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는 동안 과거 휴가차 아내와 '홍도'로 여행을 갔을 당시의 서해 먼 바다에 외로이

떠 있던 '홍도'의 모습이 눈에 떠올랐으며, 내가 그 섬을 여행할 당시 느꼈던 추억과 느낌이

작품 속 주인공 처지와 어딘지 모르게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작품에 대한 느낌이 더욱

다가왔지만 한 편으로는 작품을 통해 받았던 답답함에 근거한 무기력감으로 인해 주인공이

겪었을 한 많은 세상에 대한 원망도 해 보았고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희망도 찾지 못한 채

끝없는 미로를 헤매었을 주인공의 참담한 마음도 함께 헤아려 보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말 그대로 내게 큰 흑산(黑山)으로 내게 다가왔다.

 

작품을 통해 격랑의 역사 속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 간 새로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그간 몰랐던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조각을 찾아냈다는 즐거움과 함께 한편으론

씁쓸함이 더 컸던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중심에 선 인물은 이름도 생소한 [황사영]이라는 분으로, 서학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해당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조건들, 예를 들자면 시대적 상황과

당시를 살던 민초들의 움직임 등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와 이해가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면 작가의 의도는 물론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주제성을 거의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이며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정약용의 형제들과 교류를 갖던 중 둘째인 정약종(丁若鍾)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정조 14(1790)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정약종의 맏형

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

, 천주교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1801)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중국

에서 파견한 신부인 주문모(周文謨)를 만난 뒤 그의 측근 인물로 활동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 방안에 대해서 북경주교에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로 이를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 편에

보내려다 발각된다.

이 문제로 체포된 황사영은 서울로 압송 뒤 '대역 부도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고,

살아 남은 일가족은 모두 귀양 가면서 [황사영]과 관련된 모든 자취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작품은 혼란한 세상에 홀연히 들어오게 된 서양 종교의 유입 과정에 얽힌 우리 종교

선각자들과 이를 받아 들이는 민초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내용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사건의 줄거리 속에 간간이 끼워 놓은 우리 민초들의

참담한 이야기 소재는 작가가 마치 곁에서 본 사건인양 묘사하고 있는 점은 작가의 숨겨진

또 다른 내공을 보여 준 한 단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으며 왜 작가는 지금 '흑산'이라는 작품을 들고 나와 그분의 이전 작품

'칼의 노래', '남한산성' '현의 노래'로 연결 되는 연장선상에서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

를 던지려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작가는 '한 시대를 증거하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갖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시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갈구하는지에 대해 세치혀가 아닌

그들의 재주인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로 무장하고 시대의 아픔을, 민초들의 절박한

속내를 대변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로 작품은 그런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금융 위기와 국가간의 경쟁적인 환율 장난으로 우리네의 살림살이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한 때는 공업화와

산업화의 역군이라는 평가를 받던 베이비부머세대는 이제 퇴물 아닌 퇴물로 전락해

버리면서 더 이상 그들은 시대의 중추가 아닌 걸림돌로 변해 버렸고, 그것도 모라자

작금에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떨어트리는 주범으로까지 폄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그들이 보유했던 특정 기술은 더 어리고 더 똑똑한 후배들에 의해 추월 당해 용도

폐기를 넘어 무용지물화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고, 그들이 자부하며 지녀 왔던 그들만의

노하우는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기기 앞에 밑천을 드러내 버리고 말아 그들이 지녔던

희소성에 대한 의미도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잠재적 역동성을 젊은 피를 소유한

세대를 역시 기성 세대와 같은 수준의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그런 평가에 좌절한 그들은

국가가 쳐 놓아주길 원하는 사회적 안전망에 기대려 하나, 이런 것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될 인간들은 남의 나라 주방용 고무 장갑 광고에 나올 정도로 주접만 떨고 나 몰라라

외면하고 그것보다는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 몰두한 나머지 연일 색깔 논쟁으로 싸움만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답답함의 극치를 느끼면서 이런 시대적 상황이 빨리 종결되고

어서 빨리 새 날이 오기만을 꿈꾸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아마도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로 북한의 '김 청년'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아마 작품 속 시대적 배경과 같은 고민

속에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핵 무기' 운운하시는 모양인데, 전쟁을 일으키면 어떤 무기를

쓰더라도 아래 이유로 절대 이 쪽을 이기지를 못 할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이 쪽의 혈기 방장하고 어디로 뛸지 모를 중학생들의 의식은 이쪽에 사는 기성인력들

         도 컨트롤이 안 되는 별종의 인간들이 무지하게 많고

 

둘째, 대학까지 나와 번듯한 직장을 잡지 못한 채 여기 저기에 이력서를 내밀고 있는 가슴

         에 남은 것은 열정이 아닌 좌절밖에 남지 않은 젊은이들이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군에 들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것이며

 

셋째, 더 중요한 것은 '핵이 있으면 이긴다'는 망상은 절대 허구라는 점을 시대적 상황,

         새 역사의 창조 이전에 감안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할 것임.

때문에 전쟁에 대한 미련은 버리는 게 좋을 듯하다고 생각하는 데 당신 생각은?

작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본인이 앞서 읽고 기록으로 남겼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

했던 "조선의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백승종), 세상을 바꾼 여인들(옥당, 이덕일)"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국민 정서적으로 정신적

측면이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었던 것으로 관측 된다 할 것이다.

, 조선의 문화 부흥기를 이끈 영, 정조를 거치며 문화가 융성해 짐과 동시에 민초들의

사고의 폭도 넓어져 민초들에게 과거처럼 일방적인 복종만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조 시대를 거치며 외부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민초들과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는

집권층간의 노골적인 싸움은 서학 문물의 유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출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 중에서 가장 시대적 상징성이 큰 작품의 소재된

'황사영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간간이 등장하고 있는 중인 및 하급 계층(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이야기가

비록 창작성을 띈 문학 작품일지라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기에 작품에 주요 사례로 등장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나의 눈길을 잡은 대목은 다른 게 아닌 바로 어느

민초의 기도문이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58)

 

라고 기도하는 '언문 기도문'에서 당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작품은 기득권과 새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조직적인 항거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작품을 읽으며 한가지 재미난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의 작품 전개 방식이 본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앞서 읽었던 황 작가님의 작품 역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그 사건의 밑에 침잠해 있던 민초들의 고충을 다루면서 작품의 주제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본 작품도 그런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너무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 김 작가께서 본 작품에 한 해 황 작가님을 COPYCAT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듯 하다고

  이야기하면 아마 발끈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ㅋㅋㅋ

 

과거 황 작가님이 모 신문에 '장길산'이라는 작품을 연재할 때 작품이 펑크 나지 않도록

수발하러 다녔던 전담 마크 맨이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대 작가님이 자신을 수발하러 다녔던 졸개의 작품 전개 방식을

약간 본 떴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는 순간이다.

아무튼 김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섬뜩한 감각력에 무한 찬사를 보내는 바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작품의 소재와 같은 상황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신유박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 된다.

특히,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할머니인 정순대비(貞純大

)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계열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