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마을 사람들은, 섬돌이의 목을 매달았던 바로 그 나무의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 곧  "백송 껍질의 맛을 알았던 사람들"(『열명길』, 100쪽)이다. 그들의 '몰락'은, 우리가 「열명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이후 「숙주(宿主)」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듯이, '반드시 필요했던' 하나의 몰락이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한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여두고자 한다.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 황제 엘리오가발의 가계(家系)와 '치적(治績)'에 대한 아르토의 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몰락'의 방향성을, 곧 카오스의 영점을 향해 치닫는 '발효'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 Antonin Artaud, Héliogabale ou l'anarchiste couronné, etc. Œuvres complètes VII
    Paris: Gallimard, 1982. 

14) 바로 이 영점으로부터 인물들은 제 각기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 역병 이후에, 이 말의 죽음 이후에 두 종류의 생물이 탄생하고 두 방향으로의 '진화(進化)'ㅡ'역진화(逆進化)'일 것인가?ㅡ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진화'의 두 길들은 각각 2부와 3부로 이어질 것이다. 마치 박상륭의 「숙주」에서 어릿광대가 아편의 혼돈 속에서 다시 왕국의 코스모스(질서)를 세워가듯이. 그리고 「뙤약볕」 1부의 마지막에 제시되었던 시원의 이미지와 맞물려 있는 3부의 말미, 그 속에서 점쇠가 어떤 '경지'ㅡ'지경'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ㅡ에 도달하게 되듯이. 마치 독이 거꾸로 약이 되고 이미 썩은 것이 도리어 다시 곰삭아 피어나듯이. 다시 찾은 '말', 그것은 이미 '말'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 말은 사실 말 '이전의' 어떤 것이다(다시 한 번,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직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의미에서, '사후적으로(nachträglich/après coup/retrospectively)', 그리고 오직 '사후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나 우리는 말을 겪고서만, 말과 몸을 끌어안고 가서만, 다시 이 '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점쇠가 다시 찾은 '말'은, 말 이전의 말이지만, 시기상으로는 필연적으로 말의 삶과 죽음 이후에 도래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점쇠가 겪었을 저간의 과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성이 혼재된 채 하나의 이미지로 묶여 있던 세 명의 인물(섬돌이, 천치녀, 젊은 당굴)은, 누이를 살해하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을 획득한 점쇠 안에서 비로소 제 몸을 입어 피어난다. 이렇게 얻은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마음은 언제나 이렇게 몸과 함께 올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육화(肉化, incarnation)'로 되새겨볼 수 있을 터. 흔히 「요한시집」 등의 작품을 통해 1950년대의 '실존주의' 작가로서만 알려져 있는 장용학의 단편 「비인탄생(非人誕生)」은, 저러한 '육화'와 '진화'의 의미를 되새김질해 볼 때, 특히나 재독을 요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하 두 권의 판본 모두 이 작품을 싣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일종의 '독특한' 선을 그리는 하나의 문학적 계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 계보는 장용학에서 시작하여 박상륭을 지나 아마도 백민석에, 가장 최근에는 어쩌면 편혜영에까지도 가닿을 것이라는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이 점에 관해서는 차후 따로 독립된 평론 하나를 준비해보도록 하겠다.

   

▷ 장용학, 『 원형의 전설 外 』(한국소설문학대계 29), 두산동아, 1995.
▷ 장용학, 『 장용학 대표작품선집 』(살아 있는 한국문학 9), 책세상, 1995. 

15) 2부의 시간 규정인 '하원갑(下元甲)'이라는 시기는 순환적 시간관에 있어서 하나의 기운이 쇠락하고 다음 세상의 기운이 생성되는 시기를 뜻한다. 따라서 '하원갑 섣달 그믐'은 어떤 세기말의 시간, 한 기운과 시대가 몰락하는 마지막 날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뙤약볕'은 이와 관련하여 어떤 '시간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말의 죽음이 고지된 상황, 신의 죽음 이후 인간이 놓인 상황, 역병의 창궐과 지극한 혼란을 드러내는 1부의 말미는, 인간을 향해 따갑게 내리쬐는 한낮의 뙤약볕이다. 곧 태양을 가려주었던 말의 차양과 신의 구름이 걷힌 것이다. 그 태양을 참을 수 없어 2부에서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은 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 한다. 그들의 시간이 아마도 '하원갑 섣달 그믐'쯤이 되려나.

16) 섬을 떠나 새 세상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선상에서 펼치고 있는 2부의 장면들은 여러모로 서양 사회의 역사에 대한 비유, 곧 '근대'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해석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다만, 이러한 해석이 쉽게도 '오리엔탈리즘적' 자족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 먼저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항해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렇다. 이는 신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 근대라는 시간의 탄생을 특징짓는 역사적 사실들 중 하나인 이른바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이라는 그네들의 정복 활동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또한 이는 신이 없는 상황에서 현세주의와 물질주의를 추구하게 된 근대적 항해 자체에 대한 비유로도 읽힐 수 있다. "공화국"(『열명길』, 126쪽)이라는 표현도 근대에 등장한 부르주아 정치체제에 대한 '비유'ㅡ'공화국'은 곧 말 그대로 '공화국'인 것인데, 이 '동어반복'이 하나의 '비유'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요한다ㅡ로 읽을 수 있는, 결코 쉽게 간과되어서는 안 될 표현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항해의 끝에서 "제국주의적인 맹아"(『열명길』, 127쪽)가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은 단순한 기우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17) 물론 「뙤약볕」의 2부 전체가 단지 '서구의 몰락'이라는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단순 요약될 수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렇게 도매금 짓는 것은 심지어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종일 개연성이 크다(이와 관련된, '의상'에 대한 여담 한 자락: 지금까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각각 한 번씩 '연극화'되었던 <뙤약볕>은 의상을 통해 '원시'라는 공간에 대한 특정한 선입견을 드러내고 있는데, 선입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야 무슨 문제일까마는, 그러한 의상이 마치 '당연한' 듯 규정되고 있는 시대 설정은 사실 지극히 임의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며, 문제는 사실 그 '당연함'에 있다는 것, 그리고 '고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증'이라고 하는 '헛된' 노력과 '헛된' 고민 없이 쉽게 이루어진 의상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훨씬 더 '헛되다'는 것). 그러나 한편 '서양'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현대 사회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거대서사'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2부 전체가 단지 '역사적' 서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여전히 '서양'이라는 기표로 대변되는 상징적 질서 전체에 대한 가장 유효하고도 효과적인 비유로 기능할 수 있는 것. 곧 나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적' 동양은 사실 저 상징적 '서양'의 질서 안에 이미 편입되어 있는 것이라는 '철지난' 진단, 그래서 2부 전체는 나와 당신이 속해 있는 '현대'라는 시공간 일반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 있으리라는 '진부한' 판단을 여기서 따로 내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18)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마지막에 남겨진 섬순이가 가진 아기가 누구의 아이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것은 바람쇠의 아이일까, 아니면 족장의 아이일까. 바람쇠의 아이라면, 그 아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제국주의적인 맹아'로 자라날 것인가? 족장의 아이라면? 족장은 이 항해를 시작하고 이끈 사람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간에 다시 나무토막 하나로 말의 사당이 지녔던 외형인 오각형 모양을 깎는 행위를 보여준다. 끝간데 없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듯 보이는 배 위의 인간 군상 속에서 작가는 어떤 '희망'의 희박한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는 더 이상 절망할 수 없는 극한 절망의 한 형상화일 것인가? 어쩌면 이는 족장이 마지막까지 차마 완전히 놓아버릴 수 없었던 하나의 '회의'를 드러내주는 것? 「뙤약볕」의 3부는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인' 문제 제기에 대한 하나의 '비역사적' 해답일 수 있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X, Paris: Gallimard, 1979.
▷ Georges Bataille, La littérature et le mal,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0.
▷ 조르주 바타이유, 『 문학과 악 』(최윤정 옮김), 민음사, 1995.

19) 「뙤약볕」의 2부와 3부는 일차적으로 성(聖)과 속(俗)의 개념쌍에 입각해서 독해될 수 있다. 속의 세계는 생산, 노동, 삶, 교환, 일상, 도덕의 세계임에 반해, 성의 세계는 소비, 유희, 죽음, 증여, [도덕을 넘어선] 윤리의 세계이다. 바타이유는 『문학과 악(La littérature et le mal)』의 서문(전집판 9권, p.171)에서 이러한 도덕을 "초(超)도덕(hypermorale)"이라 명명한 바 있다. 바타이유의 가장 정치하면서도 열정적인 문학 비평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일전에 국역본이 나온 바 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태.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바타이유의 '이론서' 국역본들 중에서는 번역의 질이 가장 나았는데, 아쉬운 일이다.   

20) 먼저 2부에서의 난교(orgy) 장면은 일견 성적인 일탈과 광기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행위, 곧 가장 기본적인 종족보존의 행위라는 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성행위의 생산/재생산적인 측면과 관련된 행위이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죽임의 행위도 사실은 지극히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일견 미신을 좇는 행위처럼 보이는 일들, 예를 들어 배의 선장을 용왕께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나 여자는 항해에 액운을 준다는 생각 등은, 먹여야 할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와 정당성에 입혀진 '비합리적인' 구실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그 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실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자체가 중요하다. 바람쇠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바람쇠의 '논리적인' 답변에 의해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난 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행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말이 죽은 이후의 세계, 곧 성스러움의 질서가 없어진 속만의 세계에서는 이 가장 현세적인 욕망, 곧 생존의 욕망만이 꽃을 피운다. 박상륭의 단어를 차용하자면, 이른바 '축생도(畜生道)'의 세계가 바로 그것. 그들에게 죽음이란 단지 생명활동의 끝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며, 이는 성스러움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질서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생물학적, 의사(擬似, pseudo)-유물론적 귀결이다. 바람쇠가 자기 자식에 대해 그렇게 애착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종의 보존과 개체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어쩌면 합리주의 가장 먼 극단을 항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것은 '바보들의 배(Narrenschiff)'일 것인가?

21) 반면 3부에서 점쇠의 누이 살해는 일견 이해되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속의 질서로 판단의 잣대를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이후부터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카트린드리야[四官動物]에게 하나의 감관이 더해져 판켄드리야[五官動物]가 되었을 때, 그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났던 하나의 감관은, 다름 아닌 '죽음'을 응시할 수 있게 된 감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 벌의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감관이었을 것. 다시 말해서, 자신 안에 깊고 깊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 심연과도 같은 우주를 발견한 인간, 그 인간이 바로 판켄드리야의 탄생 설화를 이루는 구조적이고 논리적인 '시조'가 되는 것이다. 바타이유를 차용하자면, 여기서 성스러움에 대한 인식과 추구란 곧 연속성에 대한 갈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연속성에 대한 추구란 유한한 삶을 넘어 무한에 가닿고자 하는 종교적인 갈구이다. 곧 '삶 속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그러한 갈구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른, 실로 다양한 형태의 술어들로 표명되어 왔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적으로는 '신과의 합일', '천국의 약속' 등의 예를, 불교적으로는 '아상(我相)과 윤회의 고리를 끊고 이를 수 있는 해탈' 등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부에서 보여지는 '죽임'의 행위들이 속(俗)의 질서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누이를 죽이는 점쇠의 행위는 성스러움의 질서를 체험하기 위한 행위, 곧 유한한 삶 속에 무한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끌어들이고 존재가 처한 불연속성을 넘어 어떤 연속성에ㅡ순간적으로나마, 아니, 순간으로서만ㅡ가닿기 위한 행위로서 성(聖)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개념화가 가능하다. 바타이유가 말하듯, "존재를 불연속성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은 언제나 가장 폭력적"(L'érotisme, p.23)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점쇠가 누이를 살해하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성스러운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죽음의 한 연구』의 '살해' 또한 마찬가지인 것). 여기서 '성스러운 폭력'이란, 한 존재가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한계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비록 순간으로나마ㅡ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오히려 '순간으로서만'ㅡ무한과 죽음의 질서인 연속성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신공희(人身供犧)나 희생제의에 있어 제물과 제의참석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교적인 '교감 작용'은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이 지닌 특징에 근거하고 있다.

22) 「뙤약볕」 안에서 남성의 계보와 여성의 계보가 갖는 의미에 대한 '가벼운' 분류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남성 인물들의 계보는 일종의 '발전 단계'를 전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계보는 곧 노당굴에서 새 당굴로, 그리고 다시 바람쇠 또는 점쇠로 이어지는 선이다. 노당굴은 최초의 균열을 의미하며 그 균열과 회의를 물려받아 한 시대를 닫는 이가 바로 새 당굴임은 이미 앞서 지적했던 바. 그가 그렇게 닫은 한 시대로부터 다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인물들이 바로 바람쇠와 점쇠일 것. 이 두 인물은 신이 죽고 말이 없어진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 위에서 각각 인간이 갈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길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족장과 점쇠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이지만(『열명길』, 106-107쪽), 족장이 이끄는 배 위의 집단은 신의 죽음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물질주의와 현세주의를 대변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무신론에 기반한, 그로부터 발원하는 발전 방향이다. 이러한 방향의 가장 첨예한 극단에 바람쇠가 서 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반면 점쇠는 '다시 [이미 알았던 것을] 찾으려' 섬에 남는다. 바람쇠의 행동선이 개척과 개발, 집단과 외재적 혁명을 통해 나아가는 직선의 선이라고 한다면, 점쇠의 행동선은 갱생과 순환, 개체와 내재적 회귀로 나아가는 나선형의 곡선이다. 분명 박상륭의 강조점은 이러한 후자의 나선형 곡선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23) 천치녀를 여성과 남성의 구분도 없는 존재, 언어와 언어 아닌 것의 구분도 없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문제일 뿐이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제도와 법의 체계라는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그녀는 분명 하나의 여성, 그리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천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그녀는 하나의 '시원'이라는 이미지로 왔지만, 그 의미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고 파악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거나 심지어 귀찮아하는 이 천치녀를 젊은 당굴이 사당까지 데리고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을 법하다. 이러한 이미지의 제시는 바로 그 이미지 자체가 지니고 있는 '본원적인 이해불가능성'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역설. 이 천치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단지 무질서와 비이성만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천치'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 말, 말씀이 신화와 역사 속에서 거의 언제나 '남성'의 전유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질서에서 볼 때 언어를 '결여'하고 있는 여성은 단지 '천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그렇다면 이 천치녀가 섬돌이나 새 당굴에게는 어째서 "말의 따님"(『열명길』, 96쪽)일 수 있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시 한 번 천치녀를 남성과 여성 또는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 '아직' 분절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모태(母胎)'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모태', 이 '매트릭스(matrix)'가 '여성명사'라는 것, 이를 '단순히' 수사학적 비유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의 따님'인 이 '어머니'는 실제로는 말을 '모른다'. 말과 그 따님은 이미 말/말씀 이전의 어떤 것, 언어와 언어 아닌 것 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어떤 구조적 시원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ㅡ혹은 그래서ㅡ그 어머니는 단순히 포근한 모성(母性)의 어머니만은 아니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 천치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자궁 안에 혼돈을 품어 질서와 안정과 이성을 의미할 뿐인 제도로서의 말을 깨뜨려 죽이고 새로 태어나게 해주는 어떤 '광포한' 모태를 의미한다. 이 시원, 이 어머니를 버리는가 아니면 되찾으려 하는가 하는 선택이 바로 2부와 3부의 갈림길, 혹은 바람쇠와 점쇠 사이에 놓인 간극일 수 있다.

   

▷ 칼리(Kali), 혹은 '버마재비의 암컷'... 어쩌면, '신성을 지닌' femme fatale?

24) 덧붙여 이 천치녀라는 인물을 좀 더 '세속적으로' 확대시켜ㅡ'축소시켜'라고 할 것인가ㅡ생각해보자. 어느 마을에나 '미친년' 하나쯤은 살고 있다(정말?). 마을의 소년(남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여자에 대한 성적 호기심을 품기도 했었을 것이다(진짜?). 흥미로운 것은, 범하기 쉬운 어떤 범속함과 범하기 두려운 어떤 성스러움이 이 여자 안에서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여자는 단순히 바보나 광인일까?ㅡ정말? 진짜? 혹시...? 이러한 맥락에서 천치녀를 바라보았을 때ㅡ섬돌이의 경우처럼ㅡ그/그녀는 천치와 성자가 한 몸 안에 공존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성(聖)과 성(性)이 혼재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25) 2부에 등장하는 섬순이는 속의 질서 속에서 교환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무엇보다 대를 잇고 종족을 보존할 여성성의 이미지 그 이상으로 기능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생물학적 여성에 충실한 인물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대지'는 수동적인 여성 또는 풍요로운 어머니로서만 드러난다. 풍랑이 불어닥치는 험난한 바다 위에서도 어쨌든 그 여성은 새로운 씨앗을 품고 보듬어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할 모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섬순이는 마지막까지 배[船/腹] 위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반면, 3부의 누이는 성의 질서 속에서 일방향으로 증여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증여의 의미는 생산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순수한 소비와 낭비, 소진 또는 과잉, 넘침이다. 곧 누이는 '희생'되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이 된다. 그 여성은 풍요롭고 넉넉한 대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유혹적이고 잔혹한 '자연'으로서의 어머니이다. 그 '상극'의 질서 속에서, 죽음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잔혹한 세계 속에서, 점쇠는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신을 가진 인간, 자기 안에 남성과 여성을, 말과 말 아닌 것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간, 자기 안에 온전한 우주와 시커먼 심연을 한 벌씩 안고 있는 인간, 곧 '인신(人神)'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인신이 등장하게 되는 광경은 앞서 1부의 말미에 제시되었던 '천치녀-섬돌이-새 당굴'이라는 어떤 '존재 덩어리'의 이미지가 비로소 몸을 입고 현현하는 장면에 다름 아닌 것. 같은 곳을 향해, 다른 모습으로, 점쇠는 그렇게 '누이'를 통과하여 '어머니'로 돌아오는 것.

26) 비슷한 맥락에서 점쇠의 어떤 '깨달음'이 목적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점쇠가 겪는 경험의 의미 자체가, 보려고 하는 의식적이고도 지향적인 태도에서가 아니라, 보여지고 내던져지고 남겨지는 어떤 '피험(被驗)'의 체험으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깨달음과 합일(合一)이라 할 것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체험이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의도와 목적은 이미 하나의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오히려 점쇠가 마지막에 도달한 어떤 '상태'는 그런 의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의도와 목적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는 이 부분에 대한 몇 가지 '문학적 장치'들이 엿보인다. 먼저 점쇠는 말을 다시 찾기 위해 사당을 복원한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방식이기는 하나 그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 말의 어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이고 목적의식을 갖는 시도, 하지만 막연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무위에 그치고 점쇠는 누이를 만나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듯 하면서 본래 스스로 가졌던 의도와 목적을 포기하는 듯이 보인다(여기서 카잔차키스(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나오는 저 '최후의 유혹'을 떠올리는 이는 오직 나뿐일까). 그런데 누이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나서 그는 어딘가 '변하게' 된다. 그는 말의 사당을 허물어뜨리고 누이를 살해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점쇠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누이의 살해와 그를 통한 '구도'의 과정이 자칫 처음부터 필요했던 과정, 의도했던 행위, 예정되어 있던 일정으로 비쳐질 위험은 언제나 있다. 물론 점쇠가 누이의 살해를 거쳐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깨달음이 어떤 '필연적인' 과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은 원래 점쇠가 지녔던 목적이나 의도와는 얄미울 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곧 그 깨달음의 과정 자체는 '필연적인' 것이나 '목적론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점쇠가 처음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했던 행위들이 지극히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데에 반해, 나중에 그가 얻는 일종의 '깨달음'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놓아버린 듯 보이는 상황에서, 마치 우연이나 축복 혹은 기적처럼, 그러나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하나의 필연이자 거대한 저주처럼, 그렇게 그에게 다가온다. 그가 찾은 것은 신이지만 그것은 신이 아니었고, 그가 찾은 것은 또한 말이지만 그것은 말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돌아가 되찾은 것은 무엇인가, 그가 깨달았다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신성(神性)이 없는 어떤 성스러움(un sacré sans divinité)'은 아니겠는가?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아도나이 1 』(정순희 옮김), 심지, 1991.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아도나이 2 』(정순희 옮김), 심지, 1991.
*) '아도나이'라는 제목은 이 국역본이 선택한 일종의 '안전한 번안' 제목인 셈인데, 원제를 그대로 달고 고려원에서 출간되었던 또 다른 국역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또한 현재는 절판인 것으로 안다. 1991년에 나를 처음으로 카잔차키스의 소설 세계로 인도해줬던 이 책은, 그해 겨울 나를 말 그대로 '펑펑 울렸다'는 고백 한 자락.

27) 이러한 점쇠의 '변성(變性)'에서 연금술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연금술적인 변성은 흔히 남자와 여자가 각각 반씩 결합된 이미지로 자주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결혼'의 이미지이다. 두 개의 성이 뒤섞이고 그로 인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제 3의 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하나의 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점쇠의 경우도 그러한 변성, 다시 말해서 말 그대로 성(sex)이 바뀌고 성질(quality)이 바뀌는 과정을 겪는다. 점쇠는 남성이지만 그는 "버마재비의 암컷"(『열명길』, 147쪽)이 되는 것이다. 점쇠가 누이를 살해함으로써 둘은 한 몸 안으로 섞이면서 어떤 '화학적' 작용을 겪게 된다(그렇다면 살해한 시신의 어떤 부분을 말 그대로 '먹는' 어떤 연쇄살인마의 행위는 단순한 '엽기'일 뿐일까). 연금술의 본래 의미에 따라서 점쇠는 하나의 '금(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곧 점쇠는 신성한 연금술적 결혼/결합을 통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죽었던 애를 되살려야겠"(『열명길』, 145쪽)다는 점쇠의 의지는 이제 그 자신의 갱신과 재생의 결과로 꽃피우고 발효되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질적인' 변화이다. 질적인 변화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내가 그의 '깨달음'이라고 범박하게 부르고 있는 그 순간 이후에 그에게서 어떤 '눈에 띄는' 변화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불순한 몸이 제거되고 이른바 정신의 순수함만이 남는 상황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몸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깨달았다고 해서 그 몸이 갑자기 어디로 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몸은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다. 단순한 광기와 복합적인 성스러움은 서로 섬세하게 구분돼야 할 필요가 있다. 점쇠가 이러한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몸 입은 '정상적인' 삶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예상은 그래서 오히려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 이러한 성(聖)의 체험은 속(俗)의 삶 속에서 순간으로 나타나고 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지속되며, 무엇보다 그러한 체험 자체가 이렇게 지속되는 삶 속에서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점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Alexander Roob, Alchemy & Mysticism: the Hermetic Museum
    Köln, Lisboa, London, New York, Paris, Tokyo: Taschen, 1997.
▷ Frances A. Yates, Giordano Bruno and the Hermetic Tradition,
    Chicago,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1964¹].
*) 로프(Roob)의 책은 연금술에 관한 다양한 도판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자료의 가치가 높고 여러모로 유용한 면이 많다. 덧붙여, 예이츠(Yates)의 위 책은, 이른바 '연금술적' 혹은 '헤르메스적' 전통이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자연관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논파한, 실로 명저라 이름할 만한 책이다. 일독을 강권한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의 이른바 '플라톤적 신학' 체계에 관해서는 이후 따로 글을 하나 마련해볼까 한다.

28) '자정(子正)'이라는 시간이 지닌 의미는 바로 이러한 체험이 갖는 순간과 경계라는 특성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도출되고 있다. 자정은 곧 회귀의 순간, 초월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시간과 대비되면서 또한 낮과 밤을 이어주는 어떤 '칠흑 같은 섬광'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점쇠에게 시원으로의 회귀, 곧 같은 곳을 향해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는 저 초월의 과정을 가능케 해준 것이 누이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자정녀(子正女)'라고 불러보자. 하지만 그 이름은 동시에 그러한 변성의 과정을 겪고난 후의 점쇠를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점쇠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점쇠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가 자정녀가 되는 순간과 경계를 체험하면서 찰나 안에 영겁의 시간을 담는다. 그는 누이를 살해하고 그의 죽음을 보는 그 유한한 순간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지닌 무한성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29) 마음은 몸과 말을 떠나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랬을 때만이 비로소 유한한 삶 속에서 체험하는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띨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체험된 무한과 죽음만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효하고 유의미한 무한이고 유일무이한 죽음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 갈구란 이러한 무한성의 죽음을 유한성의 삶 속에 담아보고 체험해보려는 일종의 'mission impossible'이 아니었던가. 몸을 몸으로써 넘어도 몸은 그대로 남고, 말을 말로써 넘어도 말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삶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윤회생사(輪廻生死)의 세계인 바르도(Bardo), 곧 모든 유정(有情)이 태어남으로 인해 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유형지(流刑地)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몸을 입음으로 인해 치뤄내야 할 형벌, 곧 유형(有形)은 또한 유형(流刑)이기도 한 것. 그러나 오히려 몸을 그렇게 남긴 채 몸 안에서 몸을 넘음으로써만이 몸을 온전히 넘어 살아냈다고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 사실 안에 초월의 드물고 고귀한 역설이 숨어 있다, 아니, 숨어 있지 않고 드러나 있다. 이러한 초월의 공간은, 몸짓을 통해 말씀이 발화되고 그 말씀을 넘어 마음으로 넘어가려는 열반에의 시도가 다시금 몸짓으로 돌아와 그 몸 안에서 체현(體現)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에, 또한 가장 '인간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다.

   

    

▷ 박상륭, 『 七祖語論 1: 제 I부 中道[觀]論 (Madhyamika) 1』, 문학과지성사, 1990.
▷ 박상륭, 『 七祖語論 2: 제 I부 中道[觀]論 (Madhyamika) 二/間場 』, 문학과지성사, 1991.
▷ 박상륭, 『 七祖語論 3: 제 II부 進化論 』, 문학과지성사, 1992.
▷ 박상륭, 『 七祖語論 4: 제 III부 逆進化論[Nivritti] 』, 문학과지성사, 1994.

30) 만약, 이 네 권의 책을 완독(完讀)한 사람이 국내에 열 손가락도 안 될 것이라는 몇몇 패관(稗官)들의 다소 과장된 풍문(風聞)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완독'이라는 '무식한' 행위가  곧 바로 '완벽한 이해'라는 '기민한' 결과를 낳을 수만은 없다는 슬픈 사실이 언제나 독서하기의 또 다른 지난함과 고단함으로 남아 있다는, 어떤 '씁쓸한 희망' 한 자락만을 밝혀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독은 함께 나누면 약이 된다(정말? 혹여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심보는 아니고?).

   

▷ 박상륭, 『 평심 』, 문학동네, 1999.
▷ 박상륭, 『 小說法 』, 현대문학, 2005.

31) 1994년에 『칠조어론』의 4권(3부 逆進化論[Nivritti])이 나온 이후 5년만에 박상륭의 '신작' 두 권ㅡ『평심』과 『산해기』ㅡ이 동시에 출간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열광했던가. 흥미로운 점은 '평심'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소설집'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반응이었다. 그 반응의 요지는, 이 '자이나교도' 박상륭에 대해서도 비로소 '소설 비평'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김윤식 선생에게 있어 그 이전의 박상륭 '소설'들은 소설이 아닌 것이 되고 있는데ㅡ어쩌면 박상륭 자신의 말 그대로 하나의 '잡설'일 뿐일 것?ㅡ, '근대 소설'의 형식과 미학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오랜 천착이 낳은 기준과 그 [헤겔적?] 엄격함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없지 않다). 특히 이 소설집의 백미라 할 세 연작 소설들(「로이가 산 한 삶」, 「왈튼 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 「미스 앤더슨이 날려보낸 한 날음」)을 통해, 가장 '근대적인' 형태의 소설 형식이라는 자리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박상륭의 행보가 그 반응의 이유였다. 일독을 권한다. 박상륭은 가장 최근작인 『소설법』에서 이번엔 『莊子』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小說 - 法'으로 읽을 수도, '小 - 說法'으로 읽을 수도 있는 제목은, 그대로 이 책에 대한 독서의 두 가지 방법이 되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여러 개의 이야기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단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으로 쓰는 작가도 있다. 박상륭은 물론 후자에 해당하는 작가이다, 그것도, 단 하나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책들로 쓰고 있는, 그런 마하바라타의 '패관'이자 천일야화의 '잡설가'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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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8-09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대단하십니다. 박상륭의 책은 저도 읽어보려고 몇번 시도하다가 중도에 좌절하고 말았다는..ㅜ.ㅜ 그런데 칠조어록같은 책을 모두 완독하시다니..^^ 함께 독을 먹을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님이 올려주신 이 포스트라도 대신 프린트해서 완독해 보겠습니다..(모니터로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내용들이네요..^^;;)

람혼 2007-08-0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린트까지 해서 완독해주신다고 하시니 영광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독을 먹는 일이 '동반자살'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시너지 효과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Sweet Summer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