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경찰 소설'은 이제 다양하게 분화한 미스터리 소설의 하위 장르 중에 없어서는 안될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경찰 소설은 단지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경찰 소설은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실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경찰의 조직 수사는 과거 명탐정들의 들러리 역할만 떠 맡아야 했던 바보스러운 경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경찰은 어떠한 명탐정보다도 많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경찰 소설은 경찰의 수사활동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들이다.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를 통해 '경찰 소설'을 정립한 작가다. 제 1작인 <경찰 혐오자> 이래 2005년 타계할 때 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50편이 넘는 87분서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87분서 시리즈는 특출난 주인공이 없다.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 시의 경찰청 산하 87분서 소속 형사들이 집단으로 등장한다. 각 작품마다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형사들이 바뀌기도 하며, 범죄 해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이 형사실에 신참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87분서 형사들의 시간은 지극히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시리즈를 50년 가까이 이어가지만 작품 내의 형사들은 10년의 나이도 채 먹지 않는 것 같다.

 

시리즈 한편 한편은 요새 나오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에 비해 상당히 짧은 분량이다. 그만큼 군더더기도 없다. 그렇지만 맥베인 특유의 빠른 호흡과 간결한 문장이 주는 매력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 50~70년 대의 영미 미스터리는 그동안 국내 미스터리 시장에 공백기나 마찬가지였다. 작년에서야 처음 국내에 소개된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도 이시기의 대표작이다. 87분서 시리즈도 예외가 아닌데, 50편이 넘는 작품 중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은 모두 10편이 채 안될 것이다. 그나마 해적판에 가깝게 나왔던 작품들은 모두 절판되어 구하기도 어렵고, 여러군데서 나온 시리즈 1작인 <경찰 혐오자>와 해문에서 나온 <10 플러스 1>만이 현재 새책으로 구해 볼 수 있는 '유이한' 작품이었다.

 

 

왜 <경찰 혐오자>만 줄기차게 중복 출판되는가!라고 울부짖었던(?) 기억도 이제 10년 가까운 예전 일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새해 벽두에 반가운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구 동서 추리문고로 출판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살의의 쐐기>가 새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이 땅의 맥베인 팬들이여 경배할 지어다. 내가 읽어본 많지 않은 87분서 시리즈 중 <살의의 쐐기>는 최상급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시리즈를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라도 독립적인 각각의 이야기들을 즐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뒷 날개에 87분서의 주요 형사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살의의 쐐기>는 읽기 시작하면 결코 멈출수 없는 엄청난 속도감과 긴박감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결말에 대한 궁금증에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 없이 책장을 넘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책장을 덮는 순간 제목이 의미하는 절묘한 중의성을 깨달으며 다시 한 번 만족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소설가들은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소설가가 되었다"라고 말할만한 작품이 하나 씩은 있다고 한다. 출판사도 "이 책을 내고 싶어서 출판사를 만들었다"라고 할 만한 책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띄엄띄엄 읽던 추리소설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한 것이 지난 2001년의 일이다. 지금은 없어진 추리소설 독자들의 커뮤니티인 모사이트를 알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많은 고수들이 남긴 리뷰와 작품 소개, 토론 등을 접하며 미스터리 애호가로의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 시절 그 사이트에서 가장 돋보이는 분 중 한 분이 "carella "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이었다. 87분서 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인 '스티브 카렐라'형사에서 유래된 닉네임이다.

 

세월이 흘러 좁디 좁은 미스터리 장르 소설 바닥이다 보니 온라인 상에서 동경하는 고수였던 carella 님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몇 년전 carella 님은 '미스터리 소설 애독자가 출판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책을 직접 출판한다'라는 오랜 꿈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출판사를 차리게 되면 꼭 내고 싶었다는 87 분서 시리즈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에드 맥베인과 87분서 시리즈에 대해 정통한 독자가 출판인이 되어 직접 만들어 낸 책인 것이다. 본문 뒤에 수록된 풍성한 해설이 이를 증명한다.

 

출판 시장이 유래없는 불황의 시기를 겪으며 어려운 와중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carella 님의 건투를 빈다. 이 책은 꼭 많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적어도 그만한 재미는 충분히 갖고 있다. 깔끔한 장정의 책등을 보며 이 책이 시리즈로 줄줄이 나와서 내 책장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년전쟁 세트 - 전5권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떠오른 아주 오랜 두 가지 기억이 있다.

그 중 더 오랜 기억 하나는, 유현종의 소설 <임진왜란>이다. 이 책을 읽은게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라서 책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몽사 소년문고라는 전집에 들어 있었던 책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었지만 제법 진지하게 전쟁을 서술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기억은 고등학생 시절의 일로, 현대문학 교과서에 일부가 실려 있었던 김성한의 <바비도>다. 1980년대 그 시절의 교과서 작가 중에 김성한은 비교적 젊은(?) 작가였다. 소설의 내용도 외국을 배경으로 한 종교 재판을 다루고 있어서 참 특이하고 인상 깊었다. 의연하게 삶의 길을 포기하는 바비도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제법 숭고하게 다가왔다. 돌이켜 보면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80년대의 엄혹한 시대상황과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세월은 25년 가까이 흐르고, 상대적이라지만 젊다고 여겨지던 김성한이 고인이 된 연후에야 그의 역사소설 <7년전쟁>을 읽게 되었다. 그제서야 중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에 컬러 삽화와 함께 실렸던 소설 <임진왜란>의 기억이 떠 오른다. 송영방 화백의 그 익숙한 붓터치와 함께.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연재 소설을 읽을 만한 깜냥이 못 되었던 나는 이렇게 나마 뒤늦게 <7년전쟁>을 접하게 되었다.


작가의 약력이 이채롭다. 순수문학을 업으로 하다가 언론계에 투신하여 <사상계>와 <동아일보>에 재직했다. 그리고 정년퇴임으로 보이긴 하지만 80년 신군부의 집권과 언론 통폐합 시절에 맞물려 언론인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 후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써내려 간다.

 

<7년전쟁>은 이런 작가의 약력에 어울리는 긴장감을 갖고 있다. 신문 기사처럼 간결하고, 감정에 치우친 불필요한 가감이 없다.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과 국제 정세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을 유지한다. 이렇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역사 소설이 우리 문학사에 있었던가? 과문한 탓인지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 소설은 종군 기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르포르타주라 할만큼 생생하다. 엄청난 사료 조사와 입체적인 분석이 돋보인다. 작가의 상상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독자를 선동하고 앞서나가 흥분할 법한 장면에서 조차 담담한 눈으로 사실을 조목조목 묘사한다. 소설 후반부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멸, 이순신의 재신임, 기적과 같은 명량에서의 승리. 소설가라면 욕심을 부릴만한 처절한 소재이고, 극적인 장면이다. 실화가 아니었다면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고 치부할 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냉정을 잃지않은 서술은 오히려 더 생생하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소설은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서둘러 결말에 이른다. 연재 상황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인지 권말에 수록된 작가 노트는 풍성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본작의 후일담이나 에필로그에 해당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을 다 읽은 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중요 부분이라 하겠다.

 

귀에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온 역사적 사건이지만, 사실 그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도 그 중의 하나다. 1592년에 발발하여 7년 간 전개 되었던 전쟁, 통신사들의 엇갈린 증언, 선조의 야반도주, 이순신의 활약과 거북선,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각각의 단편적인 사실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7년 동안 전쟁이 거시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종료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 내부의 사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으며 오롯이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나라와 위정자들은 온전히 되풀이 되는 역사속에 과거를 답습하고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임진왜란과 6.25는 놀랄만큼 유사한 사건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위정자와 지배층들이 보여주는 부패하고 무능한 행태, 수도를 사수한다고 민중을 속여 놓고 뒤도 안돌아본 채 도망치는 겁쟁이 조정과 정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오판과 잘못된 정책, 외국의 원조 없이는 나라가 결단나고 말 수 밖에 없는 허약한 국방력, 도망칠 때는 언제고 안전한 곳에서 결사 전쟁을 외치는 왕과 대통령, 적군과 원조군 모두에게 학살당하고 약탈 당하는 민중, 그리고 휴전 협상에서 제3자로 소외되는 전쟁 당사국.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통점들은 마치 평행이론을 보는 듯 하다. 1500년 대에 일어난 사건에서 한 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20세기 국가. 참으로 부끄럽고 불쌍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할 것인가.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 작가는 서언에서 준엄하게 일갈한다.


의도적인지 모르겟지만 우리는 그동안 민족사를 다룰 때 '전쟁'이라는 용어를 회피해 왔다.
'임진왜란'이 그렇고, '병자호란'이 그렇다. '6.25 사변'이 그렇고, '몽고의 침략'이 그렇다.
국가간의 전쟁을 단순히 나쁜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리', '변괴', '사달'정도로 치부해 오지 않았나. '7년 전쟁', '조청전쟁', '한국전쟁', '항몽전쟁' 등이 더 적합한 용어가 아닐까?
어설픈 명칭을 부여하여 전쟁의 선량한 피해자인척,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고 외면해오지 않았는가 돌이켜 봐야 한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인데 많은 의병들과 관군들이 일치 단결하고, 이순신 장군이 용감하게 적군을 무찔러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라고 피상적으로 배워 왔다. 하지만 소설에서 보듯 임진왜란은 그렇게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명, 일본, 조선왕조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대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자세한 사정이 비록 우리에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진보적 재야 역사학자인 이이화는 10여년 전 저서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15년 이상 앞서 작가는 <7년전쟁>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제목만으로도 작가의 역사적 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소설은 훌륭하게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탓인지 신문 연재 당시 고수하지 못했던 제목을 제대로 살려 <7년전쟁>으로 새롭게 출간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접하고, 역사에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의 감동과 재미는 물론 덤이 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2-09-1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게 누구시죠? 반갑네요. ^^

하이드 2012-09-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하이드 2012-09-1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손님의 별다섯이라니, 임진왜란이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사읽고 싶네요. 반갑습니다!

oldhand 2012-09-1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 님, 하이드 님, 잊지 않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
역사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한 두권 짜리 책이 아니니 대하 역사소설을 좋아하시거나, 임진왜란이 궁금하신 분들만 읽으시라고 조심스럽게 추천합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3학년 겨울, 연합고사를 치르고 빈둥거리며 지내던 나는 수업이 일찌감치 끝나자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갔었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즐겨 가던 서점에 들렀다. 


당시 해문 출판사에서 발행 중이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에 열광하고 있던 나는 크리스티 문고가 꽂혀 있는 서가 부터 찾았다. 몇 달 간격으로 해문의 빨간 책, 애거서 크리스티 문고가 목록을 늘려 가던 시기였다. 근간으로 예정돼 있는 <화요일 클럽의 살인>,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같은 책들을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하지만 이미 바로 그 전날 크리스티의 신간을 두 권이나 샀기 때문에 뭔가 다른 살만한 책을 찾아 보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래, 이제 크리스티 말고 다른 작가의 책들도 좀 읽어봐야 겠다.'란 마음으로 서가를 훑어 보다 보니, 해문의 추리 걸작선이 이전의 세로 쓰기 판을 개정해서 새로 발행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집어 들었던 책은 다름 아닌 전설의 걸작 <환상의 여인>. 크리스티 문고는 1500원인데, 이 책은 비싸다. 2800원.

표지가 참으로 옛스럽도다.


그러고 나서 또 근처에 있던 다른 서점에 들렀더니 내 눈에 확 들어오는 파란 색을 띤 문고본이 있었다.


'오오라, 새로운 미스터리 문고가 나왔나 보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제법 희귀한 아이템이 된 '자유 추리 문고'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유 추리 문고는 해문의 크리스티 문고처럼 2-3권 씩 순차적으로 발행된 것이 아니라 제법 일시에 많은 책이 한꺼번에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초판 발행일자와 당시 내가 자유 추리 문고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와는 6개월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이미 50권의 목록이 서가를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리에 대한 지식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으로 쌓아 올린 것이 전부였던 당시에도 자유 추리 문고의 목록은 꽤나 익숙한 작가들과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심하던 내가 '유명 작가의 데뷰작'이라는 이유로 골라 잡은 책이 다름 아닌 <로마 모자의 비밀>이었다.

1986년과 2011년의 간극. 껍데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책을 산 날짜와 서점을 꼼꼼하게 책에 적어둔 관계로 책을 샀던 그날의 상황은 비교적 생생하게 옮길 수 있지만 정작 <로마 모자의 비밀>에 대한 독후 감상은 그다지 변변히 기억에 남아 있지 못하다. <환상의 여인>은 미친듯한 속도로 읽어 버렸지만, <로마 모자의 비밀>은 두 권이기도 하고, 내용도 그다지 속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읽었던 기억 정도만이 남아 있다. 팬더 추리 문고로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보다 재미없게 읽었던 것은 분명하다.


엘러리 퀸에 대한 본격적인 애정과 탐독은 그로부터 10여 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시그마 북스로 쌓아 올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최초의 만남은 아동판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고 최초로 접한 완역본은 자유 추리 문고였던 것이다.


시그마 북스 이후 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엘러리 퀸이 돌아왔다. 국내에 발간된 엘러리 퀸의 모든 작품들을 이미 소장하고 있지만, 순조로운 시리즈 출간을 응원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너무 오래전에 읽었던 지라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은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새로 사서 읽게 되었다. 유일하게 시그마 북스로 갖고 있지 않은 국명 시리즈이기도 하다.


25 년여만에 읽은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기대보다 재미있었다. 국명 시리즈를 관통하는 엘러리 퀸의 논리는 '소거법'이고, 그 첫작품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도 충분히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독자에의 도전을 통해 진정한 논리 미스터리를 표방한 엘러리 퀸은 이 후 일본의 신본격 세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가장 충실하게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작품을 읽지 못한 작가라서 섣불리 언급하기는 좀 두렵지만 노리즈키 린타로나 구라치 준도 근사한 계승자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천상 직업이 논리를 추구해야 하는 개발자인 나는 이러한 소거법에 의한 범인 색출이 언제 봐도 짜릿하다. 오히려 엘러리 퀸의 중후기 작품들보다 초기 작을 더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반 다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이런 완벽한 논리적 추리 기법은 엘러리 퀸에 의해 완성되고 제창되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많은 후배 작가들이 그를 따르고, 모방하고, 넘어서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처녀작이기에 접할 수 있는 몇 가지 재미있는 설정들도 이 작품의 가치에 빛을 더한다. J.J. 맥의 서문은 퀸 독자들에게 좋은 호사거리임에 틀림없다. 일찌감치 은퇴해서 결혼하고 이탈리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엘러리는 누구이며, 중년이 되도록 독신인 채 왕성한 추리 작가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라이츠 빌의 엘러리는 누구란 말인가. 당시에는 버나비 로스의 필명을 보고 J.J. 맥의 서문을 떠올리며 의심하는 독자들이 없었을까. 등등.


전성기의 걸작들에 비하면 소설적 재미나 짜릿한 반전, 그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쾌함은 다소 부족하고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거장이 이후로 쌓아올린 커다란 탑의 주춧돌로 부족함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루인 수사의 고백 캐드펠 시리즈 1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드펠 시리즈의 첫 권 성녀의 유골을 처음으로 읽은 것이 시리즈가 국내 완간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쉬엄쉬엄 생각날 때 마다 몇 권씩 사두고 묵혔다 읽고를 반복, 싸목싸목 쌓여 햇수로 5년여가 넘어서 어느덧 15권 <할루인 수사의 고백>에 이르렀다. 완독의 고지가 이제 멀지 않은 셈이다.  

캐드펠 시리즈가 국내에 소개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기에 작가 앨리스 피터스는 비교적 현대 미스터리 작가라고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고故 피터스 여사는 무려 1913년 생으로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는 앨러리 퀸, 딕슨 카 등과 불과 10년 차이도 나지 않는 연배다. 작가 데뷔 연도는 1936년. 

작가 정보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해도 1959년이기에 20년 가까이 활발히 활동하다가 그의 나이 60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여든 살을 넘어서까지 완성시킨 시리즈가 바로 캐드펠 시리즈인 것이다. 작가의 고향인 잉글랜드 시로프셔를 공간적 배경으로, 작품이 씌여질 때로부터 800여년 전인 12세기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열 다섯 권의 캐드펠 시리즈를 읽어온 경험으로 미루어 피터스 여사는 대단히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라고 짐작함에 부족함이 없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젊은이들은 왜 그리 많은지. 내전의 시기에 더해 살인이 난무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천착이다. 크리스티의 소설도 로맨스 소설의 변형이라는 이야기들도 많긴 하지만 로맨스 소설적인 강도로는 캐드펠 시리즈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본 작가의 인상 또한 어찌나 선한 얼굴인가! 사랑과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낙관이 캐드펠 시리즈 곳곳에 흘러 넘친다.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해왔고 어떤 결혼 생활을 해왔기에 6,70 대의 나이에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제인 오스틴을 읽을 시간이면 뒤마를 한번 더 읽겠다. 브론테 자매보다야 당연히 디킨즈지!'라는 마초적 독서관觀을 갖고 있는 나는 이런 로맨스 지상주의가 다소, 어쩌면 많이, 오글거린다. 처지와 상황이 다른 선남 선녀가 첫눈에 반하고,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별다른 갈등 없이 외부적인 고난만을 겪어낸 후 순조롭게 맺어지는 이야기들은 재밌게는 읽힐지라도 가슴에 맺히는 이야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남은 수십년을 과연 처음처럼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굳이 보태게 된다. 

지금까지 봤던 15개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시리즈 11권 <반지의 비밀>인데,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 반해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기다림과 깊은 신의를 주제로 한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할루인 수사의 고백> 역시 꽤나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소설의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 빤히 보이는 설정과 예측되는 결말로 인해 그저 그런 시리즈 소설 중 한 권임이 유력했으나, 무한한 로맨티스트로만 알고있었던 작가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영원성, 영속성이 아닌 사랑의 찰나적 속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예측된 결말에 이르렀지만, 그동안 알아왔던 작가의 다른 면모를 접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거기에 더해 에들레이스 노부인의 그 압도적인 캐릭터는 선악과 호오를 떠나 시리즈 역대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셀린과 헬리센드 두 젊은 연인들의 애타는 간절함과 해피엔딩보다 지난했던 18년 세월을 오롯이 가슴에 담아두고, 기꺼이 기쁘게 돌아서는 할루인 수사의 뒷모습이 더 찬란해 보이는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지금 그 옛날의 첫사랑으로 돌아가라 하더라도 그녀는 등을 돌릴 터였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도 한철인 법이다. 이제 그들의 계절은 봄의 폭풍우와 여름날의 열기를 넘어 초가을날 낙엽 떨어지기 전의 황금빛 평온으로 접어들었다. 

"제 뒤에 남겨진 것들이 모두 잘 있는데요 뭐. 아주 행복하게. 제가 어디에 묶여 있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 독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 지난 2001년이었다.
가끔 땡기면 사서 읽곤 하던 추리 소설에 본격적으로 탐닉하게 된 것도 신문에 소개된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찾아 들어가 정보와 감상들을 얻어 듣기 시작한 이후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암흑기였다. 서점에 깔려 있던 책들을 마지막으로 시그마 북스가 절판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며, 해문의 Q 미스터리도 절판 상태였고, 현재의 세계 추리 걸작선으로 재 발간되기 전이었다. 일신, 문공사 등의 미스터리 시리즈도 2000년 대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서점에서 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끔 단행본으로 나오는 현대 스릴러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미스터리라고는 해문의 빨간 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던 시절.
오로지 헌책방을 전전하거나, 고수들이 올린 절판된 동서나 자유의 리스트와 리뷰들을 보면서 입맛만 다시던 시절.

이 후 셜록 홈즈 완역판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브라운 신부, 괴도 뤼팽, DMB 등 시리즈 기획물들이 줄줄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일본 미스터리 열풍에 힘입어 실시간으로 이웃 나라의 신작들을 접할 수 있게 된 요즈음에 이르렀다.

주저리 주저리 옛날 신세 한탄을 해 댄 이유는,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전무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 중 한 명이 다름아닌 존 딕슨 카였기 때문이다.

DMB로 재 발간된 <모자 수집광 사건>, <화형 법정> 등과 초역 되었던 <세 개의 관> 이 후, 미스터리 부흥의 시대에 한 걸음 비껴서 있는 듯이 보였던 딕슨 카의 소설들이 2009 년을 맞이하여 속속 새롭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왕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해적판으로만 나왔었던 데뷔작 <밤에 걷다>, 딕슨 카의 대표작 리스트에 이름을 빼놓지 않고 올리던 <구부러진 경첩>과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카가 후반기에 주력했던 분야인 역사 미스터리들 중 최초의 번역인 <벨벳의 악마> 까지. 향 후 출간이 확정된 몇 몇 작품들을 더하면, 딕슨 카에 대한 미스터리 독자들의 오랜 갈증은 거의 해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은 그동안 접했던 카의 미스터리 소설에 비하여 대단히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사에 관련된 세 사람이 펠 박사에게 사건에 대해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털어 놓는 하룻 밤 동안의 이야기다. 수사관 캐러더스, 경찰 부국장 허버트 암스트롱, 카의 팬들에게는 익숙한 해들리 총경까지. 처음 접한 사건은 대단히 불가해한 점들이 여럿 눈에 띄지만, 각각의 진술이 진행됨에 따라 대부분의 의문들은 풀려 나간다. 해들리 총경의 진술에서는 범인까지 확실해 보이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여러가지 단서들을 바탕으로 탐정의 추리과정을 막판까지 꾹 묻어 두었다가 일시에 터뜨리며 모든 의문점들을 해소하는 일반적인 퍼즐 미스터리나 딕슨 카의 여타의 작품들과는 느낌이 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구조가 딕슨 카의 장점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막판의 깜짝쇼를 포기하고, 서술 과정의 흥미를 유지하고 있기에 단 한건의 살인 사건과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트릭임에도 장편 소설의 결말까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한다. 중간 중간에 선보이는 딕슨 카 특유의 유머 코드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비교하자니, 다소 초라하고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고 즐겨 읽던 추리소설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 들어 있다.

1936년 발표된 거장의 대표작이 70년이 넘어서야 이 땅에 소개되었다. 하루에도 화제작들이 여러권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라서, 읽을만한 책도 없던 7-8년 전 소수의 매니아들이 모여서 리스트만 거론하며 안타까워 하던 그 시절이 아니라서, 카의 미번역작은 커녕 절판된 책들이라도 어느 헌책방에 있더라는 소문만으로 달려가던 그런 열성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겪었던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서 숱하게 들었던 "예전엔 어려웠지. 지금은 정말 좋아졌다~"류의 훈계나 회고담은 아닐지라도, 새롭게 미스터리의 세계에 빠져든 신진 독자들과, 오매불망하던 전설의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도 이제는 그냥 무덤덤해진 오랜 독자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고 싶다.

"이 책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전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p.s. 딕슨 카의 소설이 단순히 추억 상품으로 취급 받는 것은 억울하다. 재미나 품격 면에서 손색이 없는 고전이 단지 구닥다리라고 해서 외면 받는 것이 안타까울 뿐. 

p.s.2. 펠 박사의 사후 처리는 예전부터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일로 번스의 방식이 맘에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09-11-0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의 귀환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

oldhand 2009-11-02 20:25   좋아요 0 | URL
아래 페이퍼 댓글로 파란여우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저 어디 다른 곳에 간 적은 없습니다. 귀환이라기 보다는 그냥 잊어 먹을만 하면 한번씩 집에 들르는 뜸한 탕아라고나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