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만큼 비밀스러운 큰 돈이 생겼을 때 인간은 어떻게 변할까?" 

우연히 숲속에 추락한 작은 비행기를 발견한 세사람이 있다. 조종사는 죽어 있었고, 그 안에서 그들은 450만 달러의 돈뭉치를 발견한다. 3명이서 똑같이 나눠가지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만큼 큰 돈이다. 우리 돈으로 45억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지만 심플 플랜이 쓰여진 시점이 93년도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금 시세로 따지면 450억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엄청난 주인없는 돈을 발견했을 때, 동요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설령 위험한 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안전하게 돈을 나누기 위해 우선은 돈의 출처를 정확히 알게 될 때까지 돈을 숨기고 비행기가 저절로 발견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하지만 가만히 기다렸다면 소설이 아니겠지. 돈에 대한 욕심은 서로에 대한 의심과 범죄를 낳고, 그 범죄를 숨기기 위한 또 다른 범죄와 함께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악하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선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다가 그렇게 될 뿐이다. 

마냥 선량한 중산층 직장인이었던 주인공 행크는 돈에 대한 집착과 함께 점점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사실 처음에는 여차하면 돈을 태워버리겠다고도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처음에 행크가 "만약" 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돈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그런 찝찝한 돈을 왜 가지냐며 자기는 경찰에 신고할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근데 그 돈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들을 이뤄줄 수 있는 돈 앞에 점점 그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 아닌, 없으면 안되는 무조건 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심플 플랜의 놀라운 점은 스펙타클한 전개 속에서 돈 앞에 미쳐가는 인간의 심리를 소름끼치게 잘 표현했다는 점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라고 상상했을 때 마냥 남의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만큼, 어쩌면 그 상황에서는 진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당장 상상만 해봐도 길가다 50억이 든 돈자루를 주웠을 때, 그걸 그대로 경찰서에 가져다주며 신고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이며, 그 돈으로 인해 달라질 자기 인생을 상상해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상상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그전에 평범하게 잘살고 있던 내 삶조차 회색의 무의미한 삶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평범하던 현재가 어느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무섭다. 돈을 가지기 전의 마음 상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우리는 한계를 넘어섰으며, 돌아갈 수 없다. 그 돈 덕분에 꿈꿀 기회를 얻었지만 그 때문에 현재의 삶을 경멸하게 되었다. 사료상의 일, 알루미늄으로 옆면을 댄 집, 주변 마을. 우리는 그 모두를 이미 과거의 것으로 보고 있었다. 백만장자가 되기 전의 과거, 형편없고,우울하고, 시시한 과거. 그러므로 어찌어찌하여 그 돈을 도려주어야 한다 해도, 의미 있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듯이 다 잊고 옛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옛 생활을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았던 때로, 옛 생활을 평가하고 값어치 없게 여겼던 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 」 <심플 플랜>

그래서 내 힘으로 번 돈이 아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큰 돈은 (솔직히,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두렵다. 지금 내 힘으로 하나하나 쌓아가는 저축이 당장 의미없어 질 것이며, 내 능력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의욕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그 돈으로 물론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 살긴 하겠지만 마음 한켠에 불안감과 공허감이 존재할 것 같다. 

심플 플랜은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말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 돈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어쩌면 현실은 이보다 더 무서울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은 어쩌면 돈에 대한 환상과 상상만으로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돈의 환상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디, 아주 단디 먹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op It Up! - Music Craft Studio, 남무성·장기호의 만화로 보는 대중음악만들기
남무성.장기호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음악만큼 사람을 순식간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는 마법을 지닌 매체가 있을까. 단지 다양한 음들의 집합이 소리가 되어 귀에 들려올 뿐인데 사람을 기분좋게, 신나게, 감성에 젖게 만드는 걸 보면 무슨 마법이 숨어있는 것 같다. 학창 시절,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면서 어두운 책상에 스탠드 불 하나 켜두고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꽤나 행복했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음악만 있으면 하기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그 순간도 나에겐 꽤 견딜만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무슨 공부를 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무슨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기억 나니까. 대중음악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형태로 추억과 함께 갈무리 되어 남아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음악,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들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pop it up (팝잇업)은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꽤 성실하고 쓸모있는 기본 개념을, 일반 대중들에게는 흥미로운 음악 상식을 전해주는 독특한 음악 만화다. 골치 아픈 음악 이론을 만화 형식으로 전하려는 시도는 새로웠지만, 사실 재미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너무 재밌다. 우선 그림이 놀랍도록 센스있고, 유머감각이 펄펄 넘쳐서 계속 낄낄거리며 보게된다. 만화로서의 재미와 정보의 깊이를 둘다 놓치지 않아서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음악 공부하는 사람들이 기초를 다지기에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사실 좀 어렵기도 했지만 교양 차원에서 알아두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이라 앞으로 음악 감상할 때 좀 더 풍부하게 느끼며 재밌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용음악 전공하는 사람들이 어떤걸 배우는걸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이런걸 공부하는 거구나 알게 됐다. 음악은 예술보다는 과학에 가까운 학문인 것 같다ㅠ

pop it up 팝잇업

책을 읽으며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만화 그림이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재주가 너무 뛰어나서 깜짝 놀랐다. 배철수와 손석희 아나운서를 그림으로 표현한 거 보소. 훅치고 들어오는 유머코드와 쉽게 풀이 된 설명들 덕분에 깔깔 웃으면서 즐겁게 읽었다. 책을 다보고 나서는 도대체 이 그림 누가 그린건가 찾아봤는데, 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남무성 재즈 평론가가 직접 그렸나보다. 전문 만화작가가 그린줄 알았는데 이 분은 만화가로 전업해도 충분히 먹고 사실듯 ㅋㅋ 


좋은 음악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형식과 코드, 음의 반복과 변칙을 통해 과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음악 발전에 장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pop it up은 대중음악을 다루는 책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히트곡의 숨은 비밀도 속속들이 알려준다. 잘 모르고 어려운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 이상씩 들어본 유명한 대중 음악을 대상으로 설명해주므로 훨씬 이해가 쏙쏙되고 재미있다. 

앞으로는 음악을 들을 때 곡의 진행형식이라든가, 훅 hook 부분, verse와 chorus 같은 부분도 생각해가며 들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한국 대중음악 시장을 보면 예전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음악이 많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하루단위로 히트곡이 변하니 음악을 통해 지금을 기억할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자꾸 옛날 사람처럼 예전 노래를 찾아 듣고 또 듣고 하는걸까. 

유통기한이 몇 주도 안가는 인스턴트 음악 말고, 
오래오래 들어도 들을때마다 새롭게 심쿵하는 그런 음악이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학창 시절 이사카 고타로는 <죽음의 키스>라는 책을 읽다가 몸을 벌떡 일으킬 만큼 흥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언젠가 꼭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신작 화이트 래빗에 꽤 많은 트릭들을 갈아 넣은 듯하다. 읽으면서 놀라 벌떡 일어나진 않았지만, 몇 번이나 동공이 훅 커지곤 했으니 어느 정도는 꿈을 이룬 듯하다. 책 전체가 반전과 트릭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글을 읽는 독자들이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려면 자세한 줄거리 소개는 되도록 자제해야 할 것 같다. 간단히만 말해보자면 범죄조직에서 인신매매를 통해 돈을 벌며 살아가는 우사기타 다카노리가 얄궂게도 자기의 사랑하는 와이프 와타코를 조직의 두목에게 인신매매 당하는 바람에 아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리온 별자리를 검색해 본 것이다. 소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2가지가 있는데 바로 오리온 별자리와 레미제라블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작가는 두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이야기를 묘하게 합쳐 재밌게 풀어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연인 관계였던 오리온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르테미스의 오빠 아폴론은 어느 날 멀리서 오리온이 사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오리온의 머리를 과녁 삼아 동생에게 사냥 내기를 청한다. 과녁이 오리온인 줄 몰랐던 아르테미스는 활로 오리온의 머리를 명중하고 오리온은 죽게 된다. 그런데 소설 초반 부분에서 와타코가 우사기타에게 해주는 얘기에서는 오리온이 전갈에 물려 죽었다고 나오는데 일부러 잘못 알려주는 건지, 작가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전갈자리와 오리온자리의 관계도 흥미로운데 이런 이야기들이 소설 속에 조금씩 녹아있다. 

근데 다 읽고도 왜 책 제목이 화이트 래빗인지, 소설 속 사건이 왜 흰토끼 사건인지 알 수가 없어 알쏭달쏭했다. 설마 주인공 '우사기타 다카노리'의 이름에서 '우사기'가 일본 말로 토끼를 뜻하는 단어라서는 아니겠지 생각하다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토끼자리를 찾았다. 사냥꾼 오리온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 토끼 사냥이었고, 실제로 겨울 하늘을 보면 오리온자리 바로 밑에 토끼자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작가가 숨겨놓은 이야기를 직접 찾아보는 과정은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그래도 왜 소설 속 사건 이름이 흰토끼 사건인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건 반전? 

<화이트 래빗> 소설의 특징적인 부분이자, 읽으면서 약간 아쉬웠던 점은 작가가 직접 개입해서 말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이야기에 직접 개입해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이 신선하긴 했지만 구구절절 상황에 대해서 힌트를 주고 설명을 해주다 보니 긴장감이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 들긴 했다. 차라리 인물의 시점이나 시간의 교차 전개 같은 걸 더 잘 이용해서 반전의 묘미를 끌어올렸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작가가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방식을 차용해서 쓴 듯하다.

「"그 소설, 군데군데 이상한 구석이 있던데요. 작가가 느닷없이 '이것은 작가의 특권이므로 여기서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리겠다'라는 둥'한참 뒤에 나올 장면을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겠다'는 둥 묘하게 나서더라고요."
구로사와는 옛날부터 있는 수법이라고 말하려다 애당초 <레미제라블>이 옛날 소설이니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 <p.34>


하지만 역시나 명불허전 이사카 고타로는 여기저기 복잡한 떡밥을 투척하고 마지막에 완벽하고 세세하게 주워 담는 데는 도가 튼 거 같다. 처음엔 대체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결국엔 '헐, 이런 거였어?' 하며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추리나 미스터리는 그런 재미로 보는 거 아니겠는가. 문득 이사카 고타로가 잔뜩 흥분하며 읽었다는 <죽음의 키스>라는 책도 궁금해진다. 

누워서 읽다가 정말 벌떡 일어날 그런 책을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강림하는 지름신이시여, 그대가 어떤 경로로 내게 오는지 에밀 졸라의 소설을 통해 더욱더 생생하게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1860년대의 소설, 그것도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소설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 마케팅 기법을 속속들이 알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에밀 졸라가 2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총 20여 권의 역작 <루공-마카르  총서>의 11번째 작품이다. 에밀 졸라라고 하면 <목로주점> 정도의 작품만 들어본 적 있는 작가였는데, 그 작품 역시 루공-마카르 총서 중에 한 작품이라고 한다.  
현대 소설도 아닌 고전 소설에서 백화점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다니 읽기 전부터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단지 배경일 뿐만 아니라 백화점이 어떻게 여인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여 미친 듯이 매출을 올리며 성장해갔는지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아, 나는 그동안 이런 상술에 놀아났었던 거구나, 절실히 느끼게 하는 백화점의 판매전략들. 이것은 꼭 백화점 뿐만이 아니라 모든 판매에 적용되는 전문 마케팅 기법이었다. 그 때 프랑스에서는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담은 소설이 인기 있었다. 에밀 졸라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실제 모델 봉 마르셰 백화점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엄청난 정보를 끌어모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기존 2권으로 분권되어 있던 책을 한 권으로 합본하여 낸 책이기에 총 770페이지가 넘는 완전 벽돌 책이다. 고급스러운 양장과 두께 때문에 읽기 전에는 사실 다 읽을 수나 있을까 겁을 집어먹었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정말 술술 잘 넘어가도록 쉽고 재미나게 쓰여있다. 백화점이 무섭도록 성장하는 과정과 함께 그 앞에 힘없는 스러져가는 소상공인들의 아픔과 괴로움, 백화점 안에서의 다양한 알력 다툼과 쫄깃한 사랑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고루 버무려져 있어 읽는 내내 흥미롭다. 

특히나 읽으면서 내 머리를 띵하게 했던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들을 책 속에서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게다가 이제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학자처럼, 여성에게 좀 더 높은 차원의 덫을 놓았다. 여성이 값싼 물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면서 필요 없는 상품을 구매한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관찰에 근거해 가격 인하 시스템을 도입했다. 상품을 신속하게 회전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팔리지 않는 물건들의 가격을 점차 낮추다가 손해를 보고서라도 팔아치우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p. 394~395>

「제품 하나당 고작 몇 상팀 정도 손해를 보겠지. 그래. 그런데 그다음을 생각해봤나? 그로 인해 수많은 여자들이 몰려와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우리 제품 앞에서 넋을 잃고 정신없이 지갑을 열게 된다면, 그건 반대로 우리한테 축복이 되는 거라고.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란 말일세. 중요한 건, 친구, 여자들의 욕망에 불을 지펴야 하는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들을 유혹하는 미끼 역할을 할 대박 상품이 필요하단 말일세. 」<p. 71~72>

그래, 난 호갱이었다네. 그 미끼상품을 덥석 물고는 이런 물건을 이렇게 싸게 득템하다니 사는 김에 다른 것도 사야겠다며 룰루랄라 즐겁게 잘도 질러댔었지ㅋㅋ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사용된 다양한 마케팅 기법은 실제로 지금까지 전 세계의 모든 회사들이 사용하는 마케팅 기법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소설이 아니라 재미난 마케팅 도서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소설 속 여인들이 유혹에 넘어가는 걸 보면서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말이다. 

아내가 죽으면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백화점을 차린 무레는 그 당시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모두 동원해 막대한 부를 쌓는다. 마케팅과 경영의 천재이며 동시에 바람둥이이기까지 한 무레는 수많은 여자들 중 단 한 명, 빼빼 마른 시골 출신 백화점 판매원 '드니즈'의 사랑만은 얻지 못하자 점점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데.. 과연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지?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번역도 쉽고 명확해 잘 읽히고, 다양한 인간관계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도 꽤 흥미로우며, 고전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와 거의 다를 것 없는 배경의 이야기들이 펼쳐지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고전 소설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책꽂이에 꽂아두면 꽤 아름다우니 장식용으로도 손색없으므로 일석이조. 

에밀 졸라의 다른 소설에도 용기 내어 도전해보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과거를 돌아보면, 누구나 어떤 한 시점을 중심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진 듯 느껴지는 사건이 한 두건쯤 있을 것이다. 그때 난 왜그랬을까.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왠지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은 더 아름다울 것만 같고, 타인의 인생은 언제나 내 인생보다 1.5배쯤 더 빛나보이는 법이다. 지금 내 인생이 시궁창처럼 느껴질수록 아마도 과거에 대한 집착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그 부분에 대한 환상을 건드리는 책이다. 바로 <만약 .. 했다면>에 대한 것이다. 밤에 자다가도 이불킥을 할 만큼 창피한 기억이나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망친 그 사건을 내 과거에서는 물론 다른 사람의 과거에서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 한마디로 처음부터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창피한 내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 자체를 없앤다는 건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일이 생기지 않음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인해 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의 미래의 모습도 다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비슷한 컨셉의 영화, 나비효과나 어바웃 타임처럼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 영향을 끼쳐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스스로 당당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주인공 찰리가 어느 날 우연히 과거를 지워주는 기계를 통해 자신의 가장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지움으로 인해 달라지는 미래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매일 여러남자들과 끊임없이 원나잇을 하며, 동네 술집 드링크스&모어 에서 서빙일을 하던 찰리는 과거를 지우자마자 자신의 현재가 신데렐라처럼 변해있음을 실감한다. 학창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첫사랑과 14년 열애를 통해 결혼하기 직전의 순간이었으며, 강변의 으리으리한 저택이 그녀의 집이었고, 그녀의 방에는 예전인생에서 결코 입어본 적 없는 비싼 속옷들이 즐비하다. 이 얼마나 대박인가. 정말 과거의 실수 한번을 없앴더니 내 인생이 이렇게 황금빛으로 변했다고?

그녀는 과연 바뀐 인생에서 행복했을까? 바뀐 인생의 그녀는 예전 인생의 그녀와 전혀 다른 취향의 사람이었다. 바뀐 인생에서의 찰리는 예전 인생의 찰리라면 절대 듣지 않았을 재미없는 경음악만 들었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정숙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전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다른 인생으로 넘어온 찰리가 언제까지 다른 찰리를 연기할 수 있을까. 첫사랑이었던 남편 모리츠는 자신의 성공만을 좇는 사람이었고, 친구들은 모두 사업상으로 얽혀있어 불편한 관계였으며, 결정적으로는 예전 인생에서 그녀의 사랑했던 친구들 '팀과 게오르크 아저씨'와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다시 찾을수 있을까?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시간 판타지 형식의 이야기를 빌려 '바로 지금 여기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과거의 행복, 미래의 행복이 아닌 바로 오늘의 행복 말이다. 지금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 있고, 스스로 자유로우며 마음이 충만하다면 돈이 조금 없는 것이야 무슨 대수랴. 조금 찌질하더라도 내가 행복하면 된 것 아닌가. 한 때 나도 '과거에 만약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현재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이미 지나가버린 아무 소용없는 과거를 원망했었다. 그런데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해서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던 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우주가 정말 평행우주라 내가 선택하는 순간에 따라 수많은 우주가 생겨나는 것이라면, 아마 그 수많은 우주 속의 나는 모두 그 나름의 불행을 지니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지금 이 우주의 내가 좋다. 순도 100%의 행복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80%이상 행복하니 그 정도면 합격점이다. 나답게 살 수 있고,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이 소설은 이야기로 따지면 여타 잘만들어진 영화들에 비해 줄거리가 다소 허술할 수도 있고, 조금은 가볍게 여겨지는 소설일 수 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묵직한 메시지 하나만큼은 던져준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18-04-1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쉬운 듯 하지만 참 어렵죠. 지금 여기 행복하기! 방금 다락방님 글 읽고 행복해졌어요. ㅎㅎㅎ

다림냥 2018-04-11 15:16   좋아요 0 | URL
ㅋㅋ 전 다림냥입니당ㅋㅋ
꼬마요정님이 이 글 읽고 행복해지셨다니 저도 행복해졌네요 ㅋㅋ

꼬마요정 2018-04-11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 다림냥님 죄송해요~~~ㅠㅠㅠㅠㅠ 제 손가락이 잠시 미쳤나 봅니다ㅠㅠㅠㅠ 행복에 취해 넋이 나갔나 봅니다ㅠㅠㅠㅠㅠ

다림냥 2018-04-11 18:48   좋아요 1 | URL
ㅋㅋ 괜찮아요~ 글 행복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용 :) ㅎㅎ

2018-04-11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1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트 2018-04-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냥님 쓰신 후기를 읽으니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시험 끝나는대로 읽어봐야겠어요 :)

다림냥 2018-04-20 18:08   좋아요 1 | URL
흥미로운 주제죠~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하나쯤은 있기에 더 관심가는 주제인 듯 싶어요 ㅋ 시험 끝나고 잼나게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