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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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켜놓고 이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쓰고 싶어라!"

키다리 아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제루샤 애벗이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만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편지 안에 그녀의 기쁨과 슬픔, 분노, 행복, 변덕이 다 들어있다. 편지글만으로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어찌 이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며칠 전에 읽었던 <투 더 레터>라는 책에서 '편지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라는 말을 봤었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다. 


고아원에서 자라난 제루샤 애벗은 어느 날 리펫 원장님에게서 돈 많은 어떤 평의원님이 그녀를 후원하여 대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녀의 국어 실력을 높이 평가해 작가로 키우고 싶다는 말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들과 생활에 대해 그분께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것, 단, 절대 답장은 기대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후원하는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른 채 대학교에 간 제루샤 애벗은 그가 키가 크다는 정보 하나 만으로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며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고아원 원장이 전화번호부에서 랜덤하게 골라 제멋대로 지어준 제루샤 애벗이라는 본명 대신, 자신을 사랑스러운 '주디 애벗'이라 칭하며.


키다리 아저씨의 원제목인 Daddy long leg는 사실 우리말로 '장님 거미'라는 뜻이다. 다리가 긴 거미인데, 아니 이렇게 스윗한 느낌의 고전 소설의 제목이 사실은 벌레 이름이라니, 우리나라에 장님 거미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ㅋ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 덕분에 대학교에 가서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주디 애벗은 처음엔 고아원 안에서만 살아왔던 과거 탓에 일반적인 가정 환경에서 살아온 친구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곤 하지만 곧 특유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잘 사귀고 공부도 잘하는 사랑스러운 숙녀로 성장해 나간다. 

 


이 책이 쓰였을 당시에는 여성에게 투표권도 없을 때였나 보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보다 하등하다는 인식이 많을 시대였을 텐데 주디 애벗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생각이 뚜렷하고, 멋진 독립심을 지닌 여자다.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은 후원은 딱 잘라 거절할 줄 아는 뚝심도 지녔다. 사실 한참 사고 싶은 거 많고, 스스로를 치장하고 싶은 여대생이 용돈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그녀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솔직한 모습 때문이다. 자신의 편지에 답장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삐지고 화내는 모습부터 그 나이 젊은 숙녀의 설레는 일상 모습까지 편지에 너무 예쁘게 담겨있다. 특히나 책 속 일러스트가 너무 예뻐서 한참이나 그림을 쳐다보게 된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게 표현했을까. 



「맥 빠지는 일이 이렇게 줄줄이 일어나는 하루를 경험해 본 적 있으세요? 큰 시련이 닥쳤을 때만 인격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위기에 대처하거나, 치명적인 비극에 맞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날그날의 사소한 불운들을 웃음으로 넘기는 일은 '정신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답니다. 

제가 키워 나가야 할 게 바로 이런 종류의 인격이에요. 저는 인생을 요령 있고 공정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놀이로 생각할 거예요. 놀이에서 지더라도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넘길 거예요. 이겨도 마찬가지고요.」 

< 키다리 아저씨 p.71>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한없이 감사할 줄 알며, 매일매일 닥치는 작은 불운도 웃음으로 넘기려 노력하겠다는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스러운 주디 애벗에게 매일 편지를 받았던 키다리 아저씨는 그녀의 편지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었으리라.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로맨스 이야기에 야밤에 혼자 콩닥콩닥하며,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귀에 걸렸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이미 아는 얘기라며 넘겼던 사람들도 꼭 다시 읽어보기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다. 

멋진 여자 주디 애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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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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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6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601 WORDS : 지적 리딩을 위한 고급 영단어 지적 리딩을 위한 보카 시리즈
머레이 브롬버그.줄리어스 리엡 지음, 오수원 옮김 / 윌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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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1100 words가 나왔을때 아마도 이것보다 어려운 시리즈는 나오지 않겠지 했는데, 그야말로 지적 리딩 시리즈의 최상급 단어교재 601 워드 words가 나왔다.  어쩌다 보니 난 이 시리즈의 모든 단어책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공부는 안하지만(?) 왠지 가지고만 있어도 뿌듯한 느낌ㅋ 한때 영어단어 외우는 걸 좋아해서 엄청나게 많은 단어를 섭렵했을 때가 있었으나 이젠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때의 10%라도 기억이 나려나 싶지만 여전히 영어 공부는 늘 도전하고 싶은 과제다. 
지적 리딩 시리즈는 단순히 단어와 뜻 위주로 외우도록 구성된 책이 아니라 문장안에서 다양한 늬앙스로 쓰이는 단어를 읽고 퀴즈를 풀어보며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구성된 단어교재이다. 실제로 외국 중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재를 그대로 가져온거라 우리나라 단어교재보다는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순 있다. 그만큼 현지에서 많이 쓰이는 구문과 문장, 즉 소설과 잡지등에 등장하는 다양한 구문을 가지고 단어의 다채로운 늬앙스를 공부할 수있어 흥미롭다. 


지적 리딩 시리즈 출간 순서는 504 워드 -> 1100 워드 -> 300 워드 -> 601 워드 순이지만, 난이도 수준으로 따지면 300 워드 -> 504 워드-> 1100 워드 -> 601 워드 순이다. 300 워드가 비교적 가장 쉬운 수준의 단어위주로 공부할 수 있는 기본 영단어 책이지만 말했듯이 외국 학생들이 자국어 공부를 위해 많이 쓰는 교재이므로 단어수준이 생각만큼 쉽진 않다. 4가지 책 모두  SAT나 토플, 텝스, 편입, 공무원 영어에 쓰이는 단어를 다루고 있는 만큼 토익 수준의 단어보다는 좀 더 어렵다고 보면 된다. 같은 시리즈이지만 안에 구성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1100워드 도 단어 수준이 꽤 어렵다고 느꼈었는데, 과연 601 워드(words)는 어떨지 살펴볼까? 
이전 시리즈들이 하나의 글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사용된 다양한 단어를 익히는 과정으로 제시된 방식이라면 601 워드는 좀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비슷한 성질의 단어를 모아 뜻과 함께 먼저 제시하고, 그 단어가 실제 사용된 문장을 통해 늬앙스를 익힌 뒤 다양한 퀴즈를 통해 익숙해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총 40회 기준으로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평일에 매일 공부한다고 한다면 2달 정도의 코스로 끝내 수 있는 과정이다. 단어의 수준은 음... 솔직히 거의다 모르겠는 수준? ㅋㅋ (아 부끄러;ㅋㅋ) 601 워드(words) 수준의 단어까지 거의 다 섭렵한 사람은 아마도 영어로 쓰인 거의 모든 글(문학, 전문 칼럼 등)을 읽고 해석하는데 영어 사전이 필요없지 않을까 싶다. 각 시리즈마다 해당 숫자만큼의 단어를 익히게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나온 책이라 601개의 단어라고 하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흔하게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보다는 전문적인 글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 익숙해지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단어 선별부터 미국인들이 글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어휘 위주로 뽑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매우 효율적인 공부가 될 수 있다.


매일 15개 정도의 단어를 다양한 문장 속에서, 퀴즈를 통해 물고 뜯고 맛보면서 공부해가다보면 나름의 성취감이 있을 것이다. 다만 영어 초보가 처음부터 가장 어려운 601 워드부터 달려들었다가는 멘붕이 올 것이다, 300 워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꾸준히 공부하면서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영어 원서를 막힘없이 술술 읽고 싶은 욕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빽빽이 단어 외우기 대신 요렇게 문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외울 수 있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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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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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한 소년을 죽였다.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그야말로 우연히 살인자가 된 12살 소년 앙투안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평소 자신을 그렇게 잘 따르던 옆집 소년 레미, 그 동그란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년이 앙투안의 몽둥이질 한방에 죽어버렸다. 눈앞에서 죽어버린 아이, 갑작스럽게 살인자가 되버린 앙투안은 그 나이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아이의 시체를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무 구덩이 사이에 숨긴다. 일단은 당장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그 후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부모와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찾아나서지만 수색 작업이 제대로 마무리가 되기도 전에 엄청난 폭우와 바람이 불면서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아이의 실종은 마을의 또 다른 불행에 묻혀 진실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어영부영 마무리 되어버리고 마는데...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한 아이가 겪었던 이 사흘이 아이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시간상으로 쫓아다니며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을 보면 사뭇 특이하다.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이 누구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범죄장면을 보여주고 범인의 변화하는 심리를 보여주는 식이다. 앙투안의 입장에서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많아서 앙투안의 불안이 읽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 들어 심장이 함께 쫄깃해진다. 그런데 앙투안이 노력해서 완전범죄를 만들어가는 식이 아니라 뭔가 하늘의 도움(엄청난 폭우)이나 우연 같은 것들이 뜻하지 않게 앙투안의 범죄를 숨겨준다. 앙투안은 처음엔 너무 무섭고 괴로워서 차라리 빨리 자신의 범죄가 밝혀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 연인이 생기고, 의사로써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삶이 펼쳐지자 어떻게든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는 것을 막고 싶다. 과연 그의 죄는 사람들 앞에 낱낱이 밝혀질런지... 

<오르부아르>로 공쿠르상을 거머쥔 작가가 다시 추리소설을 썼다. 추리소설로 데뷔한 작가가 순수문학으로 공쿠르상을 받고, 다시 추리소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다니, 필력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오르부아르가 워낙 칭찬이 자자한 책이라 언젠가 읽어야겠다며 리스트에 올려둔 책인데 그 후속작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먼저 읽게됐다. 읽고나니 그의 다른 작품들이 더 많이 궁금해졌다.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놨다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끝에서 빵 터뜨려주는 필력이 대단하다. 한편으로는 12살이 진짜 이런식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나이인가 하는 궁금함도 생긴다. 12살치고는 앙투안이 너무 노련해보였단 말이다. 

오타가 좀 여기저기 눈에 띄었던 점이 좀 아쉽긴 하지만, 심장 쫄짓한 심리스릴러를 원하신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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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더 레터 - 편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사이먼 가필드 지음, 김영선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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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멀리 떨어진 사람끼리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카톡이나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직접 쓴 삐뚤삐뚤한 글씨를 공유하며 직접 산 편지지에 고이 접어넣은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산 넘고 물 건너 그 손길이 그대로 옮겨져 온 것만 같아 신기하다. 글씨엔 그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씨체와 그림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받는다는 건 그래서 특별한 경험이다. 학창 시절엔 여러 친구들이랑 매일 교환 일기를 썼던 기억이 있다.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보면서도 또 집에 가서 교환 일기에 편지를 쓴다. 할 말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붙여서 교환하기도 한다. 그래도 마냥 좋았던 이유는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다는 게 좋아서였을 거다. 편지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서 쓰는 글이다. 혼자 보는 일기와도 다르고, 공개적으로 책을 내기 위해 쓰는 글과도 다르다. 오로지 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 들여 쓰는 글, 그것이 편지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투 더 레터는 편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시작된 편지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작가들이 주고받은 편지, 혹은 그 편지들이 문학작품이 된 사례들까지 꽤 방대하다. 거기다 무슨 내용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내용도 자세히 공개되어 있어 흥미롭다. 

「부인, 한 사람의 편지에서 그의 영혼은 발가벗겨집니다. 그의 편지는 그가 가진 마음의 유일한 거울이지요. 그의 내면에 무엇이 지나가든 그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뒤집히지 않고, 아무것도 왜곡되지 않아요. 그 요소들에서 체계가 드러나고, 그 동기들에서 행위가 보입니다. 」 
<투 더 레터 p. 278>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이 꼭 특정인이 아닌 대중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에도 딱딱한 글보다는 직접 쓴 손글씨로 편지 형식의 글을 전하면 훨씬 더 진심 어리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손글씨로 쓴 글에는 항상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책에는 편지의 그런 점을 이용한 희대의 위조지폐 우편 사기에 관한 내용도 들어있었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다.  자신을 최고 재질의 위조지폐를 취급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의 편지다. 

「귀하의 이름을 귀하의 마을에 사는 믿을 만한 사람한테서 받았습니다. 귀하께서는 어떤 수단, 방법, 형태로든 돈을 버는 데 부정적이지 않은 분이라고, 게다가 호락호락 속아넘어가지 않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최고 재질의 위조 화폐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물건은 품질이 뛰어나지요. 저와 거래하는 사람 가운데 일찍이 아주 사소한 문제라도 겪은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가 빠르고 안전하게 거액을 벌었습니다. 저는 귀하가 사는 자취주의 유명한 사람들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름을 언급할 수는 없는데, 일부 인사는 사회적 지위가 높답니다. 단언컨대 그들은 이 물건을 이용해 수천 달러를 벌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어떻게  돈을 손에 넣었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중략) 
가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1,500달러는 현금 75달러
4,000달러는 현금 125달러.... (생략)
<p.336>

뒷부분에는 현금을 보낼 주소와 함께 혹시나 의심스럽다면 직접 와서 돈을 교환해도 된다며 주소를 첨부한다. 하지만 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결국 편지에 현금을 넣어 보내고, 결국은 답장으로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이런 재밌는 희대의 사기도 있었다니 편지로 참 재미난 일이 많았다 싶다. 예전에 이메일로 떠돌아다니던 다단계 사기 같은 것이 떠오른다. 이메일보다도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우편으로 받으면 그게 더 믿음직스러워서 더 속기 쉽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사람들끼리 순수하게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가 잘 발달된 택배 시스템 덕분에 택배 상자로 대체돼가고 있는 건 아닐까ㅋ 멀리 사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너무 쉬워진 세상이니 물리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사람이 택배아저씨라고 하지 않는가. 편지가 사라지고 디지털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그래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물리적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자. 
삐뚤삐뚤 손글씨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예쁜 카톡 이모티콘으로 대신하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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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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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삼월 말의 어느 야밤에 한 십 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

하지만 소설의 중반 부분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꼼꼼히 베어타운에 사는 마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따라다니며 보여준다. 쇠락한 숲속 마을에서 유일하게 모든 주민이 기대를 걸고 있는 건 바로, 청소년 하키대회! 그들에게 하키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다. 마을의 경제를 살려줄 동아줄임과 동시에 마을의 자존심을 치켜세워줄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베어 타운 하키팀은 이겨야 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마을 사람들의 모든 눈이 하키 선수들의 승리만 바라보고 있다. 다행히 하키 실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 케빈 덕에 베어타운 하키팀은 어렵지 않게 준결승전에 진출하는데...
결승전만 남겨놓은 그날 밤, 사건은 벌어진다.

마을의 한 소녀가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하키 최고 유망주 선수와 평범한 여학생 간에 벌어진 이 사건은 과연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결승전을 앞두고 승리를 위협하는 사건에 부딪힌 케빈과 그를 보는 마을 사람들. 베어타운은 공동체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침묵과 위선, 양심과 의리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울타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책에는 무섭도록 실질적으로 드러나있다. 

「베어타운에서는 어느 누구도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마야'라고 쓰지 않고 'M'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아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걸레'라고 한다. 어느 누구도 '성폭행'을 운운하지 않고 다들 '그 주장'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거짓말'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로 시작해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자발적이었다'로 발전하고, 한술 더 떠서 '자발적이 아니었다 한들 그 아이가 자초한 일이다. 술을 마시고 그의 방에 같이 들어가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거야'로 수위가 높아진다. '그 아이가 원해서 한 거였다'로 시작해 '당해도 싸다'로 마무리된다. 
어떤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말자고 서로를 설득하는 건 금방이면 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많은 시간 동안 침묵하면 목소리를 내는 소수가 너 나 할 것 없이 악을 쓰는 듯한 인상을 풍길 수 있다.」 
< 베어타운 p.375>

예전에 뉴스로 봤던 신안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 생각났다. 자신의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섬마을 남자들이 집단 성폭행을 했다. 여교사 남자친구의 폭로로 사건이 밝혀지자 심지어 성폭행 가해자의 아내들조차 남편을 감싸며 쉬쉬하던 모습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들에 있어 침묵을 선택했던 것일까. 고립된 공동체는 때로 자기도 모르게 악마가 되기도 하는 걸까.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 
<p.506>

어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어 인정받는 느낌은 어쩌면 꽤 강렬한 마약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공동체의 소속감이 때로는 옳은 것을 보고도 스스로 눈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침묵하는 다수에 속함으로써 조용히 다수의 분위기에 묻어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소수에 속한다는 건 꽤 많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까. 베어타운은 공동체 내의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 군상을 다채롭게 담고 있다. 그래서 초반에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정성 들여 설명하는데 페이지를 그렇게나 많이 들였나 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중후반 부분부터 포스트잇이 아주 덕지덕지 붙어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다. 나라면 어땠을까. 개인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두 사랑받는건 꽤나 어려운 일인듯 하다. 

하지만 기억해 둘 말,
요즘 시대에 특히나 더 어울리고 필요한 말,
침묵이 언제나 금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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