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내내 정신줄을 꽉 붙잡아야 한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는 순간, 정신과 눈이 분리되버린다. 날아다니는 듯한 현란한 문장과 현실을 벗어난 괴상망측한 배경 때문에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 일단 빠져들면 잘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세상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모든 것이 유연하고 자유로우며, 머릿속에 뚜렷하게 상상된다. 유령들 사이에 홀로 살아있는 인간 소년 티모시와 함께 상상 속 시월의 저택 안에서 유령들과 자유롭게 뛰어놀면 된다. 그 유령들의 모습이 꼬마 유령 캐스퍼처럼 귀엽고 깜찍하진 않지만, 꽤 다정하고 재밌기도 하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아니 영원히 죽은 채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한 곳에 모인다. 죽은 지 4,000년 된 이집트 미라부터 세상 모든 것에 깃들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 '세시'까지 흥미롭고 신기한 존재들이 소설 전체를 꾸미고 있다. 환상문학의 대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 소설을 무려 55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것도 오랜 시간 다양한 잡지사에 게재했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엮어서 연작소설로 만들었다. 그는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준비하던 핼러윈을 추억하기 위한 소설을 꼭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모든 유령들은 대부분 그의 가족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큰 날개를 달고 멋지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에이나르 아저씨는 실제 그의 숙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부디, 제발, 저도 지금 도착할 가족들처럼 자라나게 해주세요. 늙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게 해주세요. 다른 가족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해도 죽을 수가 없거나, 먼 옛날에 이미 죽은 이들이라고 말했어요. 세시도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렇게 속삭이시는데, 그리고 이제 다른 가족들도 모두 오는데 저는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요. 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나무 위에 살거나 땅속에 살다가 17년 만에 비가 내리면 물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들도, 무리를 지어 뛰어나오는 이들도 될 수가 없어요! 저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모두 영원히 사는데, 왜 저는 그럴 수 없나요?"」
< 시월의 저택 p. 61>

이미 죽어 육신이 없는 유령들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낮에는 포도주에, 창문 틀에 깃들어 잠을 자다가 밤이 되면 다시 살아나 밤새 파티를 즐긴다. 티모시는 뭐든지 될 수 있는 유령들이 부럽다. 유령들 사이에서 혼자 다른 존재니 오히려 자신이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수밖에. 커다란 날개를 가진 에이나르 아저씨와 함께 하늘을 날아본 티모시는 지옥과 악마에게 기도한다. 자기에게도 날개가 돋아나게 해달라고. 

「석양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꽃은 질 운명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들판을 뛰노는 개와 부엌에 웅크린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머지않아 떠날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아침 인사와 오후의 웃음의 깊은 이면에는 작별의 약속이 숨어 있다. 늙은 개의 회색 주둥이에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찾아낸다. 나이 든 친구의 지친 얼굴에서 우리는 귀향보다 먼 곳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행길을 읽어낸다. 」 <p.182>

모든 것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다. 죽음 이후의 삶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가 되어도 아직 사람들은 죽음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 왜 죽는 건지, 죽은 후엔 어디로 가는 건지,  혹은 또 다른 삶이 이어지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 채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행복한가요? 그걸 모르겠어요. 저는 슬픈 기분만 들거든요. 때론 한밤중에 깨어나서 울곤 해요. 여러분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사는데, 끝없는 시간이 있는데, 그 모든 시간을 써도 별로 행복한 것 같지가 않거든요."
"아, 그렇지. 시간은 무거운 짐이니까.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단다. 너무 오래 산 것이 분명하지.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이다, 티모시, 네가 얻은 새로운 지혜를 이용해 충실한 삶을 사는 거란다. 매 순간을 즐기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자리에 누워서 행복한 기분으로 모든 순간을, 모든 시간을, 흘려보낸 매년을 충실하게 살았고,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았음을 떠올리는 거지, 자, 그럼 떠날 준비를 하자꾸나."」  <p. 222>

산자의 시간은 유한하고, 죽은 자인 유령의 시간은 무한하다. 살아있다는 건 그래서 아름다운 게 아닐까?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어디선가 본 최승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삶이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촛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촛불이 꺼지면 비로소 영원한 시간을 가진 유령이 되는 걸까? 

유령에게 그 어떤 능력이 있다해도 나는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지금의 촛불 같은 삶이 더 좋다. 
다만, 세상 모든 것에 깃들어 꿰뚫어볼 수 있는 '세시'의 능력은 좀 부럽긴 하네.. 쩝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슬프지만 따뜻하고, 쓸쓸하지만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있는 그 곳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8-02-1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이란 바다 밑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으니, 연결과 단절이라는 동시성을 갖기에 특별해보입니다.
‘슬프지만 따뜻하고, 쓸쓸하지만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그 곳에 있다면 저 역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다림냥 2018-02-12 15:04   좋아요 1 | URL
ㅋㅋ 소설 속 사람들이 딱 그런 느낌이라 더 그 속에 녹아들고 싶더라구요ㅋ 슬프지만 왠지 따뜻한 느낌이었어요ㅋ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다 읽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귓가에서 철석철석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몇 발자국 나가면 파도가 출렁일 것 같고, 어둡고 조용한 해안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그 배경에 푹 빠졌나보다. 포토알처럼 많은 섬이 흩뿌려진 바다 어디쯤 존재하는 작은 섬, 그 곳에서 조용히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하루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그 섬에 온 이유는 제각각 달랐지만 그들이 슬픔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 섬에서의 한없이 잉여로운 생활이 나에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1년전 세상을 떠난 정미경 작가의 유작이다. 남편 김병종 화가가 정미경 작가의 유고 후 작업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미완의 원고였다. 소설의 뒷 부분에는 남편이 이 소설에 바치는 발문이 담겨있다. 이 소설은 애초에 자신이 강요해서 쓰게 된 소설이라고. 신안의 젊은 군수 P에게서 그 지역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작가 정미경은 다른 할일이 많다고 꺼려했지만 남편인 자신이 거듭 추천하여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한다. 평소 완벽주의에 가깝던 정미경 작가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소설을 쓰면서 급격이 몸이 삭아내리기시작했고, 어느 날 글을 쓰다가 병원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다. 아내의 힘듦과 아픔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속상한 마음 때문에 한동안 집안의 어둠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지냈다는 그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평소 아내의 소설 쓰는 스타일과 다르긴 하지만 오히려 그 다름이 새롭고 아름답게 다가왔기에 용기를 내어 출판사에 원고를 내밀었다 한다. 

설을 프린트 해놓고 책더미 사이에 쌓아둔 걸 보면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써놓고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혹은 초안만 작성하고 아직 다듬지 않은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인지 이야기의 전체적인 완결성이나 결론이 탄탄하지 못하고 다소 허술한 부분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떠나서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와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듯 하면서도 글 중간 중간에 위트가 있다. 여고생 '이우'의 발랄함과 이삐 할미의 우악스럽지만 친근한 정이 대화 곳곳에서 느껴져 좋았고, 무뚝뚝한듯 보이는 정모의 마음 씀씀이와 판도의 무심한 듯 따뜻한 눈빛 때문에 난 그 섬이 좋아졌다. 

계속해서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해 하는 딸 이우를 짐짝처럼 생각하는 연수는 최근 고향의 섬으로 귀향한 정모에게 거의 강제로 딸 이우를 맡겨버린다. 저항도 없이 인생을 포기한 듯 갑자기 섬으로 내던져진 여고생 이우는 난생 처음보는 정모 아저씨와 한집에 살게된다. 정모의 집에 온 첫날부터 새벽바다에 혼자 뛰어들어 죽을 뻔 하질 않나, 정모에겐 팔자에도 없는 말 안듣는 딸이 생겨버린 것만 같다. 그 마을에는 아무 때나 불쑥불쑥 집에 쳐들어와 욕과 함께 반찬을 챙겨주는 이삐 할미가 있고, 할미가 육지의 어느 서커스단에서 구해와 함께 살고 있는 청년 판도가 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이우는 가장 소중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었고, 이삐 할미는 아들 세 명을 바다에서 차례로 다 잃었다. 정모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병에 걸렸고, 판도는 듣고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하지만 바다라는 커다란 자연 앞에서 그들은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이우는 넘치는 낮 시간동안 해안가를 걸어 맨발로 섬 반대편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햇볕으로 따뜻하게 달궈진 판판한 돌 위에서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바다가 만들어낸 조그만 동굴에 들어가 하루종일 앉아있다 나오기도 하고, 해안가를 기어다니는 칠게를 잡아 밀가루를 묻혀 바삭한 게튀김을 만들어먹기도 한다. 이 섬엔 자연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왠지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정모는 섬에 버려진 소금창고를 개조해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파도 소리가 BGM으로 깔려있는 도서관이라니 너무 멋지잖아. 책을 읽다 지겨우면 해안가를 걷다와도 좋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봐도 좋다. 그냥 오롯이 하고 싶은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풍성한 시간들을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물구나무를 선 채 책을 읽던 판도는 이 구절을 두 번 읽었다. 그러고는 팔을 늘어뜨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바다는 유난히 고요하다. 허공에 걸린 바다를 바라보며 막 읽은 구절을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내게 실제 일어난 일은 거의 없고 나는 많은 일들을 읽었을 뿐입니다…… 판도는 이런 순간이 좋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써놓은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든 듯한, 그냥 읽어나가다 어떤 한 문장에 붙들려, 그 문장의 무엇에 붙들렸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 당신의 아주 먼 섬 p.59>

그들은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면 어줍짢은 위로 대신 턱에 걸린 눈물을 찍어먹어 보고는 "염도 0.5네." 하고 빙긋 웃어준다. 슬픔의 농도가 다를 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의 슬픔을 달고사는 법이니까. 

바닷물이 증발해 하얀 소금이 엉겨붙어 소금꽃이 만들어지는 곳, 하루 한번 물이 들어오고 빠지며 삶도 이런거라며 속삭이는 곳.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슬프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나의 아주 먼 섬에 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다가 뚜껑이 없어 - 요시타케 신스케, 웃음과 감동의 단편 스케치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컴인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게다가 뚜껑이 없어》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손가락이 가는 대로 그린 단편 스케치들을 아무런 순서도, 의미도 없이 담아놓은 책이다. 순서대로 책을 넘겨보다가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 하며 갸우뚱했는데,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거나 그려놓은 스케치들을 마구 모아놓은 책이구나 싶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정신없고 이게 뭔가 싶은데 가끔씩 공감 가거나 피식 웃음 나는 그림들도 보인다. 뚜껑도 없고, 정신도 없고, 내용도 없지만 책은 귀여우니까 한번 살펴볼까? 


훗, 길 지나가다가 어릴 때 친구랑 똑같이 생긴 애가 뛰어가는 걸 보고 순간 타임 슬립했나 착각했단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 그럴 듯. 난 예전에 친구랑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버스에서 본 적이 있다. 나를 보고도 계속 모른척하길래 한참 쳐다보다가 그 친구가 내리고 나서 전화를 해서 왜 모른척하냐고 했더니 자기는 버스를 탄 적도 없고 전혀 딴 곳에 있다고 했다. 헐, 소름; 그런 이상 야릇한 기분이랑 비슷한 거겠지.



'자동차 불빛 안에만 가랑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 어두운 데서 헤드라이트를 켜면 진짜 불빛 안에만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별거 아닌데, 이렇게 말로 써놓고 보면 괜히 새롭다.



외로울 땐 뭐라도 내 어깨를 터치해주면 주면, 그렇게 위로가 되는 건가. 깃발의 쓰담쓰담 위로를 받는 순간, 왠지 은근 위로되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기지만 ㅋ 



엄마, 아빠 사이에 양다리 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지 좀 말라고요. 대단히 곤란하니까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남의 고민뿐입니다. 자신의 고민은 무리입니다. 
그러게, 자신의 고민을 자기가 해결하면 세상에 고민할 일이 없겠네.


신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
"내가 기회를 몇 번이나 줬지?"
그러니까 기회일 때는 기회라고 말하면서 달라고요. 신 미워요~ 

작가도 딱히 무슨 의미를 두고 그린 그림들은 아닌듯하니, 읽는 사람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겨보면 될 듯하다. 요런 매우 자유스러운 스케치를 보니, 나도 평소 떠오르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요렇게 스케치로 남겨보고 싶어진다. 꽤 재미있을 듯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는 여자들 - Dear 당신, 당신의 동료들
4인용 테이블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 남성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선배 남성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서사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성공한 여성의 사례를 보거나 듣는 게 같은 여성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이런 책 어디 없을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이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임신과 육아 때문에 하던 일을 그만두는 여성도 많고,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경험하면서 힘겹게 일하는 여성도 많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서 족적을 남기고 활발하게 일을 이어나가고 있는 여성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은 원래 유료 디지털 컨텐츠로 발행된 글을 좀 더 다듬어 종이책으로 옮겨담은 글이다. 4인용 테이블 이라는 이름의 여성 4명이 11명의 일하는 여성을 인터뷰했다. 기자, 작가, 영화감독, 아티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녀들은 어떻게 일을 시작했고, 어떻게 그 분야에서 살아남았을까?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영화감독 윤가은의 고민을 들어보면 영화창작이라는 분야에서 여자 감독이라는 위치가 주는 고민에 대해 알 수 있다. 


「내가 남성감독이라고 가정해보자.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데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이게 상업적인 소재인지 아닌지는 고민하겠지만 '내가 남자라서 남자 영화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은 안하지 않을까? 나는 늘 '내가 여자라서 이렇게 섬세한 영화만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냥 '나'라는 사람의 성향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일 뿐인데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니 아이러니하다. 」 < 일하는 여자들 p.50>


이미 작품을 한번 성공시킨 영화감독으로써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지에 대해 자신이 여자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번 더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남성감독이 섬세한 영화를 만들면 감성적이라고 칭찬할만 소재가 되고, 여성이 섬세한 영화를 만들면 여자라서 그렇다는 인식, 혹독한 직업 세계에서 아직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과 성격을 정해놓고 생각하는 편견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일하는 여자들의 인터뷰마다 끝부분에는 저마다 자신을 잘 드러내는 물건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물건은 백은하 기자의 신발주머니였다. 초등학교 이후로 신발주머니를 들고다닌 기억이 없는데, 그녀는 항상 신발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며 구두를 신은 날에는 스니커즈를, 스니커즈를 신은 날에는 구두를 넣어서 가지고 다닌단다. 상태에 따라 언제든지 원하는 모드로 체인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굽높은 구두를 신고 나간 날, 자신감은 상승할 지언정 그만큼 그날 하루의 활동 자유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갈아신을 수 있는 신발 한 켤레가 더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그녀의 자유로운 활동성이 드러나는 물건이라 새롭고 신선했다.   


책에는 유독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여럿 등장했는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영화지를 포함해 잡지의 경우 일간지나 방송과는 달리 여자 기자가 훨씬 많은데, 그 이유가 급여가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 동의하는가?

- 맞다. 그 급여를 받겠다고 남자들이 지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예비 언론인 과정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들 중에 지금 현업에 있는 남자들은 다 방송사 아니면 일간지에서 일한다. 그쪽이 아니라면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함께 공부한 여자들은 일을 관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을 하는 경우는 PD 정도다. 아니면 나처럼 잡지 쪽이다. 잡지쪽으로 넘어오면 여자들이 훨씬 많지 않나. 이건 임금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 일하는 여자들 p.193>


화려해보이는 잡지사의 일이 사실은 임금이 낮아서 여성이 많은거라니, 씁쓸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하고싶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 결혼도 미루고,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잡지를 만들고 편집하는 일을 한다. 처우가 어떻든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힘이 닿는 한, 언제까지고 일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프리랜서로 소소하게 일하고 있지만, 일이 주는 그것만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나만의 효용가치가 있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싶은 마음, 그것을 동력으로 매일 조금씩 해나간다. 

아직은 척박한 환경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수많은 일하는 여자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