의 젖을 빨고 있는 섬돌이는 일단은 모자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세 명의 인물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새 당굴의 의미가 보다 도드라지게 된다. 곧 그는 섬돌이와 천치녀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태어난 자, 한 시대와 한 체계의 문을 닫고 다음 세상을 여는 자라는 신화적인 의미를 획득하면서 두 사람의 '아들'이라는 '기호학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새 당굴은 하나의 육신으로서는 죽었지만, 그 죽음은 동시에 2부와 3부로 이어질 어떤 길들의 작고 소박한 씨앗, 하지만 동시에 폭풍 같은 파괴력을 지닌 씨앗을 품고 죽은 죽음이며, 이후 그 '죽음'의 씨앗으로부터 다시 '삶'의 씨앗이 싹터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 '구도(求道)'의 계보, 말 그대로 '길을 구하는' 계보 안에 어떤 '대속(代贖)'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차적인' 섬돌이의 죽음이 아니라, '이차적인' 새 당굴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놈은 죽어야 된다는"(『열명길』, 90쪽) 선과 악의 도덕적 논리, 그 제도적 법률의 [악]순환을 끊고 새 당굴은, 시간적으로는 한 시대를, 제 스스로는 한 육체를 닫는다. 섬돌이와 천치녀 그리고 젊은 당굴은 이렇게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무언가를 닫고 다시 열 준비를 하는 '시원'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

11) 성과 가계가 뒤섞이고 혼재되어 있는 삼중의 '부자' 혹은 '모자' 관계라는 상태, 1부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어떤 '구조적인' 기원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 '환생'을 준비한다. 더 이상 '환생(還生)'하지 않기 위한 '환생(幻生)'의 준비? 모든 것이 부패된 후 그 덩어리는 발효를 기다리는 것이다. 말과 법과 제도로 유지되어 오던 사회는 이 카오스의 덩어리 속에서 완전한 영점(零點)으로 접근한다. 새 당굴이 이렇듯 자신의 죽음으로써 닫는 한 시대의 말미는 역병의 창궐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그 역병은 단순히 신체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교적인 신열(身熱/神熱), 볼 수 없는 것을 봐버린 이들이 앓게 되는 어떤 불치의 열병에 가깝다. 섬돌이와 당굴의 죽음이 이들에게 '병'이 되고 '독'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종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곧 그것이 외재적 존재로서의 신의 부재,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뙤약볕'과도 같은 사형 선고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는 실로 '니체적인' 진단이 아닌가?

       

▷ 박상륭, 『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續 山海記 』, 문학동네, 2003.
▷ 박상륭, 『 산해기 』, 문학동네, 1999.
▷ 박상륭, 『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 문학동네, 2002.

12) 사실 박상륭은 이후 자신과 니체를 '조심스럽게' 구분하며 다소 점잔을 빼는 반론(『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을 제기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차라투스트라와 박상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대결'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불어 에켄드리야에서 판켄드리야에 이르는 유정(有情)들의 잡다한 모습, 그리고 도대체 독룡(毒龍)에 잡혀간 공주를 누가 구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관심이 있다면, '산문성'의 극단에 서 있는 이 '잡설가 패관'의 산문집 『산해기』의 일독을 권한다. 일종의 '심화학습'으로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ㅡ출판사 편집자가 달아줬다는 인상을 물씬 풍기는 제목인데ㅡ에 수록되어 있는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의 일독 또한 권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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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ger Caillois, L'homme et le sacré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8[1950¹].

1) 성(聖)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에 대한 고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분법'이란 뛰어넘거나 무화시킬 어떤 이론적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곧, 칼로 자르듯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시킬 수 없는 이분법, 아니 어쩌면 너무도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려낼 수 있을 법한 이분법, 그래서 오히려 그 이분법 자체에 종말을 고할 수조차 없는 이분법, 경계선 위에서 스멀거리는, 극단적으로는 서로의 위치까지도 뒤바꿔버리는 역설(paradoxe)의 두 반쪽들이 그려내는 이분법... 그러므로 성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역설의 철학'을 찾아가는 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철학(philosophie)인가? 바타이유(Bataille)와 데리다(Derrida)에 따르자면, 그렇다(그런데, 이들은 과연 '철학자'들인가?). 그리고 또한 그들에 따르면ㅡ어쩌면 가장 '솔직하게' 말하여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ㅡ철학은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2) 성(聖)과 속(俗)은 각각 그 자체로서는 외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이 각기 상대편의 침범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곧 역설적으로, 성과 속이 상대편의 존재에 대한 상정과 그러한 상대편과의 대립 구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임을 말해준다. 반대편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즉 서로 간의 차이와 상대적 규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성과 속이, 또한 각각 반대편과의 접촉에 의해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종교의 모순적인 진리' 혹은 '성과 속의 역설적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카이유와(Caillois)가 말하는 것처럼, 성(聖)이란 "죽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것(ce dont on n'approche pas sans mourir)"이다(p.25). 

3) 성(聖)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양가성(ambiguïté)은 그것이 '더러움'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일견 표면적으로 성스러움과 더러움의 관계는 대립적인 이분법의 관계이다. 그러나 어떤 '고정적인' 상황을 떠났을 때 그 이분법은 모호한 형태로 유동한다. 성스러움을 파괴하는 불경한, 따라서 어떤 '더러운' 행위가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으로 화(化)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유동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종족을 살해한 자, 같은 종족의 여자를 취한 자, 같은 종족의 토템을 먹은 자는, 바로 그 '위반(transgression)'을 통해서, 더럽힘과 훼손을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같은 종족 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직접 벌하려 하지 않는다. 감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곧, 그가 저지른 불경함과 그로 인해 그가 지니게 된 '더러움의 신성함'이 자신들에게 '전염'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종의 경외감이 '반대편'에 위치한 권위를, 곧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을 형성한다. 이러한 성스러움의 역설적인 의미에 관한 연구로는 가장 먼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책들의 일독을 권한다. 모스의 대표적인 논문인 『증여론(Essai sur le don)』을 포함해서 그의 주요작들을 수록하고 있는 『사회학과 인류학(Sociologie et anthropologie)』을 가장 먼저 읽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서두에는 학구열을 잔뜩 자극하는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의 서문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성스러움(sacré)과 희생제의(sacrifice)의 개념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모스의 3권짜리 저작집, 특히 1권을 참조하기를 권한다(교환(échange)과 증여(don)의 개념에 관해서는 특히 3권의 일독을 권한다). 이 저작집은 모스의 사회학/인류학 체계 전반을 일별할 수 있는 훌륭한 편제가 특히나 매력적인 판본인데, 이 중 2권과 3권의 글들을 일부 발췌 수록하여 『사회학 시론집(Essais de sociologie)』이라는 제목의 문고판도 간행된 바 있다.


   

▷ Marcel Mauss,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aris: PUF(coll. "Quadrige"), 1999[1950¹].
▷ Marcel Mauss, Essais de sociologie
    Paris: Seuil(coll. "Points sciences humaines"), 1971.

       

▷ Marcel Mauss, Œuvres. Tome 1: les fonctions sociales du sacré
   Paris: Minuit(coll. "Le Sens commun"), 1968.
▷ Marcel Mauss, Œuvres. Tome 2: représentations collectives et diversité des 
   civilisations, Paris: Minuit(coll. "Le Sens commun"), 1974.
▷ Marcel Mauss, Œuvres. Tome 3: cohésion sociale et divisions de la sociologie
   Paris: Minuit(coll. "Le Sens commun"), 1969.

4) 균형적인 상호성과 질서의 세계가 우월성과 위계 또는 서열의 세계로 전이되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이는 물론 가장 '비역사적인' 역사적 추측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권력의 기원'이었을 것이다(이 역시 물론 가장 '비정치적인' 정치적 추측일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그러한 상호적인 균형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권력과 서열의 관계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따라서 또한 이는 가장 '비역사적'이며 가장 '비정치적'인, 인류학적/종교학적 기원-목적론인 것). 말하자면, 누군가는, 위반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어떤 '기원'이나 '태초'의 이미지로 윤색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어느 때나 그 어느 곳에서나, 누군가는, 위반을 '해야만 했던' 것이 된다(따라서 이는 종교학적/인류학적 철학 혹은 인간학이 지닌 일종의 '프로토콜'이 된다). 전대미문의 전복, 오직 '전대미문'이라는 의미에서만 '기원적인', 과연 '전대미문'이나 '전무후무'라는 것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품는 한에서만 '원형적인', 그런 '최초의' 전복. 그러므로 모든 왕조의 시조, 곧 첫 번째 왕은 언제나 찬탈자이자 전복자였으며 위반하는 자이자 폭군이었던 것. 물론 여기서의 전복과 찬탈을 그 이전 '왕조'에 대한 것으로 즉물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차용증서도 없이 차용하자면, 일종의 '자연사(Naturgeschichte)'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5) 금기의 체계가 근본적인 동질성에 대한 금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근친상간은 쉽게 동성애의 상징이 된다. 호모(homo-)적인 것, 동질적인 것, 동류의 것은 곧,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재생산/출산(reproduction)의 관점에서 근친상간은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쓸모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띠게 되는 것. 그것은 마치 동족을 먹는 행위(homophage)와도 같은 것이 된다. 자기 부족의 토템을 먹는 행위도 이와 비슷한 '상징적' 문맥에서 금지되는데, 섹스가 흔히 음식을 '먹는' 행위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카이유와가 말하고 있듯이, "음식물과 여자와 희생물들은 외부에서 찾아져야 한다(Aliments, femmes et victimes doivent être recherchés au-dehors)"는 것(p.110).

6) 카이유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p.76): "속(le profane)은 안락과 안전의 세계이다. 두 개의 소용돌이가 그 세계를 한계 짓는다. 안락과 안전이 더 이상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규칙에 대한 확고하고도 조심스러운 복종이 인간을 짓누를 때, 이 두 현기증(deux vertiges)이 인간을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그는, 규칙이라는 것이 하나의 장벽(barrière)으로 거기 있다는 사실을, 성스러운 것이란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에 오직 그것을 넘어서거나 깨뜨린 사람만이 이해하고 소유하게 될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얼마나 모스-바타이유적인 관점이란 말인가.

7) 상호성과 균형을 그 특징으로 하는 두 부족 간의 질서와 금기의 체계는 위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곧 축제가 갖는 기능에 다름 아닌데, 금기(interdit)가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한 사회의 한계(limite)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과 속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기와 위반은 단순한 대립 관계나 상극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기의 질서가 주기적으로 위반의 작용과 행위를 '요청'한다고 하는 사실이 '조화'의 이데올로기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반이 금기를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바타이유적 주제를 떠올려 볼 때, 금기와 위반의 주제를 단순히 넓은 의미에서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가령 예를 들면,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La part maudite)』을 어떤 잃어버린 '조화'와 '균형'에 대한 회복과 복권의 이론으로 읽는 것은 '저주의 몫'이라는 영역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될 수 없다. 『저주의 몫』은 미뉘(Minuit) 출판사의 원판본과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전집판 7권, 이 두 판본을 추천한다. 미뉘 출판사의 판본은 『저주의 몫』의 모태가 되는 바타이유의 초기 글 「소비의 개념(La notion de dépense)」 또한 수록하고 있으며(이 글은 전집판에서는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장 피엘(Jean Piel)이 서문을 달았다. 전집판 7권의 장점은 『저주의 몫』을 전후로 한 '일반경제' 관련 바타이유의 저작과 강연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전집판의 7권과 8권은 바로 바타이유의 이른바 '저주의 몫' 3부작을 둘러싼 저작들에 할애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조한경의 바타이유 국역본들은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이 번역들에 대해서는 차후 따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다행히도' 현재는 대부분이 절판인데), 특히나 『에로티즘』의 국역본이 행한 거의 '폭행' 수준의 번역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

▷ Georges Bataille, La part maudite,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7[1949¹].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VII, Paris: Gallimard, 1976.

8) 파괴의 기쁨을 선사하는 축제는 구질서와 신질서 사이의 '간빙기', 시간이 정지해 버리는 시간을 구성한다. 카이유와가 말하듯, 축제에서는 "규칙들에 반(反)해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반대로 실행되어야 한다(Tout doit être effectué à l'envers)"는 것(p.151). 또한 "이러한 신성모독들은 바로 그것들이 위반하고 있는 금지사항들 자체만큼이나 역시 의식적(rituels)이고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들은 금지사항들과 마찬가지로 성(sacré)에 속한다"는 것(p.155). 이 역설의 철학, 역설의 인간학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카이유와의 문장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일 터(p.183): "성(sacré)은 삶을 부여하는 것임과 동시에 삶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흘러나오는 원천(source)이며 동시에 삶이 사라지는 하구(estuaire)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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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8-09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루어주신 인간과 성스러움의 국역본 상태는 어떤가요? 국내에 <인간과 성>이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것으로 아는데..

인류학이라고 하는 분야는 저도 몇권 접해본적이 없습니다만. 처음으로 흥미를 느끼게 된 책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예 소바주>시리즈를 접하고서 였습니다. 이 시리즈에서도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같은 편에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소위 "순수증여"라고하는 개념으로 새롭게 설명하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람혼님은 나카자와 신이치씨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람혼 2007-08-0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과 성>의 번역은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제는 아마 절판이겠지요? 나카자와 신이치의 그 시리즈는 출간되었을 당시 상당히 관심은 있었는데ㅡ예쁘게 디자인된 표지가 특히나^^;ㅡ아직 구해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언젠가 일독해보고 yoonta님께 고견을 여쭙겠습니다.
 

'이사만루(二死滿壘)'의 문학과 '무타무주(無打無走)'의 문학
ㅡ 문학적 분류법에 관한 몇 개의 야구 이야기



▷ 사이토 지로(齋藤次郞), 『 아톰의 철학 』(손상익 옮김), 개마고원, 1996.

1) 11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1996년 여름, 나는 서울의 한 서점에서ㅡ아마도 강남역의 동화서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ㅡ당시 신간으로 출간되었던 사이토 지로(齋藤次郞)의 책 『아톰의 철학』을 찾고 있었다. 이 책은 데츠카 오사무(手塚治)의 생애와 그의 만화 세계를 다룬 책이었다. 다만 그때 나의 '결정적인' 실수는 이 책을 만화 코너에서만 열심히 찾고 있었다는 것이 되겠다. 지금과 같은 우수한 성능의 검색용 컴퓨터를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시기, 나는 나만의 '서툴고 원시적인' 검색 방법에만 의존하는 데에 스스로 조금씩 지쳐갔고, 결국에는 서적의 분류법에 있어서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전문가'인 서점 직원에게 책이 있는 장소를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알아낸 놀라운 사실은, 그 책이 '당당하게도' 철학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서광사와 민음사의 책들 가운데에, 문학과지성사와 창작과비평사의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얄미운 곳에 그렇게 얄밉게 꽂혀 있었다는 것. 윤대녕의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이 처음에는 레저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안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이다.

   

▷ 高橋原一郞, 『 優雅感傷的日本野球 』, 河出書房新社, 2006[新裝新版].
▷ 다카하시 겐이치로,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2) 12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겠지만, 내가 『아톰의 철학』을 찾으면서 느꼈던 이 실소를 동반한 기묘한 감정을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原一郞) 또한 비슷하게, 하지만 나보다는 가볍게, 아마도 조소를 띠며, 어쩌면 약간은 자조 섞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렇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1988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1995년에 처음 국역본이 나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ㅡ얼마전에 새로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안다ㅡ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 풍경을 그려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야구'라고 하는 도구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책방에서 이 작품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
ㅡ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3쪽.

3) 이 짧은 문장들 속에서 다카하시는 실로 많은 말들을 풀어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문학평론가는 물론이거니와 야구해설자조차도 실소하게끔 만들 귀찮고 성가신 '문학적' 아포리아가, 그것도 아무리 줄여봤자 최소한 세 개의 아포리아가, 너끈히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째, 여기에는 분류법의 문제가 있다. '아톰의 철학'이라고 하면 철학 코너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라고 하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는 저 '웃지 못할 몰상식'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이 문제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 '당연하게' 보이는 비웃음의 근거를 그 자체로 고착시키거나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아마도 다카하시 또한 그럴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당위'가 아니라 '현상'인 것. 그러므로, 비웃거나 탓하기보다는ㅡ그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없을 것이다ㅡ마치 다카하시의 소설 속 주전 투수가 라이프니츠를 흉내 내는 것을 다시 한 번 흉내 내듯 "칸트 할아범"(『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59쪽)을 흉내 내면서, 우선 이 글은 이러한 비웃음의 담론 체계를 형성시켰던 가능 조건들을 물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문학이 한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풍경을" 그려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저 오래된 사회적 반영론의 테제를 굳이 새삼스레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혹은 헤겔의 저 시대정신(Zeitgeist)을 어렵사리 기억해내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 자체로 역시 이미 '당연한' 명제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순진한 의심을 품기도 했겠고, 또 누군가는 이에 대해 두 번 이상으로 중첩된 긍정과 부정의 회로를 거쳐 정당함과 부당함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 어디쯤에 이미 당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불행히도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문학은 무엇을 그려내는 것인가'라고 하는, 케케묵은 문학적 대상에 관한 물음을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과연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국역본이 출간되었던 1995년이라면, 내 기억으로는 이 땅에 '저자(auteur)의 죽음'이라든가 '텍스트(texte)의 자립적이고 비인격적인 성격' 등등의 이론들이 맹위를 떨치며 한 바탕 장안을 풍성하게 풍미하던 시기였다(나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부르기보다는ㅡ'그렇다면 그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무슨 시기란 말인가'라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ㅡ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 이식문학론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인데, 어쨌든 여기서 우리는 저 유명한 '이식문학'의 테제와 그 주창자 임화(林和)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단지 그대로 지나가버리기만 했던 유행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벌어졌던 저 오래된 숙명적 역전과 재역전의 전적에 관해 재차 삼차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이 글은 적어도 저 세 가지의 골치 아픈 난제들 모두를 정확하고 적확하게 분석해가는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 김윤식, 『 林和硏究 』, 문학사상사, 1989.
*) 개인적인 기준에서 김윤식 선생의 '최고작'을 꼽자면, 그것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도 아니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도 아닌 바로 이 책, 『임화연구』이다. 나는 여전히, 비내리는 시나가와 역을 지나, 요코하마 부두에서 우산을 받고 서서, 내 자신조차 그 이름을 모르는 어떤 '누이'를 부르고 있는 기분이다. 

4)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이 '네 번째' 문제는 일견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ㅡ하지만 사실 언제나 나는 '개인적인'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ㅡ어쩌면 문화 일반,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법 일반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일견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접속사에 관한 문제라는 외양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위 인용문 속에서 내가 시급하게ㅡ비록 12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시급하게ㅡ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실 따로 있는데, 그가 사용한 두 개의 '그 때문에'가 바로 그것. 첫 번째 '그 때문에':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신풍경"을 그리려 한다는 이유 때문에 야구라는 도구가 필요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두 번째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 앞의 세 가지 물음들 중 첫 번째 물음, 곧 '자연스러운' 분류법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다 미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야구'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라는 긴 어구를 이루고 있는 저 모든 수식어들이, 곧 성질(quality)과 양태(mode)와 국적(nationality)에 관한 저 모든 꾸밈말들이, '야구'라는 한 단어만을 집중적으로 꾸며주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 책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냐는, 그런 일도 가끔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분류 체계의 성립과 인정과 수용에 관한 투덜거림의 외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일종의 '투덜거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마도 이 두 번째 '그 때문에'는 다카하시의 서문 속에서 "그 때문인지"라고 하는 한 발짝 물러선 어법으로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분류법의 기원, 보다 정확히는 하나의 분류법이 가능하게 되는 어떤 '환경(milieu)'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우리의 중점은 분류 체계 일반의 구성 요소와 그 법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분류법을 두르고 있는 테두리가 만들어내는 여백, 어쩌면 이미 그 자체가 특정한 하나의 분류법을 미리 지시하고 구획하고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해야 할 바로 그 여백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여백' 또는 '바깥'은 문학이 품고 있을 저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의 비가시성(非可視性)과 비인과성(非因果性),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만드는, 그 원인 없는 시간에 원인을 부여하는, 가시성과 인과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 박민규,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한겨레신문사, 2003.

5) 2003년 혹은 1982년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이러한 '그 때문에'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야구 소설' 하나(하지만 이 두 소설을 '야구 소설'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분류법일까). 분명히 1982년에 출간되었다면 당연하게도 야구 코너에 가장 먼저 가서 꽂혀 있었을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화자는 야구 경기를 "인생의 축소판"(『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86쪽)으로 언급한다. 왜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인가? 어째서 8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화자의 시공간은 한 개의 야구장으로, 한 개의 야구공으로, 그렇게 '축소'되어만 가는가(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물어보아야 하는 물음 하나는, 이 2003년의 야구 이야기가 1982년의 야구 이야기의 압축된 '후일담 문학'은 아닐 것인가 하는 물음)? 소설의 화자는 청소년기의 어느 3루 끝자락에서 그만 덜컥, 그것도 야구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현실 인식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혹은, 그러한 현실 인식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여기서 독자는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주의'에 작은 따옴표가 붙어야 했는지를 잠깐 동안이나마 음미해보아야 한다고, 나는 권고한다):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ㅡ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ㅡ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ㅡ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ㅡ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29쪽.

6) 프로야구에서 이루어졌던 이러한 계급의 구분은 정확히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어쩌면 그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이 소년의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 역설적으로, 하지만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러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소년의 삶에 강하고 독한 추동력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저 유명한 근대화의 저돌적인 추동력에 관한 이야기와 정확히 짝을 이루는 어느(혹은 '여느') 소년의 흔하디 흔한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뒤도 말고, 앞만 보고] 달려라 메로스, 혹은, 소년이여, ['프로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야망을 가져라 등등의 뒤틀린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년에게 기이한 생존의 욕망과 기형적인 삶의 의지가 마치 일종의 약물처럼 투여되는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만년 꼴찌 팀에로 오체투지 하듯 온몸을 감정이입 시켰던 이 소년에게는, 그러므로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이 야구의 확대판이자 실측지도였던 것. 삶이 야구 같은 것임을 깨닫고 삶을 야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살던 소년은 인생의 중간계투 시기에 일견 매우 맥 빠지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ㅡ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42쪽. 

7) 기껏해야 이 가장 기초적인 근대 인식론의 명제 따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현대의 원효(元曉)는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그렇게나 많이 그리고 그렇게나 오래도록 퍼마셔야 했던가? 세계는 주체가 구성하는 한에서만 '세계'일 수 있다는, 이 근대 인식론의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할 순진무구한 모토의 재탕 혹은 중탕을 위해서? 하지만 나는 저 명제 자체의 진부함에 질려 등을 돌리기 전에 먼저 이렇게 소년 스스로 구성한 세계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러한 구성 작용의 '대상'은 무엇인가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말하자면, 나는 이 성장소설의 '노에마'와 '노에시스'를 묻고 싶은 것이다). 일견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인식론이 장년이 된 소년의 비관적이고 진부했던 또 다른 인식론,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고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따름"(『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12쪽)이었던 과거의 인식론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것이 데카르트의 명제를 한 번 뒤집는 척만 한 후 다시금 칸트에게로 나아가버린 듯, 일견 맥이 풀려버린 인상을 주는 전회(轉回)이기에, 나는 더욱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대척점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히려 가장 먼저 깨달았어야 했고 또 가장 먼저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인식론의 도식은 왜 이 소년에게 이리도 뒤늦게, 지각(遲刻/知覺)하여 도착했던가? 이러한 지각과 지연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삶을 새롭게 분류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분류법, 그것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인생의 축소판이었던 야구에 관한 새로운 분류법의 탄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애당초 승부의 판가름이 무의미한 경기였다. 아니, 같은 룰이 적용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야구를 통해ㅡ두 팀은 격돌했던 것이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오른쪽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ㅡ2루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괴소년은 그렇게 많은 포볼을 던지고도 도무지 지치지 않았고, 또 같은 이유로 아무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수비들은 계속 체력을 축적하고,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이상한 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길고 긴 7회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가 요원했던ㅡ아직 원아웃인가 그랬고 스코어는 20:1인 상황에서, 결국 타임을 외친 올스타즈의 주장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만 하죠."
ㅡ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92쪽.

8) "노란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공을 던지지 않는 야구와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야구는 이미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서로 달리 하는 이질적인(hétérogène) 것일 수밖에 없다. 후자의 야구는 우리에게 익히 친숙한 '프로'의 야구이며, 전자의 야구는 우리가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지 모른 또한 상상하자마자 머리를 흔들어 머리 밖으로 몰아냈을지도 모를 기이한 야구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심히 할수록 쇠약해져만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 모를 괴물에게 살과 피를 빼앗기는 듯이 느껴지는 '프로'의 야구는 '이사만루(二死滿壘)'라는 절체절명의 상황과 규칙을 따르는 야구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사만루의 절박하고 강제적인 상황에서 하는 야구가 아닌, '프로'라고 하는 인간 이상(또는 이하)의 것을 강요하는 야구에 대항하여 자진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야구, 나는 이러한 야구를, 하나의 대구(對句)를 이루기 위해, '무타무주(無打無走, no hit no run)'의 야구라 부르려고 한다.

   

▷ 우스타 교스케(うすた京介), 『 멋지다!! 마사루 3권 』, 대원씨아이, 1997, 111쪽.
*)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 작전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만이 신나는 세상을 여는 열쇠다." 정말 그렇다. 공을 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달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마사루 일당은 정말 '치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는' 무타무주의 야구를 몸소 보여준다. 한국어판 전 7권, 일독과 재독을 강권한다. 또한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압권의 '번안'도 주요 관전 포인트.  

9) 1988년, 또는 1995년, 혹은 어쩌면 어떤 먼 미래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야구가 사라진 시대에 출간되었더라면 서점의 야구 코너를 창시할 법한, 야구에 관한 도서 목록 작성의 초고가 되었을 법한 다카하시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무타무주'의 야구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사전 속의 야구에 관한 정의도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야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벌어지는 야구에 관한 이야기라는 외형을 띤다:
야구[사어(死語)] ㅡ 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말하여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
ㅡ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72쪽.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 premiers écrits 1922-1940,
    Paris: Gallimard, 1970.
▷ 『 Review 』, 창간호(1994년 겨울호), 문예마당.
*) 바타이유는 초기에 『도퀴망(Documents)』 지를 통해 '건축(architecture)', '낙타(chameau)', '유물론(matérialisme)', '도살장(abattoir)' 등의 단어를 새롭게 정의내리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정의 내리기' 작업을 묶어 통칭 '비평적 사전(Dictionnaire critique)'이라 한다. 바타이유 전집 1권에 실려 있으며, 일독을 권한다. 예전에 발간되었던 잡지 『Review』에는 "X-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이와 비슷한 형식의 '정의' 작업이 연재되었던 바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식이다(창간호, 248쪽): "공윤 ㅡ 공연윤리위원회의 약칭. 영화를 비롯한 기타 대중문화 생산물들의 재미있고 자극적인 내용을 회원들끼리만 돌려보기 위해 만든 폐쇄적인 소규모 결사체. 이들 자료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음."

   

▷ Gustave Flaubert, Le dictionnaire des idées reçues
    Paris: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1997. 
▷ 귀스타브 플로베르, 『 통상 관념 사전 』(진인혜 옮김), 책세상, 2003.
*) 이러한 '새롭게, 뒤틀어서 정의 내리기'는 사실 플로베르 또한 이미 시도한 바 있었다. 플로베르의 '엄청난' 소설들을 읽는 일에 지쳐 있을 때, 혹은 그 어느 것에라도 지쳐 있을 때, 일독을 권한다.


   

▷ Gustave Flaubert, Bouvard et Pécuchet,
   Paris: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1999.
▷ 귀스타브 플로베르, 『 부바르와 페퀴셰 』(진인혜 옮김), 책세상, 1995. 
*) 앞의 책을 소개하고 보니, 역시나 이 책, 플로베르의 미완성 유작 『부바르와 페퀴셰』 또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책에 미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특히나 일독을 권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국역본은 1995년에 나온 초판인데 현재는 절판되었고 얼마 전 책세상 세계문학 문고를 통해 두 권으로 분책되어 다시 나온 바 있다.

10) 나는 여기서, 어떤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몰지각하다고 생각했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분류법, 곧 11년 전의 저 '아톰의 철학'에 대한 분류법과 다시금 조우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의심해본다, 상상해본다, 생각해본다, 혹여, 『아톰의 철학』을 만화 코너가 아니라 철학 코너로 분류했던 것은, 어느 열성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 회원의 교묘하고도 지능적인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고, 아니면, 그때 내가 철학 코너라고 생각/착각했던 그 서가가 실은, 다카하시의 인물들이 때때로 야구에 대한 명언과 탁견과 열정이 담긴 책들을 꺼내보고 그 문구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하던 야구 관련 코너의 서가가 아니었던가 하고. 또한 나는 여기서 푸코(Foucault)의 『말과 사물』을 '부팅'시켰던 저 유명한 보르헤스(Borges)의 중국식 동물 분류법과도 오랜만에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또 나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실은, 이제껏, 이사만루의 잔인함과 숨막힘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혹은, 야구에는, 존재에는, 오로지 이사만루라는 분류법 외에 다른 분류법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살고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이어 나는, 어렴풋이, 알아챈다, 다카하시 소설 속의 등장인물 랜디 바스가 인류의 모든 책들을 야구에 관한 잠언과 해설로 인식하는 것처럼, 아톰과 철학에 대한 혼란스러운 분류 체계가 사실은 또 하나의 '야구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 그것은 또한 삶의 축소판과 확대판을 아우르는 울타리와 여백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 그리하여 다카하시가 새롭게 작성하는 실제 세계의 분류법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자, 야구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사람인 다카기 유타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리얼 월드를 다음의 두 개로 분류하고 있다.
(1) 홈 베이스 위에 있는, 타자의 어깨로부터 무릎까지의 공간ㅡ즉, 스트라이크 존.
(2) 그 이외의 모든 것.

ㅡ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76쪽.

   

▷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66.
▷ 미셸 푸코, 『 말과 사물 』(이광래 옮김), 민음사(대우학술총서), 1987.
*) 예전에 대우학술총서를 통해 출간되었던 이광래 선생의 국역복 『말과 사물』은 현재 그 '시대적 임무(초역과 소개)'를 마치고 '장렬히 전사(절판)'해 있는 상태. 능력과 열정 있는 역자(譯者/力者)가 어서 나타나 '이 시대에 맞는' 새 번역을 내주기를 고대한다.

11)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기존했던 과거시제로서의 이사만루의 야구가 제한적인 경제가 지닌 협소한 윤리학적 체계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도래할 미래시제로서의 무타무주의 야구는 이사만루의 야구가 '멸종'해버린 세상에서 만나게 될 하나의 새로운 삶의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학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는, 하나의 '허무맹랑한' 가설일 것인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러한 윤리와 존재의 '미학화'가 하나의 문학적 '유토피아(utopia)'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 해도, 이사만루의 야구가 사라진 무타무주의 야구 세상 속에서 다카하시의 소설이 짙은 '디스토피아(dystopia)'의 냄새를 풍기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러므로 이러한 물음은, 혹여, 무타무주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문학적/스포츠적 체계가, 여전히 유토피아'주의적'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정 담론 체계 안에, 그래서 결국 아직은 변증법적 이분법이라는 오래된 늪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묻는, 유독 우리 시대에 특히 더욱 진부해져버린 저 의심과 회의의 물음으로, 다시금 귀착된다. 다시금, 반복되는, 문학적 '아포리아'로서의 '유토피아'.

12) 물론 이사만루의 문학적(혹은 '시대적') 상황이 무타무주의 문학(어쩌면 '시대정신'?)으로써 타파되고 위반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일 것이다(게다가 이러한 생각은 '위반'이라는 작용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몰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타무주의 문학이란 기존하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한 당연하게도 어떤 '점수'도 낼 수 없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노히트노런은 언젠가 또 하나의 훌륭한 '상품'이 되고 '물신(Fetisch)'이 될지 모른다. 마치 우승 후에 연고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는 프로야구단처럼:
우승을 했으니까요. 그럼 서울로 가는 것이 이 세계의 룰입니다.
ㅡ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81쪽.

13) 그래서, 근대 문학이란, 곧 근대적 상황 속에서 잉태되었고 소비되고 있는 근대 소설이란, 본래부터 겉으로는 '무타무주'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무사득점(無死得點)'의 만루홈런 기회나 대량학살과도 같은 '삼중병살(三重倂殺)'의 기회만을 노리는 기민하고 약삭빠른 심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그래서ㅡ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이ㅡ문학의 전장(戰場) 또한 결국은 피 튀기는 연장전에 돌입한 헤게모니 투쟁의 속편이었음을 씁쓸하게 반추하게 되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말했던바 사회적 실천을 떠맡은 중심적 예술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근대 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인다(하기야 근대의 종언뿐만 아니라 문학의 종언을 발음하고 발언했던 이가 어디 이 '일본인' 비평가 하나뿐이었겠느냐마는). 위반하고는,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한계(limite)의 공간. 이 무한한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ㅡ누구나 이 원환의 운동 속에서는, 소승적이 되기는 쉬워도 대승적이 되기는 어려운 것일 터ㅡ누군가는 역사의 종언을 목격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복음의 창궐을 목도했을 것이다.

       

▷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 트랜스크리틱 』(송태욱 옮김), 한길사, 2005.
▷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7.
*) '노동자는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점... 사실 가라타니 자신은 표가 나게 언급하거나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최근 저작에서는 모스(Mauss)-바타이유(Bataille)-카이유와(Caillois)를 잇는 정치경제학적 계보의 수혜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다른 글을 따로 마련할 때 다뤄보도록 하겠다.

14) 90년대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을 체감한 푸념과 투덜거림이 내뱉었던 하나의 '문학적이고도 세속적인' 물음이 하나 있다: 왜 한국의 작가들은 더 이상 민족의 분단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더 이상 가장 '낮은' 곳으로도 임하려 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당신이 관심을 가지지 못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 작가들이 여전히 얼마든지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었)고, 또 누군가는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가 가져다준 영향이자 폐해라고 말할 것이(었)다. 혹은, 좀 더 에둘러 말하자면, '태백산맥' 사이로 외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빛의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지 않느냐고 안도하면서 말할 수도 있(었)고ㅡ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정래 식으로 삭히며 쌓아가던 것을 이제는 김영하 식으로 돌파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한데ㅡ,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난장이가 쏘아 올렸다던 그 작은 공은 지금쯤 어느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이 되었느냐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반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 물음이 물음으로서 유효하다면, 그 유효성은 이 문제에 대한 당장의 해답을 내리려고 하는 결단의 조급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저 물음이 물음일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을 탐색해야 한다는 생각 한 자락. 저 물음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물어져야 할 것은, 과연 '한국의' 작가란 도대체 누구인가, 작가라는 '직업' 앞에 '국적'을 표시하는 수식어가 첨가될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다시 그 국적의 '소유'를 표시하는 조사 "~의"가 흘레 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등등의 물음이다. 이 물음들은, 그러므로, 역사와 문학의 종언에 대한 물음들, 그리고 그러한 종언 이후에 비로소 겨우 다시 시작되는, '역사 없는' 시대의 문학에 대한 물음들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사만루'라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유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둘'이라는 이분법이 죽고[二死] 그와는 다른 다종다양한 분류법들이 만개할 수 있는[滿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지극히 '은유적인' 상황 인식 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은 또한 '복음의 창궐'을 '복음'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창궐'로만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전제 조건의 한 형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새로운 물음과 인식의 소재들은, 마치 민족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국경선들처럼 엄연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확고한 분류법 그 자체에 대한 이의제기일 것이고, 또한 하나의 물음이 또 다른 물음들을 촉발시키는 위반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래서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류법 하나쯤은 잉태시킬지 모르는 하나의 작은 반례(反例)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의 저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이사만루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과연 무타무주는 '가능할' 것인가? 칠 수 있을까 칠 수 없을까 하는 선택적 물음에 직면하여 이 물음이 강요하는 대답을 찾는 것은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숫제 이 물음의 틀과 영역을 바꿔버리는 일, 동문서답을 하거나 전혀 다른 것을 되물어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 역전된 물음이 우리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게 되물어야 할 오늘날 '우리' 문학의 물음일 것이며, 또한 이는 어쩌면 '한국의' [혹은 '일본의', '그 어딘가의'] 문학이 특별히 지금 이 순간 다시 되물어야 할 방치된 물음인지도 모른다. 치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치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 물음들.



▷ 박민규, 『 핑퐁 』, 창작과비평사, 2006.
*) 고백하자면, 나의 이 글은, 사실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박민규 사이의 어떤 접점에 대한 확장된 잡설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박민규의 최근작 『핑퐁』을 보고 나서, '표절'이나 '수혜'까지는 아니더라도, 박민규가 다카하시적인 세계에 상당히 많은 부분 공감하고 접근하고 있다는 혐의(?)를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 <슈퍼스타 감사용> vs <아는 여자>
    '反-영웅', 혹은 '反-反-영웅', 마치 '포스트-'라는 접두어에 다시금 '포스트-'를 붙이듯이. 

15) 이 시점에서 나는 두 개의 '야구 영화'를 떠올려본다(다시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이 두 영화를 '야구 영화'로 분류하는 분류법은 과연 정당할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은 승리를 위해 공을 던진다. 거기에는 약자와 패자의 설움이 있고 패배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풀뿌리 같은 희망이 있지만, 반면 거기에는 '저들'ㅡ실제이든 가상이든ㅡ이 만들어 놓은 승리와 패배의 판 자체를 흐트러뜨리고 뒤집어버리려는 '문학적' 위반의 물음이 부재한다('영화' 속에서 '문학적' 위반의 어떤 단초를 찾아보려는 것은 정당한 분류법적 욕망의 발로일까, 하고 다시 한 번 자문해보게 되지만, 어쨌든 소설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영화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반면 영화 <아는 여자>의 주인공은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자 쪽으로 신중하게 투구해도 모자랄 공을 엉뚱하게도 뒤로 돌아 경기장 바깥으로 길게 내던져버린다. 그 공은 야구장을 가득 메운 모든 이들의 황당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멀리 멀리 날아간다, 달아난다, 뒤집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위반한다. 이제까지 '당연한 듯' 존재했던 경기의 규칙들은 바로 그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기이한 분류법의 일단이 반짝하며 출몰한다. 이 분류법은 투수가 마운드에 서서 상대편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면서도 몸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목격했을 때 새롭게 열리게 되는 하나의 분류법이다. "기록의 경기"(『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50쪽)인 야구에서 아예 기존의 기록 체계를 통째로 무시하는 또 다른 체계 하나가 찰나적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수비 실책도 아니고, 더구나 고의 사구는 더 더욱 아니므로(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그 공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투지의 데드볼', 말 그대로 '데드볼'?). 다카하시와 박민규의 인물들이 이 후자의 투수만을 진정한 '야구 선수'라 여길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못해 쑥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저 확실성일 것인가 아니면 저 수치심일 것인가.

   

▷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trans. by G.E.M. Anscombe), 
    Oxford: Blackwell, 2001[50th Anniversary Commemorative Edition].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철학적 탐구 』(이영철 옮김), 서광사, 1994.
*) 사족(蛇足) 한 자락: 새로운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한 벌 짓는 일과, 규칙과 분류 자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일은, 분명 서로 다르다. 후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샛길들을 지닌 무수한 물음들과 마주할 마음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판본은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간행된 독영 대역판이며, 이영철 선생의 국역본도 또한 추천한다. 이 국역본은 최근에 책세상 출판사에서 비트겐슈타인 선집의 일환으로 다시 출간된 바 있다. 어쩌면 이 책을 하나의 '야구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은 '진짜' 야구를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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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아톰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비트겐슈타인까지 람혼님의 "생각 한 자락"을 쫓아 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네요. (람혼님의)글 읽기를 "이사만루"식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타무주"식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 그리고 개인적인 리퀘스트?를 하나 하면 위에서 언급하신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속의 "모스-바타이유-카이유와"로 이어지는 "정치경제학적 계보"에 대한 글은 꼭 좀 써주시기를 부탁드려 봅니다.

람혼 2007-07-2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만루든 무타무주든 간에 어쨌든 병살만은 면해 보려는 마음입니다.ㅎㅎ^^;
리퀘스트는 조만간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저 또한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덥고 습한 날씨, 어떻게 지내십니까?^^

yoonta 2007-07-2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벌이하느랴, 이책 저책 뒤적이느랴 왔다갔다하는 사이 시간만 덧없이 가버리네요.-.-; 리퀘스트 받아주신다니 감사하구요.. 날씨도 무더운데 건강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람혼 2007-07-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닌 듯 ㅠㅠ
yoonta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여름 나시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