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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지옥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74
스탠리 엘린 지음, 김영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제8지옥>은 개인적으로 20세기 최고의 걸작 미스터리 단편집들을 꼽는다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특별요리>의 작가 스탠리 엘린이 1958년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음산한 제8지옥의 인간군상! 폭력적 도박, 썩어빠진 경관, 성에 얽힌 스캔들. 음산하고 혼탁한 제8지옥의 군상. 향기로운 필체로 그려낸 스탠리 엘린 최고 걸작!" 이라는 다소 선정적이고 과장된 띠지의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다소 이색적인 책의 목차가 또 한 번 눈에 띈다.
제1부 콘미 (p11), 제2부 콘미와 커크 (p29), 제3부 커크 (p301), 해설 (p376).
페이지 수를 보건데 1, 2, 3부로 이루어진 3부작 이라기 보다는 1부는 프롤로그의 성격, 3부는 마무리와 에필로그의 성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저 기괴한 소제목은 무슨 의미일까? 등장 인물을 살펴보면, 콘미는 사립 탐정사의 전임 사장이고 커크는 사립 탐정사의 현재 사장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콘미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회상 장면 이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달랑 세 개의 목차에 붙은 이 독특한 소제목들은 이야기의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커크는 뉴욕의 한 잘나가는 사립 탐정사의 현직 사장이다. 그가 "경영"하는 탐정사는 네로 울프의 가내 수공업에 가까운 단란한 탐정사무실이나 말로나 아처의 "도꼬다이"식 나홀로 탐정사무실이 아닌 큰 조직과 지사까지 갖춘 기업형 사무실이다. 해미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콘티넨탈 탐정사와 비견할 수 있을까. 커크는 이러한 대형 탐정사의 사장답게 탐정이라기 보다는 경영인에 가까운 인물이며 여느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에서 묘사하는 탐정과는 사뭇 다른점이 많다. 그는 항상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적당한 불의와도 언제든지 타협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추리력이나 직관력 보다는 경영 철학과 용인술 등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사건의 해결 보다는 사건 의뢰인인 피고의 애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를 위해 오히려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기를 바라기도 한다.
뉴욕 경찰의 오직 사건에 휘말린 말단 경관 랜딩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커크는 처음부터 회의적인 자세로 사건을 바라보지만 수사를 할 수록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8지옥'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중 제8장을 가리킨다. <신곡>을 읽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이 곳은 단테가 그려낸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음산하며, 세속적인 악이 모두 모인곳이라고 한다. 엘린은 타락한 대도시의 인간군상을 '제8지옥'으로 묘사하고 있다.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그늘지고 혼탁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이 소설은 로렌스 블록의 작품들인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나 <백정들의 미사>와 비견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맬리 커크는 블록의 매튜 스커더 만큼 심각하지도, 암울한 현실에 번민하며 고뇌하지도 않는다. 커크는 낙관적인 인물이다. 물론 이는 2~3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갖는 두 주인공의 시대적 배경과 그 시간만큼 더 타락하고 흉폭해진 도시의 현실 탓이기도 하다.
<제8지옥>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단지 사립 탐정사의 사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일반 소설에 가까워 보인다. 소설의 중심은 사건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트릭도 기교도 없다. 엘린의 작품에는 '꾸밈'이 없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통념'에서 출발한다"는 엘러리 퀸의 엘린에 대한 평가는 아주 적절해 보인다.
단편 소설만큼 스탠리 엘린의 고도로 정제된 문장들과 허를 찌르는 반전 등이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모던하면서도 간결한 문체, 수미 쌍관적인 구조를 취하는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장면 등은 장편 소설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엘린의 또 다른 매력을 잘 보여준다.
p.s. 언제고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리라는 마음을 먹고는 있었는데, 로렌스 블록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을 읽고 있으려니 문득 생각이 나서 읽은지 근 1년이 되어가는 책의 리뷰를 쓴다. 그런 이유로 내용이 좀 어색하고 싱싱하지 못한 듯 하다. 역시 책을 읽은 직 후 쓰는 생생한 리뷰가 쓰는 사람들에게나 읽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글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