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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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점은 어쩌면 개인주의자가 되기로 작정한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자는 되지 말되, 나 자신의 행복을 가장 먼저 생각하자. 더 이상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자. 싫은 인간관계에 굳이 얽매이지 말자. 몇 가지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깔끔한 정리를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행복감이 커졌다. 가끔 내가 너무 세상을 좁게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라고 하면 그리 못할 것 같긴 하다.

그러던 차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의 제목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안도감과 위로를 주었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이 얼마나 용기 있으면서도 솔직한 선언인가.

나도 이제 당당하게 선언하겠다. 나는 행복한 개인주의자라고!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연구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 문제가 심각하며 선진국 중 강력 범죄율이 가장 높은 미국도 15위로 늘 행복지수 상위권이다.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동아시아 경제 우등생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개인주의자 선언 p.56

우리나라는 특히나 남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행복감을 충전시키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에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에 아주아주 발 벗고 나서는 대한민국 1%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행복 기준은 사회의 기득권을 자식에 물려주고 오래오래 이어가는 것이다.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고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안간힘을 쓰며, 심지어 같은 목표를 가진 SKY 캐슬 이웃끼리도 서로 협동하는 척, 견제하고 경쟁한다. 태어날 때부터 서울대 의대를 가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들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덕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긴 하겠지만, 과연 평생을 경쟁하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인생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p.22


남들은 어떻든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여 재벌 회장들 변호하며 큰돈 버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p.59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책을 읽다 저자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자신의 성향이 나와 매우 비슷해서 좀 놀랐다. 책의 추천사에서 손석희 앵커도 문 판사가 자신의 성향과 매우 비슷해서 경이로움까지 느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런 성향이 그리 독특한 성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마음속에는 주변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소소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하지만 남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가 지대한 관심사인 우리나라에서 그 관심에 초연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이 책에서 개인주의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집합이 사회이니만큼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폭넓은 생각을 전한다. 직업이 판사라서 그런지 모든 문제에 대해 따뜻하지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 읽는 동안 흥미로웠다.

우리 사회는 사실은 제대로 된 이념이 부재한 곳인데도 이념 코스프레 중인 상황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원자력발전소 건설, 한미 FTA 체결 등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다층적 갈등 구조의 문제를 진영 논리로 단순화해서 선악 구도로 몰고 가기도 하고 반대로 이념과 무관한 일상적인 문제에도 이념의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중략) 우리 사회의 많고 많은 문제 중 어느 하나를 얘기하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부터 의심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보수냐, 우리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진보냐고 묻는 사회에서 문제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온데....

개인주의자 선언 p. 208

나도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모든 사회문제에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 편을 나누고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인지. 현재 우리나라 정당의 정책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정책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두 정당 모두 자본주의와 복지주의가 혼재된 정책을 펼치고 있어 만약 모르는 사람에게 정당 이름을 가리고 어느 쪽에서 내건 정책인지 맞춰보라고 하면 전혀 모를 정도라고 한다. 본질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하는 이런 분위기가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의외의 사실에 가장 놀라고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있다.

저자가 미국 하버드에 연수 갔을 당시 친지의 안내로 흑인들이 모여사는 할렘가에 갔던 얘기에 관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역에 주유소가 딱 하나 있는데, 갤런당 2달러 33센트를 받더라는 점이다. 이렇게 비싼 곳은 미국 와서 처음 봤다. 하버드 로스쿨 근처 주유소는 2달러 9센트를 받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거주 지역 주유소보다 이곳의 기름값이 훨씬 비싼 이유가 무엇일까? 친지의 설명은 슈퍼마켓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주유소에 온다는 것은 폐차 직전일지언정 차가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싼 주유소를 찾아가면 될 것 아니냐? 대답은, 이들은 가격을 비교해 싼 곳을 찾아가는 등의 생각도 별로 안 한다는 거다.

요지경 세상이다. 뉴저지에 근사한 식민지풍 저택을 짓고 숲도 소유하고 있는 어느 교민은 반짝 세일 정보를 주시하다가 단돈 299불에 7박 8일 카리브해 크루즈를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나만 해도 책 하나 살 때도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최저가를 찾고 마일리지다 쿠폰이나 써가면서 호들갑을 떨고, 식료품도 보스턴 시내를 다 뒤져서 제일 저렴한 체인인 마켓배스킷까지 15분을 운전해 장을 보러 다니는데, 컴퓨터도 인터넷도 차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벌어보려는 악착같은 의지조차도 없는 이들은 시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받는 하나밖에 없는 작은 가게에서 술, 담배, 싸구려 과자를 사서는 하염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세상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집창촌 아가씨들에게 싸구려 화장품이나 옷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은 떼어온 물건 값의 열 배 스무 배를 받아내고, 그녀들이 가는 미용실에서는 동네 일반 손님한테 받는 값보다 훨씬 비싼 값을 그녀들에게 받는다. 경제학적으로는 최적화된 가격차별화 정책이다.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은 시장이니까.

p. 223~224

이런 분위기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 교포들이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슈퍼마켓 같은 걸 운영해서 꽤 쏠쏠한 수익을 내며 자수성가한다고 한다. 어려우니까 더 아껴 쓰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아껴 쓸 의지조차 없어 백인 중산층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오히려 백인 중산층은 어떻게든 돈을 아껴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니 내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20대 땐 지금보다 훨씬 수익도 적고 어려웠지만 돈은 오히려 더 펑펑 쓰고 다녔다. 어차피 몇 푼 아껴봤자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때보다 수익이 훨씬 나아졌지만, 오히려 씀씀이가 많이 검소해졌다. 물론 지르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모든 쿠폰과 할인을 총동원해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골라 과감히 지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하루에 몇 챕터씩 읽다 보니 완독하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개인주의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꽤나 묵직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그의 신선하고 객관적인 시선들도 다양하게 담겨있어 신선한 채소가 가득 들어있는 건강한 맛의 비빔밥 한 그릇 맛있게 뚝딱 비워낸 느낌이다.

밥을 먹어 묵직하지만 신선한 채소가 많았기에 속이 부대끼지 않는 그런 느낌!

문유석 판사에 이어 나도 선언한다!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시선을 가진,

똑똑한 개인주의자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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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2019-01-16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새 새로나온 쾌락독서도 재밌던걸요.

다림냥 2019-01-17 20: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책도 재밌다고 하더라고용! 저도 곧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림냥님 명절연휴 잘 보내세요☕️

다림냥 2019-02-02 12: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도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