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500년 고려 역사를 만나다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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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작품을 읽은 후 3주가 지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마주한 고려사 일부 내용이 내가 학창시절 배운 내용과 일부 달랐기에

또 그동안 우리 민족이 외세에 대항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알고 있었던 일부 내용이

자랑이 아닌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일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나는 쉽게 독후감

작성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최근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역사 과목 국정화문제가 내가 작품으로부터 알게 된 일부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나를

더욱 독후감 작성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그런 논쟁을 갖고 국정화가 좋다, 아니다하고 다툼을 일삼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어느

신문의 논설위원이 이야기하였듯이 망가진 배를 앞에 두고 자기가 운항을 책임지면

잘 할 수 있다고 떠드는 모습처럼 내게 비춰져 씁쓸함만 더해졌기에 이 역시 나를 쉽게

독후감 작성에 돌입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을 통해 내가 실망한 부분은 일전에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언급했었던 '대몽 항쟁'

시기에 나라의 지도자들었던 무신들이 보여준 치졸한 처사에 대한 사항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솔선수범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도 같은 행동을 왜 보여주지 못하였느냐 것이다.

당시 권력을 잡았던 무신들이라고는 하지만 배운 집안의 후손들이었을 것이고, 문신

수준은 아니더라도 관료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사서삼경도 읽고, 충효를 논했을

것이고, 공자왈 맹자왈을 떠들며 갖은 허세, 없는 허세를 다 부려가며 백성 위에 군림

하면서 난리를 쳤을 터인데 어째서 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힘들어 할 때 그들은 자신들

의 안위 그리고 영달만을 추구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다

- 있는 동네에 임대주택이 못 들어오게 하고, 임대주택 아이들이 자신의 아파트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장애인 시설이 자신의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의석수만을 늘리려는 우리의 선량들의 모습은 무신들이 행했던

그런 치졸한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 반문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

고려는 잘 아는 바와같이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918)되어 33대 공양왕(1392)

이르기까지 47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였으며, 1170년에서 1272년까지

무신에 의해 통치되던 국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칭키스칸의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국가였다는 것을 작품과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런 유구한 역사 속에 감춰진 우리 고려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역사

과목의 국정화 추진은 문제가 있는 주장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아직 완성도 되지 않는 분야를 무조건 자율이라는 이름하에 민중사학자들이 주체가

되어 외치고 있는 주장에 근거해 교육을 시켜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남한의 민족주의사학과 북한 역사학이 접목돼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일종인 민중사학, 그 이념을 추종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건국

부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획일화된 이념을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에 버금가는 민중사학적 관점에서 그 어떤 역사가 또다시 변질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개인적인 생각은 십 수 년이 흐른 어느날 우리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덤벼든 무지랭이 민초가 우연히 알게 된 우리의 숨겨진 역사를 보면서 오늘 나와 같은

혼란을 겪게될 경우 우리의 찬란한 역사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을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만큼만은 네 편, 우리 편으로 갈라서지 말고 역사와 후손

앞에 당당할 수 있게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거기서 나온 중론을 모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학자적 양식이 있는 분들을 엄선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측면에서

다루어진 내용으로 교과서가 집필되어 후세 교육에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자께서 나름의 연구 끝에 반드시 짚어 봐야할 역사의 주요 변곡점이라 여겨지는

29꼭지에 대해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시다고 생각되었는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경우는 비록 주마간산식 고려사에 대한 탐구였지만 작품을 통해 또 새롭게 알게

사실은 광종(4)’대에서부터 현종(8)’에 걸쳐 이루어진 개방정책으로 귀화인이

급증하면서 단일민족으로 부르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많은 외부인들이 고려로 귀화해

국력이 전성기였다는 사실은 로마가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으며 능력 있는 속국인들을

로마에 중용해 강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에 비견될 수 있다는 사항은 외국인 노동자 100만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새겨 볼 만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국(거란 및 송나라)과 벌였던 여러 외교전략과 협상술은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우리의 외교관들이 배워야 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던 작품이다.

아무튼 본 작품을 통해 고려 관련 작품이 나오면 주제별로 찬찬히 정리해 볼 필요성을

크게 느낀 그런 시간이었으며 작품 말미에 언급되고 있는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개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기에 이 작품에서는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김윤회, 역사의 아침)라는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과 사랑 그리고 행동을 연구해 여기에 정리할 예정이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

 

- 고려의 국호는 고려(901), 마진(904), 태봉(911)으로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려 했던 궁예의 뜻으로 지어졌으며,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으로 마하크다’, ‘진단동방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마진(摩震)’대동방국을 의미하는 뜻이며,

   태봉(泰封)()’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고, ‘()’은 봉토 즉, 영토를 의미한다.

   따라서 태봉(泰封)’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왕건은 후백제의 근거지인 나주전투에서 승리해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일약

   2인자로 올라서게 되는데,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 물류의

   거점이자,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나주전투의 승리는 궁예가

   견휜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게 된다.

   이의 뒷배경에는 왕건의 제1비인 신혜왕후와 제2비인 장화왕후의 집안이 당시

   유력한 해상세력이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927년 왕건의 팔공산 전투는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지만

   오히려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전투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자신의 심복 신숭겸김락은 물론 5천여 명의 군사를 잃지만

   견휜이 왕건과 연대하려는 경주를 침공해 신라 국왕을 살해하는 등 정통 왕조 신라에

   잔악한 행동을 하자 군소 실세들이 견휜에게 등을 돌리고 존왕주의를 내세워

   끝까지 신라를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내게 되는 계기된다.

 

- 왕건은 개태사(충남 연산)를 지어 견휜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했다.

 

- '고려판 왕자의 난

  태조 왕건 제1비인 신혜왕후에게 후사 없자, 2비인 오씨로부터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하나 다른 호족에 비해 세력이 약해 이를 주저하게 되어 박술희, 왕규 등과

  같은 후견인을 내세워 후사(혜종)를 잇게 하는데 이로 인해 태조의 바람과는 다르게

  호족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혜종 등극 3년 만에 병석에 눕자 차남 (3,정종)’와 삼남 (4,광종)’는 왕위를

  노리고 거사를 준비한다. 왕규는 배다른 형제 요와 소에게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를

  혜종에게 알지만 혜종이 이를 무시하자 오히려 왕규는 태조의 16번째 광주원군

  내세워 왕위에 앉히려 하다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정종을 등극시키게 되고 만다

 

- 광종은 중국계 귀화인 중 능력 있는 인물을 받아 들여 사회 각 방면에 활용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과거제도를 도입한 쌍기이며 고려사에 기록된 귀화인 중 두드러진

  인물만 40명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고려는 관료 엘리트뿐 아니라 외국인 기술자도 정책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10명 중 한 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활용해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한다.

  11세기 중엽 문종(1046~1083)은 송나라 진사 출신인 장정이라는 인물이 귀화하자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타산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해 고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다.

 

- 고려 현종 때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했을 경우 약 8.5%의 인구가 이민족으로 구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있는

  단일민족론을 재검토 해 할 근거가 되고 있다.

 

- 본관과 성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이다.

  , 고려 초기 지배 계층은 왕조 건국에 협조한 대가로 중앙정부로부터 성씨와 본관을

  받은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성씨와 본관의 소유는 곧 중앙과 지방에서 지배 계층임을

  과시하는 증표이기도 했으며 이후 점차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며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

 

1) 안동 권()씨의 유래

  권씨는 김행(金幸)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김씨는 신라의 대성(大姓)이었다. 김행이

  복주(안동)를 지키고 있던 중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이르니,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있음을 알고 고을을 바치고 항복하자 태조가 기뻐하며 씨 성을 내렸다.

 

2) 이천 서()씨의 유래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경기 이천 부근 남한강에 이르렀을 때 이곳 출신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주었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서()씨 또한 여기서 유래한것

 

3) 경주(慶州)의 유래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수도 계림경사스런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 토성분정 정책(본관제)은 단순히 지방세력에게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제도를 뛰어

  넘는 정책으로 초기에 토성을 부여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층이라 했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란 뜻으로 958(광종 9) 과거제는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1055(문종 9)에는 씨족록에 올라 있지 않은 본관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 고려 500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고 있는데

  근친혼은 당시 왕실 및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 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조치

  였는데, 4대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며 8대 현종에 이르러서야 왕실 외부

  가문으로부터 이성(異姓) 후비가 들어오지만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화되어 가자

  유력 가문의 딸을 맞아들여 외척 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 태조 왕건이 직접 작성한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 존속 기간 내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는데,

  8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역적 문제점(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과 땅)

  다룬 이야기는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 홍성

  지역의 인물들을 등용할 때 금지할 것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지 이를 현대에까지

  적용하여 지역적 차별을 유도하는 것은 문제 있는 행동이다.

 

-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로

  태조 왕건이 불교와 음양 사상을 강조한 것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 주려는 것일

  뿐 이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행사가 팔관회로 이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는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로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자국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이 거란의 침입 목적

  임을 알아차린 서희는 두 나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돌려 줄 것을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 고려 문종은 영토를 잠식하려는 거란의 위협을 제어하고 송나라의 책봉을 받아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여 문벌귀족을 억누르려 했다. 송나라 또한 고려와 연합해

  당면한 거란의 영토 침해 행위를 견제하여 했다.

  일제 식민학자들을 비롯한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사대주의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이들 국가와의 책봉 -조공 관계는 실상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는 자국의 안전과 실리를 추구하는 냉엄한 국제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때 형제맹약은 실리외교의 또 다른 모습이다.

 

- 예종은 부왕인 숙종을 기리기 위해 천수사의 건립을 산하들이 반대하지만 윤관을

  앞세워 이를 관철시키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지만 윤관의 죽음으로 사면초가에

  빠진다.

  예종은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인천) 이씨인 이자겸의 딸을 비로 맞아들여 이들과

  손을 잡고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

  따라서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왕권은 보장 받지만 왕실과 왕권 강화를 괴한 부왕

  숙종의 부국강병은 포기해야 했다. 이에 따라 숙종 정책에 반대한 문벌 귀족 세력이

  득세하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모양세가 된다.

  이자겸은 예종 사후에 아들이자 외손주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출가시키며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이자겸의 부상에 부담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동원해 이자겸을 제거하지만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와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묘청의 난으로 연결된다.

- 1142(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에 완성하며 1170(의종 24) 일어난 무신정변(경계의 난)은 의종 주위의

  권력 집단인 내시, 환관과 술사, 친위 군사 간의 내부 세력 다툼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는 약 6,735명인데 그 가운데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

  는 전체의 33%2,229명으로 고려 전 기간을 감안하면 약 20%가 적정선임에도

  불구하고 합격자가 과다하다. 이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평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통한 등용보다는 천거제를 두어

  실력보다는 무신 정권에 충성하려는 자를 더욱 중용하였다.

 

- 몽고(원나라)는 총 7차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특히 1254(고종 41) 몽골과의 30

  전쟁에서 최대의 피해를 보았다. 이때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207천 명

  으로 당시 고려 인구를 500만으로 보았을 때 전 인구의 약 10%가 포로로 끌려갔다.

  1270(원종 11)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삼별초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반기를 든다.

 

- 삼별초 항쟁의 초기 모습은 몽골에 대한 저항을 명분으로 민심을 결집하고, 몽골과

  결탁해 삼별초군을 해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국왕과 지배층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었다.

  삼별초 항쟁은 몽골의 압력이 점차 강화되고 무신들의 권력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그에 대응하여 일어난 반 왕조적 정치운동이었다. 대표적인 증거가 진도를 근거지로

  궁궐과 성을 수축하고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여 독자적인 진도 정부를 세운 것이

  구체적인 증거이다.

 

- 원의 간섭기 동안 두드러진 활동을 한 인물로 55(평민15, 천민10, 상인2, 승려3,

  외국인7)을 들고 있다. ,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의 간섭은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던 것이다.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으로

  이들은 향, 부곡, , , 처라는 특수행정구역에 거주하는 하층 주민들이었다.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이 부곡인들이었으며

  대표적 사건이 망이, 망소의 난이다.

  고려 후기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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