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관점이 본래부터 분별 가능한 만주족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면, 신청사 담론은 왕조가 흘러가면서 만주족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건륭제를 비롯한황제들의 노력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그 민족의 문화를 방어했다기보다는 기원 신화, 민족의 언어와 문학, 일련의 뚜렷한 문화적 특색을규정하여 만주족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들은이러한 계획을 통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역설적이게도 16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족이 1911년에는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셈이었다. - P34

중국은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어쩌면 생물학적으로 다른민족들과 다르다는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의정복은 그런 내부적인 인종 차별적 사고가 표면화된 계기였다. - P44

계속 확대되던 천자의 제국이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당·송과 명말청초에 제국의 생산성을 크게 확대시켰던 두 가지 경제적 개혁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서 청 제국은 백성들을 궁핍하게 하지 않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청 중기에 기하급수로 증가한 인구가이 전략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게 만들었을 때까지 이러한 상승세는지속되었다. 성장하는 경제적 생산성과 더불어 조직적 병참도 성공을거두어, 청 제국의 예산은 사회 전체의 경제 생산에서 낮은 비율을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잘 작동했을 때 청의 행정은 저비용으로 유지되었다. - P66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 - P100

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1

청의 관료집단은 종족 조직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종족은 제국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유교적 정통론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종족에게 갈채를 보내야 했다. 실질적으로 지방의 관료들은 관할 구역 주민들의 복지와 생계를 위해 종종 종족의 자선 활동과 심지어 상업적 활동들에 의지했다. 옹정기와 건륭제 초기동안에 일어난 몇몇 경우에서 성급 관료들은 과도한 소송 절차로 인한지현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심지어 사법 권한까지 종족 수장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종족의 힘은 국가에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있었다. - P210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협조 정책은 두 사건, 즉 1870년에 있었던 영국의 올콕 조약 AlcockConvetion 조인 거부와 천진에서 일어난 대학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있었던 불만과 백성의 고통에 따른 산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청과 여러 서구 열강은 1860년의 북경 조약에 뒤이은 협정들을 지속적으로 맺어나가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그들의 태도는 많은 지지자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 P385

통상적으로 19세기 말의 조선에서 청의 외교는 ‘근대화한 일본의팽창주의적 위협과는 대조적으로 구시대적인 ‘중국적 세계 질서 속에서 불안정한 속국에 대해 자신들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지연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 사대부 계층 내의 청 지지 세력을유가 보수주의자로, 이에 대항한 친일세력을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상당 정도 사실의 묘사라기보다일본팽창주의자들의 선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청이 조선에서 완전히 근대화된 서구식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청이 한 행동들은 오랜 한중관 - P398

계의 역사 속에서도 선례가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주의적 서구 열강들이 행했던 수법과 더욱 공통점이 많았다.
또한 이는 청 제국 중흥의 일부로서 1880년대에 시작한 신강, 대만, 만주에서의 변방 지방화정책과 유사했다. - P399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즉 대도시 국가들은 그들의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한 출구를 찾고 있었으며, 국내 경제의 침체와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중국 같은 나라들은 잉여자본 투자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서 산출된 이익들은 대도시 경제로 다시 보내졌다.
이로 인해 투자 대상이 된 국가들의 자본이 유출되었고, 격차 해소를위한 산업화에 자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1920~1930년대의 국 - P407

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8

대청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고 해서 대부분의 보통 중국인의 삶이 단기간에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산동성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혁명을 경험했던 어느 여성은 훗날 자신에게 실제로 변화된 것은 단지화폐 단위뿐이었다고 회고했다. 혁명 이후 청의 동전보다 은화가 통용되었지만, 그 여성의 임금 가치는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엘리트 남성들에게 혁명은 강력하고 충격적인 의미를 지닌 문화적 사건이었다. 몇몇 학자들은 멸망한 왕조에 대한충절을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행위로서 자살을 감행했고, 1920년대까지도 새로운 중국의 일부 남성들은 변발을 자르고 근대적 머리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행동은 청에 대한 복종과 자랑스럽게 변발을 유지했던 선조들에 대한 효심이 결부되어 나타난 것이 - P503

었다. 더욱 광범위하게 청의 멸망은 여성의 전족과 같은 세속적이면서 성적으로 뒤틀려 있는, 이제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낡은 관습의자취에 대한 독특한 향수를 가진 남성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 P504

19세기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 - P504

제‘인 아이신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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