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5

   

가슴 속 추억은 추억일 뿐

 

작가께서 살아오신 지난하고 어려웠던 시대를 소재로 작품은 일기장처럼 무덤덤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작가와 같이 대 작가분들이 더 이상 이런 주제를 축으로 하는 작품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이문구의 관촌수필’,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혹은 늘 푸른 소나무(10)’,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같은 작품으로 부모님들의 어려웠던

시기의 이야기는 충분하다고 여겨져서이다.

- 나도 어느 정도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는 생활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

또 다른 측면은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이야기가 신세대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게 다가 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런 작품으로는 그런 세월을 살아오신 일부 기성세대들

입맛을 맞추고 그런 독자들에게 과거의 삶을 회상하게 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신규 독서

인구를 새롭게 창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어렵고 가난했던 주제를 갖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 본들 어느 영화의 한 대목으로 이해할 뿐이지 그게 얼마 전 우리들이 살아왔던

세상 이야기라는 점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서 인구의 저변을 넓히려면 이런 류의 작품보다는 좀 더 참신한 소재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

- 실제적 역사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 부모들이 겪은 가난과

  어려움을 역사의 한 범주로 넣어 판단한다면 할 이야기는 없겠으나 단순한 가난과 어려움만을

  극화시키는 이야기로는 취업문제, 내집 문제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대에게 공감을 못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듯이 내 앞의 현실이 지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부모세대의 고난 역시 해결책이 아닌 쓸데없는 잔소리로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시절 서울의 중심부에 살았었지만 정말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 대신 수돗가에서

허기를 채우던 친구들이 있었으며, 한 학급 학생수가 거의 90명이다 보니 휴식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게 데모 군중 속을 뚫고 다니는 듯 했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채변 봉투와 쥐꼬리를 의무적

으로 제출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다른 동네로 이사해서 동네 또래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정작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나와 이웃집 친구 외에는 없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하나 밖에 없는

외길로 거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학생, 좌로 방향을 틀면 연탄 공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나와 친구만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동네의 또래 친구들은 전부 좌향좌하여 공장으로

출근하는 그런 동네였고 삼일이 멀다하고 동네 사람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움이 벌어지던 그런

동네였다.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만이 살 길이라는 일념 속에 다른 것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추억이나 기억이 별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네에 아이들이 무지 많았던 기억과 함께 서울 변두리다 보니 집집마다 시골에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뭔가 이뤄보겠다고 힘차게 살아가던 어느 작품의 주인공과도 같은 봉순이 언니들도 상당히 많이

보이던 시대이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선배와 선생님들로부터 툭하면 얻어맞은 기억 밖에는 없다.

- 당시 학교에서의 구타는 일상화 된 행사와도 같은 시기였으며 학생들에게 행해지던 구타가

  당연시되던 시대로 기억되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고 ROTC를 거쳐 대기업에 입사해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자식들도 두었다. 그리고 어언 30년이 흘러 정년퇴직하고 한 권의 책도 썼으며 경쟁력

있는 유망 중소기업에서 제2의 길을 걸었으나 그것도 잠시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나가라고 해서 지금은 집에서 책과 글 쓰기 그리고 잠깐잠깐 운동하며 소일 거리를 찾고 있는 이 시대의

평범함을 가장한 베부른 실직 가장이다.

내가 살아온 궤적을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 보니 작품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조용히 입가에 미소만 지어질 뿐이다.

하지만 작품 행간에 숨어 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절절한 애환은 작가가 아니고는 또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고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은 이를 긍정의 힘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어느 작가분께서 황 선생님을 황구라라고 칭하시면 그 분의 창작에 대한 열의를 잘 표현해

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분이 동료 작가들로부터 그렇게 불리웠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땅에 살면서 누구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북으로, 남으로 다니시며 정말로 많이 체험하고, 들으시면서 집필

하셨던 손님’, ‘개밥바라기별’, ‘여울물 소리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를 극복하는 해법을 제시하려 노력하시다 얻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추억과 그 추억 속에 옹심이처럼 박혀있는 눈물겨운 고난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그 모든 것을 어렵고도 힘든 추억으로만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리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음은 물론 남은 인생을 그런 과거에 얽매어 산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서두에 작가와 같은 대 작가님은 본 작품의 주제와 같은 내용의 작품을 앞으로 저술하지

말아달라고 주장한 이유는 더 이상 이런 작품을 통해 부모세대가 사셨던 어렵고 힘든 시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부모 세대가 겪으셨을 고통으로 인해 유, 무형으로 제약받을 수 밖에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이를 떨쳐 일어나자는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 부모 세대가 겪었을 그런 어려움이 이 땅에서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또 우리 모두의 희망과 꿈을 그리고 모두가 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이런 작품이 식상하다

던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해 좀 더 적극적인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런 책이고 작품이라면 한 사고 안 읽으면 되는데 뭔 외침인지 모르겠다.....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살면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해 보지만 선생의 작품에 자꾸 손이가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항시 이런 작품을 접하면 느끼는 좀 생뚱맞은 나의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