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이 말을 말로 넘어가려 하듯, 몸은 몸으로 몸을 넘어가려 한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말은 오직 말로써 넘어가야 하고, 그와 똑같이, 혹은 평행하게, 오직 몸은 몸으로써만, 몸을 씀으로써만, 넘어갈 수 있다. 초월(超越)은 그렇게 넘어가는 것, 곧 언제나 하나의 이행이자 이동하는 몸짓이지만, 무엇보다 그 초월의 몸짓은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 재귀적이며 회귀적으로, 매번 같은 곳을 향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다. 예를 들면, 그래서 김진석의 철학적/수사학적 행마법(行馬法)은, 더욱 쉽게 잊혀져서는 안 될 드물고 고귀한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탈-'이라는 접두어를 춤사위로 삼아 일종의 '탈-춤'을 추는 춤꾼의 책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1992)에서부터, '초월'의 개념을 '포월(匍越)'로 대체하고 삶의 변속기를 조절하는 『초월에서 포월로』(1994), '초인'에 대해 '넘어가는 인간'을 맞서 세우며 '기우뚱한' 균형을 탐색하는 『니체에서 세르까지』(1994)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초반에 이미 독자적인 개념어들과 고유한 문체를 창안해냈던 이 '가장 한국적인' 철학자에 대한 [재-]기억과 [재-]전유를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소망 한 자락.

      

▷ 김진석, 『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 문학과지성사, 1992.
▷ 김진석, 『 초월에서 포월로 』, 솔, 1994.
▷ 김진석, 『 니체에서 세르까지 』, 솔, 1994.

2) 그런데 이 '초월'이라는 움직임의 모습은 자주 '구도(求道)'나 '깨달음'이라는 말의 습관 속에서 쉽게 잊혀지거나 곡해되곤 한다. 그 습관 속에서 말은 어딘지 모를 높을 곳으로 고양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육체나 물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떤 정신만이 투명한 '유령'처럼 나의 몸과 말을 짓누르며 배회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고 상승만을 하거나 추락하며 하강만을 할 뿐이며, 순환의 궤적이 아닌 편도의 직선을 그린다. '구도'는 더 이상 떠나거나 걷지 않고 어느 구석 마을에서 아내 하나쯤 얻어 틀어박히고 뿌리내린다. '깨달음'은 더 이상 달리거나 미치지[狂/至] 않고 웅덩이 하나에 똬리 틀고 앉아서는 짐짓 점잖은 듯 고여서 썩은 냄새를 풍기거나 흉물스런 돌로 굳어진다. 바로 이 마을, 이 웅덩이 속에는, 뿌리 깊은 목적론적 귀신이 서식하고 있으며, 드물고 고귀한 것의 비의(秘意)가 숨이 틀어 막힌 채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숨어 있지만 숨은 것이 아니고 또한 일종의 비의이긴 하나 '신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숨은 신'일 것? 그것은 드물지만 어디에나 널려 있으며, 고귀한 성스러움이지만 동시에 가장 낮은 곳의 속됨이기도 하다.

   

▷ 박상륭, 『 열명길. 박상륭 작품집 I 』, 문학과지성사, 1986.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박상륭 작품집 II 』, 문학과지성사, 1986.

3) 박상륭 문학의 출발점과 종착점ㅡ하지만 그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ㅡ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모순어법 안에 위치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 완고하게 서 있는 벽, 마주 대면해 면벽해야 할 이 벽이, 먼저 하나의 '어법(語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은 그렇게 끈질기게 끈적거린다. 말을 말로써 넘어야 하는 말하는 운명의 지난함, 몸을 몸으로써 넘어야 하는 몸 입은 존재의 고단함은, 단순한 정신의 '순수한' 고양과 상승 작용으로써만 해결될 수 없는 어떤 뒤척임과 끈적거림이다. 이 말 앞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어눌한 말더듬거림이 될 수밖에 없고, 이 몸 앞에서 몸짓은 언제나 고꾸라지는 불구의 움직임이 되어버린다.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고 싶은데, 그만 그 더듬거리는 말끝에 들러붙거나 말 안 듣는 몸끝에 억지로 목발을 덧댄다. 말을 말로써 몸을 몸으로써 온전히 살아내기도 전에 말과 몸의 저 천근 같은 무게에 먼저 짓눌리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 이 '어법'만이 자아(自我)에로 열린 말의 저 가장 깊은 굴을 뚫을 수 있었고,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다'는 몸에 대한 자각(自覺)을 비로소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이미 오래 전에 자신 안에서 한 벌의 우주를 발견했던 생물, 판켄드리야[五官動物]로서의 인간의 탄생이 놓여 있다. 지금, 그 어두운 굴은 밖으로 드러나 밝은 땅이 되었고,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했던 자각의 빛은 지극히 당연한 나날의 햇살이 되었다. 슬프고도 경이롭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개체와 종을 아우르는 발생론적이고도 진화론적인 상징계의 모습, 거짓말 같은 진실, 진실 같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나는, '몸'의 단계를 졸업하고 '말'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말, 말로 말 되어질 수도 없는 '마음'인데 하물며 그것에 '몸 담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 몸, 그러한 말과 몸을 '가진'ㅡ가지고 있다고 '상정된'ㅡ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

     

▷ 박상륭, 『 아겔다마 』, 문학과지성사, 1997.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上 』, 문학과지성사, 1997.
▷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下 』, 문학과지성사, 1997.
*) 『죽음의 한 연구』는 1997년에 두 권으로 분책되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총서의 일환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4) 「뙤약볕」이 시작되는 공간은 일견 안온하고 정돈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어떤 불모(不毛)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매일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태양 아래에서 일상의 경작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회'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득한 태초였을 뿐이다. 이 사회는 태초의 '말씀'이라는 종교적 체험이 하나의 제도, 하나의 법이 되어버린 체계이다. 이 체계는 하나의 '질서'를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이 질서 안에서 말은 존재를 가진 하나의 신(神)이 되며 그 신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이 질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분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형법에 기초해 있다. 사회 안에서 이러한 질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열명길』, 82쪽)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한 체계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가장 '자연스러운' 법률을 구성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그러므로 모든 '이야기', 모든 '서사'의 시작에는, 하나의 균열, 하나의 흠집이 있다). 이 균열은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노당굴의 회의, 새 당굴의 번뇌, 섬돌이의 죽음 등이 그러한 균열의 중요한 기호이자 현상들이다.

5) 노당굴의 회의는, 새 당굴의 눈에서 "맹렬한 어떤 혼돈"(『열명길』, 83쪽)을 보고 그 혼돈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삼는 행위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가 감지했던 것은 세습적인 당굴의 지위와 말의 법으로써 유지되는 인간의 사회가 인간에게 있어 결코 본질적일 수 없다는 어떤 예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젊은 시절에 새 당굴이 일삼았던 이른바 '패륜적' 행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에게 당굴은 사회의 도덕적 중심으로서 하나의 구조를 가능케 하는 지위를 의미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그 구조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 새 당굴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서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반면 노당굴이 새 당굴의 눈빛 속에서 본 어떤 혼돈, 그리고 그러한 혼돈을 바라보는 노당굴의 시각은, 이러한 사회 체계의 존속과 안녕이라는 문제로부터 이미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투. 이 불안과 혼돈은, 깨지기 위해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살해(meurtre)'의 씨앗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ㅡ마을 사람들의 것과 노당굴의 것ㅡ은 사실 새 당굴의 '패륜적' 행위, 곧 '악(惡, le mal)'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 먼저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질서를 파괴하며 기존의 사회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악행'을 지극히 위험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한 사회의 도덕적인 체계 안에서 습득되고 유포되는 것이다. 반면 노당굴은 무질서와 방황 또는 악과 혼돈 속에 어떤 '깨달음'의 씨앗이 있다는 기본적인 시각에서 그러한 '악행'을 기존의 도덕적인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단초 혹은 전조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을 넘어서 있는 것, 그러한 구분을 가능케 한 도덕 체계 전반에 대한 회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당굴이 꿈꾸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기존해 있는 '사회'와는 어떻게 다르고 어디서 어긋나는가. 아래의 책 몇 권이 그에 대해 답하고 있다는 생각이다(바타이유와 블랑쇼, 낭시가 생각했던 '공동체'의 개념,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이 마르크스의 개념인 '교통(Verkehr)'에 근거하여 펼치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 사이의 구분법에 관해서는 각각 후일 따로 글을 마련해볼까 한다). 일독을 권한다.

       

▷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désœuvrée
    Paris: Christian Bourgois(coll. "Détroits"), 1999³[1986¹].
▷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Paris: Minuit, 1983.
▷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affrontée, Paris: Galilée, 2001.

▷ 모리스 블랑쇼 / 장-뤽 낭시,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 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이산, 1999.
▷ 가라타니 고진, 『 은유로서의 건축 』(김재희 옮김), 한나래, 1998.
▷ 가라타니 고진, 『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6)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홀로 덩그러니 '던져진(geworfen)' 새 당굴은 이러한 노당굴의 회의를 자신의 짐으로 떠안는다. 그에게 더 이상 말은 현현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말의 죽음을 몸으로 먼저 깨닫고 있다. 새 당굴이 처한 번민은 과거 자신이 했던 행위들에 대한 참회 때문이 아니다. 그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황할 뿐이다. 하지만 이 방황 역시, 마치 『파우스트(Faust)』의 프롤로그에서 주(主)께서 말씀하시듯, 그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 lange er strebt)"고만 말하고는 안심하고 우쭐해 할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말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닥뜨린 인간, 곧 신이 없음을 어느새 알아채버린 인간의 혼란이다. 새 당굴도 처음에는 단지 세습적인 계급으로서의 당굴의 권위를 거짓으로 흉내내보려고 하지만 곧 그 모든 것이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는 곧 새 당굴이 안고 갈 화두의 탄생을 의미한다. 하지만 새 당굴은, 그가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지도자격인 '당굴'이기에, 재판을 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바로 여기에 그가 느낄 수밖에 없는 괴리의 원인 한 자락이 놓여 있다. 이는 앞으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중요한 의미망 중 하나로 작동하게 될 성(聖)과 속(俗) 사이의 어떤 괴리라고도 할 수 있다. 새 당굴이 느끼는 이러한 괴리는 그가 섬돌이의 사형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새 당굴이 사당 벽을 내리치며 "말을 해라, 말을!"(『열명길』, 86쪽)이라고 발악할 때 그는 아직 말이라는 것을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말에게 '말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말이 단지 "우연의 자존자(自存者)"(『열명길』, 87쪽)일 뿐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부터 그는 외재적인 실체로서의 말에 회의를 품고 그것을 '넘어가기' 위해 고민하며 비로소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에게 섬돌이의 죽음이 섬광처럼 내리친다. 그 죽음은 말의 죽음을 결정적으로 고지함으로써 장차 마을을 휩쓸 저 거대한 정신적 공황, 곧 역병의 창궐을 예고한다. 안온히 내리쬐던 햇살이 고통스러운 뙤약볕으로 돌변하는 순간인 것. 그것은 동시에 평온해 보이던 상징계를 순간적으로 침범해오는 잔혹한 실재, 곧 '불가능성의 사막'이 지닌 모습이기도 하다.

   

▷ Jacques Lacan, Les écrits techniques de Freud. Le séminaire I
    Paris: Seuil(coll. "Champ freudien"), 1975.
▷ Jacques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Le séminaire XI, Paris: Seuil(coll. "Champ freudien"), 1973.

7) 실재에 관한 라캉의 무수한 논의들 중 가장 '원론적인' 두 구절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세미나 1권의 80쪽: "실재(le réel), 또는 실재로서 지각되는 것이란, 곧 상징화(symbolisation)에 대해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미나 11권의 152쪽: "불가능한 것이 반드시 가능한 것의 반대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것에 대립되는 것은 확실히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후자의 문장은, 바타이유와의 접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부분으로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논의이다. 사실 라캉의 '실재'나 '상징' 등의 개념에 관해서는 뭔가 더 말을 덧붙이는 일이 어색하고 쑥스러울 정도로 이미 이곳저곳에 많은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다만 한 사람의 지독한 '원전주의자' 혹은 '텍스트주의자'로서 첨언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먼저 원전ㅡ원본이든 번역이든ㅡ을 또박또박 읽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라캉의 책들은 현재 오랜 기간 동안 꼼꼼한 번역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에크리(Écrits)』는 작년에 브루스 핑크(Bruce Fink)의 훌륭한 번역으로 영역본(완역판)이 나온 바 있으며, 세미나들 중의 몇 권도 이미 영역된 바 있다(불어판은 전 26권 중 현재까지 열세 권이 출간된 상태이고, 영역본은 현재까지 다섯 권이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는데, 이들 판본에 대해서는 이후 라캉에 대한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8) 「뙤약볕」에서 아마도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당굴이라는 존재가 노당굴에서 새 당굴로 이어지면서 그 의미와 가치가 변성(變性)하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먼저 그것은 단지 세습되는 하나의 계급이었으며 또한 어떤 회의나 의심도 없이 단순히 전래되어 오기만 했던 하나의 사회적 구성요소였다. 따라서 이 때의 당굴이란 한 사회를 통합하고 그 사회의 도덕적 장치로 기능하는 어떤 지표로서의 의미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노당굴이 이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일말의 회의와 의심은, 그가 새 당굴의 눈빛 속에서 목격했던 혼돈에서 다른 씨앗을 찾아낸다. 노당굴의 회의가 새 당굴의 번뇌에 씨앗을 뿌린 셈이고, 이는 곧 말이란 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치달아간다. 따라서 이와 함께 인간이 의지할 절대적인 도덕이 사라져버림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절대적 불안의 지점으로부터 터벅터벅 걸어가야 할 구도의 길이 열리고 있다(이 구도의 과정은 다시 3부의 점쇠에게로 이어질 것이고, 점쇠는 말의 죽음 이후에 다시 말을 되찾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도드라진 발화점(發火點/發話點)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섬돌이의 죽음이다. 섬돌이의 죽음은, 서구의 축제/희생 이론에서 희생제의(sacrifice)의 가장 근원적인 기능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바타이유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L'érotisme, p.29): "성스러움(le sacré)이란, 어떤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인(discontinu)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들 앞에 드러난 존재의 연속성(continuité), 바로 그것이다." 『에로티즘』의 판본으로는 다음의 두 권을 추천한다. 미뉘(Minuit) 출판사의 원판본과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전집판 10권이다. 두 권의 텍스트는 동일하며, 미뉘 판본이 도판을 텍스트 사이 사이에 삽입하고 있는 반면에 갈리마르 판본은 도판만을 따로 모아서 묶고 있다는 차이만이 있다.

   

▷ Georges Bataille, L'érotisme,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57.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X, Paris: Gallimard, 1987.

9) 한편, 섬돌이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른다. 그는 '단지'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고 그 죄에 대한 벌로 사형을 받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죄와 벌의 관념 자체가 한 사회 체계의 질서, 곧 도덕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섬돌이는 죽음에 직면한 섬광 같은 순간, 죽음을 생물적으로 거부하는 몸부림의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온 어떤 차분하고 고요한 순간에, 한 어머니를 만난다. 그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다. 섬돌이가 어렴풋이 감지했을, 그러나 완벽하게는 알 수 없었던 것,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를 어딘지 모르게 변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시원(始原)'으로서의 어머니이다(이러한 '시원'은 물론 하나의 '기원 없는 기원',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원점'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원점'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이 '어머니'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먼저 그 어머니는 남성과 여성 등의 성(性)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남자도 여자도"(『열명길』, 96쪽) 아닌, 무성(無性)이면서 동시에 양성(兩性)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편의상 섬돌이를 따라 그/그것을 여성 명사인 '어머니'로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머니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여성은 없다. 다만 여기서는 '어머니'라는 단어의 상징적 느낌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할 터. 여기서 어머니로 '상징'되는 시원은, 언어와 언어 아닌 것, 여성과 남성 등이 분화/분절화(articulation)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섬돌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성이 규정되지 않은 채 모호한/양가적인 상태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섬돌이에게 뚝쇠의 아내가 어떤 어머니의 이미지로 기능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섬돌이는 남자인 새 당굴을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섬돌이가 어머니의 생김새를 모른다는 사실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10)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혼재되어 있는 성(性)과 가계(家系)의 기이한 모습을 보게 된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새 당굴과 섬돌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 곧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볼 수 있다. 또한 노당굴의 어떤 회의에서 시작된 저 구도의 계보 상에서, 그리고 가장 표면적으로는 마을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제도적인 당굴의 계보 상에서, 노당굴과 새 당굴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아들 관계이다(이 부자 관계는 두 인물이 공히 서로 느끼고 인정하고 있는 가장 표층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어떤 신비한 과정에서인지' 섬돌이는 당굴에게서 어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데 섬돌이는 이 '모자(母子) 관계'를 어렴풋이 감지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관계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와 이성과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란 점에서?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렇다. 한편, 천치녀(天痴女, 뚝쇠의 아내)와 섬돌이 또한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이고 있다(뚝쇠의 아내를 '천치녀'라고 편의상 부르는 것은 이 인물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 비추어볼 때 자칫 편협하고 곡해된 규정이 될 위험이 있으나, 무엇보다 이 '옌네'가 천치로 보이는 것은 앞서 밝혔던바 일차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서와 안정이라는 시각 혹은 남성중심적인 시각 때문이라는 점만을 부기하기로 하고, 이하에서는 말 그대로 단지 '편의상'의 이유에서 '천치녀'로 불러보기로 하는데, 다소 괴이한 형태로 유행하고 있는 이 '~녀'라는 명명법을 버리고 차라리 '미친년'이라고 직설적으로 부르는 일을 망설이게 만드는 나의 이 심리적 방어기제 혹은 '초자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이 '모자 관계' 역시 둘 사이에 의식적으로 인식되는 관계는 아닐 것이며 오히려 상징적인 관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 당굴과 천치녀와 섬돌이의 삼자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천치녀와 그녀의 젖을 빨고 있는 섬돌이는 일단은 모자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세 명의 인물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새 당굴의 의미가 보다 도드라지게 된다. 곧 그는 섬돌이와 천치녀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태어난 자, 한 시대와 한 체계의 문을 닫고 다음 세상을 여는 자라는 신화적인 의미를 획득하면서 두 사람의 '아들'이라는 '기호학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새 당굴은 하나의 육신으로서는 죽었지만, 그 죽음은 동시에 2부와 3부로 이어질 어떤 길들의 작고 소박한 씨앗, 하지만 동시에 폭풍 같은 파괴력을 지닌 씨앗을 품고 죽은 죽음이며, 이후 그 '죽음'의 씨앗으로부터 다시 '삶'의 씨앗이 싹터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 '구도(求道)'의 계보, 말 그대로 '길을 구하는' 계보 안에 어떤 '대속(代贖)'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차적인' 섬돌이의 죽음이 아니라, '이차적인' 새 당굴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놈은 죽어야 된다는"(『열명길』, 90쪽) 선과 악의 도덕적 논리, 그 제도적 법률의 [악]순환을 끊고 새 당굴은, 시간적으로는 한 시대를, 제 스스로는 한 육체를 닫는다. 섬돌이와 천치녀 그리고 젊은 당굴은 이렇게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무언가를 닫고 다시 열 준비를 하는 '시원'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

11) 성과 가계가 뒤섞이고 혼재되어 있는 삼중의 '부자' 혹은 '모자' 관계라는 상태, 1부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어떤 '구조적인' 기원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 '환생'을 준비한다. 더 이상 '환생(還生)'하지 않기 위한 '환생(幻生)'의 준비? 모든 것이 부패된 후 그 덩어리는 발효를 기다리는 것이다. 말과 법과 제도로 유지되어 오던 사회는 이 카오스의 덩어리 속에서 완전한 영점(零點)으로 접근한다. 새 당굴이 이렇듯 자신의 죽음으로써 닫는 한 시대의 말미는 역병의 창궐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그 역병은 단순히 신체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교적인 신열(身熱/神熱), 볼 수 없는 것을 봐버린 이들이 앓게 되는 어떤 불치의 열병에 가깝다. 섬돌이와 당굴의 죽음이 이들에게 '병'이 되고 '독'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종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곧 그것이 외재적 존재로서의 신의 부재,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뙤약볕'과도 같은 사형 선고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는 실로 '니체적인' 진단이 아닌가?

       

▷ 박상륭, 『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續 山海記 』, 문학동네, 2003.
▷ 박상륭, 『 산해기 』, 문학동네, 1999.
▷ 박상륭, 『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 문학동네, 2002.

12) 사실 박상륭은 이후 자신과 니체를 '조심스럽게' 구분하며 다소 점잔을 빼는 반론(『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을 제기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차라투스트라와 박상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대결'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불어 에켄드리야에서 판켄드리야에 이르는 유정(有情)들의 잡다한 모습, 그리고 도대체 독룡(毒龍)에 잡혀간 공주를 누가 구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관심이 있다면, '산문성'의 극단에 서 있는 이 '잡설가 패관'의 산문집 『산해기』의 일독을 권한다. 일종의 '심화학습'으로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ㅡ출판사 편집자가 달아줬다는 인상을 물씬 풍기는 제목인데ㅡ에 수록되어 있는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의 일독 또한 권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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