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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퍼니 발렌타인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 1. 연애, 소설의 기원 ]
“연애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은 현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애정’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연애(戀愛)’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그러하다.
인간은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단어들에 현혹되곤 하는데, 이를테면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도무지 정체를 확인할 수도 없으며, 공통된 경험을 추출할 수 없고, 그 구체적인 면모를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이러한 단어들에 대한 인간의 동경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연애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프랑스에서 확립되었다는 연애란 놈은 특권계급의 소유물로, 일반 서민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연애소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작가 서문에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타당하다. 사실, ‘연애’라는 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연애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서구의 연애소설이 기사와 공주/귀부인의 ‘플라토닉한 불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이는 동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운영전>의 주인공들이 그러하고, <구운몽>의 성진과 여덟 명의 선녀들이 그러하며, <춘향전>의 몽룡과 춘향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연애보다는 하루하루의 노동과, 한 끼 한 끼의 식량이 훨씬 주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압도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연애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그 단어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연애소설의 두 가지 전형이 되었는데, 하나는 서구에서 유행했던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유행했던 서로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연애소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랜슬롯과 기니비어 왕비의 불륜이 그러했던 것처럼, ‘플라토닉’과 ‘불륜’이란 결합될 수 없는 것이며, 결합된다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비겁하고 타락한 사랑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연애를 꿈꾸었다면 이는 감정의 작용이 아니라 권태를 이기기 위한 장난, 혹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치렁치렁한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이다.
또한, 이몽룡과 성춘향의 결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분을 뛰어넘는 연애, 나아가 신분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애는 불가능하다. 만일, 춘향이가 몽룡의 첩실이 되었다면 다소 현실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소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애소설의 독자들은 어정쩡한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독자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물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인물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연애소설의 주된 독자가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되는데, 특히 조선 후기 연애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던 집단이 바로 궁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은 독자이면서 창작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연애소설은 “로망스에 나타나는 여성을 보살피는 남성주인공의 등장은 여성 자신이 외디푸스 시기 이전의 어린시절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보살핌과 관심의 원천이 되는 환상”이라는 래드웨이의 견해나, “연애소설이란 소녀가 체험하는 외디푸스의 드라마”라는 카워드의 견해도 이러한 연애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Janice A. Radway, “Reading the Romance - Woma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an Press, 1984.; 존 스토리, 박모 역,『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5, p.187. : 이 견해들의 내용 및 출처는 김지영,「정비석 초기 연애소설 연구」, 부산대 국문과 석사학위논문, 2000, p.15.에서 참고한 것임).
[ 2. 연애, 소설의 상품화 ]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근대 이전의 연애소설은 그것이 가진 환상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거짓말, 속임수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마술, 그렇다면 이러한 거짓말과 마술은 더 이상 거짓말도 마술도 아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가 된다.
놀이는 현실이 아니다. 놀이를 주도하는 사람도,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놀이인 ‘연애소설’이 아무리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걸을 알고 있으니, 연애소설을 읽는 사람도 연애를 꿈꾸지 않고, 꿈꾸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연애소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변한다. 연애를 할 수 없었던 혹은 하지 못했던 계층인 부르주아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면서, 그리고 그러한 변모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연애의 가능성을 느낀다. 이제 그들에게 연애는 더 이상 환상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을 넘어버려도 이전처럼 무자비한 보복을 당할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플라토닉한 불륜’이라는 애매모호한 관계에 안주하기보다는, ‘플라토닉’ 혹은 ‘불륜’을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좁은 문」이 플라토닉으로 기울어진 예라면, 「보바리 부인」은 불륜으로 기울어진 예라고 하겠다. (상대적으로 근대 체험이 늦어졌던 아시아, 특히 우리의 소설에서는 플라토닉의 형태가 개화 혹은 계몽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광수의 『무정』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태생적인 계급에 의해 신분의 동반상승이 불가능했던 제약이 느슨해지면서, 혹은 신분이 자본의 유무로 치환되면서, 신분의 동반상승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표적인 나라 미국의 소설에서 자주 표현되는데, 「키다리 아저씨」 류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이전의 춘향이는 현실 불가능했지만, 근대에는 춘향이를 현실에서 발견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연애’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도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이야기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설마,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시사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가계도를 찾아보기 바란다. 자본가들은 결혼과 연애를 통해 자신들의 자본을 수호한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날 가능성보다야 주디가 키다리아저씨를 만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근대 이전의 꿈이 무해(無害)한 것인데 비해, 근대의 꿈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중독성을 가진 꿈이다.
이 꿈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빼앗아 기존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정당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육체나 순결을 상품화하여 출세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경영에는 관심도 없고, 유아기적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실장님’들이 등장하는 모든 드라마는 이런 점에서 해악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근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없다면, 드라마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술과 담배와 같다.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견딜 수 없는 중독성에 우리는 굴복하고 만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근대의 ‘연애소설’은 본질적으로 상품성을 가진다.
섹스의 문제, 더 나아가 보다 큰 자극으로의 변태적인 성 의식과 행위의 문제는 이러한 상품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더욱이 “무라카미 류 최초의 연애소설”이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마이 퍼니 발렌타인」은 이러한 근대적 연애소설의 특징에 충실한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으므로, 일반 남녀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두려워하고, 낯설어한다.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토커가 되기도 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자유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순 된 감정을 가진다. 사실은 너무 가까이 하고 싶은데, 괴롭고 불안해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진다. 그런 독특한 감정을,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 이 작품집의 일본어판 제목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줘>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 특히 변태적인 성행위에 동조하는 여인들이 많이 나오는 사실이 이러한 작가의 견해를 증명한다. 사실, 누가 등장하는지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춘향이는 기생의 딸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지만, 그 외의 고전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엄연한 기생인 경우가 많다. 물론, 기생이 그대로 몸을 파는 여자인 것은 아니지만, 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니 류의 이 작품은 동양적 연애소설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점에서 류의 작품들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태 플레이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여타의 로멘스 소설에 비해 덜 역겹다. 연애소설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곱게 간직한 제 순결을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따위의 상품화 논리로 덕지덕지 장식된 작품들이다. 또한 순결을 가지고 놀다버리는 나쁜 남자와 이에 당하기만 하는 청순가련한 여자만큼 역겹고 무기력한 인물도 또 없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포르노만큼이나 위험하다. 포르노가 위험한 것은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다루기 때문인데, 순결 이데올로기도 변형되기는 했지만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이는 중세 유럽의 ‘플라토닉한 불륜’과 다를 바 없다. 인간에 대한 공통된 사랑이 아닌, 특정 인물과의 연애로 구체화된 플라토닉이란 변태적인 사랑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 3. 연애, 소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비록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인간에게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단 한 사람이 내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혹은 내가 단 한 사람에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견딜만한 곳이다.
이 글의 시작에서 제시했던 허황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가 인간에게 구체적인 이득을 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더라도, 이러한 단어로 인해 인간의 도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시지프스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리고 사랑, 혹은 연애도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또 다른 산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시도했다는 그 자체, 혹은 열심히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기 때문에 아름답다. 선남선녀의 순탄하기 짝이 없는 연애보다는,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연애가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 집안의 반대,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연인…… 그 모든 위험요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빛나게 만난다.
류의 작품에서도 이런 위험요소가 끊임없이 제시된다. 그의 작품에서 정상적인 만남이나 상식적인 연애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려 하지 않고, 만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고, 과거를 통해 추악한 현재를 발견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과거와 현재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작품의 분위기는 강렬해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류가 제시하는 낙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연애라고 할 것도 없는 그의 작품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다. 첫 번째 작품 「그리고 우연한 만남」이나, 작가의 경험으로 파악되는 「지옥에 떨어진 용사들」과 「와일드 엔젤」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사실, 무라카미 류가 보여주는 연애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SM과 폭력적인 성행위는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연애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삶의 면모들이 그런 것처럼, 사랑도 역시 절망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