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임기환 기획,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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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역사는 진실이고, 소설은 거짓이다”라는 말은 착각이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고도 분명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르만 신화 조작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역사가 잘못 알려질 경우, 현실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일본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진실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1984』의 빅브라더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그래서 그들은 빅브라더를 위대한 구원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잘못된 현실을 만들거나, 현실의 잘못을 유지시키는데 (자신들도 모른 채) 협조하게 된다.

  잘못 알려진 경우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알려지지 않는, 더구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역사도 역시 문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혹 우리의 광복이 오로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서만 얻어진 타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감추어진 역사 역시 현실을 잘못된 방향으로, 혹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발굴하고, 가르치고 거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 발굴 및 해석 수준은 아직 부족하기만 하고, 역사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도 충분하지 못하고,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은 수준을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온달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온달을 옛 이야기 속의 주인공, 그것도 ‘바보’로 한정시켜 받아들였고, 교육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바보에게 시집을 갔던 평강공주는 정말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나? 결혼한 후 짧은 시간 동안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온달이 과연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까? 온달은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투에 자진해서 나갔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연구(역사학과 국문학 모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이런 문제에 천착한 이 책의 기획의도 역시 탁월하다.


  「나는 먼저 온달 이야기를 분석한 모든 연구논저를 연구자의 시각과 분야에 따라 재분류했다. 그러자 역사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 경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 반면, 국문학자들은 온달이 설화 속 인물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다보니 어느 한족의 연구 성과에만 의존하다 보면 균형 잡힌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p.74.


  그러나 이 책 역시 온달 이야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더구나 이처럼 탁월한 문제의식을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것도 역시 문제이다. 타당하고 또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이렇게 반복해서 듣게 된다면 누군들 지겹지 않겠는가?


  사실, 이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연구를 통해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학적 논리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가진 상상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고, 또한 역사적인 오래를 일으킬 여지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도 설화나 허구에 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예술이 가진 영향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야, 연구인력 및 연구결과에 대한 수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고, 그래야 보다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옛 이야기에 대한 예술적인 상상력을 통한 접근이야 말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하겠다.


  일본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일본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역사와 설화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활발하게, 소름끼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대화 된 설화, 만화 <배가본드>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각종 게임에 도입되는 일본의 전래적 이야기 및 디자인적 요소들.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멋지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작업이 거의, 정말로 거의, 없다. 흔히 소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소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소재는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온달이 아닐까?

  물론 우리에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나리오(스토리텔링)에 있다. 이에 가장 적합한 말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그것을 잘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야기 즉 서사예술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계를 가진다. 이 책은 역사학과 국문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온달’의 역사성에 집착한 나머지, ‘온달과 평강공주’가 가지는 이야기성(敍事)을 간과하고 말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온달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는 인물이기 ㏏?甄?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적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온달이야기’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 2 ]


"아아, 온달이여, 살아서는 어리석지 않았고 죽어서는 신이런가.(嗚呼溫達 生亦不遇死猶神)"

- 이학규의 시 「우온달(愚溫達)」 중에서


   물론 이 책에서도 온달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나열과 소개에 그쳤을 뿐, 이를 재창조하는 작업, 혹은 재창조 작업에 대한 분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강조했다면, 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문학작품에서 온달이야기를 재해석 한 것으로는, 최인훈의 희곡「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김지원의 소설 「편강공주와 바보 언달」등이 있다. 이에 대한 분석,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면 더욱 다채로운 해석 가능성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희곡의 경우에는 그것을 공연했던 배우들이나 관람객들과의 인터뷰도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기획의도를 가진 저술이 보다 많이 발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도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면, 보다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문화산업의 가치를 강조하는 예로 영화 <타이타닉>이 거둔 수익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예는 <타이타닉>이 얼마를 벌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지, 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좋은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뿐만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책도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좋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 ]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맑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늘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하였다. 찢어진 옷과 헤진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삼국사기』권45 열전5 온달편


  사족이다. 온달이야기의 원문을 처음 공부했을 때부터, 나는 이 점이 참으로 궁금했다(그런데 왜 선생님들께 질문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될 뿐이다).


  원문에는 ‘愚溫達’이라고 되어 있다. 어리석을 (우)에 온달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를 ‘바보 온달’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석되는 것일까?

  어르신들의 호를 살펴보면 종종 ‘愚’자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愚巖’과 같은. 그런데 이 경우에 ‘愚’는 ‘바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다’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는” 혹은 “부귀권세를 탐내지 않는”이라는 의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愚溫達’ 역시 ‘바보 온달’이 아니라, ‘어리석은 온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숨은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주가 그에게 끌린 이유도, 온달이 어여쁜 공주를 거절하는 이유도, 공주와 결혼하면서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성장하여 용맹을 떨치는 원인도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한 문장만 가지고 짐작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를 해석한 연구자들은『삼국사기』전체 혹은 당대의 한문학 전체를 가지고 이 문장을 해석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하게 된다.


  내 해석과는 약간 다른 측면이지만, 愚溫達’이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 분도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님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관련 게시물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blog.naver.com/art2173/12001189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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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퍼니 발렌타인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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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 소설의 기원 ]



  “연애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은 현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애정’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연애(戀愛)’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그러하다.

  인간은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단어들에 현혹되곤 하는데, 이를테면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도무지 정체를 확인할 수도 없으며, 공통된 경험을 추출할 수 없고, 그 구체적인 면모를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이러한 단어들에 대한 인간의 동경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연애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프랑스에서 확립되었다는 연애란 놈은 특권계급의 소유물로, 일반 서민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연애소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작가 서문에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타당하다. 사실, ‘연애’라는 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연애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서구의 연애소설이 기사와 공주/귀부인의 ‘플라토닉한 불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이는 동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운영전>의 주인공들이 그러하고, <구운몽>의 성진과 여덟 명의 선녀들이 그러하며, <춘향전>의 몽룡과 춘향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연애보다는 하루하루의 노동과, 한 끼 한 끼의 식량이 훨씬 주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압도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연애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그 단어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연애소설의 두 가지 전형이 되었는데, 하나는 서구에서 유행했던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유행했던 서로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연애소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랜슬롯과 기니비어 왕비의 불륜이 그러했던 것처럼, ‘플라토닉’과 ‘불륜’이란 결합될 수 없는 것이며, 결합된다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비겁하고 타락한 사랑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연애를 꿈꾸었다면 이는 감정의 작용이 아니라 권태를 이기기 위한 장난, 혹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치렁치렁한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이다.

  또한, 이몽룡과 성춘향의 결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분을 뛰어넘는 연애, 나아가 신분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애는 불가능하다. 만일, 춘향이가 몽룡의 첩실이 되었다면 다소 현실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소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애소설의 독자들은 어정쩡한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독자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물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인물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연애소설의 주된 독자가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되는데, 특히 조선 후기 연애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던 집단이 바로 궁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은 독자이면서 창작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연애소설은 “로망스에 나타나는 여성을 보살피는 남성주인공의 등장은 여성 자신이 외디푸스 시기 이전의 어린시절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보살핌과 관심의 원천이 되는 환상”이라는 래드웨이의 견해나, “연애소설이란 소녀가 체험하는 외디푸스의 드라마”라는 카워드의 견해도 이러한 연애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Janice A. Radway, “Reading the Romance - Woma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an Press, 1984.; 존 스토리, 박모 역,『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5, p.187. : 이 견해들의 내용 및 출처는 김지영,「정비석 초기 연애소설 연구」, 부산대 국문과 석사학위논문, 2000, p.15.에서 참고한 것임).



[ 2. 연애, 소설의 상품화 ]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근대 이전의 연애소설은 그것이 가진 환상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거짓말, 속임수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마술, 그렇다면 이러한 거짓말과 마술은 더 이상 거짓말도 마술도 아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가 된다.

  놀이는 현실이 아니다. 놀이를 주도하는 사람도,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놀이인 ‘연애소설’이 아무리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걸을 알고 있으니, 연애소설을 읽는 사람도 연애를 꿈꾸지 않고, 꿈꾸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연애소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변한다. 연애를 할 수 없었던 혹은 하지 못했던 계층인 부르주아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면서, 그리고 그러한 변모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연애의 가능성을 느낀다. 이제 그들에게 연애는 더 이상 환상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을 넘어버려도 이전처럼 무자비한 보복을 당할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플라토닉한 불륜’이라는 애매모호한 관계에 안주하기보다는, ‘플라토닉’ 혹은 ‘불륜’을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좁은 문」이 플라토닉으로 기울어진 예라면, 「보바리 부인」은 불륜으로 기울어진 예라고 하겠다. (상대적으로 근대 체험이 늦어졌던 아시아, 특히 우리의 소설에서는 플라토닉의 형태가 개화 혹은 계몽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광수의 『무정』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태생적인 계급에 의해 신분의 동반상승이 불가능했던 제약이 느슨해지면서, 혹은 신분이 자본의 유무로 치환되면서, 신분의 동반상승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표적인 나라 미국의 소설에서 자주 표현되는데, 「키다리 아저씨」 류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이전의 춘향이는 현실 불가능했지만, 근대에는 춘향이를 현실에서 발견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연애’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도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이야기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설마,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시사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가계도를 찾아보기 바란다. 자본가들은 결혼과 연애를 통해 자신들의 자본을 수호한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날 가능성보다야 주디가 키다리아저씨를 만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근대 이전의 꿈이 무해(無害)한 것인데 비해, 근대의 꿈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중독성을 가진 꿈이다.

  이 꿈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빼앗아 기존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정당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육체나 순결을 상품화하여 출세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경영에는 관심도 없고, 유아기적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실장님’들이 등장하는 모든 드라마는 이런 점에서 해악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근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없다면, 드라마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술과 담배와 같다.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견딜 수 없는 중독성에 우리는 굴복하고 만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근대의 ‘연애소설’은 본질적으로 상품성을 가진다.

  섹스의 문제, 더 나아가 보다 큰 자극으로의 변태적인 성 의식과 행위의 문제는 이러한 상품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더욱이 “무라카미 류 최초의 연애소설”이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마이 퍼니 발렌타인」은 이러한 근대적 연애소설의 특징에 충실한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으므로, 일반 남녀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두려워하고, 낯설어한다.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토커가 되기도 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자유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순 된 감정을 가진다. 사실은 너무 가까이 하고 싶은데, 괴롭고 불안해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진다. 그런 독특한 감정을,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 이 작품집의 일본어판 제목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줘>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 특히 변태적인 성행위에 동조하는 여인들이 많이 나오는 사실이 이러한 작가의 견해를 증명한다. 사실, 누가 등장하는지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춘향이는 기생의 딸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지만, 그 외의 고전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엄연한 기생인 경우가 많다. 물론, 기생이 그대로 몸을 파는 여자인 것은 아니지만, 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니 류의 이 작품은 동양적 연애소설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점에서 류의 작품들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태 플레이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여타의 로멘스 소설에 비해 덜 역겹다. 연애소설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곱게 간직한 제 순결을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따위의 상품화 논리로 덕지덕지 장식된 작품들이다. 또한 순결을 가지고 놀다버리는 나쁜 남자와 이에 당하기만 하는 청순가련한 여자만큼 역겹고 무기력한 인물도 또 없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포르노만큼이나 위험하다. 포르노가 위험한 것은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다루기 때문인데, 순결 이데올로기도 변형되기는 했지만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이는 중세 유럽의 ‘플라토닉한 불륜’과 다를 바 없다. 인간에 대한 공통된 사랑이 아닌, 특정 인물과의 연애로 구체화된 플라토닉이란 변태적인 사랑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 3. 연애, 소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비록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인간에게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단 한 사람이 내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혹은 내가 단 한 사람에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견딜만한 곳이다.

  이 글의 시작에서 제시했던 허황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가 인간에게 구체적인 이득을 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더라도, 이러한 단어로 인해 인간의 도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시지프스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리고 사랑, 혹은 연애도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또 다른 산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시도했다는 그 자체, 혹은 열심히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기 때문에 아름답다. 선남선녀의 순탄하기 짝이 없는 연애보다는,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연애가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 집안의 반대,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연인…… 그 모든 위험요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빛나게 만난다.

  류의 작품에서도 이런 위험요소가 끊임없이 제시된다. 그의 작품에서 정상적인 만남이나 상식적인 연애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려 하지 않고, 만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고, 과거를 통해 추악한 현재를 발견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과거와 현재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작품의 분위기는 강렬해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류가 제시하는 낙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연애라고 할 것도 없는 그의 작품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다. 첫 번째 작품 「그리고 우연한 만남」이나, 작가의 경험으로 파악되는 「지옥에 떨어진 용사들」과 「와일드 엔젤」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사실, 무라카미 류가 보여주는 연애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SM과 폭력적인 성행위는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연애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삶의 면모들이 그런 것처럼, 사랑도 역시 절망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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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5-12-2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쓰신 글이군요. '연애'의 신화화, 공감하는 바입니다. 책은 못 읽었지만서도.

tommasi 2009-12-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낙차는 현재의 추악함을 드러낸다'고 읽으셨군요.
<와일드엔젤><지옥에떨어진용사들>의 경우, 그런식으로하면, '순수했던시절'에 대한
노스탈지아 예찬으로 떨어질 수도... 두 작품의 결론이 공히, '썩 나쁘지않은성장'으로 읽히더군요.
개인적 의견일 뿐입니다.
 
코인로커 베이비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 1. 무라카미 류 ]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더라도, 커다란 덩치에 카리스마를 내뿜는 인물이더라도, 그들의 정신은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결핍되었다고 느끼며, 그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될지라도, 결핍으로 인한 증상은 언제나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대부분 SM적 폭력과 극단적인 형태의 섹스를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엄살인 경우가 많다. 사실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고찰이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한계 상황에 직면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류의 작품에 나타나는 외로움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제시했던 노인의 고독과도, 카뮈가 「페스트」에서 제시했던 타르와 뤼가 직면했던 상황과도 다르다. 노인이 고독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외로울 뿐이고, 타르와 뤼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위기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 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헤밍웨이나 카뮈의 작품에 비해 류의 소설은 ‘한없이’ 가볍고, 또한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의 작품은 헤밍웨이나 카뮈에 비해 훨씬 쉽고 편안하다. 상황 자체, 표현 자체는 훨씬 잔혹하지만 이것은 혼자 있는 토요일 밤 킬링타임용으로 보는 공포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 선혈이 낭자하지만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지만 역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견딜 수 없는 장면이 나오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역시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은 가짜 공포, 자본주의적 공포, 혹은 공포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역시 같은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으로의 폭력, 그리고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섹스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군대라는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도 하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다 너희들 잘 되라고 때리는 거다. 나 혼자 즐기려고 이러는 거 아냐, 너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너무도 닳고 닳은 변명들이다.

  사실, 이런 변명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이들의 마음에 진정성이 남아있을 때 이들은 행동은 다소 간의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 진정성이 변질되어 버리면 이런 식의 행동은 그 어떤 폭력보다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파괴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재자이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히들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가정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폭력을 휘두른 남편은 쓰러진 아내를 껴안고 오열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들의 사랑은 위험하다. 변명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변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변명으로 치장된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진정,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위험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탁월하다. 가학과 피학, 폭력의 역학관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좋은 예시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이런 측면을 다룬 최고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탁월하게 다룬 작가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2. 코인로커 베이비스 ]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자, 잠시 열기를 가라앉히고 냉정해지자.

  다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말한다. 그의 소설은 엄살이고 변명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의 성패는 그러한 엄살과 변명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내가 파악하기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엄살은 탁월했지만, 「토파즈」의 엄살은 구태의연했다. 「69」의 변명은 명쾌했지만, 「피지의 난장이」의 변명은 구질구질했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의 엄살과 변명은 그럭저럭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 분 후의 세계」의 엄설과 변명은 구태여 인내심을 발휘해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엄살과 변명이 잘 통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과 그로 인한 행동은 충분히 동감을 얻을 만 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작품을 끌고나가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법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꼭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질문이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폭력과 섹스 밖에는 없는가? 이런 방법은「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폭력과 섹스가 외로움을 (어떤 식으로든) 견디게 하는 분명한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가?


  코인로커에 버려진 이후 난 무엇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뭔가가 필요했다. 뭔가에 굶주렸다. 역시 저 소리였을까? 저 소리뿐이었을까? 난 무엇 하나 손에 넣은 게 없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 코인로커 속에 있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채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맹도견이 내 냄새를 맡고 짖어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p.628.)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류의 대답은 섹스와 폭력뿐이다. 섹스가 주는 쾌락을 통해 분노를 잊어버리던가,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을 통해 분노를 발산하던가.「코인로커 베이비스」의 두 주인공은 그러한 방법을 대표한다. 하시는 섹스를 택하고, 기쿠는 폭력을 택한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도, 쾌락은 더 큰 허무를 만들고, 발산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남색에서 여색으로 TV쇼에서 라이브공연으로 히치의 욕망은 끊임없이 변모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그의 허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높이뛰기에서 살인으로 다시 독극물 살포로 기쿠의 행동에는 외형적인 변화는 없을지라도,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하여, 타인을 파괴하고, 끝내 아무런 연관이 없는 대중을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파괴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상처에서 비롯된 그의 행동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을 뿐이다. 



[ 3. 아이와 어른 ]



  아이는 아름답다. 숨을 쉬는 것, 욕망에 충실한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어른은 추하다. 그도 숨을 내쉬지만 구취가 묻어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척하지만 타락한 욕망에 복종하고 있으며, 행동하지 말아야 할 때에 행동하고 정작 행동해야 할 때에는 행동하지 않는다.

  맞다. 아이는 아름답고, 어른은 추하다. 그러므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지난 1990년대, 흔히 세기말이라 불렀던 시대에 한국와 일본에서 공통되게 나타났던 정서 중의 하나였다. 난해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우리나라의 세대론(신세대, X세대, N세대 따위의 소모적인 논쟁) 등이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 역시 이런 정서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면모를 간직한 어른, 그러면서도 어른의 면모를 함께 가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면모’는 무엇인가? 아직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내 고민이 찾아낸 대답은 두 가지뿐이다.

  어른은 책임을 진다. 또한 어른은 이해한다.

  아이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면 된다. 혹시 잘못을 하더라도 그는 무서워할 뿐 가슴 아파하지는 않는다. 부모한테, 선생한테 혼나면 그만이니까. 혼나고 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일이 해결될 테니까. 그러므로 아이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폭발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울고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안다. 내가 울면 다른 사람도 울고 싶다는 것을, 내가 쓰러지면 나를 의지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쓰러진다는 것을, 내가 때리면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을.


  코인로커에 버려졌다고 해서, 분노를 폭발하는 방법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더구나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폭발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코인로커 ‘베이비스’일 수밖에 없다. 어른은, 책임을 지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하, 그러나 부끄럽게도, 세상에는 ‘어른’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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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인간
나카노 하지무 지음 / 국제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사실, 이 책만 욕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판되는 이공계열이나 예술계열 책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글쓰기'가 엉망인 경우가 많다.

  맞다. 나는 지금 '기본적'이라는 말을 썼다. 글쓰기에도 기본이 있는가? 글을 쓰는 방법이나 표현하는 생각에는 기본이 있을 수 없지만, 최소한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그것이고,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의미가 전달될 수 있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것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번역자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의 책임이 크다. 교정만 정확하게 보았더라고 이 책의 문제점은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책을 만드는 성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말고는 이유를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떠드는 것보다,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책의 134~135페이지를 대상으로 문제점을 지적해 본다. 다소 길고, 피로한 작업이지만, 혹시라도 책 만드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뜨끔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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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사이를 용도에 따라 구별한 것이지만, 그 사이와 방(室)과 상호 닮아 있으면서도, 그곳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p.134.)

⇒ 1) "상호"라는 것은 불필요한 한자어휘이다. 2) 조사를 정확하게 쓰자. 3) 괄호사용을 정확하게 하자. 한글과 한자의 음이 다르면 큰 괄호를 쓴다. 이 문장을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 "... 그 사이[間]와 방[室]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에는 거실과 침실, 그리고 차마시는 곳이 구별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같은 사이(間) 중에 언제나 방석이 깔려 있으면 거실(居間)이 되고, 손님이 있으면 응접실로도 되고, 식사 때가 되면 밥상이 나오고 차 마시는 곳으로 바뀌고, 마침내 밤이 깊어지면 침구가 퍼져 침실로 된다(게다가, 그곳에는 불상도 놓여져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패를 모시는 방으로도 이용된다)라는 광경과, 또 서양화(西洋化)가 되지 않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후(戰後) 얼마동안 일본에서는 결코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p.134.)

⇒ 1) 띄어쓰기 좀 똑바로 하자 2)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3) 일본식 어휘의 사용은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라는" 것과 같은 어휘. 이 문장을 고치면 다음과 같다. :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는 거실과 침실, 그리고 차 마시는 곳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사이[間]라도, 방석이 깔려 있으면 거실이 되고, 손님이 찾아오면 응접실이 되고, 식사 때가 되면 밥상이 들어오고 차 마시는 곳으로 바뀌고, 밤이 깊어지면 침구가 펴져 침실이 된다(게다가 불상도 놓여져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패를 모시는 방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런 광경은 서양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제2차 세계대전 전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그리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 따라서, 일본가옥에 살 때에는 성숙한 인간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이와 같은 전통적 분할법에 의한 가변공간(可變空間)과 비독립성, 비고정적 공간에서 구성된 가옥이며 그곳에 사는 것에서 자연적으로 결과의 융통무예(融通無碍)한 생활형태가 우리 민족성의 형성과 더불어 커다란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자존심의 관념이 부족하고, 그것을 지켜서 싸우는 것보다도 타인과 화해하는 것이다라는 경향이 강한 것도 그러한 한 가지 예로써 생각되어진다. (p.135)

⇒ 1) 접속사 다음의 쉼표는 피해야 한다. 접속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2) 문맥을 분명하게 밝히자. 원본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혹시 원본의 글 자체가 이렇게 난삽하다고 하더라도, 번역본에서는 의미를 분명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문장을 고치면 다음과 같다. : "따라서 일본 가옥에서 생활할 때에 성숙한 인간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일본 가옥은 전통적 분할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변공간과 비독립적이고 비고정적인 공간으로 구성된 가옥이며,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융통성있고 막힘이 없는 생활형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우리 민족성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자존심이라는 관념이 부족하고, 그것을 지켜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타인과 화해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도, 그러한 공간적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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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예는 이 책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책은 책으로의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무나 갈겨놓은 낙서가 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공들여 쓴 책을 번역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번역가가 작가가 될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문학적 역량은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어이가 없어서 성급하게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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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 - 모성과 카오스, 에로스의 판타지
시미즈 마사시 지음, 이은주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작품의 탄생, 혹은 재생


 


「물론 작품을 언제나 분석적으로 검증할 필요는 없으며, 그려진 표층장면의 전개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표층적 장면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층을 볼 필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pp.50-51.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당연하다.

  작품은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작가가 없다면 작품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작품은 탄생하자마자 소멸되어 버리고, 몇몇 작품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아 사람들의 기억 속을 떠돈다. 그리고 다시 그들 중의 몇몇은 사람들의 감성을 장악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시대를 지배하기도 하는 <작품 중의 작품>이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나는 작품, 감성을 장악하고 시대를 지배하는 작품 중의 작품, 그런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런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콤비네이션이 필요하다.

  우선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필요하고, 다음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독자/관객/시청자 등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해설자로의 비평가가 필요하다. 이 콤비네이션이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작품 중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 비평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러움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을 텍스트로 해서 작품론 혹은 작가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물론 두 말할 필요 없이,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장(巨匠)이고, 그의 작품은 분석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지금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야오가 아직 거장이 아니었을 때, 그의 작품이 이제 막 발표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의 작품을 분석해준 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는 거장이 될 수 있었으며, 그래도 그의 작품은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

  이런 것들은 모두 가정에 불과하니 확언할 수야 없더라도, 그러지 못했거나, 혹은 그리되기 힘들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모든 작품은 비평을 통해서 새롭게 탄생한다. 특히 요즘처럼 엄청난 양의 ‘작품’들이 쏟아질 때에는 더욱 그렇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모태회귀(母胎回歸)>나 <신(神)과 인간에 대한 관계> 등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다만 그러한 내용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텍스트에서 추출해냈다는 것이 새로울 뿐이다.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적 적용이나, 신화원형 비평적 접근은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서는 일반론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는 분석방법이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이 토토로라는 것,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의 모습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체형 인간이라는 것, <천공의 성 라퓨타>의 라퓨타는 유토피아의 재현이자 허구라는 것,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내포되어 있는 ‘물’의 상징적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이야 말로 그러한 분석방법의 결과들이다. 


  사실 이러한 분석방법이 애니메이션에 적용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이야 말로, 당대의 문화예술 장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나 전설, 소설이나 회화, 오페라와 연극 등에서 이러한 이론이 추출되었고, 이제는 애니메이션에 적용되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흘렀고, 그만큼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 장르가 변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이런 상징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러하기에 이러한 분석방법이 가지는 한계도 이 책에서 역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즉,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동감 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센과 치히로…>에 대한 분석에서 가오니시와 하쿠를 대립적인 인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의 관계를 꼭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 다만 오직 센이라는 아이를 좋아하는 것만 공통될 뿐이 아닌가? 또한 가오니시는 제니바의 집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마감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상징적인 의미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이 어떤 단계에 따라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상징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보편적인 상징을 결합하는 능력(plot)이야 말로 거장의 능력이고, 작품 중의 작품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요인을 찾아내는 능력이야 말로 비평가의 능력이고, 작품을 되살려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이러한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부러웠던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비평서가 없는가? 일본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도 분명히 애니메이션과 만화 작품이 있지 않은가.

  우리의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라 해서 처음부터 인정받는 작품들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작품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고, 그 분석을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냈으며, 부족 부분을 끊임없이 보강해왔다.

  왜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하지 못하는가? 이제 비평가들의 시야가 순수 예술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예술장르로, 조금 더 대중적인 문화 ‘작품’으로 확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서를 끝내고 감상문을 작성하는 지금도 여전히,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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