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참기름과 고춧가루와 올리브유와 생리대와 샴푸가 한꺼번에 떨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숨이 가빠진다.
시장에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을 것이다.
평소 시장비가 5만 원이라면 10만 원을 써야 한다.
10만 원이라면 20만 원은 각오해야 한다.
거기다 소고기 국거리라도 큰맘먹고 한 근 사게 되면
계산대 앞에서 가슴이 두방망이질 칠 게 틀림없다.

그런데 만약 지갑 속에서 현금을 꺼내어 계산한다면
시장바구니는 절반 정도로 줄지 않을까?
카드로 지불하면 아무래도 자신이 쓴 돈의 구체적인 액수가 실감나지 않게 마련이다.

살 것이 많을 땐  대형마트가 편하다.
매대 사이를 누비며  메모해 온 물품을 집어 카트에 던질 때는 묘한 쾌감이 인다.
메모에는 분명 없는데 안 사면 손해일 것 같은 물품들도 있다.
1 플러스 1 상품이 그렇고, 사은품이 본품을 능가하는 물건도 있다.
사은품으로 주는 밀폐용기 같은 건 찾아보면 한 박스는 될 텐데 볼 때마다 욕심이 난다.
예전에는 동네에 슈퍼가 새로 문을 열면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통을 개점 선물로 주었다.
그 플라스틱 통이 탐나 온 식구를 동원해서 슈퍼에 가는 아줌마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주부가 되고 보니 플라스틱통의 용도는 어쩜 그리도 다양하고 쓸모가 있는지
나도 가능하면 아이들까지 줄 세워서 한 개 더 받고 싶다.
더구나 플라스틱은 분리수거가 가능하니 낡아서 버릴 때 따로 애쓸 필요가 없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대형마트에 가지 않는다.
동네의 농협슈퍼를 이용한다.
달걀 한 줄이나 급히 필요한 두부, 맥주 큐팩 같은 건 단지 앞의 작은 가게에 가서 해결한다.
장사가 안 되어 술만 드시고 있는 아저씨를 보면 가슴이 무겁다.
채소나 나물 같은 건 되도록 노점을 이용하려고 한다.
땡볕에 시든 나물 바구니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들이 우리 동네엔 어쩜 그리 많은지......

지난주 겉절이 하려고 연하디연한 열무 한 보따리를 샀더니 그걸 봉지에 담으며 할머니,
"이 채소로 반찬 맛있게 해먹고 가족들 모두 건강하시오!"하는 인사를 해주시는 게 아닌가.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다.

부추와 생강을 사러 농협슈퍼에 들렀더니 부추단이 너무 실하다.
'부침개 한 번 해먹고 겉절이에 좀 넣고 그래도 남겠네?'하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자니 조금 전 부추를 장바구니에 집어넣은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부추가 필요한기요?"

"아뇨, 딱 절반이면 좋겠는데......"

"그러면 우리 절반 노눕시다. 부추는 꼭 남아서 버리게 되더라고."

화끈하신 할머니는 말이 끝나자마자  절반 딱 나눈 부추를 비닐봉지에 넣어 내게 내미셨다.
급히 지갑에서 동전을 찾아 반에 해당하는 돈을 드렸더니 안 받으시겠단다.
죄송해서 어쩌냐고 했더니 서로 좋은 일이란다.
참으로 쿨하고 멋진 할머니였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내가 부추든 뭐든 사겠다고 인사하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좀전 알라딘에 들어오니 노마트, 즉 마트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기사를
라주미힌님이 퍼오셨다.
그날 두 분 할머니에 대해 페이퍼를 하나 써야겠다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는데 까먹고 있었다.
잊기 전에 급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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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06-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동네에 제법 큰 재래시장이 있는데 지금 이 곳이 재개발이란 명분아래 다 헐려지고 있어요. 길에선 사람들이 살 터전을 달라고 농성을 하고.. 옹기종기 앉아 채소를 팔고 국수를 말아 팔던 이 곳이 싹 쓸려 없어 지고 새로운 대형 건물이 들어 선다고 하니깐 마음이 뭉클했어요.
시장에서 찌게에 넣을 쑥갓 한웅큼만 있으면 된다고 할때 그냥 집어 주시던 그런 정은 이젠 사라지겠지 하는 마음이 무겁답니다.

저도 노마트를 외치는 중인데 잘 안돼요..^^

로드무비 2006-06-2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마트의 쾌락에 너무 깊이 중독 되어서요.
님 사시는 동네가 어디더라? 잠시 머릴 굴려봤습니다.
그러니까요. 재래시장 참 좋은데.
주전부리 할 것도 많고.^^

nada 2006-06-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가 없는 동네에 살다 보니 얼떨결에 동참하고 있군요. 캬캬.

"당신은 그렇게 많은 부추가 필요한기요?" 이 부분에서 살짝 웃었어요.
무슨 선문답처럼 느껴져서..ㅋㅋ 쿨한 할머니 만세!

rainy 2006-06-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정말^^ 나도 기회되면 그래야겠다고 불끈..
좋은 건 쑥스러워 말고 따라하자 할만큼은 나이먹은 내가 이럴땐 좋아요..
인터라겐님.. ? 혹시 성북구청 쪽에 사시나요? 바로 우리동네 이야기네요...

로드무비 2006-06-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그걸로 제목 바꿔야겠슴돠.
필이 오는데요?
제목에 시장을 넣고 싶었는데 '부추'로 통합하지요.
힌트 감사!ㅎㅎ

(할머니 말투도 독특하죠? 그대로 옮겼어요.)

플레져 2006-06-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가 생긴뒤로 씀씀이가 커졌어요. 수퍼 규모인데도 말이죠, 물건이 다양하니까.
트럭에 야채싣고 오는 아저씨도 우리 아파트 단지가 작아서 오지 않아요.
우연히 만나 이천원에 감자 한봉지 샀는데 싱싱하고 맛난 데다가 양이 정말 많아서 넘 행복했잖아요 ㅎㅎ 대형마트가 멀어서 다행이에요. 한번 다녀오면 이십만원은 우스워요. 게다가 뭐 산 것도 없는 데 돈만 날린 기분, 저도 노마트!

로드무비 2006-06-2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나이 먹는 게 좋은 점도 더러 있어요. 그죠?
그리고 언제 부추 사실지 말씀해 주세요.
가서 얻어 오게!=3=3=3

플레져님, 어마어마한 카트가 계산대 앞에 줄서 있는 광경도 장관이에요.
도대체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물품이 어느 정도인지.
식재료며 옷이며 책이며.
가끔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뭐 그러면서 아구아구 사들이지만.....

하루(春) 2006-06-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할머니 참 멋지네요. 캬~ 갑자기 왜 소주가 생각나지? ^^;

조선인 2006-06-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벅이족이 된 지금, 아파트 토요장의 단골이 되었어요. 후한 인심은 아니지만 딱 먹을만큼 살 수 있어 좋더라구요. 대형 마트에선 못 느꼈던 거죠. 할머니의 말씀, 기억해둘게요.

paviana 2006-06-2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urblue 2006-06-23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에서 부추가 상해가고 있어요. 저도 그런 할머니를 만났으면 좋았을걸. 아니, 그 할머니처럼 할 걸 그랬나요?

건우와 연우 2006-06-2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할머니 진짜 쿨하시네요.^^

sooninara 2006-06-2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트 다녀오면 반성하다가 또 마트가면 눈이 뒤집혀서 잔뜩 사온다는..ㅠ.ㅠ
요즘은 동네 슈퍼도 묶음 포장이라서 부추는 정말 남아요. 부추전에 부추겉절이에 해 먹지만 다른 야채도 냉장고에서 버려지는게 만만치 않죠.
저 할머님 정말 멋지십니다.

치유 2006-06-2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할머니예요..
우리도 가끔 그럴때가 너무 많아요..
한단 사기엔 너무 많아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이웃들과 알게 지내다 보면 나누어 먹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닐땐 참 아깝더라구요..결국엔 썩어 버리게 되니..
전 또 가지가 썩어가고 있더라구요...한묶음이 여섯개나 들어있었거든요..ㅡ,.ㅡ


sudan 2006-06-2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추를 부츠라고 읽고는 신발 얘기인줄 알았어요. 로드무비님은 구두 쪽으로 사치하시는 분이신건가 생각하면서 들어와봤더니. ^^

혜덕화 2006-06-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거의 마트에 안갑니다. 정말로 꼭 마트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으면 몰라도 대개는 군것질거리만 카트 가득 실어오게 되더군요. 메모해서 가면 동네 수퍼에서 5만원 안팎이면 해결 될 것이 마트만 가면 십만원 넘는 것은 순간이예요. 아이들에게 과소비를 가르쳐서 좋을 것도 없고, 노마트 운동에 찬성합니다.

로드무비 2006-06-2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네, 마트에 가면 눈이 뒤집히지요.ㅋㅋ
책장수님왈,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합니다.
전 사실 야채 손질이 귀찮아서 야채를 잘 안 사요.
그러다 또 큰맘먹고 이것저것 사와서는 미루다가 썩혀서 버리고.
할머니 인상도 참 유쾌하고 좋았어요.^^

건우와 연우님, 확 열려 있는 느낌이었어요.^^

블루님, 부추 반단 나눠먹기 운동 해볼까요?^^

파비아나님, 샤프한 외모에 쿨한 할머니, 잘 어울리는데요?^^

조선인님, 아파트 알뜰장터도 좋지요.
정말 싼 것 같아요.
전 어쩌다 그 옆을 지나가게 되면 이용하는데
일부러 가지지는 않더라고요.
그것도 부지런해야...^^;;

하루님, 맥주도 아니고 소주가 생각난다고요?ㅋㅋ

로드무비 2006-06-2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아이의 눈을 생각해서라도 뭘 좀 덜 사야겠어요.
며칠 전 저에게 "엄마는 돈이 아깝지 않지?"라고 말해서
가슴 철렁했답니다.
제가 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구석이 있거든요.;;

수단님, 저는 사치를 모르는 인간입니다.
정신적인 사치 외엔.=3=3=3
(님의 사치 쪽 아킬레스건은 뭔가요? 궁금.)

배꽃님, 가지야말로 이상하게 꼭 요리를 미루게 되는 채소.
희한해요, 그죠?^^;

클리오 2006-06-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트만 가면 적자가 나서 동네 슈퍼를 애용하려고 노력중이예요.. 이상하게 더 싼 물건만 사는데도 왜 마트에 사면 살게 그리 많은지 이해가 안되요.. ^^; 마트에 가면 할인품목만 얌체같이 사오자~~ 고 다짐하는데 안될 때도 있어요. 흐..

가시장미 2006-06-2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추.. 저희 집에도 너무 많아서. 부침개하고 김치에도 넣고,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도 많이 남은 것 같더라구요. 전 사실 장을 본적이 별로 없어서 부추 한단에 얼마만큼인지 잘 몰라요. -_-;; 솔직히 저렇게 말을 건네준 할머니도 대단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하자고 동의한 로드무비언니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상대의 호의를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아름다움이죠. :)

릴케 현상 2006-06-2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트만 따라가면 앤님이 사주는 옷이 한가득=3=3=3

로드무비 2006-06-23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결혼 전에는 본래 그런 거라오.ㅎㅎ

붉은가시장미 님, 그래도 집 냉장고 사정을 잘 아시네요.
워낙 말 길게 하는 거 싫어해서 할머니의 제안 그냥 받아들였어요.
다른 분께라도 갚으면 되지 마음 편하게 생각했고요.
뭐 떼먹어도 할 수 없고.ㅎㅎ

클리오님, 마트에 가면 모처럼 왔는데 안 사면 손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도 주워담게 되고.
안 가는 게 돈 버는 거예요.^^


반딧불,, 2006-06-2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공산품하고 놓치기 아까운 몇가지가 있어요.
저도 반성합니다.
회사하고 넘 가깝다보니 꼭 가게 되요ㅠㅠ

로드무비 2006-06-24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마트에 절대 가지 말자고 쓴 글은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게 흘렀네요.
아주아주 얌체 손님으로 필요시 가끔은 마트를 이용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헤헤~

balmas 2006-06-26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있어요, 로드무비님. :-)
부추 나눠주신 할머니도 ...

로드무비 2006-06-2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호호, 새삼스럽게.=3=3=3
(부추 할머니 만나고 나니 세상이 잠시 환해지는 듯.
그런데 열무 할머니도 괜찮았는데......)

야클 2006-06-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갑자기 비도 오는 날씨에 부추잡채랑 공보가주 생각이 났다는.... ^^
잘 지내시죠?

로드무비 2006-06-26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부추잡채 먹고 싶어요.ㅎㅎ
공보가주는 뭔공?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야클님도요?^^

2006-06-26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6-06-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추천 하나 얹어요. ^^

로드무비 2006-06-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벼리꼬리님, 흐뭇하옵니다.^^

잊지 않으시고님, 별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