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9

 

금번 작품을 읽으면 벌써 김종서 장군에 관한 작품만 세 번째 읽는 것이라  그래서 그랬는

지는 몰라도 김 종서 장군과 관련된 작품을 읽다 보면 읽을수록 울화통이 터지고 답답한

마음을 이루 헤아릴 길 없음을 이 지면에 대고 외치고 또 외쳐 본다.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이름도 빛도 없이 정당한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다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인물들은 수 백 년이 흐른 지금도 후세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지만, 당시 현실적인 암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장악했던 한명회, 권람 등을 기리는 곳이

조선 천지의 그 많은 서원 중에 단 한군데고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이, 역사가들이 그들을 무어라 평가해 본들 꺽여져 버린 북진의 꿈과 정통 왕권의

계승은 이미 엎어진 물이 되어 버렸으니 말 그대로 '오호 통재라' 아니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 언젠가 북진 땅을 휘달리며 김 종서 장군을 비롯한 고토의 회복을 염원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한 맺힌 억울함을 달랠 수 있을런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오늘도 대권을

향해 울부짖는 저 위정자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메세지나 절규가 없음에 한 없이 눈물

짓는다.

작품의 내용을 이전의 독후감 정리 방식이 아닌 팩트별로 요약해 보았다.

절재(節齋) 김종서(1383 1453) 장군은 문신이면서 무신의 역할까지도 완벽 수행한

인물로 세종, 문종, 단종을 거치며 임금의 명을 받아 북방 영토를 확장, 정비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종 1(1453), 계유정난의 시발점에서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된 김종서는 무려 293

후인 영조 22(1746)에 공식적으로 신원된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잘 보좌했다는 뜻의

'충익공'이란 시호도 함께 내려졌다.

[정권과 시대적 환경]

국내적으로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된 모든

세력들 특히 세종의 장인과 처남까지 정리하는 데, 세종은 그런 정치적 기반 위에서 안정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가뭄으로 인해 서민들의 고통도 상당히 뒤따랐던 시기였다.

국외적으로는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상당히 곤경을 치루기도 했다고 하는데,

특히 조선 출신이면서 명나라에 환관으로 바쳐진 '윤 봉'이라는 인물은 명 황실을 등에

업고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힌 인물로 그는 조선에 있는 자신의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달라고 위세를 부린 인물이다.

[세종과 김종서]

사리 분별 정확하고, 매사에 꼼꼼한 김종서를 무한 신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일 계속되는 자연 재해 피해를 김종서를 통해 조사해 보고케 하는 등 다른

관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조사 내용으로 세종의 신뢰가 상당했었다고 하나, 황흥 정승같은

이는 그의 대쪽같은 성격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질책을 가하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김종서가 북방을 지키는 도중에 모친이 돌아가 돌아가셨음에도 세종의 성화에 못 이겨 3

상을 마치지 못한 채 '기복출사'를 명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의 문제점]

현명한 군주였던 세종도 역시 피부치에 대해서는 과단성이 상당히 결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연일 문제를 일으켜 대소 신료 특히

김종서까지 나서서 이를 질책하기를 건의하나 세종은 자신의 형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등의 허점을 노출하는데, 이 과정에서 김종서와 양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기득권층의 문제점]

세종의 명을 받아 어렵게 북방 영토를 김종서 장군이 개척하였지만 척박한 북방 지역으로

이주할 이주민들이 없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벼슬아치들 조차 북방은

커녕 서울 근교의 지방으로도 가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고 한다.

이런 작태에 심기가 불편해 진 세종은

'사람들이 모두 경직(중앙 벼슬)을 하려고 늙은 병든 어버이를 핑계를 대고 외관에 나가지

않으려 하니 아주 옳지 못한 일이다. 또 어버이가 있는 가까운 곳을 제수해도 사양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경상도나 전라도에 있는 어버이를 위하여 경직을 사양하고 가는 자가

없는 것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라고 탄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국경의 말썽꾼, 여진족]

김종서가 함길도로 떠날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안팎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 당나라 시대엔 '말갈족'이라고 불렸는데, 발해 때만 해도 여진족은 발해의 한 부분으로

이루는 주요한 요소였으나 고려가 만주 쪽에서 통제권을 상실하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가 한 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었던 적도 있는데 우리의

유학자들이 중국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면서 여진족을 오랑캐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한족의 시각으로 여진족을 바라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가장 우려한 것은 여진족의 통합이었다. 따라서 여진족을 여럿으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이를 '기미정책'이라고 하는데 기미란 '고삐'라는 의미한다.

조선 개국 당시 여진족과 조선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여진족이 일정 부분 활약

하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조선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

조선과 명은 사대와 조공의 관계였지만 만주를 두고는 끊임없이 갈등을 하는 관계였다.

명나라는 이름만 있는 허울 좋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은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북진 정책]

- 세종 때 북방 정책은 문신 김종서, 무인 최윤덕과 이징옥에 의해 주도 되었다.

- 세종은 고려시대의 '윤관'이 설치한 '길주'라는 지명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명 태조가 만주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국경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파악하고

   세종 21(1439) 공조참판 최치운을 북경에 보내 두만강 북쪽 700지점에 있는

   공험진 이남의 땅이 조선의 땅이라고 통보를 한다.

 

조선 중, 후기 '한백겸''동국지리지'에서 공험진이 함경도 남쪽에 위치한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인데, 한백겸의 주장에서 유력한 증거로 윤관이 세운 비석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은 함경도 이원의 마운령에 있는 '석추구기'라는데, 이는 윤관이 세운

    '선춘령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이 세운 마운령 순수비로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국토 확장 사상이 오그라든 계기가 되었다.

- 김종서의 북진 정책에는 이징옥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징옥은 영토를 확장할 때

   반드시 이주할 백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국경방어의 역할을

   맡기는 것을 건의할 정도였데 그의 도움으로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다. 

[문종의 급서와 어의의 특진]

- 문종의 수명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역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문종 재위 2(1452) 5월초 허리 위의 종기와 이를 담당한

  어의 '전순의'에 의해 운명이 갈린다.

  전순의는 문종의 종기에 상극일 수밖에 없는 음식인 꿩이나 오리, 닭 등을 상식하도록

  처방하였는데 한의학에서는 종기 환자에게 이러한 처방을 하는 것을 독살의 증거로 삼을

  정도로 상극인 음식이라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모든 의료에 관한 사항은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과 양녕에게 상의한 후

  처리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왕이 급서한 다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곧 바로 어의였던 전순의를 복귀 시키고 좌익 원종공신 1등급을 부여 했다는

  사실이다.

[단종의 어려움]

12살의 나이에 등극한 단종은 수렴청정 해 줄 대비가 없었다는 게 큰 어려움 이자 난관이었

다고 보면 된다. 그의 모친 권씨는 어린 시절 죽었으며, 할머니 소헌왕후 역시 태종에 의해

쑥대밭이 된 친정집의 한을 품고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등극]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2천번 이상 이름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즉위년 7월인데,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는 '음서 제도' 덕택에 관리로 나서는 데 제일 처음 받은 보직이 '경덕궁 궁지기'였다.

그는 친구이며 과거에 장원 급제한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 줄을 대고, 수양대군의

모사꾼이 된 한명회는 불평불만 세력을 결집해 수양대군을 부추긴다.

[문종과 문종빈 권씨의 무덤과 풍수지리]

세종의 세자빈 권씨의 장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목효지'라는 인물이 장지 선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 권씨의 장지로 선택된 곳은 '장자, 장손이 일찍 죽는 악지'라는

것이다. 풍수가들은 문종의 능자리를 찾으면서 백악산의 뒤에 궁을 짓자는 주장을 한다.

이는 문종 빈 권씨의 장지 선택 시에도 나왔던 주장으로 만약에 궁을 짓게 되면 '자손이

성한다'는 설로, 그렇게 되면 자신의 거사가 좌절 될 것을 우려한 수양대군이 이를 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세종 이후 후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 수양대군은 방룡으로서 왕은 되었지만 그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일찍 사망하고,

둘째 '예종'이 뒤를 잇고, 그 후사는 의경 세자의 둘째인 '성종'이이었으며, 성종의 맏아들

인 정룡 '연산군'은 쫒겨나고, 성종의 차남 '중종'이 뒤를 잇는 등 방룡이 성했다.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은 즉위 1년이 못 되어 사망하고 둘째 아들 '명종'이 뒤를 이었으니

그 옛날 풍수가들이 한 예언이 어느 정도는 맞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계유정난]

- 정난(靖難)은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으로 어차피 이긴 자들이 붙이는

   이름이다.

- 수양은 훗날의 거사에 대한 명분을 쌓고 명나라의 우군화를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그는 명나라 육부상서에 들어갈 때 한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다시 황제

   앞으로 나가서는 다섯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북경에 간 이유는

   자신은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다.

- 수양은 자신의 야욕을 감추기 위해 단종의 국혼을 강력히 권유한다.

   이는 철저한 이중 플레이였다. 세조 실록에는 자신이 거사를 일으킨 이유로 양평대군의 

   모반을 미리 없애기 위해서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권력에 야욕이 없던 양평대군을

   음해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 단종 11010일 한명회, 권람, 홍달손, 양정, 유수, 유하 등이 수양의 집에서 거사를

   결정하고 시행에 옮긴다. 거사의 첫 번째 목표로 김종서와 양녕대군을 처치를 내세운다.

   그렇지 않고 거사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의 계획이 맞아 들어가자

   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단종을 위협해 김종서와 양평대군 등을 역모로 모는 교서를

   작성하게 한다.

- 수양은 자신의 거사에 반대를 했거나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친자이면서

   16세 이상인 자는 '교형'에 처하고, 그 이하의 친자는 양육한 뒤 거제, 제주, 남해, 진도

   의 관노로 편입시켰으며, 자신의 거사에 동참하였던 자에게는 귀천 여부를 따지지 않고

   종이나 시녀들에게 까지도 죽은 대신들의 저택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고 한다.

[계유정난 이후 처리 과정]

- 갑작스런 거사에 성공한 수양은 김종서와 쌍두마차를 이루며 북방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이징옥을 불러 들여 처치하려 하는 데, 한때 김종서와 원수지간이었던 '박호문'이라는

   자를 이용하려 하지만 갑작스런 지휘권 이양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징옥이 박호문을

   통해 거사가 일어났음을 알고 반발하며 대항하려 하지만 이징옥을 따라다니던 종성 판관

   '정종''이행검'에게 오히려 살해 당하고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이징옥의 거사는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군사권마저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 세조(수양)는 왕위 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 2,300여명에게 정치적 특권을 주었는데

   어떠한 죄를 지어도 처벌하지 않는 불처벌 특권이었다.

   이는 추후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일부 특혜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 세조 3(1457) 1021일 단종은 결국 천명을 보존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나이 열 일곱, 재위 기간 32개월이었다. 선조 때 씌여진 '대동운옥'에서 '수상 정인지

   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단종)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이덕형이 '죽창한화'에서는 단종의 죽음에 대해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 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

[정말 특이한 인물 열전]

- '정인지'는 병든 아내를 두고 북방에 나가 있는 김종서대신 그의 아내를 돌볼 것을 세종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정인지에게 명을 내리나 그는 세종의 명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수양의 편에 선 관계로 공신으로 추대받는 그런 인물이다.

   그가 만들었다고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실제로는 김종서가

   편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진실은 '고려사' 전문이 아니라 같은 날

   '문종실록'을 보면 좀 더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 박호문이라는 작자는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회령절제사'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하자마자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새 청사 짓는 것을 반대한

   김종서와 척을 지게 되면서 무고한 내용의 죄를 김종서에게 씌우려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 명나라 환관 '윤 봉'은 명나라 요구에 따라 조선에서 바쳐진 명 황실에 헌납되어 고위

   환관이 된 인물인데, 명 황실을 등에 업고 조선에 있는 자신의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달라고 위세를 부린 인물이다.

 

   작품으로 얻는 지식들

 - 전남 해남군에 있는 '방춘서원'은 숙종 때 창건되었는데 김종서, 황보인, 정문 등

   계유정난 당시 희생된 세 정승을 모시는 사당으로 '삼상사'라 불리웠는데,

   1919방춘서원으로 개칭되었다.

  

-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내용이 어떠할지라도 죄를 주지 않았다.

   만약 죄를 줄 경우 숨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식읍'이란 그 고을의 민호나 조세를 받아 쓰게 하던 것이고,

   '석실봉'이란 해당 민호와 조세와 부역 전부를 주는 것을 말한다.

- 보통 기제사(忌際祀)4년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신주를 무덤에 묻는다.

   그러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인 경우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계속 모시는 데 이를

   '불천위'라고 한다.

- 단종의 시신은 영월부 호장 '엄홍도'라는 인물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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