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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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 레프 톨스토이

 

 * * *

 

 톨스토이는 그냥 작가가 아니라 언제나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특별한 칭호가 따라붙는 작가다. 그가 남긴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전쟁과 평화』는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 평가받는다. 그 작품 하나만 하더라도 너무나 스토리가 거대하고 등장 인물들이 방대한 데다가, 인간의 삶을 둘러싼 온갖 다양한 주제들을 너무나 드넓게 포괄하고 있어서 그 스케일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인데, 그는 거기에 더해 기어코 『안나 카레니나』라는 불멸의 사랑 이야기마저 창조했다. 두 작품 모두 집필하는 데만 꼬박 대여섯 해씩 걸렸는데, 『안나 카레니나』(1873∼1877년)가 『전쟁과 평화』(1964∼1869년)보다 몇 년 뒤에 쓰였다.

 

『전쟁과 평화』가 주로 '전쟁과 파괴'를 다루고, 『안나 카레니나』가 '유부녀의 잘못된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 두 작품 사이에 공통점이 아예 없을 순 없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다룬 이야기가 아무리 거창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작가의 문제 의식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와 강렬하게 맞닿아 있고, 그 점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그 문제를 두고 가장 고통스럽게 싸웠던 인물은 단연 안나 카레니나였다. 그 반면에 삶 자체를 가장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성찰한 인물은 농장을 돌보던 시골 귀족 레빈이었다.

 

 

톨스토이는 스스로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성찰한 인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톨스토이에 대해 '세계를 움직이는 제1원인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라고도 평했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귀족 출신이면서도 평생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파묻혀 지냈으며, 저술 활동뿐 아니라 농노 해방과 자선 사업은 물론 교육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작가의 모습이 작품 속에 투영된 인물이 바로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와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레빈이다. 시골 영지 포크로프스코예에 파묻혀 지내는 귀족 레빈이 여름철마다 풀베기에 열정을 쏟는 장면, 애완견과 함께 멧도요를 사냥하는 장면,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에 대한 강한 반감, 러시아의 농민들에 대한 사랑 등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인간 톨스토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어떻게 해서 안나 카레니나라는 젊은 귀부인이 겪은 부적절한 사랑,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 순간 느닷없이 빠져들고 만 치명적인 불륜과 그로부터 파생된 온갖 불가피하고 불쾌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 가령, 남편과의 이혼 문제(이 문제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드는 순간까지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양육 문제, 브론스키와의 혼인 문제와 주거 문제, 친인척과 사교계 등에서 맺은 온갖 인간관계 문제 등에 대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자신이 도저히 그런 경험을 했을 리도 없는데?

 

이 소설이 탄생한 데에는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작가는 『전쟁과 평화』를 끝낸 뒤 표트르 대제 시대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자 자료를 수집하던 어느날 우연히 《툴라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한다.

 

휼륭한 옷차림을 한 신원 불명의 여인이 모스크바ㅡ쿠르스크 선의 야센키 역에 도착하여 선로에 뛰어 들었다. 화물차 7호가 지나갈 때, 그녀는 성호를 긋고 기차 아래로 몸을 던졌고, 그녀의 몸은 두 동강이 났다.

 

그런데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안나 피고로바라는 여인은 마침 톨스토이도 알던 여자였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이웃 영주 비비코프라는 사람의 내연녀였다. 톨스토이는 심지어 기차역에서 실시된 검시에도 참관했다. 1872년 1월에 발생한 이 사건이 작가의 뇌리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1873년 3월에 우연히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에 '점화'되어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고 강력하게 구체화되어' 소설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생생하고 열정적이고 완벽한 소설입니다. 나는 이 소설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느님이 내게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2주 안에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2주가 아니라 무려 5년에 걸쳐 집필된 소설이 『안나 카레니나』로 탄생했다. 이 소설은 월간 잡지에 첫 연재가 실릴 때부터 엄청난 반향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조차 한 지인의 찬사를 인용하며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소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걸작입니다. 우리 작가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에 필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설이 당대의 수많은 논의들을 소설 속 담론으로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목적, 여성 문제, 노동자 문제, 민중 교육 문제, 유몰론적 철학에 반하는 인상 등으로 인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사실 톨스토이는 작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쇼펜하우어'의 열럴한 찬미자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유일하게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에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드물지 않게 드러나 있으며,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견해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예술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웅장한 테마 두 개가 나란히 전개될 뿐 전체 소설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오히려 나는 건축술에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둥근 천장은 아무도 연결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 무엇보다 공들인 부분입니다. 구조의 통일성은 행위와 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연속성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비평가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총 8부에 이르는 작품의 구성은 일견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에 얽힌 테마'와 '레빈의 소박한 전원 생활에 대한 테마'가 뚜렷이 구분된 채 좀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7부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고 난 이후에도 제8부가 다시 길게 이어지는 점은 충분히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할 만하다.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여길 법한데도, '안나의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죽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레빈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시골 농장에서의 일상' 이야기를 제법 길게 덧붙여 놓음으로서 도리어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제8부는 편집자와의 의견 충돌로 출간 당시에도 잡지에 연재되지 못하고 톨스토이가 자비로 따로 출간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를 대신해서 조금이나마 더 해명해 보고 싶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보여준 기법은 이미 찰스 디킨스가 『황폐한 집』에서 일찌감치 미리 선보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안나 카레니나』만큼 방대한 디킨스의 그 걸작 소설에서 작가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와 3인칭 작가 시점의 이야기를 계속 교대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여주인공인 에스더가 1인칭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두세 장쯤 진행되다가 멈추고 나면, 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비록 시간대는 엇비슷하지만 공간과 등장 인물이 바뀌면서)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식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맨 처음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고,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도무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차츰 그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조금씩 겹치면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등장 인물들도 차츰 가까운 곳에서 스치듯이 지나치며 때로는 직접 서로 맞닥뜨리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평행선을 달리듯 따로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마침내 서로 더이상 피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완전히 하나로 합류한다.(그 지점은 총 67장으로 구성된 그 방대한 소설이 막바지 클라이막스에 다가설 때쯤인 56장 말미에서야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또한 '안나의 이야기'와 '레빈의 이야기'가 전혀 상반된 공간에서 서로 전혀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두 주인공들은 차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에서 디킨스의 소설 전개 방식을 닮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브론스키는 좀 더 자주 레빈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바(오블론스키)의 권유에 이끌려 안나까지 만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 속으로 떠밀려 가고, 그때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판단과 행동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레빈, 키티, 스티바, 돌리 등이 한결같이 그런 선택 앞에서 매번 갈등한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소설 속에 아주 잠깐식 등장했다 사라지는 수많은 다른 인물들 또한 끊임없이 '다른 상황'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다른 판단을 요구받는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를 전전할 때 만난 화가 미하일로프는 아마도 그런 측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일일이 설명해 나가는데, '그림이 바뀔 때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갈 만큼의 진폭으로 확연히 달라지는 감상평 때문에 그는 자신의 표정은 물론 자신의 작품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생각까지도 (짧은 시간 동안에 자주) 근본적으로 뒤바꿔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무리 안간힘을 다하더라도 자신들이 뿌린 선택의 씨앗이 파생시키는 사태의 예기치 못한 진행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삶에 불쑥불쑥 개입하는 거대한 힘과 우연과 비이성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거역하기 힘들 만큼 불가항력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안나가 키티의 보호자를 자청하면서 함께 참여했던 무도회 장면부터 그렇다.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었고, 키티는 브론스키에 이끌려 그보다 훨씬 더 진실한 사랑을 호소하는 청순남 레빈의 청혼까지도 거절한 마당이었지만, 정작 안나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브론스키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 남자에게 매혹적인 생기로 화답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당혹해 하면서 황급히 모스크바를 떠난 안나는 자신의 평온한 가정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기차역까지 직접 마중나온 남편의 귀를 보고 느닷없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고 만다. 남편에 대해 더욱 성실하리라 다짐했던 굳은 각오는 그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영영 다시는 복구되지 않는다.

 

 

 

이처럼 불가항력으로 브론스키에게 매혹되고 마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갈파했던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종족에의 의지'를 눈 앞에서 생생히 목도하는 듯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 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안나 카레니나』의 시공간은 『전쟁과 평화』보다는 훨씬 단촐한(?) 편이다. 안나와 카레닌과 브론스키가 살았던 페테르부르크, 안나의 오빠이자 브론스키의 친구인 오블론스키 공작 부부가 살았던 모스크바, 레빈이 농장을 가꾸며 살았던 포크로프스코예,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이탈리아를 떠돌며 지내던 안나와 브론스키가 나중에 터잡고 지낸 시골 영지인 보즈드비젠스코예 등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러시아의 귀족답게(?) 끊임없이 서로의 삶의 터전을 자주 방문하여 오랫동안 머물며 함께 지낸다. 함께 사냥도 하고, 승마와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함께 만찬을 즐기며 열띤 토론도 벌인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이처럼 등장 인물들 사이의 예정된 방문이 아니면 우연한 부딪힘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만남이 단순한 친지 방문이든 정식으로 초대받은 만찬 모임이나 화려한 무도회든, 혹은 우연히 찾아간 음악 연주회나 오페라 극장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테두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이 흔히 가정 소설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오롯이 '사랑 때문에 남편과 아들과 가정까지 다 팽개친' 안나의 이야기만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애시당초에 문제가 된 가정은 정작 카레닌 부부가 아니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는 그 유명한 첫 문장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 속에 등장하는 문제의 가정은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 부부였다. "오블론스키의 집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자기 집의 가정교사로 있던 프랑스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남편에게 더 이상 한집에서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 아내는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가정을 수습하기 위해 안나는 일부러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찾아온다. 오빠의 부탁으로 올케 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

 

안나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지만 정작 미남 청년 브론스키부터 먼저 만난다. 그것도 기차역에서, 아주 우연히. 그러고 나서 오빠를 만나고, 올케 언니인 돌리를 설득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와서는 남편의 귀를 만나고, 외아들 세료자를 만나고, 결국 나중엔 (한때 브론스키를 두고 서로 경쟁 관계였던) 키티와 그녀의 남편인 레빈까지 만난다. 브론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작의 딸이자 아름다운 처녀였던 키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유부녀인 안나부터 먼저 만난다. 그 다음으로 키티를 만나고, 친구인 스티바(오블론스키)를 만나고, 저녁 무도회에서 다시 안나를 만나고, 나중엔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도 어쩔 수 없이 자주 맞닥뜨린다.

 

부유한 미남 청년과 아름다운 귀부인 안나 사이에 급작스레 휘몰아친 격정적인 사랑은 평온하기만 하던 두 사람의 삶의 조건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마냥 우호적이었던 주변의 인간 관계들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불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들의 사랑은 온갖 모욕가 냉대와 시련을 불러 일으키지만, 안나와 브론스키는 오로지 그들 사이의 굳건한 사랑에만 의지한 채 모든 걸 희생하면서 꿋꿋하게 버텨 나간다. 심지어 안나는 자신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을 먼저 털어 놓고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다. 자신의 인생 역정에 크나큰 흠결이 생긴 카레닌은 파장을 최소화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수습에 골몰한다.

 

출중한 능력을 지닌 남편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을 키우며 8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는 어느새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까마득한 딴 세상의 일처럼 변해 버리고, 오로지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안나는 낯선 현실에 몹시 당혹해 하지만 결코 비굴해 하지도 않고 회피할 생각도 없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 일들에 대해 어느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내하고 불편한 현실 조건에 맞선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안나 카레니나의 성격을 상징한다. 당대 러시아의 사교계를 빛냈던 사랑스럽기 그지 없던 안나는 그렇게 자신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알게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빠졌던 수많은 다른 귀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헤쳐나갔는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톨스토이가 그려낸 '사랑과 번민과 고통과 기쁨이 함께 뒤섞인 안나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현실적이어서, 그녀가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도저히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랑 때문에 때로는 몹시 행복해 하지만, 도처에 도사린 벅찬 현실적 난관 때문에 늘상 불안정한 삶과 가정(완전히 해체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외관만 유지하는 첫 번째 가정, 아들 양육 문제 때문에 남편과의 이혼을 마무리짓지 못하면서 브론스키와의 정식 결혼조차 이룰 수 없는 두 번째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비해 레빈의 삶과 가정은 너무나 튼실하면서도 평온하고 이상적이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청혼을 거절당했던 레빈과 키티가 오랜 좌절감과 단절을 극복하고 다시 사랑을 되찾고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모습이나, 신혼 초에 불거지기 마련인 생경한 갈등까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모습들은 흐뭇한 미소를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듯한 안나의 위태롭고도 투쟁적인 삶에 비하면 레빈의 일상들은 얼마나 평화롭고도 자연스러우면서 또한 목가적인가.

 

제인 오스틴의『오만과 편견』이 당대의 인습적인 결혼관이나 편견들에 용감히 맞선 끝에 극적으로 '결혼'에 이르는 주인공들을 묘사했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 이후에 찾아온 또다른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좌절하는 기혼녀 안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대조적이다. 또한 안나에게 찾아온 결혼 이후의 사랑이 비자발적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이라는 면에서 똑같은 '불륜 소설'로 분류되는 『마담 보바리』와도 사뭇 대조적이다. 가난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따분한 일상이 지겨워 자발적으로 불장난을 저지른 끝에 스스로 쌓아 올린 과오를 감당하지 못해 음독 자살로 자멸하고 마는 마담 보바리는 안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바리의 죽음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미련도 느껴지지 않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엔 왠지 모르게 진한 아쉬움과 묘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짤막한 성경 구절 하나가 먼저 제시된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안나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이 결혼 서약을 깨고 간통을 저지른 안나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안나의 죄악'은 스스로 찾아 나선 것도 아니며, 안나와 비슷한 처지면서도 감쪽같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러시아 사교계의 다른 여성들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한 안나는 솔직하면서도 용기 있고 지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죄'에 대해 분명하게 자각했으며 거듭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또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브론스키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브론스키와 동거하면서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궁극적인 죄는 브론스키와의 간통도 아니었고, 카레닌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게 궁극적으로 문제였다.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던 그녀는 결국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던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하느님을 버리면서까지 기대고 의지했던 브론스키를 도리어 심판하기 위해 '죽음'을 떠올린다.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늘상 자신의 곁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을 해결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음으로서 브론스키를 벌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마침내 기차에 몸을 던진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라고 회개한다. 브론스키를 사랑한 죄뿐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인 '심판자'의 역할까지 떠맡은 불경죄를 뉘우친 셈이었다. 결국 톨스토이가 소설 앞에 내세운 에피그램은 안나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을 빗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버린 안나에 대한 '신의 탄식과 위로'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꿋꿋하게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 심판은 나의 몫이거늘, 너는 왜 용서 대신 심판을 구하고 벌써 때이른 죽음을 맞은 것이냐.'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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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0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도 쇼펜하우어를 좋아했군요. oren님 역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좋아하시는 만큼 인간의 의지의 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해석하셨음을 이번 페이퍼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oren 2018-08-10 12:14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애쓴 흔적도 있는 듯해요. 왜냐하면 안나나 브론스키나 그 어떤 인물들도 사랑 때문에 고뇌하면서도 사랑 너머에 깔려 있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셔는 결코 질문을 던지지 않거든요. 톨스토이가 쇼펜하우어로부터 배웠던 ‘사랑의 형이상학‘을 최대한으로 희미하게 드러내는 솜씨야말로 대문호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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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 쇼펜하우어

포스트잇 2018-08-10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레빈편은 건너뛰었습니다요..;;;;;;;;
다시한번 읽을 기회가 온다면, 님의 글을 상기하며 읽어볼랍니다^^

oren 2018-08-10 12:24   좋아요 0 | URL
저는 레빈 편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때로는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안나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할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로 톨스토이의 분신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읽으니까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나중에 다시 읽으실 때는 레빈 이야기도 꼭 빼놓지 말고 마저 읽으시길요.^^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 제임스 조이스

 

 * * *

 

지금 전세계를 통틀어 싱가포르만큼 뜨거운 도시도 없을 듯하다. 21세기 최대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한 '세기의 회담'이 이제 곧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훨씬 훗날에 태어날 사람들한테도 과연 '2018년 6월의 싱가포르'가 우리들처럼 그렇게 뜨겁게 느껴질까? 아마도? 아마도!

 

비록 '올해의 싱가포르' 정도는 아니더라도 해마다 6월이 되면 몹시 술렁거리거나 들썩거리는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가 하나 있다. 그곳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이다. 거기선 해마다 6월 16일이 되면 '블룸즈데이'라는 이상한 타이틀을 내걸고 온갖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곤 한다. 그날의 그곳이 바로 제임스 조이스가 쓴 악명높은 소설인 『율리시스』의 배경이 된 날짜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제 날짜와 장소는 확정되었으니 그걸 채우는 인물들이 등장할 차례다. 소설이 마련한 무대에 나타나는 핵심 인물은 셋이다. 유태계 출신의 광고 세일즈맨인 레오폴드 블룸, 그의 아내이자 오페라 가수인 마리언 블룸(애칭은 '몰리'), 그리고 예술가를 꿈꾸는 문학 청년인 스티븐 데덜러스이다.

 

그날 더블린에서 제임스 조이스라는 민완 기자가 밀착 카메라를 둘러메고 하루 온종일 도심 곳곳을 동분서주한 끝에 끌어모은 동영상이 아직도 유튜브에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걸 몰래 즐감하는 네티즌들은 뜻밖에도 거기서 레오폴드 블룸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밀착 카메라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의 어깨 위에서 주인공들을 추적하는 듯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레오폴드 블룸의 머리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떠메고 다니는 밀착 카메라가 보여주는 가장 신비로운 혁신 기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신속히 침투하는 능력이다. 그 기술은 단순히 인물들의 두뇌 상태만 살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의식의 흐름'까지 추적한다. 그래서 그날 더블린에서 촬영된 유튜브 동영상은 '단 하루, 더블린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매우 흥미롭고도 방대한 분량의 기록물이지만, 그걸 올바로 감상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카메라에 담긴 대부분의 영상들은 아주 뚜렷하지만 일부 영상들은 흐릿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카메라가 갑자기 레오폴드 블룸의 머리 속으로, 혹은 마리안 블룸의 머리 속으로 바쁘게 옮겨 다니기 시작하면 도대체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들의 의식이 그려내는 놀라운 요지경을 두루 감상하기 위해서는 <블룸즈데이 동영상 감상법>이라는 아주 방대한 주석집이 필요하고, 그 주석집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따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느닷없이 블룸즈데이 이야기를 꺼낸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난해한 소설을 읽는 동안에 끄적거렸던 메모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소설을 읽고 나서 한참 뒤에 그 메모들을 사진으로 담아 놓은 기억도 떠올랐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몰라서 한참이나 뒤졌다. 다행히 그 사진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컴퓨터에 멀뚱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나 영영 달아나면 어쩔까 싶어 이번 참에 온라인 공간으로 끄집어 올려 본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북핵 같은 고차 방정식도 다들 서로 풀겠다는 나서는 마당에, 『율리시스』라는 아주 케케묵은 독서 난제 하나조차 못 풀어서야 말이 되느냐는 식의 '뜻밖의 결심'을 세우는 사람이 나타날 지.

 

  * * *

 

 

<사진 1> 『율리시스』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가장 많이 인유하는 작가는 단연코 셰익스피어다. 그런 예비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인유한 곳들을 '비교적 좁은 공간'에 적기 시작했다가 아주 큰 낭패를 겪었다.

 

 

<사진 2> 소설의 목차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똑같이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제3판과 <어문학사>에서 나온 제4개역판을 함께 놓고 비교하며 읽었는데, 사실 제4개역판에서 크게 바뀐 내용은 드물었다.(제3역 주석이 4,464개이고 제4개역판 주석이 4,463개로 '딱 1개' 차이가 나는 건 그저 헤프닝일 뿐이다. 제3역 주석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지 제4개역판에서 새로운 주석을 '1개' 추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 3> 『율리시스』에 인유된 작가와 작품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단 1회' 인유된다는 게 특징이다. 물론 극소수의 걸출한(?) 작가들은 예외적으로 자주 인유된다.

 

 

<사진 4>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인유된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인유된 작품은 단연 『햄릿』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올바로 감상하려면 먼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두루 섭렵할 필요가 있다.

 

 

<사진 5>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제임스 조이스의 드넓은 의식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신비로운 탐험이나 다름없다. 책을 너무 읽어 눈이 멀 정도였던 '독서광'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 편력을 따라가 보는 방법 가운데 『율리시스』를 읽는 것만큼 좋은 방편도 없다.

 

 

<사진 6> 이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아주 많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음란서적'으로 내몰려 '금서'로 지정되었다가 한 훌륭한 판사에 의해 마침내 '탁월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는 나보코프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그런데도 짐짓 요조숙녀인 체하는 모순적인 독자들을 안심시킨답시고 '성욕을 자극한다'는 지적을 받을 만한 몇몇 장면을 희석하거나 생략해야 한다면(이 문제에 대해서는 1933년 12월 6일 존 M. 울시 판사가 훨씬 더 노골적인 다른 책과 관련하여 내린 기념비적인 판결을 참고하라), 차라리 『롤리타』의 출판을 포기하는 편이 나으리라.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 <머릿말> 중에서

 

 

 

<사진 7>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는 않다. 주인공 블룸의 아내인 마리언 블룸(몰리)의 애인 숫자는 꽤나 많다. 레오폴드 블룸은 아내의 '불륜'을 눈치 채고도 정작 모른 체 한다. 그런 '오쟁이진 남편'의 입장이 참으로 묘하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쿨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제대로 화풀이 한 번 못하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속을 끓이기 때문이다. 마리언 블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스런 애인의 모습'과 레오폴드 블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죽도록 패주고 싶은 마누라의 애인 녀석'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사진 8> 소설이 워낙 난해하고 주석 또한 엄청나게 복잡한 게 『율리시스』의 특징이다. 제3판에서 주석 하나가 불필요하게 끼어드는 바람에 제4개역판에서 수정되었지만, 오탈자는 제4개역판에서도 여전히 심심찮게 발견된다.

 

 

<사진 9> 『율리시스』를 처음 펼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침투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다시 덮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펼쳤을 때 '조금 더' 눈에 들어온다면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완독하는 날도 오게 된다.

 

 

<사진 10> 제임스 조이스는 언어, 철학, 문학뿐 아니라 심지어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아일랜드 민족의 삶과 애환이 깃든 민요에 대해 해박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사진 11> 주석의 오류를 찾아 내는 것도 흥미롭다. 가령 '멜랑쥐'를 혼합주의 한 종류로 해석한 건 명백한 오류다. 우리가 흔히 '비엔나 커피'로 부르는 게 바로 '멜랑쥐'이기 때문이다.(예전에 비엔나에 갔을 때 맛봤던 '멜랑쥐' 생각도 나고,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직접 발음하는 '멜랑쥐'를 유심히 들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사진 12> 이 작품엔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보다 앞서 발표한 다수의 작품들도 많이 인유한다.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끌어들이는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이다. 『율리시스』가 '더블린 3부작'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진 13> 이 작품엔 작가 최후의 작품인 『피네간의 경야』와도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나중에 언젠가 그 작품을 읽게 되면 『율리시스』를 읽을 때 메모했던 내용들을 다시 들춰 볼 셈이다.

 

 

<사진 14> 제임스 조이스가 읽은 작가와 작품들이 『율리시스』라는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이 녹아들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건 수많은 영문학자들이 지금도 매달려 씨름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사진 15> 『율리시스』는 주석이 없으면 읽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가 어떤 작품 속의 어떤 인물들의 행동이나 상황을 이 작품에 끌여들여 설명하는지를 파악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 16> 『율리시스』에 담긴 책들 가운데 '나도 읽은 책들'은 너무나 보잘것 없었다. 나로서는 제임스 조이스가 읽고 작품 속에 녹여낸 작가와 작품의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다.

 

 

<사진 17> 제임스 조이스는 이미 중학생 때부터 오뒷세우스(영어로는 율리시스)를 흠모하는 글을 썼을 정도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수필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따지고 보면 소설 『율리시스』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사진 18> 『율리시스』는 '원서'로 읽는 일도 무척 어렵다고 한다. 영어 말고도 수많은 다른 언어들이 그대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영어 이외에 자주 쓰이는 언어는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게일어, 헤브라이어, 이디시어, 페르시아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등인데 모두 합하면 대략 14개 언어나 된다고 한다. 그는 또한 언어유희의 대가였다.

 

 

<사진 19>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더블린 시내로 한정된다. 탑, 학교, 해변, 집, 목욕탕, 공동묘지, 신문사, 도서관, 거리, 주점, 산부인과 병원, 홍등가, 아내의 침실 등등이 주된 배경이다.

 

 

<사진 20> 『율리시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은 <제18장 침실(페넬로페)>이다. 일명 '몰리의 독백'으로도 불리는 이 장은 Yes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데, 보다시피 중간에 쉼표나 마침표 한 번 없이 4만 단어로 나열된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아내 몰리의 의식 속을 여행하는 이 신비롭고 놀라운 대목이야말로 '오뒷세우스 장군이 겪은 온갖 고난'이 그녀의 아내였던 페넬로페의 침실에서 마침내 '평화로운 안식'으로 귀결되는 흐름과 몹시 유사하다. 비록 책의 겉모습만 보면 '숨막힐 듯' 빼곡한 단어들의 연속이지만, 온갖 고초 끝에 마침내 저 텍스트에 다다른 독자들이 맛보는 남모르는 희열은 책의 겉모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사진 21> 제4장 마지막 부분. '인생도 이랬으면' 하는 장면은 레오폴드 블룸이 마침내 시원하게 용변을 보고 내심 안도하는 장면이다. 블룸은 약간의 변비증을 겪고 있다.

 

 

<사진 22> 친구의 장례에 참석한 레오폴드 블룸이 마음 속으로 느끼는 '의식의 흐름'은 몹시 흥미롭다. <햄릿>에 나오는 묘굴인(墓掘人) 이야기도 당연히(!) 나온다. 라틴어 경구 'De Mortuis nil nisi prius(죽은 자에 대해 악담하지 말라)'도 흥미롭다.

 

 

<사진 23> 아내 몰리와의 싱그러운 데이트를 떠올리며 행복해 하면서도, 거의 동시에 몰리의 정부(情夫)인 보일런을 떠올리며 둘과의 관계 때문에 혼란스러운 레오폴드 블룸. 주인공은 아내의 불륜 때문에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5월의 초승달이 비치고 있어요. 사랑. 녀석이 아내의 다른 편에. 팔꿈치, 팔. 그이. 개똥벌레의 불ㅡ똥이 비추고 있어요, 여보. 감촉. 손가락. 질문. 대답. 그래요.

그만. 그만. 만일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137쪽)

 

주석) 토머스 무어의 노래 <5월의 초승달>에서ㅡ5월의 초승달이 비치고 있어요, 여보 / 개똥벌레의 불똥이 비치고 있어요, 여보 / 산보란 얼마나 달콤한가요 / 모나숲을 지나 / 졸린 꿈을 꿀 때, 여보.

 

주석) 그 녀석ㅡ몰리의 정부, 보일런. Touch Fingersㅡ성교에 대한 속어다. 만일 원하는 자가 상대방의 손바닥을 셋째손가락으로 터치하면, 상대방이 의향이 있을 때 그 응답으로서 같은 손가락의 제스처를 함. 여기서 블룸은 몰리와 보일런의 관계를 의심함.

 

 

 

<사진 24> 이 소설에서 가장 난해하고도 주석이 많이 붙은 부분이다. <제9장, 국립도서관>에 딸린 주석만 613개에 이른다.

 

 

<사진 25> 제12장의 마지막 문장들은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듯하다.

 

 

<사진 26> <제15장 밤의 거리(키르케)> 무대는 더블린의 홍등가이다. 여기서 레오폴드 블룸은 갖가지 잠재 의식이 불러오는 환각을 경험한다.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의 부하들이 키르케의 마법에 빠진 것과 비슷한 분위기다.

 

 

<사진 27> <제17장, 이클레스가 7번지(이타카)>에서는 시종일관 교리문답식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사진 28> 제18장에 딸린 주석 55는 설명이 불충분해 보인다. 프랑수아 라블레가 쓴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에 나오는 내용을 인유한 것인데, 작가와 작품 이름이 둘 다 주석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주석이 붙은 원문은 이렇다. "어떤 사람은 그를 성직자로 생각하지만 저 프랑스와 선생의 작품에는 여인이 탈장(脫腸)을 했기 때문에 귀(耳)로 아기를 낳았다는 거야")

 

 

<사진 29> 작품의 배경이 된 더블린 시내 지도.(<생각의 나무> 제3판 126쪽)

 

 

<사진 30> 조이스의 입상.(<생각의 나무> 제3판, 128쪽)

 

 

<사진 31> 『율리시스』 집필 종반 무렵의 조이스.(<생각의 나무> 제3판, 131쪽)

 

 

<사진 32> 『율리시스』 구상 당시의 조이스.(<생각의 나무> 제3판, 137쪽)

 

 

<사진 33> 데이비드 레빈이 그린 조이스의 초상화.(<생각의 나무> 제3판, 139쪽)

 

 

<사진 34> 『율리시스』 초고 중 한 페이지.(<생각의 나무> 제3판, 140쪽)

 

 

 

<사진 35> 제임스 조이스.(<생각의 나무> 제3판, 145쪽)

 

 

<사진 36> 결혼 신고를 위해서 등기소로 가는 길에서.(<생각의 나무> 제3판, 1,026쪽)

 

 

<사진 37> 마티스가 제작한 『율리시스』의 삽화들 중 하나.(<생각의 나무> 제3판, 1,028쪽)

 

 

<사진 38> 1930년대의 조이스 모습.(<생각의 나무> 제3판, 1,037쪽)

 

 

<사진 39> 작품의 구도.(<어문학사> 제4개역판, 915쪽)

 

나는 이상하게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생 독서 계획』에 담긴 충고를 아주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그 책에 담긴 충고 가운데 내게 가장 큰 용기를 불러 일으킨 대목은 뜻밖에도 아주 짧은 두 문장이었다.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라. 그런 다음 책을 내려놓았다가 1년 뒤에 다시 시작하라."

 

나는 정말 이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맨 처음엔 그저 그 책을 아무데나 펼쳐서 몇 줄만 읽고 그냥 책을 덮었었다. 몇 년 후에 다시 펼쳐서는 이곳 저곳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덮었다. 그 다음엔 첨부터 끝까지 줄곧 내달릴 수 있었다.

 

『율리시스』라는 오래 묵은 독서 난제를 푸는 데 있어서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내가 마음 속으로 자주 되뇌었던 그 책 속의 문장들은 지금 다시 읽어 봐도 여전히 옳고 강력하다.

 

 

『율리시스』는 침투하기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인다. 이 높은 산은 단숨에 걸어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올라갈 수는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아주 풍요로운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다음에 다섯 가지 사항을 간단하게 적어 보았다. 이것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율리시스』를 즐겨 감상하게 하거나 이해하게 도와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한 오해, 가령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아주 외설한 작품이다, 정신이상에 걸린 천재의 작품이다, 컬트의 제단이다 등의 오해는 불식시켜 줄 것이다. 1922년에 이 소설이 출간된 이래 많은 우수한 비평가와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1. 이 작품은 『신곡』  이래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작품이다.

 

2. 20세기에 발표된 작품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소설이다. 그 영향력은 주로 다른 작가들에게 미친 것이므로 간접적이다.

 

3. 영어로 된 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문학의 많은 길을 새롭게 개척했다.

 

4. 약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견해로서, 이 작품은 '퇴폐적'이거나 '부도덕'하거나 '비관적'이지 않다. 『평생 독서 계획』에 포함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강력한 정신이 포착한 인생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 정신은 부분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자기 변명적인 것은 일체 배격한다.

 

5. 그 모태가 되는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363∼364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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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6-10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트하신 것 굉장합니다. 감명 받았어요.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다 읽고 나면(아직 읽은 거 4대 비극밖에 없습니다) 율리시즈에 한번 도전하고픈 마음이 생기네요. 과연 그 날이 올지..

oren 2018-06-10 14:17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시면 『율리시스』를 읽는 데 분명 큰 힘을 얻게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율리시스』를 다 읽는 동안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은 게 없어서 여간 고생이 심하지 않았답니다. 그나마 저런 메모라도 남겨둔 덕분에 나중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을 때 아주 유용하게 ‘복습‘할 기회를 얻긴 했지만요. 지금 세어 보니 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을 21편 읽었는데, 그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어김없이 『율리시스』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인유했는지 일일이 다 확인했던 것 같아요. 아직도 읽지 못한 나머지 작품들을 읽을 때에도 이 메모는 여전히 아주 유용할 듯하고요. 아무튼 메모수첩 님께서도 『율리시스』에 담긴 (셰익스피어 못지 않은) ‘인간 마음의 백과 사전‘을 꼭 한 번 탐구할 수 있길 빕니다.^^

겨울호랑이 2018-06-1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정리하신 노트만 보더라도 <율리시스>가 준비없이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 산이 높기 때문에 오른 후에는 더 큰 보람이 있으리라는 기대도 동시에 하게 되네요. 제임스 조이스가 독자들의 손을 친절하게 잡아주고 그 산을 안내해 주지는 않지만, 그 산이 아름다울 것임을 oren님의 글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oren 2018-06-10 14:58   좋아요 1 | URL
거대한 산봉우리를 오를수록 온갖 다양한 준비물도 필요하고 또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도 필요하다는 걸 히말라야 체르코리(4,984m)를 오를 때 절실히 느꼈었답니다. 함께 등반했던 많은 친구들이 3,800m까지는 다 함께 올랐지만, 4,000m, 4,500m를 지나면서 차츰 나가떨어지더라고요. 평지의 1/3에 불과할 정도로 희박한 공기 속에서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너덜지대를 헤치고 올라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더군요. 그런데, 가장 힘겨운 순간에 가장 큰 힘이 된 건 역시나 ‘최후의 일각‘까지 옆에서 서로 격려해 준 ‘동료‘였답니다. 『율리시스』 또한 숱한 비경들이 숨겨진 높은 산봉우리를 닮은 소설처럼 느껴지는데, 겨울호랑이 님이라면 그 동안의 놀라운 독서 경력으로 보나 닉네임으로 보나 지금 당장이라도 능히 단숨에 오르실 수 있을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6-10 14:53   좋아요 0 | URL
oren님께서는 정말 높은 산에도 오르셨군요! oren님의 페이퍼를 통해서 짐작해보면 「율리시스」읽기에는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을 공략하기 전 바깥 해자를 메운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가야겠습니다^^:)

oren 2018-06-10 15:01   좋아요 1 | URL
저도 한때는 등산 매니아였답니다.^^ 젊을 때 암벽등반도 배웠고요. 그런데 어느새 벌써 노쇠했는지 산보다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네요. 그나저나 히말라야는 앞으로 한두 번쯤 더 가 볼 생각입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6394813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 *

 

어떤 소설들은 단번에 사람을 매료시킨다. 처음부터 주인공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그려지고, 목소리나 말투마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그린 1984년의 세계가 너무나 숨이 막힐 듯하고 암울하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의 생김새나 목소리를 상상할 여유조차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이 소설은 몹시 재미있다. 그러면서도 충격적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소설로부터 받은 둔중한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정도다. 도대체 오웰은 어떻게 해서 이토록 암울한 미래를 그토록 잘 그려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자 말자 다시금 소설의 맨 처음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단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그저 '소설의 껍데기'만 읽은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으니까.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사실 그런 느낌 말고도 여럿 더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오브라이언에 대해 찬찬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작품의 초반부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윈스턴에게 다가왔는지, 그가 왜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진짜 주인공처럼 부각되는지, 그가 왜 반체제 영웅이었던 골드스타인이 쓴 이념 서적인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의 실질적인 저자였음을 윈스턴에게 고백하는지 등등이 단번에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나서야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관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또한 오브라이언이 어떤 존재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쨌든 소설 『1984』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오브라이언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설의 말미에서 윈스턴으로 하여금 결국 무의식 중에라도 '2 + 2 = 5' 라는 황당한 산식을 테이블 위에 쓰게 만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윈스턴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을 때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상범으로 체포된 윈스턴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의 정당성에 반항하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처한 운명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인지, 더 나아가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오브라이언만큼 명쾌한 이론을 갖춘 인물도 드물다. 그런 까닭에 윈스턴은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틈틈이 오브라이언에게 도리어 존경심마저 품게 된다.

 

 

(조지 오웰, 출처 : 위키피디아)

 

 

(조지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세계, 3대 초국가가 세계를 분할 지배하는 형국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책의 말미에 적은 메모. 이상하게도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로 읽을 때 메모한 내용들이 훨씬 많았다.)

 

체포된 윈스턴을 심문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이 주고 받는 '고문실의 대화'는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일부 비평가들이 이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두고 심지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화처럼 감동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리뷰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몇몇 인상적인 대목들을 뒤늦게나마 여기에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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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순교가 없다는 점이네

"자네가 첫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건 이곳에서는 순교가 없다는 점이네. 자네는 과거의 종교 박해 사건에 관해 읽어봤을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중세에는 종교재판이 있었네. 그런데 그건 실패작이지. 이단자를 뿌리 뽑기 위해 시작된 그 종교재판은 오히려 이단을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네. 모든 이단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이단자 한 사람을 화형에 처할 때마다 다른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났는데, 왜 그랬겠는가? 그것은 종교재판이 그들의 적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회개를 받아내지 못한 채 죽였기 때문일세. 사실은 회개하지 않는다고 죽였던 거지.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진실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걸세. 따라서 모든 영광은 그 희생자들에게 돌아갔고, 그들에게 화형을 선고한 재판관에게는 비난만 퍼부어졌지. 그 후 20세기에 이르러 소위 전체주의자라는 게 나타났네.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이지. 소련은 종교재판 때보다 더 참혹하게 이단자들을 처형했네. 그들은 과거의 실책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순교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들은 그 희생자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용의주도하게 그들의 위엄을 완전히 제거해 놨지. 그 희생자들은 고문과 감금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야비하게 굽실거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네. 그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엇이든 다 털어놓고, 자기들끼리 서로 욕하고 고자질하며 자기만 살기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 그런데 이번에도 몇 년이 지나자 그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난 걸세.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됐고, 그들에 대한 경멸도 잊혀져 버렸네.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첫째로 그들의 자백이 강제에 의한 것이었고,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일세. 우리는 그런 식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네. 여기서 얻은 자백은 모두 진실이네. 우리가 진실로 만드는 거지. 무엇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네. 윈스턴, 자네는 후손들이 자네를 옹호해 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후손들은 자네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들을 수 없을 걸세. 자네는 역사의 흐름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린다네. 공기로 변해 먼 하늘로 사라져버리는 거지. 자네에 대해서 남는 건 아무것도 없네. 기록된 자네의 이름도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도 자네는 없네. 자네는 미래에서처럼 과거 속에서도 완전히 소멸될 걸세. 결국 자네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네."(353∼355쪽)

 

 

 

 * * *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군. 한마디로 씻어버려야 할 오점이지.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 다르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으로는 만족 못하네. 자네가 우리한테 항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여야만 하네. 이단자들이 우리한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네. 그들이 지닌 모든 악과 환상을 불태워버리고, 외양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단 말일세. 비록 알려지지도 않고 그 영향력 또한 없다 하더라도 그릇된 사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 어떤 탈선도 용납하지 않네. 옛날에는 이단자들이 여전히 이단자인 채 스스로 이단자임을 자처하며 화형장으로 끌려감으로써 모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머릿속에 반항 의식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치고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355∼356쪽)

 

 

 * * *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해 보게.

 

"윈스턴,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자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겠나?"

 

윈스턴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았네. 권력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가 있지. 복종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괴롭히지 않고, 어떻게 권력자의 의사에 복종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 그리고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권력자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뜯어 맞추는 거라네. 자네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나? 이건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의 것이네. 공포와 반역과 고뇌의 세계이지.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이며, 세련될수록 더욱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이네. 우리가 만드는 세계에서의 진전이란 고통을 향한 진전일 뿐이네. 옛날의 문명들은 사랑과 정의 위에 세워졌다고들 주장했었지. 우리의 문명은 증오 위에 세워져 있네. 우리의 세계에서는 공포, 분노, 승리감, 자기 비하 등의 감정을 빼놓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네. 그 나머지는 우리가 몽땅 때려 부술 걸세. 우리는 이미 혁명 전부터 내려오던 사고의 습관을 부수고 있지. 우리는 부모와 자식,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간의 유대를 끊어버렸네. …… 충성심도 당에 대한 것 이외에는 모두 없애버릴 걸세. 사랑도 빅 브라더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 웃음도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감에 취해 웃는 웃음만 있게 될 것이고, 미술, 문학, 과학도 없어질 걸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도 없어지고, 호기심이라든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 따위도 없어질 것이네. 한마디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은 파괴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데 이걸 잊지 말게, 윈스턴. 언제나 끊임없이 커가고 끊임없이 미묘해지는 권력에 대한 도취감만 맛보게 되리라는 점을 말일세.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승리감이 주는 전율과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게 될 것이네. 만약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으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해 보게."(373∼375쪽)


 

 * * *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과거는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는 절대로 바뀐 적이 없다. …… 윈스턴은 그들의 죄를 부인할 수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은 있지도 않은, 그 자신이 꾸며낸 것이다. 그는 상반되는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기억했지만 그런 것은 모두 틀린 기억이고 자기기만의 산물이었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쉬운가! 항복만 하라. 그러면 모든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자신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어떤 경우에든 예정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는 왜 자신이 지금까지 반항해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쉽다. 다만…….(388∼389쪽)

 

 

 * * * 

 

(위키백과에 따르면, 1989년 집계 당시 《1984년》은 6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사 당시 다른 어떤 영국 소설 보다 많은 숫자이다. 국내에서도 아주 다양한 판본들이 나와 있는 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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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0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페이퍼에서˝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라는 구절을 읽으니, 화이트헤드가 물리적 현상은 끊임없이 확산되어 가지만, 생명력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대강의 내용은 위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만... <1984> 속의 문장을 통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8-06-07 09:2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저 대목을 읽고 화이트헤드의 말들을 떠올리셨군요. 저는 엉뚱하게도 쇼펜하우어가 남긴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렸는데 말이지요.^^

제임스 리 2020-01-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습니다~

oren 2020-01-19 19: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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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허위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는 터에 전 세계와 대항하면서까지 진실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미친 사람은 아니다.

 - 조지 오웰, 『1984』

 

 * * *

 

참여작가는 그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때문에 결국 세월이 흐르면 낡은 작가가 되고 마는 숙명을 떠안는다. 그런 일반 통념에 반하는 작가가 바로 조지 오웰이다.

 

그가 1948년에 완성한 『1984』는 너무나 정치색이 짙은 소설이어서 일반적인 문학 작품과는 사뭇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의도한 정치적 신념이 예술적 목적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1984』는 그만큼 암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1984년의 세계'에 얼마쯤 안도해도 좋을 만큼 디스토피아적이다.

 

조지 오웰은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지 인도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영국의 이튼 스쿨을 다녔으나,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버마로 건너가 경찰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는 '버마 시절'을 겪으며 영국의 식민 지배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 혹은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1930년대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도 공화파로 참전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그는 '전체주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1945년에 발표한 『동물농장』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일약 유명해진 터였다. 그

보다 4년 뒤에 발표한 『1984』는 앞선 작품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일상이 낱낱이 감시되고, 사상 경찰에 의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마저 통제된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선 심지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욕마저 통제한다. 체제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구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거쳐 결국 사회에서 '증발'된다.

 

『1984』에서 그려진 암울한 모습들은 과거에 일당 독재와 비밀 경찰을 통해 끔찍한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많은 공산권 국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구 소련, 동독,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구 소련 연방을 이뤘던 여러 공산국가들이 대표적이다.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1984』에 그려진 암울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요, 3대에 걸쳐 절대 권력이 세습되고 잔학한 통치가 이뤄지는 북한이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어쩌면 이토록 오늘날의 북한의 모습과 빼닮았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외부 당원이다. 서른 아홉 살인 그는 1930년경에 지어진 승리 맨션 7층에 홀로 살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에든 거대한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다. 복도 한쪽 끝 벽에도 걸려 있고,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에도 붙어 있다. 포스터에서는 언제나 커다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글과 함께. 또한 윈스턴이 생활하는 곳곳엔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이 그를 감시한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에 대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잇을 뿐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생활이 본능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11∼12쪽)

 

 

소설의 배경인 1984년의 런던은 전체주의 초국가인 오세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윈스턴은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웅장한 건물에서 근무한다. 그의 일터는 진리부다. 그 건물의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런던에는 외형과 규모가 진리부와 비슷한 건물이 세 동이나 더 있었고, 이 건물들에는 모든 정부기관이 들어 있었다. 보도 · 연예 ·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眞理部),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平和部),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愛情部),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豊饒部)가 그것이다. 이 이름들은 신어로 각각 '진부', '평부', '애부', '풍부'라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끔찍한 곳은 허울좋은 명칭이 붙은 애정부다.

 

 

애정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 건물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윈스턴은 애정부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그 근처에 얼씬거린 적도 없다. 그곳은 공적인 일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가시철조망과 철문을 비롯하여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삼엄한 경계망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건물 외곽의 방책으로 이어진 길에서조차 고릴라처럼 생긴 위병들이 검은 제복에 곤봉을 차고는 어슬렁거린다.(13∼14쪽)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에서 시도하는 최초의 반항은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25년 형의 선고를 받을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그가 서툴게 쓴 글씨는 '1984년 4월 4일'이었다. 일기 쓰기를 통해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체제에 맞설 수 있는 방법과 행동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기록국에서 일한다. 정정이 필요한 논문이나 뉴스 기사들을 수정해서 '과거를 날조'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정정된 기사들을 바탕으로 신문을 다시 인쇄하고, 원래의 신문을 폐기하고 정정된 기사가 실린 새 신문을 신문철에 꽂는다. '이같은 과정은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포스터, 전단, 영화, 녹음테이프, 만화, 사진 등 조금이라도 상관없이 그 모든 것에 적용되었다.'

 

그들은 근무시간 도중에도 틈틈이 '이 분 증오(Two Minutes Hate)'를 통해 체제 전복을 도모했던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을 향해 극도의 집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체제 수호'를 위한 정신 교육에 동원된다.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가 절정에 달할 때면 으레 빅 브라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나의 구세주여!'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빅──브라더! ……빅──브라더!  ……빅──브라더!"라는 찬가를 낮고 느린 가락으로 반복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빅'과 '브라더' 사이가 길게 늘어지면서 이어지는 그 장중한 합창은 마치 야만인들이 맨발로 춤추며 쳐대는 북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있는 듯했다.(29쪽)

 

 

기록국 사무실에서 진행된 '이 분 증오' 활동 시간에 윈스턴이 만난 인상적인 사람이 둘 있었다. 복도를 오가며 자주 얼굴을 마주친 여자는 창작국에서 근무하는 스물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윈스턴은 행동이 민첩하고 대담해 보이는 그녀가 처음부터 싫었다.(윈스턴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싫어했다. '고집스럽게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슬로건을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사람들, 아마추어 스파이들, 이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사람은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 당원이었다. 뭔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은밀한 직위에 있는 남자였다. 그가 오브라이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치적인 신조가 불완전하리라는 은밀한 믿음, 아니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텔레스크린이 없는 데서' 단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한번쯤 말을 걸어봄직한 사람이었다.

 

윈스턴은 그날 오전 중에 있었던 '이 분 증오' 시간에 일어났던 여러 풍경들을 떠올리면서도 무의식중에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는 큼직한 대문자로 보기 좋게 다음과 같이 똑같은 글을 되풀이해서 일기장에 적어 넣었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이렇게 무의식중에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된 윈스턴 스미스의 '반체제 의식'은 뜻밖의 일로 한층 탄력을 받게 된다. 사무실 복도에서 가끔씩 마주치던 검은 머리의 대담한 여자(줄리아)가 어느 날 자신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려 쓰러지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자신의 손에 몰래 '종이쪽지'를 건네 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쪽지엔 놀랍게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사실 윈스턴은 기혼자였지만 아내 캐서린과 헤어진 지 오래였다. 당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아이가 없다면 차라리 별거를 하라고 권했다. 당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조차 통제했다.

 

 

당의 목적은 단순히 남녀간에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애정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짜 목적은 성행위로부터 얻게 되는 모든 쾌락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결혼하든 안 하든 사랑보다 더 죄가 되는 것은 성욕이었다. 당원들 간의 모든 결혼은 담당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데 두 남녀가 서로의 육체에 이끌린 듯한 인상을 보이기만 해도 그 결혼 허가는 곧바로 취소되었다. 유일하게 인정된 결혼의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성교는 마치 관장을 하는 것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93∼94쪽)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글로 인해 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 윈스턴은 '온갖 현실적 제약과 난관'을 뚫고 감시의 눈을 피해 그녀와의 밀회를 즐긴다. 누구보다도 열성 당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던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사상 경찰이나 스파이단의 정보원으로까지 오해했던 윈스턴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다.

 

"당신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회를 노렸죠. 저는 얼굴만 보고도 당의 충복이 아닌 사람을 금방 알아맞힐 수 있어요.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놈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173쪽)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는 점점 더 위험한 국면으로 빠져든다. 둘만이 밀회를 즐길 수 있는 방을 빌리기에 이른 것이다. 둘은 그것이 미친 짓이란 걸 알았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채링턴 씨의 상점 2층에 있는 방에서 더 자주 밀회를 즐겼고, 두 사람은 거기서 사카린 대신 설탕을, 싸구려 커피 대신 진짜 커피를, 흑딸기 이파리가 아닌 진짜 홍차를 즐겼으며, 줄리아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향수까지 뿌렸다. 거기서만큼은 당의 동지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물상 위의 그 방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방이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윈스턴은 그 방에 가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꼈다. 그 방은 하나의 세계였고, 멸종된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과거의 주머니였다.(213쪽)

 

 

윈스턴에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오브라이언에게서 기대했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부름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지만, 이제는 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여겼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오브라이언을 만나러 내부당원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찾아간다. 방문객을 맞은 오브라이언은 텔레스크린을 미리 끄는 친절까지 베푼다. 윈스턴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 동기를 말한다.

 

"저희는 당을 전복시키려는 모종의 비밀단체와 음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이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도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당의 적입니다. '영사'의 강령을 믿지 않습니다. 사상범입니다. 게다가 간통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저희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240쪽)

 

 

오브라이언은 와인을 대접하며 그들을 냉담하게 환영한다. "자, 건강에 좋은 것이니 마십시다. 우리의 지도자,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위해!" 라고. 그리고는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을 보내 줄테니 읽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한다. 얼마 후 윈스턴은 '그 책'을 은밀한 방법을 통해 전달받는다.

 

책의 제목은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였다. 소설에서는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이 책을 읽어준다는 설정으로 무려 43쪽에 걸쳐 책 내용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윈스턴이 먼저 펼친 <제3장, 전쟁은 평화>에서는 '전쟁의 본질'을 다루고, <제1장, 무지는 힘>에서는 '계급투쟁의 본질'을 다루는데, <조지 오웰이 쓴 정치철학 강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용이 체계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논리정연하다. 반체제 인사인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의 내용이야말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역사적인 배경과 정치·경제적인 제반 환경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어서 소설 『1984』를 한층 더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훌륭한 교재가 된다.

 

채링턴 씨의 2층 방에서 밀회를 즐기던 윈스턴과 줄리아는 끝내 그곳에서 사상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방을 선뜻 빌려줬던 채링턴 영감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른다섯 살쯤 된, 빈틈없고 냉정한 얼굴의 소유자로 드러난다.

 

소설의 <제3부>는 거의 전부가 감방 안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윈스턴의 이야기뿐이다. 반역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자 사상범인 윈스턴에게 가해지는 모진 고문은 뜻밖에도 오브라이언의 몫이었다. 애정부에서 그를 만난 건 이미 관례적인 예비 심문에서 주먹과 곤봉과 쇠몽둥이와 구둣발질에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다. 오브라이언의 전기 고문은 마치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진행된다. 윈스턴은 과거에 일어난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부정을 강요하는 오브라이언의 심문에 대해 완강히 거절한다. 그건 당에 반항하는 일이었다. 오브라이언이 새삼 당의 슬로건을 상기시킨다.

 

"과거를 지배하는 데 대한 당의 슬로건이 있네. 그걸 한 번 외워보게."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345쪽)

 

 

그렇다. 당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모든 과거는 당의 뜻대로 조작되고, 날조되고, 바뀌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과거를 지배하는 일이므로. 오브라이언은 '네 개의 손가락'을 윈스턴에게 펼쳐 보이면서 그게 '다섯 개'라고 대답하도록 끈질기게 강요한다. 당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말하면 결국 '다섯 개'가 맞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윈스턴은 전기 고문의 다이얼이 최대치에 이를 때까지도 '다섯 개'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그게 네 개인데 어떻게 다섯 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로 오브라이언의 고문은 계속된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자못 친절한 태도로 윈스턴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온갖 사상범들을 잔인하게 고문할 게 아니라 간단히 없애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당국은 그토록 힘들여서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는지, 당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우리는 왜 권력을 원하는지 등에 관한 '고문실의 대화' 속에는 오웰의 예리하고도 깊이 있는 통찰들이 담겨 있다.

 

"…… 당은 오직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네. 우리는 타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도 없네.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이지. 재산도, 사치도, 장수도, 행복도 아닐세. 오직 권력, 순수한 권력만 바랄 뿐이네. 순수한 권력이 뭐냐고? 자네도 그게 뭔지 이해하게 될 걸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과두정치와 다르네. 우리와 다르든 비슷하든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이고 위선자일세.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은 그 수법에서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만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꾸며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까지 했네. 우리는 그들과 다르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걸세.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말일세. 그처럼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367∼368쪽)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점차 '당에 대한 이해와 수용' 쪽으로 기울지만 끝내 감정적인 벽을 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오브라이언에게 '빅 브라더를 증오한다'고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밟아야 할 단계'인 공포의 101호실로 끌려간다. 거기서 가장 끔찍한 공포와 전율을 마주한 그는 자신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에 줄리아마저 배신한다. 모진 고문과 세뇌교육 끝에 정상적인 사고 능력까지 망가진 채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 반체제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체스넛트리 카페에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죄를 고백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든다. 그리고는 총살을 당한다.

 

소설 『1984』는 고도로 정보화된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나 경고를 담은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소설에 담긴 '고도로 억압되고 통제된 감시 사회'는 과거의 숱한 공산권 국가들뿐 아니라, 2018년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북한 정권의 가공할 만한 지배 체제를 거듭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웰이 상상했던 1984년의 공포스런 정치 체제는 다행히 1980년대 후반에 진행된 소련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일부 국가들의 암담한 현실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게다가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통치자가 핵무기 버튼까지 움켜쥔 채 전세계를 상대로 게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질 줄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조작과 날조, 감시와 통제, 억압과 처벌로 유지되는 끔찍한 사회를 차츰 견디다 못한 윈스턴이 오랫동안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어 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도리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제거되는 이야기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윈스턴이 '반체제 혁명을 꿈꾼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고문 과정에서 끝내 배신하고, 석방된 이후에 우연히 서로 조우했을 때조차 이내 서로 냉랭하게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 황량하고도 서늘하다. "그런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온전히 다 사라지기도 전에 텔레스크린에서는 마치 그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울창한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

 

물론 가장 진한 아이러니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오브라이언을 만나기를 갈망했고, 그로부터 온갖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처럼' 사상 교육을 받은 윈스턴이 마침내 죽는 순간에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사실이다. 이보다 더 완전한 파멸과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드는 소설의 맨 끝줄을 온전히 다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의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오웰의 진면목을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의 삶이여! ……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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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담판으로 불려 왔던 '북미정상회담'이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아직도 불씨가 완전히 다 꺼진 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 다양한 속보가 아직도 잔불처럼 깜빡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회담 하나를 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입방아에 앞다투어 올렸을지를 생각하면 여간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이 회담에 쏠린 사람들의 이목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으며, 또한 이 회담을 두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엄청난 텍스트만 하더라도 어떻게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한가롭고도 쓸데없는 '심심풀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 회담의 성사 내지는 성공 여부가 초래할 온갖 심대한 변화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 거대한 변화가 두고두고 숱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못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토록 거대한 판'이 산산조각난 결정적 동기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곰곰 되짚어 보게 되고, 그런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의 '내면 심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화를 겪은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따스한 기미'조차 없었던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이 연탄을 보고 노래했던 '너는 언제 한번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을 새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만큼, 그들 둘 사이는 도대체 뜨거워지기는 커녕 미지근한 기미조차도 없이 언제나 찬 바람만 쌩쌩 불었고, 여차하면 '불바다' 내지는 '분노의 화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끔찍한 사이였다.

 

이토록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으니 '세기의 담판'이 성사되기 위한 '맨 처음 고백'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또한 북미정상회담은 단지 북미간의 일도 아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북한 비핵화'와 'CVID'만큼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도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니 김정은이 40여일 사이에 중국을 두 번이나 바삐 오가고, 폼페이오가 그 멀리서 평양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또한 북미 수뇌들의 메신저 역을 떠맡은 온갖 사람들이 때론 거칠게, 때로는 달콤하게 온갖 다양한 언사를 거듭 주고받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깨진 판'을 다시 이어붙일 수 있다는 희망섞인 속보가 연일 날아들 정도로 숨가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긴 하지만, 적어도 '판'이 깨어질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은 인간의 심리 가운데 몇 가지는 결국 누군가의 분개, 혹은 누군가의 모욕감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들의 '도덕 감정'에 대한 훌륭한 교사였던 아담 스미스 교수님의 강의 한 대목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게 되고, '굴욕과 모욕 사이'를 절묘하게 간파한 우리의 세르반테스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다시금 펼쳐 보게 되었다.(『돈키호테』 속에 담긴 이런 대목 하나만 다시 꺼내 보더라도 이토록 훌륭한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토록 재미나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심오한 인간 심리를 칼날같이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 * *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65∼66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 * *

 

 

『돈키호테_2권』에 등장하는 '굴욕과 모욕의 차이'에 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배경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걸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615년에 발표된『돈키호테_2권』은 애시당초엔 세르반테스의 구상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1605년에 발표된 『돈키호테_1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사정이 돌변했다. 온갖 정체불명의 속편들이 난무했고, 범람하는 수많은 해적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도저히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가짜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과 더불어 독자들의 불같은 성화에 견디지 못한 세르반테스는 결국 속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죽기 몇 달 전에 가까스로 출간된 그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무려 68세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가 10년 만에 다시 속편으로 쓴 『돈키호테_2권』은 1권에서 이미 모험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고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다시 '모험'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했다.(그나마 1권에서 돈키호테가 멀쩡히 살아서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2권에서 (숱한 해적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가 막힌 설정'을 도입한다. 2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이미 1권의 이야기가 시중에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있다는 설정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겪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빤히 알고도 속이는 공작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공작부인은 사냥터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숲속을 헤매던 돈키호테와 산초를 공작의 궁전으로 데려온다. 공작은 궁궐에 있는 하인들을 '사전 교육'까지 시켜 돈키호테를 '진짜 중세의 기사'로 대접하도록 꾸민다. 드디어 꿈꾸던 모험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돈키호테와 산초는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지에 빠져든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바로 자신들의 꾐에 넘어간 돈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기가 막힌 행동들을 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바로 이 와중에 '굴욕과 모욕에 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돈키호테와 산초가 머물고 있는 공작의 궁전 만찬에 성직자가 한 명 초대되는데,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초대된 그 성직자가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직자는 거인이니 비겁자니 마법이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저 사람이 바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작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읽는 그 자체가 바로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몇 번이나 공작을 나무란 바 있었으니, 자기가 의심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는 마구 화를 내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나리, 나리께서는 이 알량한 자의 행동을 우리 주님께 보고드려야 합니다. 이 돈키호테인지, 돈 바보인지, 아니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작자는 나리가 바라는 만큼 그렇게 우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는 이 작자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을 하도록 쉽사리 기회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설교를 돈키호테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당신, 머리가 텅 빈 자여, 스스로 편력 기사이고 거인들을 이기고 악당들을 사로잡았다는 생각을 그 뇌 속에 집어넣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좋게 말할 때 잘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서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나 키우고, 재산이나 살피시오. 바보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당신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두시오. 재수 없게 그런 편력 기사가 있었다느니, 오늘날도 있다느니 하는 것들을 대체 어디서 들은 거요? 에스파냐 어디에 거인이 있으며, 라만차의 어디에 악당이 있단 말이오?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니 뭐니, 당신과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는 그 모든 잡동사니 같은 바보 짓거리들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오?」

 

돈키호테는 존경받는 그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제 그가 입을 다물자, 공작 부부에 대한 존경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친 채 당황한 얼굴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는 말했다.이 말만으로도 한 장을 이룰 만하다.(402∼403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2권』, <31장, 수많은 큰 사건들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31장이 끝난다. 곧바로 이어지는 32장에 '굴욕모욕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과 산초 판사 특유의 입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대목을 (다소 길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5쪽 분량으로 충분히 인용해 볼까 싶다. 핵심적인 부분만 덜렁 떼어 옮기면 아무래도 이러저러한 전후 사정들이 모조리 생략될 테고, 돈키호테가 느낀 '인간 심리의 복잡미묘한 차이'를 두루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돈키호테는 마치 수은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며 더듬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와 지금 내 앞에 계신 분, 그리고 당신의 직분에 대해 내가 늘 가져 왔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경심이 당연히 터뜨려야 할 내 분노의 손을 막으며 붙들어 매고 있소이다. 내가 방금 말씀드린 이유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무기는 여인들의 무기와 마찬가지로 혀이기에, 나 또한 혀로 나리와 똑같이 싸움을 벌일 작정이오. 나리에게는 그런 모욕적인 비난보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를 기대하고 있었소. 좋은 의도로 하는 성스러운 비난은 이와 다른 정황을 필요로 하며 다른 기회를 요구하오. 그러니까 적어도 공공연하게, 그것도 그토록 신랄하게 나를 비난한 것은 좋은 의도로 하는 비난의 한계를 죄다 넘는 일이오. 훌륭한 비난은 신랄함보다 부드러움 위에 훨씬 더 잘 안착하기 때문이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죄인을 얼간이니 바보니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오. 아니라면 말씀해 보시오. 나한테서 어떤 어리석은 짓을 보았기에 나를 지탄하며 모욕을 가하는 것이오? 게다가 내게 아내가 있는지 자식들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과 처자식 돌보는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다니. 덮어놓고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그 집의 주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거요? 어느 기숙사에서 궁핍하게 자라 고작해야 그 지역에서 20레과나 30레과 안에 있는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적이 없는 자가 갑자기 기사도 규정을 들먹이고 편력기사들을 판단하겠다고 끼어들어도 된단 말이오?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찾는 대신 혹독한 시련을 통해 불멸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 간 길을 따르는 것을 설마 헛된 일이거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보는 건 아니시겠지? 만일 기사나 뛰어나신 분이나 관대하신 분이나 태생이 높으신 분이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하지만 기사의 길에 들어온 적도 없고, 그 길을 밟은 적도 없는 학생이 나를 멍청이로 본다면 난 콧방귀도 안 뀔 테요. 나는 기사이며,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사로 죽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오만한 야심의 광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하고 비굴한 아부의 광야로 가며, 또 어떤 이는 속임수 많은 위선의 광야로, 어떤 이는 참된 종교의 광야로 가지만 나는 나의 숙명에 따라 편력 기사도의 좁은 길로 가오. 그 길을 따르고자 나는 재산을 경멸하지만 명예는 아니오. 나는 지금까지 모욕을 갚고 굽은 것을 바로잡으며 무례함을 벌했고 거인을 이기고 괴물들을 짓밟았소이다. …… 나는 나의 의도를 늘 훌륭한 목적에 두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이러한 일을 떠받드는 자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지, 위대하신 공작 각하 내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우, 정말 잘하십니다요!」 산초가 말했다. 「나리, 더 이상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요. 우리 나리, 우리 주인님, 설명도 필요없습니다요. 더 이상 말할 것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더 이상 세상에 참고 버틸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요. 더군다나 이분이 편력 기사들은 세상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부정하고 계시지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아는 것은 전혀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혹시, 형제여 …….」 성직자가 말했다. 「자네가 주인으로부터 섬을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그 산초 판사인가?」

 

「예, 그렇습니다요.」 산초가 대답했다. 「어느 누구나처럼 저도 섬을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라. 그러면 너도 좋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함께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풀을 뜯는 사람>들 중 하나이며, <좋은 나무에 기대는 자는 좋은 그늘을 쓴다>라는 걸 아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요. 저는 좋은 주인에게 기대어 그분을 모시고 다닌 지 몇 달이 되었습니다요.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그분처럼 다른 인간이 될 겁니다요. 그분이 사시면 저도 사는 것이니, 주인 나리께서 통치하실 나라가 있을 것이므로 제가 다스릴 섬도 있을 겁니다요.」

 

「분명 있고말고, 산초 친구여.」 이때 공작이 말했다. 「내가 돈키호테 나리의 대리자로서, 내게 남아도는 꽤 괜찮은 섬을 하나 자네에게 통치하도록 하겠네.」

 

「무릎을 꿇게, 산초.」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리고 자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각하의 발에 입을 맞추게.」

 

산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성직자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사제복을 두고 말하고자 합니다. 각하도 이 죄인들만큼이나 멍청하십니다. 이들이 미친 사람들인지 아닌지 제대로 좀 보시지요! 제정신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들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마당이란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이 사람들과 계십시오.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동안 저는 저의 집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않았고, 공작 부부의 간청과 만류도 소용없이 먹지도 않은 채 가버렸다. 비록 공작은 그가 당치 않을 정도로 화를 낸 것이 어찌나 우스운지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말도 많이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돈키호테에게 말했다.

 

「<사자의 기사> 나리, 나리께서는 나름대로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소. 그러니 그 굴욕에 대해 더 이상 유감은 없을 것이오. 사실 그것이 굴욕으로 보일지 모르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소. 나리도 잘 알다시피, 여자의 말로 굴욕을 당할 수 없듯이 성직자의 말로도 굴욕을 당할 수 없으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굴욕을 당할 수 없는 자는 아무도 모욕할 수 없지요.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이나 성직자들은 모욕을 당해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굴욕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굴욕모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모욕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한 사람이 길에서 딴 데 정신이 팔려 서 있는데, 무기를 든 사람 열 명이 와서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칼을 뽑아 들어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상대방의 수가 많아서 복수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때, 이런 경우 그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랍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더 확실시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때렸다고 합시다. 그러고는 기다리지 않고 도망을 가고 맞은 사람이 그 사람을 쫓아가지만 붙들지 못할 때, 이 맞은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욕은 그에 맞서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린 사람이 불시에 때렸더라도 그 후에 멈춰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상대와 맞서려고 했다면, 맞은 사람은 모욕굴욕을 함께 당한 겁니다. 굴욕스러운 건 기습적으로 맞은 것 때문이며 모욕적인 건 자기를 때린 사람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저주스러운 결투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굴욕은 당했을 수 있지만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나 여자들은 도망갈 필요도 느끼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으며, 버티고 서서 기다릴 이유도 없지요. 성스러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이들과 같으니, 이 세 부류의 인간들은 공격을 위한 무기나 방어를 위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라 해도 누구를 모욕하는 일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지요. 아까 전에 내가 굴욕을 당했을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다시 어떤 의미에서든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모욕을 당할 수 없는 자야말로 어떤 모욕도 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훌륭하신 분이 내게 하신 말씀을 유감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렇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분이 이 자리에 좀 더 계셨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뿐입니다. 그분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깨우치게 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

 

 - 『돈키호테_2권』, <32장,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돈키호테가 한 대답과 다른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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