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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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권을 드디어 다 읽었다. 한달 좀 넘게 걸린 듯 하다. 종이책으로 살까 말까 오랜 시간 고민하다 결국엔 전자책으로 구매한 토지 전권 세트! 덕분에 자기 전 불꺼진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종이책으로 샀으면 아마도 세트의 무게감에 눌려서 시작도 못해봤을 포스지만, 어차피 전자책이니 잠 안오는 밤에만 야금야금 읽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래서 진짜로 낮 시간엔 한번도 읽은 적이 없는 토지 1권, 어쨋거나 그 시작을 해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 등장인물도 어찌나 많은지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지만, 조금 읽다보면 어느새 최참판댁이 있는 그 하동 마을에, 하나같이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에 푹 빠지게 되는 매력이 있다. 덕분에 띄엄띄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듯 하다. 예전에 토지를 한번 읽어보겠다며 도서관에서 토지 1권을 빌려온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목차만 읽어보고 조용히 덮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너무나 방대해서 읽기도 전에 기가 질렸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드라마를 본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사연인지 매일 밤 산속을 헤매며 슬픈 눈으로 꺼이꺼이 울던 구천이가 별당아씨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고, 별당아씨의 딸인 5살 서희는 매일 엄마를 찾아오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왈가닥 5살 서희를 돌보며 같이 노는 7살 봉순이가 귀엽다. 무당의 딸이라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월선이와 용이의 뒤늦은 불타는 사랑과 강청댁의 불꽃 질투를 보는 안타까움, 최참판댁에 숨겨진 과거사들과 이 집안에 뭔가를 노리고 있는 귀녀의 응큼함까지 거대한 서사의 시작이라서 그런지 수많은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탓에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읽어야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흥미로워 지루하지 않다. 

듣자하니 토지는 1권이 제일 재미없다는데, 1권이 이 정도 흡입력이라면 앞으로도 평탄하게 읽을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붙는다. 아름답고 구수한 사투리의 향연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세세한 인물 묘사에 즐겁게 감탄하면서 읽어가고 있다. 이제 19권 남았구나...ㅋㅋㅋ

앞으로도 자기 전에 잠이 안올때에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을 예정이다. 그래서 언제쯤 이 서사의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사람사는 속도로 같이 읽어나가련다. 중간 중간에 만화 토지를 보면서 상상 속의 인물이 만화에선 어떻게 그려졌는지 직접 보는 재미도 동시에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제 드디어 토지 2권 시작한다.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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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2-0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시려면 절대 중간에 끊으시면 안 됩니다. 저 예전에 10권까지는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바빠서 한참 손을 놓았더니 기억이 잘 안 나서.. 결국.. 털썩 ㅜㅜ 화이팅입니다!

다림냥 2018-02-09 00:36   좋아요 0 | URL
10권까지나 읽었는데 중간에 생각안나서 끊으시면 진짜 안타까울듯요 ㅠㅠ 저도 흐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꾸준히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_+ 꼭 완독해보고 싶네요~ㅋㅋ

칼토스 2020-10-30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기 전자책 보실때 어두운곳에서 이불까지 쓰시고 보시면 눈에 정말 치명타에요ㅠ

다림냥 2020-10-30 10: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눈건강은 소중하니까 명심할께요~ 감사해요^^
 
침대에서 읽는 과학 - 염색체에서 우주까지 과학으로 보는 일상
이종호 지음 / 북카라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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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살 안찌는 유전자는 따로 있는걸까?', '냉동인간은 정말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인간이 화성으로 이주하는 것은 정말 가능한가?'  평소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딱히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궁금하긴 한데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네.. 싶었던 질문들에 대해 똑똑한 삼촌같은 저자가 시원하게 해답을 찾아주는 책이다. <침대에서 읽는 과학>이라는 책 제목처럼 잠들기전 침대에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만큼 달콤 말랑한 책은 물론 아니지만, 흥미롭고도 짖궂은 질문에 하나하나 과학적 견해를 담아 열심히 매우 진지하게 대답해주기 때문에 어려워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를 들면, 세상에 살 안찌는 유전자는 따로 있는걸까?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사람과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는 (부러운)사람의 차이는 박테리아 네트워크의 차이일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 고든 교수는 비만 생쥐와 날씬한 생쥐의 장내 박테리아를 무균 상태의 쥐에 주입했는데 비만 생쥐의 박테리아를 주입받은 생쥐들은 날씬한 생쥐의 박테리아를 주입받은 생쥐들에 비해 체지방 증가량이 2배에 이르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일한 음식을 먹어도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해서 더 살찔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이 실험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장내 박테리아 다이어트 요법이 나오지 않을까? 혈액형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나오는 것이지만, 박테리아는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성질의 것이라서 앞으로는 어쩌면 혈액형보다 박테리아형이 사람의 더 중요한 형질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나의 박테리아는 어떤 유형이려나. 비만 유형이 아니길 바랄 뿐. 

책을 보다가 아주 아름다운 상상이 가능하게 하는 실험도 한가지 발견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꼭 시골에 놀러간 커플이 반딧불이가 가득 날아다니는 로맨틱한 장소에서 첫키스를 하는 러브러브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어떤 성분이 반딧불이 꽁무니에 불이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걸까. 반딧불이는 몸에 루시페라아제 라는 효소가 있어서 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한마리의 빛은 작디 작지만, 그 반딧불이를 한꺼번에 많이 잡아서 한 공간에 놔두면 그 빛이 실제로 꽤 밝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학자들은 빛을 내는 루시페라아제 성분을 동물에 주입하여 동물의 몸이 빛을 내도록 하는 실험도 성공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성분을 식물에 주입해보는건 어떨까? 그것도 가로수 은행나무가 스스로 빛을 내도록 유전자를 주입해 밤이 되면 길가에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은은한 빛을 내면서 빛나는 것이다. 전기세가 들지 않는다는 건 둘째 치고, 상상만 해도 너무 아름답고 로맨틱하다.  밤에 스스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은행나무라니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침대에서 읽는 과학>에는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과학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있다. 우주까지 이어지는 엘레베이터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순간적으로 치는 벼락을 붙잡아 에너지로 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대답해준다. 세상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사실이 훨씬 많다. 어릴땐 엄마를 따라다니며 세상만사의 모든 궁금한 점들에 대해 (엄마들이 미친다는) "왜~?"를 외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직접 공부하고 찾아볼 수 밖에 없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는 대신, 읽고 나면 꽤나 유식한 척 할 수 있는 과학책 한 권을 읽고 잠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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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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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유난히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취업을 위해, 학교 진학을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식 교육을 위해 등등 각각의 이유로 다양한 지방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다. 때문에 의외로 서울 토박이보다 지방 사람들이 더 흔한 도시가 바로 서울일 것이다. 나도 서울에 온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무섭고 신기하기만 하던 도시가 이제는 고향보다 친근한 곳이 되었다. 이 소설은 외국 작가, 그것도 평범한 외국 작가가 아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배경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장소만 빌려서 쓴 것도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정서를 얼마나 이해해서 썼을까 싶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아마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었다면 당연히 한국소설이라고 생각했겠다 싶었다. 서울 도심 곳곳의 장소나 분위기 묘사가 세부적이면서 사실적이었고, 소설 속 캐릭터들도 한국적이면서 흥미로웠다. 

<빛나, 서울 하늘 아래>의 주인공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혼자 유학 오게 된 소녀이다. 유일한 핏줄인 고모네 집에 머물 수 있었지만, 고모와 사촌동생 백화는 그리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 거의 하녀로 부려먹으려 하고, 틈만 나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놀리며 욕을 한다.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던 빛나는 혼자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빛나에게 뜻밖의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다.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라는 불치병에 걸려 매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어느 부잣집 여자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구한다는 거였다. 고모 집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돈이 급했던 빛나는 여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거나,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그녀의 이름은 김세리, 하지만 살로메라고 더 많이 부른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불치병을 알고는 그녀에게 모든 자산을 물려주고 동시에  자살해버렸다. 살로메는 돈은 많지만 휠체어에 앉아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으며, 언제나 바깥세상 이야기를 그리워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이다. 

빛나는 살로메에게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빛나, 서울 하늘 아래>는 빛나가 살로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액자소설 형식으로 들어있는 소설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완결성이 있으면서도 이야기들끼리도 얼기설기 얽혀있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6.25 전쟁으로 인한 분단 상황, 가까운 이웃끼리의 무관심, 자살, 베이비 박스, 여성 스토킹, 사기, 강간 등 다양한 소재가 담겨있고, 여기엔 빛나가 직접 겪은 이야기도 들어있다. 

빛나는 서울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느낀다. 살로메는 돈을 주면서 자기를 이용한다고 느끼고, 정체 모를 스토커가 자신의 뒤를 계속해서 쫓고 있음을 느끼고, 하나 밖에 없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게 없음을 느낀다. 서울은 그야말로 광활하고 적막한 도시이고, '빛나'는 그 하늘 아래 그야말로 혼자 외로이 뜬 별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빛나는 알게 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
< 빛나, 서울 하늘 아래 p.190>

서울이 아무리 차가운 도시라고 해도 사람 사는 곳이고, 그곳엔 한국 사람 특유의 '정'이 존재한다. 저자 르 클레지오는 차가운 도시 안의 인간 소외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정'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는 알게 모르게 이웃 간의 정, 사람 간의 정이 녹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르 클레지오는 한국에서 제주와 서울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특히 서울을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한다. 
최첨단과 호화로움이 넘치는 인위적인 고층 빌딩을 최악이라 본다면, 그에게 최선은 번화가 뒤에 숨은 좁은 뒷골목과 돌담길, 도심에 위치한 아담한 사찰들, 경복궁과 청와대를 품어 안은 단아하면서도 기품 서린 북악산 같은 것들이었다. 서울의 도시가 아무리 최첨단을 달려도 보통 사람들은 일반 집에서 보통 밥을 먹으며 소소하고 바쁘게 살아간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사랑하는 이와의 사랑과 희망을 꿈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
<p.237>

빛나의 삶을 응원한다. 
차가운 이 도시 안에 부디 자신만의 따뜻한 둥지를 만들고 아름다운 새가 되어 훨훨 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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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4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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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면, 평소 책 좀 읽는다 하는 자칭 책덕후들은 반드시 한 두번쯤은 찔리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부터도 몇 번씩이나 뜨끔 했었으니까.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거의 동화 수준이 아닐까 싶을 만큼 너무나 쉽게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곰곰히 씹어보면 꽤 깊은 통찰이 담긴 문장들이 많아서 곳곳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읽었다. 책덕후와 냥덕후를 같이 겨냥한 책이라지만, 사실 책에서 고양이 특유의 귀여움은 별로 느낄 수 없긴 하다. 고양이 말투치고 너무 애교가 없잖아, 고양이 말고 강아지나 요정, 일반 사람 그 무엇을 갖다놨어도 괜찮았을 것이다ㅋ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서점을 이어받게 된 린타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얼룩고양이가 말을 하는걸 보고 깜짝 놀란다.(우리 고양이도 말을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ㅋㅋ) 고양이는 난데없이 린타로에게 책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어주고 둘은 함께 책의 미로를 향한 환상 여행을 시작하는데.... 책의 미로 속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책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된 듯 보인다. 린타로는 그들에게 붙잡힌 책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책에는 생전에 할아버지가 해주신 말씀 중 참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다.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채워도 네가 네 머리로 생각하고 네 발로 걷지 않으면 모든 건 공허한 가짜에 불과해."」 
<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p.65> 

책을 읽다보면 많이 읽었다는 사실 만으로 자신이 많이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지식을 읽은 것이 전부인데도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된 짜릿함에 젖어 실제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보태고, 다듬어서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말이다.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떄로는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 
<p.124>

책 읽기를 등산에 비유하다니 탁월하다. 어떤 책들은 읽는 동안 고통스러운 책들이 있다. 어려워서, 난해해서 힘들다가도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드는 책, 끝까지 읽어야 비로소 전체적인 흐름이 눈에 들어오는 책, 그것은 산 꼭대기에서 바람을 맞으며 탁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느낌과 정말 비슷할 것이다. 

한때 나는 미친듯이 책을 빨리 읽기에 몰입했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빨리 읽고 다음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시달렸다. 단지 누군가에게 "나 이 책 읽었어" 이 말을 한마디 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었던 책 목록들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자마자 벌써 내용이 희미해졌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 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의 지독한 슬로 리딩 방법을 읽고 나서 내 독서가 잘못되었단 걸 깨달았다. 빨리 읽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크고 작은 부분들을 놓치는게 인간이다. 기차를 타면 먼 곳으로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식견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없는 꽃도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도 자기 발로 걸어가는 우직한 산책자를 따르는 법이다. 」 <p. 127>

그렇지만 지금도 속독하는 버릇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책을 읽으려는 욕심 때문에 빨리 읽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와 다른 것은 좋은 구절은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해두고 다시 읽어보며, 다 읽고 나면 서평을 쓰며 다시 전체적인 내용을 음미해본 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나아졌다.

「"책에는 마음이 있지. 소중히 대한 책에는 마음이 깃들고, 마음을 가진 책은 주인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반드시 달려가서 힘이 되는 법이야"」
<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p.228>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달려와서 힘이 되 줄 내 책들은 과연 몇 권이나 될까. 
힘들 때 달려와 줄 책을 많이 만들려면 그만큼 한권 한권 소중하게 읽고 쓰다듬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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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행복 - 이해인 수녀가 건네는 사랑의 인사
이해인 지음, 해그린달 그림 / 샘터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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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로서 평생 종교에 귀의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이라 왠지 궁금해진다. 
이해인 수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특유의 밝고 따뜻한 글 분위기에 놀라곤 하는데, 요즘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때묻지 않은 느낌이 날 수 있나 싶은 건 종교인이기 때문일까, 그녀 특유의 맑은 기운 때문일까. 그녀의 책을 읽으면 마치 딴 세상을 사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 든다. 거기다 수많은 수녀들 중 그녀가 단연 독보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글쓰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수많은 시집과 에세이를 내왔고, 꾸준하게 사람들과 편지로 소통을 지속하면서 희망을 전파하는 걸 보면 종교에 귀의한 몸이지만 외롭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기다리는 행복>은 그동안 이해인 수녀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과 시들, 여러 사람과 주고받았던 편지글, 1968년에 처음으로 수녀가 되고 나서 1년간 남긴 일기 등을 담은 책이다. 순서가 중요한 책이 아니기에 아무렇게나 펼쳐서 읽어봐도 무방하다. 특히 책 속에 일러스트가 너무 예뻐서 자주 눈길이 멈추곤 했는데, 적재적소에 보이는 따뜻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너무 예뻤다. 


책 속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시가 하나 있었는데, 요즘같이 사건사고가 특히 많이 나는 시기에 읽으니 왠지 더 마음에 와닿는 시다.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 소식에 접하면
그를 깊이 알지 못해도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더 깊이 고독하여라'
'더 깊이 아파하여라'
'더 깊이 혼자가 되어라'

두렵고도
고마운 말 내게 전하며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라 이르며

가을도 아닌데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 이해인 <죽음을 잊고 살다가> 전문-

연이은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이 생명을 잃고 있는 이때,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언제나 죽음이라는 낱말은 마음속에 찬바람이 불게 한다. 나도, 그리고 내 곁에 소중한 누군가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산다. 그러다 생판 모르는 남이 죽었다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잊고 있던 죽음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책 내용 중에는 강도 살인으로 무기징역 복역 중인 신창원과 주고받은 편지도 있었다. 

요즘은 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암송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더군요. 해서 어머니의 젖을 갈구하는 아기의 심정으로 암송을 하다 보니 어느새 스무 편을 훌쩍 넘었습니다. 이런 오묘한 맛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문학을 꿈꿨나 봅니다. 이모님의 시 중에선 <민들레 영토>,<장미의 기도>,<엉겅퀴의 기도>,<사랑의 길 위에서>,<파도의 말>이 좋아서 우선적으로 가슴에 담았고 한용운님의 <님의 침묵>과 <복종>, 박인환님의 <목마와 숙녀> 그리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여러 시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 안에 담았습니다.」 
<신창원이 보낸 편지 중에서 p.291>

생각보다 문장이 정갈한 것에 놀랐고, 시를 외우고 공부하는 감옥수라니 갑자기 신창원이 다르게 보였다. 한낱 감옥수에게 정성스러운 편지와 함께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이해인 수녀의 마음 씀씀이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마음속 가득 사랑을 담고 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걸까. 
나도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에 사랑의 인사를 건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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