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에번 핸슨
밸 에미치 외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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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근사한 날이 될거야, 왜냐하면... "

나에게 쓰는 편지는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왜냐면 셔먼 선생님이 시켰으니까?! 하지만 난 오늘이 전혀 근사하지 않은걸. 학교에 가면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 섞여 반쯤은 투명인간 인척 해야 하는 아싸(아웃사이더)인데다, 엄마는 매일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고 너무 바빠, 그리고 아빠는 날 버리고 3000km 넘게 떨어진 다른 도시로 떠나서 엄마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새 삶을 시작했어. 거기다 이제 곧 동생이 태어날거라나? 아빠는 이제 동생이 생겼으니 형 노릇을 잘 하라고 했지만 난 왠지 아빠를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야. 세상에 나를 진정으로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기는 한거야? 난 혼자야, 완전히 혼자야.

에번 핸슨에게

알고보니 전혀 근사한 날이 아니었어.

근사한 한 주나 근사한 한 해가 될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그럴 이유가 없잖아?

(중략)..

모든 게 달라졌으면 좋겠다.

나도 마음을 붙일 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얘기에 무게가 실렸으면 좋겠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내일 사라진다 한들 알아챌 사람이 있을까?

너의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친구인

내가

디어 에번 핸슨 p.41

나도 모르게 너무 오글거리게 솔직한 편지를 써버렸다. 휴우, 이런 편지는 혼자만 보는게 상책이지. 속이 좀 후련해졌으니 이제 선생님이 원하는 긍정적인 편지를 다시 써서 제출해야지. 근데 엇, 왜 프린트한 편지가 왜 코너 머피 손에 있는거야.. 안돼! 안돼!! 돌려줘!!! 코너 머피가 내 편지를 들고 가버렸다. 망했다! 완전 망했다! 코너 머피가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웃기는 편지를 썼다고 떠벌리겠지? 난 세상에서 제일 쪽팔리는 상황을 겪게 될거야. 생각만해도 죽고싶다.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이상하게 코너 머피가 학교에 안왔네. 무슨 일일까. 그래도 아직 아이들에게 내 편지를 공개하진 않은 것 같군. 다행이면서도 마음 한켠이 불안하다. 그런데 수업 시간 중 갑자기 나를 교무실로 부르는 방송이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이지. 드디어 일이 터진건가. 교무실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뭐? 코너 머피가 어제 죽었다고?'

일단 내 오글거리는 편지가 세상에 공개될 일은 없겠군, 다행이다. 근데 뭐라구요? 코너 머피가 저한테 유서를 남겼다고요? 그럴리가. 저기요. 그 쪽지는 음, 제가 저한테 쓴... 편지라고 말을... 못했다. 평소 마약 중독에 나보다 더한 외톨이인 코너 머피와 내가 친구일리가. 근데 내 부러진 팔깁스에 어제 그 녀석이 남긴 사인이 남아있다. 이건 그러니까, 그냥 우연이라고요. 우린 친하지 않아요.



코너 머피의 어머니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것 같지만, 일단은 가서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하지만 죽은 아들한테 친한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받고 있는 부모님들을 보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내 입이 나도 모르게 자꾸 거짓말을 한다.

"네, 코너와 저는 가장 친한 단짝이었어요. 우린 아무도 모르게 우정을 나누었어요."

이렇게 나는 코너가 죽은 뒤 그와 상상 우정을 쌓아간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또 거짓말을 낳는다. 내 마음 속에는 죄책감이 쌓이지만 코너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나에게 생전 처음 보여주는 관심에, 난생 처음 나도 뭔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 거짓말을 멈출 수 없다. 그런데, 이거 자꾸 일이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원한건 이런게 아닌데... 왜 자꾸 내가 유명해지고... 팔로우가 늘고... 친구가 생기지?... 뭔지 모르지만 자꾸 일이 커진다. 멈춰야 하는데...하는데...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소설이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등장인물이 모두 자기 나름의 외로움과 슬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나만 외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외롭다. 누군가 먼저 알아봐주길 기다릴 뿐. 따지고 보면 에번 핸슨이 자기 자신에게 썼던 저 편지,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해봄직한 생각 아닐까?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뮤지컬을 원작으로 다시 쓰여진 소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인걸 보면 이런 감정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겠지. 실제로 외톨이든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니까.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고 짜임새있게 흘러가서 금방 훅훅 읽는다. 우리의 에번 핸슨은 아싸에서 진정한 인싸로 거듭날 수 있을지...

참고로 뮤지컬이 궁금해서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가 넘나 좋다. 역시 괜히 유명한게 아니었나보다.

특히 waving through a window 라는 곡 너무 좋은데? 같이 들어보시길 :)

https://www.youtube.com/watch?v=zA52U37P_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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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메리카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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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 스퀘어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변경주 선인장이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 속으로 10미터에 달하는 팔을 뻗고 서 있었다. 사막 자연보호구역의 입구를 지키는 위풍당당한 수문장 같은 모습이었다. 녹슬어 가는 네온사인에 세이지 덤불 뭉치가 걸려 있는 모습이, 마치 맨해튼 전체를 완벽한 서부극을 촬영하기 위한 거대한 세트장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은행이며 증권사 건물의 2층 창문을 따라 열매가 영근 부채선인장이 늘어섰고, 항공사 사무실과 여행사의 현관에는 유카와 메스키트의 거대한 잎사귀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p.53 본문 중에서- 


이 정도면 미국이 완전히 망해서 나라 전체가 사막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실감 나는가? 망한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지금은 2114년, 한 세기 전에 미국은 망해버렸다, 그것도 완전히! 19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던 석유가 점차 지구상에서 바닥나면서 원유값이 치솟기 시작하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원유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제가 하나둘씩 멈춰간다. 먹고 살 길을 찾을 수 없어 사람들이 점점 도시에서 농촌으로, 농촌에서 자기들의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미국 땅은 텅텅 비어가게 된다. 그 후 유럽과 아시아에 불어난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세계정부에서 시도한 기후 제어 기술로 인해 해류가 바뀌면서 추운 북유럽과 시베리아 땅은 따뜻하고 비옥한 땅이 된 반면, 기후변화의 역풍을 제대로 맞은 미국은 전 국토가 사막화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게 그렇게 쉬워? 설정에 너무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사람 없이 텅 비어버렸다는 설정은 새롭다. 헬로 아메리카는 이젠 기억에만 존재하는 미국 땅을 다시 찾아가는 아폴로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본래의 목적은 아메리카 대륙에 갑자기 높아진 방사능 수치를 조사하러 가는 거지만, 어째 이 사람들 연구만 하고 돌아갈 것 같지가 않다?! 하긴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 자신들만 남겨져있는데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으랴. 땅에 금만 긋고 내 땅이라 우겨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며, 원한다면 미국의 대통령도 노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다.  소설 <헬로 아메리카>는 아폴로호에 승선한 인물들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누비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남아있는 환상을 발견한다.



<헬로 아메리카>는 미국을 두 번째로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번에 위업을 이룩하는 이는 정신 나간 광인들이다. 파괴적이며 텅 비고 무가치한 땅을, 오로지 자신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정복하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버려진 미국이야말로 그의 열정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들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국이 위대한 가공의 땅일 뿐이라면, 밸러드의 인물들은 상상의 삶을 드러내는 완벽한 횃불잡이라 할 수 있다. 밸러드는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더라도 환상 속에는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음을, 어쩌면 현실에서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P. 377 해설 중에서



밸러드는 "어쨌든 독자들은 <헬로 아메리카>가 미합중국을 격렬하게 옹호하고 있으며, 우리 유럽인들에게는 부족한 미덕인 낙관론과 자신감을 예찬하는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p.369)이라며 작가 후기에서 남기고 있다. 독특한 밸러드식 미국 예찬이 궁금하다면, 철저히 파괴된 미국 이야기에 빠져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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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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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구함은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오롯이 타자의 관점으로 관찰할 때 더 증폭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지하루는 이야기 중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총 9개의 단편 같은 이야기 속에서 엑스트라 혹은 잠깐 지나가는 사람으로 매회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할 정도로 잠깐씩 등장하지만 이 소설은 엄연히 지하루의 기구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말로 나열해보려 하면 기구하다 못해 통속적인 막장 드라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만약 지하루의 입을 빌려 서술하기 시작했다면 어쩌면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한 여자의 팔자타령 정도로 치부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신선하게도 지하루의 인생을 스쳐갔던 사람들이 화자가 되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9개의 이야기는 결국 지하루가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연작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단편처럼 느껴진다. 지하루를 매듭 삼아 그녀를 스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기구한 이야기가 함께 엮여있는 식이다. 이런 퍼즐 같은 구성이 신선하고 마음에 들었다. 지하루의 엄마 사키코의 시선으로 시작해 지하루의 딸 야야코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이 이야기는 장장 40여 년을 아우른다.

지하루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불균형할 정도로 큰 가슴을 가졌다. 그런 신체적 조건은 아름다움과 별개로 여러 남자들에게 성욕의 대상이 된다. 태생적으로 순종적인 성격에 약간 맹해 보이는 인상은 남자들이 다가서기 쉬운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중학생 시절 학교 체육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에 아이를 임신해 중절수술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서서히 지하루의 힘들고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인생이 왜 저렇게까지 되나 싶어서 답답하기도,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지하루는 마치 감정이 없는 양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재밌는 건 지하루의 엄마 사키코의 삶이다. 자기를 사랑해줄 남자를 찾기 위해서 딸도 무참히 버리고 배신했던 그녀는 늘그막이 진짜로 그 소원을 이뤘다. 비록 가슴이 썩어들어가는 병에 걸려 손도 못써보고 죽게 생겼지만 자신을 위해 같이 죽어줄 수 있는 남자가 실제로 생겼으니 말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사키코가 세상을 떠나고 그 옆에 누워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인생이란 묘하다.

한편 지하루는 평생에 걸쳐 결국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보인다. 교통사고로 그나마 멀쩡하던 신체마저도 모조리 망가지게 되니 말이다. 다리가 절단되고 얼굴엔 온통 상처, 거기다 정기적으로 이마와 볼에서 교통사고 때 얼굴에 박혔던 유리 파편이 튀어나온다. 지하루는 그걸 또 소중하게 약병에 조약돌 모으듯이 간직하고 말이다. 그 어떤 불행도 오롯이 받아들이는 지하루의 태도는 이쯤 되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대단케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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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지하루의 대사만 되짚어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시선은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지하루를 선택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운데서도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어른들을 관찰하는 눈빛'을 가진 명민한 열세 살 소녀의 삶을 오래도록 응시했을 것이다. 그녀가 필요 최소한의 온당한 말을 하고 온당한 비명을 지르는데도 평범한 이웃인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뒤틀고 일그러뜨렸는지를.

<별이 총총,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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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루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다양한 타인의 시선을 빌려와 이야기를 이끌어간 것은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타인의 이기적인 눈에 비친 지하루, 지하루를 성적으로 대하는 음흉한 남자들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하루의 삶은 한층 더 기구해 보인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가 있나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시선으로 본 지하루의 모습일 뿐이다. 지하루 자신이 스스로를 긍정한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나갈 것이다. 일그러져도, 아파도, 인생은 계속되니까.

책을 다 읽고 나면 코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눈물 콧물 짜며 펑펑 울고 난 다음 맑아진 눈으로 별이 총총 떠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구하고 기구한 지하루의 일생은 '슬프지만 이 또한 인생'이라며 가만히 등을 도닥여주는 것 같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작가다. 생소한 작가라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한 책에 푹 빠져버렸다.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다소 노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소재를 신선한 구성을 통해 잘 살려낸 것 같아 읽는 동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9개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으면서 그 자체로서 완성 미와 여운이 있고, 이야기 속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어있던 지하루가 책을 다 읽고 나면 3D 입체가 되어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사쿠라기 시노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얘기!

애정 작가 목록에 살짝궁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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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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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방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결국 소설은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겉으로 끄집어내어 텍스트로 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내 속에는 어떤 것이 숨어있을까. 궁금하다.

E. L. 닥터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 쓰기는 한밤중에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오로지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만큼만 볼 수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 여행지까지다다를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필요 없다. 목적지나 도중에지나치게 될 모든 광경을 다 볼 필요도 없다. 당신은 눈앞에 펼쳐진 오직60센티미터에서 90센티미터의 광경만 보아야 한다. 이것은 글쓰기나인생에 관해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최고의 조언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 비슷한 일이 마음의 근육에도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심리적인 상처 주변에서 근육이 단단히 뭉치는 것이다. 즉, 유년 시절의상처나 성인기에 겪은 상실감이나 실망감들,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에서비롯된 굴욕감 같은 것들이 주위의 근육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그 상처가다시 똑같은 자리를 공격당하지 않도록, 낯선 물질이 거기에 닿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덕분에 그 상처들은 치료될 기회를 놓쳐 버린다.
완벽주의는 우리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치는 것과 같은 원리를 가졌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거기에 그런 상처나 근육 경직이 있는지도 알지못하지만, 둘 다 우리를 구속하는 건 사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계속해서꼼꼼하고 근심스러운 태도로 움직이고 글을 쓰도록 만든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 이것을 떠올린다. 내가 죽어 가고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기. 실제로 우리 모두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가는 버스를 타고 있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현존을 경험할 기회를 준다. 시한부 인생에게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자체로 너무나 충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하듯이 말이다.
그들에게는 하루가 짧다. 그래서 비참하게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좋아, 음..... 한번 보자. 내일 죽는다 이거지. 그럼 오늘 내가 뭘 해야할까?˝

나는 작가들이 빙판을 뚫고 수면 밑으로 떨어지길 원한다. 그곳에서 삶은너무나 시리고 혼란스럽고 차마 똑바로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할것이다. 나는 작가들이 그 구멍 속으로 몸을 던지기를 원한다. 평소 우리가온갖 소도구로 가득 채우려 애쓰는 구멍 말이다. 구멍과 그 주변의공간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응시하거나 삶의 미스터리를 엿볼수 있는 기회를 포함해서, 온갖 종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위대한 작가들은 내면의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 대해, 얼어붙은 호수아래의 물에 관해, 숨어 있거나 위장한 구멍에 관해 쓰려고 계속 분투한다.
이런 구멍이나 구덩이에 그들이 비추는 조명 덕분에 우리는 덤불이나가시나무들을 베어 버리거나 밟으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 쓴다. 만약 성 안에 출입이 금지된 문이 하나 있다면, 당신은 악착같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살고 있는 방에서 그저 가구들의 배치만 이리저리옮겨 놓으며 살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닫힌 문 하나는 계속 닫아 놓고지내려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의무는 그 문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살펴보고, 그 음침하고 발설할 수 없는 것을 대면한 다음,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단순한 말이 아니라, 가능한 한 리듬과 블루스를 섞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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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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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점은 어쩌면 개인주의자가 되기로 작정한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자는 되지 말되, 나 자신의 행복을 가장 먼저 생각하자. 더 이상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자. 싫은 인간관계에 굳이 얽매이지 말자. 몇 가지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깔끔한 정리를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행복감이 커졌다. 가끔 내가 너무 세상을 좁게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라고 하면 그리 못할 것 같긴 하다.

그러던 차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의 제목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안도감과 위로를 주었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이 얼마나 용기 있으면서도 솔직한 선언인가.

나도 이제 당당하게 선언하겠다. 나는 행복한 개인주의자라고!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연구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 문제가 심각하며 선진국 중 강력 범죄율이 가장 높은 미국도 15위로 늘 행복지수 상위권이다.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동아시아 경제 우등생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개인주의자 선언 p.56

우리나라는 특히나 남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행복감을 충전시키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에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에 아주아주 발 벗고 나서는 대한민국 1%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행복 기준은 사회의 기득권을 자식에 물려주고 오래오래 이어가는 것이다.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고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안간힘을 쓰며, 심지어 같은 목표를 가진 SKY 캐슬 이웃끼리도 서로 협동하는 척, 견제하고 경쟁한다. 태어날 때부터 서울대 의대를 가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들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덕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긴 하겠지만, 과연 평생을 경쟁하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인생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p.22


남들은 어떻든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여 재벌 회장들 변호하며 큰돈 버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p.59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책을 읽다 저자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자신의 성향이 나와 매우 비슷해서 좀 놀랐다. 책의 추천사에서 손석희 앵커도 문 판사가 자신의 성향과 매우 비슷해서 경이로움까지 느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런 성향이 그리 독특한 성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마음속에는 주변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소소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하지만 남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가 지대한 관심사인 우리나라에서 그 관심에 초연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이 책에서 개인주의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집합이 사회이니만큼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폭넓은 생각을 전한다. 직업이 판사라서 그런지 모든 문제에 대해 따뜻하지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 읽는 동안 흥미로웠다.

우리 사회는 사실은 제대로 된 이념이 부재한 곳인데도 이념 코스프레 중인 상황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원자력발전소 건설, 한미 FTA 체결 등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다층적 갈등 구조의 문제를 진영 논리로 단순화해서 선악 구도로 몰고 가기도 하고 반대로 이념과 무관한 일상적인 문제에도 이념의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중략) 우리 사회의 많고 많은 문제 중 어느 하나를 얘기하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부터 의심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보수냐, 우리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진보냐고 묻는 사회에서 문제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온데....

개인주의자 선언 p. 208

나도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모든 사회문제에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 편을 나누고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인지. 현재 우리나라 정당의 정책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정책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두 정당 모두 자본주의와 복지주의가 혼재된 정책을 펼치고 있어 만약 모르는 사람에게 정당 이름을 가리고 어느 쪽에서 내건 정책인지 맞춰보라고 하면 전혀 모를 정도라고 한다. 본질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하는 이런 분위기가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의외의 사실에 가장 놀라고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있다.

저자가 미국 하버드에 연수 갔을 당시 친지의 안내로 흑인들이 모여사는 할렘가에 갔던 얘기에 관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역에 주유소가 딱 하나 있는데, 갤런당 2달러 33센트를 받더라는 점이다. 이렇게 비싼 곳은 미국 와서 처음 봤다. 하버드 로스쿨 근처 주유소는 2달러 9센트를 받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거주 지역 주유소보다 이곳의 기름값이 훨씬 비싼 이유가 무엇일까? 친지의 설명은 슈퍼마켓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주유소에 온다는 것은 폐차 직전일지언정 차가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싼 주유소를 찾아가면 될 것 아니냐? 대답은, 이들은 가격을 비교해 싼 곳을 찾아가는 등의 생각도 별로 안 한다는 거다.

요지경 세상이다. 뉴저지에 근사한 식민지풍 저택을 짓고 숲도 소유하고 있는 어느 교민은 반짝 세일 정보를 주시하다가 단돈 299불에 7박 8일 카리브해 크루즈를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나만 해도 책 하나 살 때도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최저가를 찾고 마일리지다 쿠폰이나 써가면서 호들갑을 떨고, 식료품도 보스턴 시내를 다 뒤져서 제일 저렴한 체인인 마켓배스킷까지 15분을 운전해 장을 보러 다니는데, 컴퓨터도 인터넷도 차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벌어보려는 악착같은 의지조차도 없는 이들은 시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받는 하나밖에 없는 작은 가게에서 술, 담배, 싸구려 과자를 사서는 하염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세상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집창촌 아가씨들에게 싸구려 화장품이나 옷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은 떼어온 물건 값의 열 배 스무 배를 받아내고, 그녀들이 가는 미용실에서는 동네 일반 손님한테 받는 값보다 훨씬 비싼 값을 그녀들에게 받는다. 경제학적으로는 최적화된 가격차별화 정책이다.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은 시장이니까.

p. 223~224

이런 분위기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 교포들이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슈퍼마켓 같은 걸 운영해서 꽤 쏠쏠한 수익을 내며 자수성가한다고 한다. 어려우니까 더 아껴 쓰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아껴 쓸 의지조차 없어 백인 중산층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오히려 백인 중산층은 어떻게든 돈을 아껴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니 내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20대 땐 지금보다 훨씬 수익도 적고 어려웠지만 돈은 오히려 더 펑펑 쓰고 다녔다. 어차피 몇 푼 아껴봤자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때보다 수익이 훨씬 나아졌지만, 오히려 씀씀이가 많이 검소해졌다. 물론 지르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모든 쿠폰과 할인을 총동원해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골라 과감히 지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하루에 몇 챕터씩 읽다 보니 완독하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개인주의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꽤나 묵직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그의 신선하고 객관적인 시선들도 다양하게 담겨있어 신선한 채소가 가득 들어있는 건강한 맛의 비빔밥 한 그릇 맛있게 뚝딱 비워낸 느낌이다.

밥을 먹어 묵직하지만 신선한 채소가 많았기에 속이 부대끼지 않는 그런 느낌!

문유석 판사에 이어 나도 선언한다!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시선을 가진,

똑똑한 개인주의자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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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2019-01-16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새 새로나온 쾌락독서도 재밌던걸요.

다림냥 2019-01-17 20: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책도 재밌다고 하더라고용! 저도 곧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림냥님 명절연휴 잘 보내세요☕️

다림냥 2019-02-02 12: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도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