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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ㅣ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소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삼월 말의 어느 야밤에 한 십 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
하지만 소설의 중반 부분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꼼꼼히 베어타운에 사는 마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따라다니며 보여준다. 쇠락한 숲속 마을에서 유일하게 모든 주민이 기대를 걸고 있는 건 바로, 청소년 하키대회! 그들에게 하키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다. 마을의 경제를 살려줄 동아줄임과 동시에 마을의 자존심을 치켜세워줄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베어 타운 하키팀은 이겨야 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마을 사람들의 모든 눈이 하키 선수들의 승리만 바라보고 있다. 다행히 하키 실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 케빈 덕에 베어타운 하키팀은 어렵지 않게 준결승전에 진출하는데...
결승전만 남겨놓은 그날 밤, 사건은 벌어진다.
마을의 한 소녀가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하키 최고 유망주 선수와 평범한 여학생 간에 벌어진 이 사건은 과연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결승전을 앞두고 승리를 위협하는 사건에 부딪힌 케빈과 그를 보는 마을 사람들. 베어타운은 공동체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침묵과 위선, 양심과 의리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울타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책에는 무섭도록 실질적으로 드러나있다.
「베어타운에서는 어느 누구도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마야'라고 쓰지 않고 'M'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아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걸레'라고 한다. 어느 누구도 '성폭행'을 운운하지 않고 다들 '그 주장'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거짓말'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로 시작해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자발적이었다'로 발전하고, 한술 더 떠서 '자발적이 아니었다 한들 그 아이가 자초한 일이다. 술을 마시고 그의 방에 같이 들어가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거야'로 수위가 높아진다. '그 아이가 원해서 한 거였다'로 시작해 '당해도 싸다'로 마무리된다.
어떤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말자고 서로를 설득하는 건 금방이면 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많은 시간 동안 침묵하면 목소리를 내는 소수가 너 나 할 것 없이 악을 쓰는 듯한 인상을 풍길 수 있다.」
< 베어타운 p.375>
예전에 뉴스로 봤던 신안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 생각났다. 자신의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섬마을 남자들이 집단 성폭행을 했다. 여교사 남자친구의 폭로로 사건이 밝혀지자 심지어 성폭행 가해자의 아내들조차 남편을 감싸며 쉬쉬하던 모습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들에 있어 침묵을 선택했던 것일까. 고립된 공동체는 때로 자기도 모르게 악마가 되기도 하는 걸까.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
<p.506>
어떤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어 인정받는 느낌은 어쩌면 꽤 강렬한 마약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공동체의 소속감이 때로는 옳은 것을 보고도 스스로 눈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침묵하는 다수에 속함으로써 조용히 다수의 분위기에 묻어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소수에 속한다는 건 꽤 많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까. 베어타운은 공동체 내의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 군상을 다채롭게 담고 있다. 그래서 초반에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정성 들여 설명하는데 페이지를 그렇게나 많이 들였나 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중후반 부분부터 포스트잇이 아주 덕지덕지 붙어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다. 나라면 어땠을까. 개인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두 사랑받는건 꽤나 어려운 일인듯 하다.
하지만 기억해 둘 말,
요즘 시대에 특히나 더 어울리고 필요한 말,
침묵이 언제나 금은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