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런 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겁니까? 아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태연한 듯이 사실과 섞어서 얘기하는군요. 그게 아주 매력적입니다. 주인공은 연인이 선물한 분홍색 장미를 꼭 껴안고 가시에 찔려 피를 흘려서 그걸 빨간 장미로 만든 후, 그 장미잎으로 요리를 만듭니다. 그 요리는 한 여자의 감정을 폭발시켜 그녀는 자기의 열기로 목욕통을 불태우고(비유가 아니고 진짜로 말입니다) 발가벗고 들판으로 나가 한 남자를 만나 말을 달리며 사랑을 나눈 후(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창녀가 되었다가 혁명군 장교가 되었다가. 이런 얘기를 별다른 수식도 변명도 없이 어제 옆집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한두번이 아니고요, 시도때도 없이 그런다니까요. 주인공 티타가 태어날 때 흘린 눈물이 마른 후 말라붙은 소금을 쓸어모았더니 5kg 푸대자루로 한가득이었다, 티타가 결혼준비를 하면서 뜨게질로 뜨기 시작한 담요가 20년 후에 3헥타르나 되는 농장전체를 한바퀴 두르고도 남았다, 성냥을 먹고 뜨거웠던 추억으로 성냥에 불을 붙여 불타 죽었다, 언니와 결혼한 자기의 연인 페드로의 아이가 태어나자 처녀인 티타의 가슴에서 젖이 흘러넘쳤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리얼한 감정묘사 중간중간에 태연자약하게 등장합니다.

제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요,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사실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너무도 적절하다는 사실입니다. 늙은 엄마의 노후를 보살피기 위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아야하는 막내로 태어나면 누구라도 5kg이 아니라 5톤은 되는 짠 눈물을 쏟아내고 싶을 것이며, 열몇살 때 부푼 가슴을 안고 혼수를 마련하고자 시작한 뜨게질로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기다림을 표현하자면 3헥타르가 아니라 지구를 한바퀴 두르고도 남을 것이고, 사랑하는 남자와 그의 아이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처녀의 가슴에서 젖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생산할 수 있지 않겠는가요.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에로틱이란 이런 것입니다. 

페드로의 눈길이 티타의 가슴에 머무를 때까지 두 사람은 황홀경에 빠진 채 서로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티타는 맷돌질을 멈추고는 페드로가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꼿꼿하게 세워서 자랑스럽게 가슴을 펼쳤다. 이 뜨거운 탐색전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바뀌었다. 옷을 뚫는 듯한 강렬한 시선을 나눈 후로는 모든 게 전과 같지 않았다. 티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 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페드로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서도 티타의 가슴을 순수한 소녀의 가슴에서 관능적인 여인의 가슴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에로틱이라니, 너무나 높은 경지 아닌가요? 읽다보면 정말 '섹시하다'고 느끼게 되는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노골적인 표현도 없이 말이죠.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이야기의 처음부터 여러가지 음식에 대한 얘기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그런 것들은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음식과 섹스'라니, 남들은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연결이 되더군요. 난 몰랐지 뭡니까.

3. 근데 참 이 간악하게도 현실적인 아줌마는 이렇게 불타듯 뜨거운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티타의 인생의 나중에 등장하여 그녀를 구원하여 주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며 모든 것을 알고도 이해하고 청혼하는 존이란 의사선생님을 보며 "티타, 존이 더 나아. 페드로랑 맺어져봤자 고생길이야. 존을 선택해!"라고 부르짖고 있었으니.....


댓글(7)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3-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밤에 읽기 좋은 에로틱한 리뷰군요.
추천하고 가요.^^

깍두기 2005-03-3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야하게 썼나요?^^ 고맙습니다요.

플레져 2005-03-31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드로 같은 남자, 딱 질색...! 그래도 사랑에 눈이 먼 자에게 그런게 보일리 없겠죠... 에스페란사, 한동안 그 이름을 잠시 잊었네요. 깍두기님이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우 같아요. 멋진 리뷰여요. 추천!

깍두기 2005-03-3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플레져님! 페드로는 대체 뭐냐고요!! 그렇게 사랑하면 데리고 도망이라고 갈 것이지 바보냐고요. 그리고 언니랑 결혼했으면 언니랑 잘 살 일이지 마음은 여따 두고 몸은 거기다 두고, 사람이 비열해! 난 존, 무조건 존이라고!!^^

sooninara 2005-03-3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책은 안보고 영화로 봤었는데..영화에서도 죽이게 불타올랐죠^^
그눈빛...안어벙보다 뜨거웠어요

밀키웨이 2005-04-2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읽는다 읽는다 하면서 왜이리 안 읽어진답니까?
그런데 깍두기님 리뷰를 보고나니 갑자기 동합니다.
왜?
야하니까 ^^;;;;;;

깍두기 2005-04-2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키웨이님 ㅎㅎㅎ
이래 댓글에서 님 모습 보니 너무 반가워요!!!
 
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성격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상당히 단순하고 낙천적이어서 즐거운 일이 있으면 시시덕거리며 삶의 고단함 같은 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눈앞의 승부에 열중하며, 삶이란 재밌는 것, 신나는 것, 슬픈 것, 짜증나는 것 등등의 총합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깊은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어느날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와, 벌어먹여 살려야 하는 부양가족과, 하루도 안할 수 없는 집안일과, 이제는 그야말로 가족이 되어버려 감정이라고는 일어나지 않는, 코를 드르렁거리며 옆자리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사는 게 뭐 이래, 뭐 특별한 거 없나, 나으 가련한 인생에 뭐 화끈한 전환점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안해보는 건 아니다.

나야 뭐 생각 뿐이지만, 실제로 그 전환점을 찾아 자기자신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너무도 우울하게 인간의 어떤 몸짓도 실은 끊임없이 쌓이는 모래를 퍼내고 또 퍼내어 기껏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우리 앞에서 중얼중얼 거린다.

경련.....똑같은 반복..........늘 다른 일을 꿈꾸면서 몸을 던지는 여전한 반복.....먹는 것, 걷는 것, 자는 것, 재채기, 고함, 성교.......

늘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서, 새로운 곤충의 변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곤충도감에 올리고 싶은 명예욕에 잠깐의 일탈과 모험을 꿈꾼 남자는 결국 모래로 뒤덮힌 마을에 갇혀 마을의 현상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모래 속에서 모래를 파내는 반복적인 노역에 종사하게 된다. 처음에는 탈출을 꿈꾸고 실제로 시도도 해보았던 남자는 점점 모래 속에서 모래에 동화되어 탈출시도는 그냥 '희망'이라는 무지개로 남겨두고 실제로 탈출이 가능한 시점에서는 정작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며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그도 깨달은 것이다. 탈출해서 간 다른 곳도 결국은 똑같은 곳일 거라는 것을.

본문에 이런 예가 나온다. 농촌 총각이 일해서 땅을 늘리면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농부의 생활을  '더 이상을 참을 수가 없어서' 가출을 한 끝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그래서요? / 그러니까, 거기에 다니겠지..../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 월급날이 되면 월급을 받았을 테고, 일요일에는 옷을 입고 영화나 보러 가고 그랬겠지/ 그러고는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이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늘 다른 일을 꿈꾸면서 몸을 던지는 여전한 반복...... 그래, 사람이 하는 일 중 이 말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를 쓰고 돈을 모으고, 자기가 믿는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고, 아이들과 남편과 복닥거리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혹은 이득을 보려고 안달복달하는 인간들에게 '너희가 하는 그 일, 사실은 모래에 파묻혀 가는 마을에서 끊임없이 모래를 파내는 일과 같은 것이야' 라는 말처럼 냉정하고 잔인한 말이 또 있을까. 하루라도 안 쓸고 닦으면 머리카락과 먼지로 뒤덮이는 집안꼴과 매일 나가서 노동하지 않으면 당장에 무너져 버릴 이 세상 대부분의 가정과, 감정 없이도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섹스, 이 모든 것에 '무의미함'이라는 냉정한 판결을 가차없이 내려버리는 잔인무도함이라니!

그런데 참, 인간이란 것이 묘해서 이런 냉정한 선고를 받고도 발딱 일어나서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누가 당신에게 그런 의미부여해 달랬어? 맘대로 생각하시지. 난 하던 일 계속할테니' 라고 말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기라고 생각해도 좋고, 깨달음이나 해탈의 경지라고 생각해도 상관없고, 바보니까 그런다고 해도 뭐라 말 안하겠다. 그냥 그 모든 게 설령 무의미하다 하더라도, 난 자진해서 내일도 직장에 나갈테고, 식구들에게 밥을 차려 줄 것이고, 투덜대면서 방바닥의 머리카락을 줏을 것이고, 애들과 남편에게 뽀뽀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목숨도 걸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3-13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파이팅!!
옳소옳소!^^

깍두기 2005-03-1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제가 무슨 웅변을 한 건가 봐요, 히히.

파란여우 2005-03-1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나는 나, 내식대로 살죠 뭐..깍두기님은 깍두기 드시고, 여우는 털을 휘날리면서...^^

플레져 2005-03-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요. 의미부여할 필요없습니다!! 모래 퍼날르는 사람은 모래 퍼날르고 밥 차리는 사람은 밥 차리면 되지요. 암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책에다 줄 별이 다섯개 밖에 안되다니 참 아쉽다. 참 오랜만에 작가를 경배하며 책을 읽었다.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되기 한참 전부터 SF커뮤니티 같은데 슬쩍 가서 글을 읽어보면 테드 창에 관한 이야기가 간혹 있었는데 항상 칭찬 일색이었다. 도대체 어떤 글을 쓴 작가이길래 이렇게 번역본이 나오기도 전에 야단들이란 말인가(하긴 그곳에 가면 원서를 읽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므로), 내 책이 나오면 꼭 사보고 냉정한 평가를 내려주리라 하고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을 해서 '자, 각오하시라. 지금부터 내가 이 책을 읽어주마' 이런 심정으로 책을 잡았건만.

결국은 나도 그 찬양하는 무리에 끼고 말았으니,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소설이며 어찌하여 10년동안 책 한권 분량의 중단편만 발표한 작가가 과학소설계의 최고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 증명해 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미리 말해 두지만 이리 말하는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백퍼센트 이해하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이 책은 언어학, 물리학, 수학, 종교학 등에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작가가 말하려 하는 것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굉장히 사변적인 책이다. 학문과 담을 쌓은 내가 그런 지식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감히 내가 이 책을 걸작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보적인 지식만 가지고도 이 책은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며,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지식을 쌓는다면 이 책을 백만스물한배는 음미할 수 있으리란 걸 지금 이 상태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정교하고, 수미일관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뭐 하나 더하거나 뺄 것 없는 이야기들. 반지의 제왕처럼 길고 긴 이야기로 현실에 없는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재주지만, 이렇게 짤막한 이야기로  논리적으로 완결된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너무나 존경스런 재주이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세계는 현실세계가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해 주며, 인간의 사고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지구와 인간을 보게 해 준다.

각 단편마다 구구절절히 감상을 쓰려고 했으나 읽은지가 오래되고 능력이 딸려서 도저히 못 쓰겠다. 나보다 먼저 쓰신 다른 님들의 리뷰가 너무 좋으니 내가 덧붙일 필요도 없겠고.

각 단편 모두 마음에 들었으나 그 중 표제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가 가장 강렬했다. 어쨌든, 멋진 작품이다. 좀더 여러 방면의 책을 읽은 후, 다시 한번 도전해 보련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개 2005-01-1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장바구니에 넣을려고 했더니 일시품절이네요.. 보관함으로~~

2005-01-11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5-01-1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꼭 사서 보세요^^

속삭이신 님, 사놓고 안 읽고 있다니 그런 아까운 일이! 빨리 보세요^^

쓰다만 것 같은 리뷰에 추천이라니...이 책에 달린 다른 리뷰가 얼마나 훌륭한데요. 그 분들 글을 꼭 읽어 보세요. 독서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하얀마녀 2005-01-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강력한 뽐뿌질이... ^^

딸기 2005-01-1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

깍두기 2005-01-1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감사합니다^^(리뷰가 허접하여 민망하긴 하지만....라주미힌님의 리뷰를 참고하시면 더 도움이 될 거예요.그 밑에 다른 분들 리뷰도)

마녀님, 제가 너무 심했나요?^^

그로밋 2005-01-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군요. 저도 보관함에 슬쩍 끼어 넣었답니다. ^^

플레져 2005-01-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땡스투! 점점 이 책에 대한 열기가... 고조 되고 있습니다, 제게...


미세스리 2005-03-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 싶어요. 그러니까 SF죠? 보관함 슝슝- 그리고 땡스투!

비로그인 2005-04-1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인것이.. 주위에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왜 이리 감흥이 없을까요? 제 맛에 책 읽는 것이라고 하지만.. 왠지 혼자 오답쓰는 것 같은 기분이..;;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슐러 르귄처럼 고요하고 우아한 SF를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SF라 하면 스페이스 오페라 정도를 상상하고 광선총이 난무하는 격전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이 작품을 읽으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강물처럼 흐르며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소곤거리는 문체로 인간심리를 집요할 정도로 파고드는 글을 접하면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귄 초기 단편집이라 하는데, 단편집이라고 만만히 볼 것은 절대 못된다. 다 읽고 나서도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르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어스시 시리즈나 어둠의 왼손을 먼저 볼 것을 권한다. 이 단편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루할 만한 글들이 꽤 되고 완성도도 다 각각이니 말이다.




 <셈레이의 목걸이><겨울의 왕>



광속 여행. 그로 인한 시간차, 내가 광속으로 여행하고 돌아오면 나는 늙지 않으나 내 고향 지구는 몇백년의 나이를 먹어버린다는 물리학의 명제를 가지고 이렇게 우아하며 우수어린, 슬픔으로 가득찬 환타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세계의 전설과 사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 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는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을 어두은 광기가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위의 두 이야기들은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신기해하며 들었던 전설이나 동화, "그곳에서 일주일 잘 보내다 왔는데 돌아와보니 70년이 흘렀다"는 이야기 같은. 우주시대의 전설 같은.





<아홉 생명>


 


복제인간에 대한 소설은 여러번 접해 봤지만 르귄의 아홉 쌍둥이는 과학적 사실과는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설정만을 빌려왔을 뿐. 르귄은 여기서 인간의 태생적인 고독(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줄 파트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나는 느꼈다. 그런 인간이 보기에 이 아홉쌍둥이는 너무도 완벽하다. 그들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설명이 불필요하며 능률적이다. 태어나서부터 쏘울메이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 때문에 자멸한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존해 온 것이다. 고독은 인간에게 저주이면서 축복이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렘의 장편 <솔라리스>와 같은 이야기이다. 행성 전체가 하나의 생명인 것,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 간여하는 것,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감정을 반사하는 것. 인간이 그 존재를 만나 의심과 공포를 발산하였기에 그 존재는 그 감정을 그대로 인간에게 반사한다. 인간은 낯선 자(혹은 미지의 것)에게 신뢰와 호감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의 불신과 의혹은 결국 항상 제 발등을 찍어오지 않았던가?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 마음 속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숲이, 아직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끝이 없는 숲이 있다. 우리 각자는 매일 밤 홀로 그 숲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처럼 미지의 것이다.





<땅 속의 별들>



이 이야기는 땅 밑 어둠 속에서조차 별을 발견해 낸 한 창조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 대한 찬사일까? 아니면 어떤 현상에든지 자신의 모습을, 기대를 투영해 내는 인간정신에 대한 연민일까?




<시야>


 


인간이 전 우주를 관통하는 진실(‘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을 깨닫게 되는 것(‘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다)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단편에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눈을 뜨고 신의 얼굴을 보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지 한 인간의 얼굴을, 나무 한 그루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내 인생 전부를 버릴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나는 내 삶이 다시 돌아오기를, 내 원래 죽음을 원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여러 방면으로 탐구하고 질문해 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해답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질문거리가 없는 삶이란, 언뜻 생각하기에도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이 이야기를 읽고서 마음 깊이 속울음을 울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이것은 인류가 살아온, 지금의 문화를 이루어 온 과정에 대한 슬픈 우화이다. 너무나 적나라한. 우리는 오멜라스에 살고 있으며, 거기 살고 있는 행복하고도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 눈 닿는 도처에는 오멜라스의 한 지하실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고통이 나머지 모든 인류의 행복을 보장한다. 우리는 그 아이를 위해 깊이 슬퍼하고, 참회하며, 고통스러워 하나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진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연민은 그대로 우리의 자양분이 되어 우리의 문화예술을 이룬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도스도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에서 격정에 차 이야기한 ‘희생양’ 이야기가 여기서 너무나도 처연하게 변주된다. 우리는 그걸 보고 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진 않는다. 거길 떠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4-12-0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요... 근데 줄이 좀....알라딘의 버그겠죠?

로드무비 2004-12-0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연민은 우리의 자양분이 되어 문화예술을 이룬다

고작 연민, 문화예술 질료의 그 어이없음이라니!

근사한 리븁니다. 추천!

깍두기 2004-12-0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그러게요, 이 줄간격 좀 빨리 해결해 주세요. 마태님이 알라딘 대주주 아닌가요?^^

로드무비님/맨날 근사하대. 창피하게^^
 
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는 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다 읽은 후 내가 물었다. "재밌어?" 그녀는 단호하게 별로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자기는 이해가 안간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와의 독서취향이 그다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냉큼 빌려 달라고 해서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그녀가 이 책이 별로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별로였을 것이다. 아직도 지고지순한 사랑과 로맨스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나에게도 이 책이 백퍼센트 맘에 드는 건 아니다. 작가가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고 의욕과잉이라는 생각도 들고 주인공 남녀에게 너무 많은 말을 시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가 하려는 말의 '내용'에는 동의한다. 그 말은 즉, 나는 영원한 사랑과 로맨스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다.

작가 김형경의 전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몇년 전에 나름대로는 힘들었던 나에게 냉정한 위로를 던져준 적이 있다. 냉정한 위로란, 작가가 이 자전적인 소설에서 자기자신에게 비교적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은 그 줄거리도 결론도 희미하지만 작가가 자신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나도 내 안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힘을 얻었던 것이다.

이번에 읽은 <성에>는, 내가 그동안 어렴풋이만 생각하고 있던 사랑과 성, 가족, 환상에 대한 입장을 좀더 정확하게 정리하도록 도와주었다. 무슨 인류학 서적도 아니고 소설을 읽고 입장 정리가 되다니, 그러니까 이 책은 상당히 탐구적인 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무언가를 강력 주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작가가 자연물(참나무, 청설모, 박새, 바람 등)의 입을 빌어 하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깊었다. 그들은 인류가 그동안 사랑과 가족에 덧입혀온 치장을 걷어내고 그 속살을 바라보게 해 준다. 일부일처제의 허상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일부일처제와 그 결과 구성된 가족공동체에 대해 인류가 그동안 미화하고 도덕적으로 가치를 부여한 것에 대해 나는 약간은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얘기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로 올리면 다들 나를 기이하게 쳐다보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내 생각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는 사람 몇몇과의 대화 중에 내가 "나는 가족이 지금보다 좀더 해체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했다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쉽게쉽게 이혼하고 해서 아이들이 상처받는다, 가족은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보금자리이다, 뭐 이런 얘기가 결론으로 제시되었다. 내가 그 얘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만, 나는 가족이 해체되는 것 자체로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기보다는 가족의 해체, 혹은 그 해체로 인하여 뭔가가 결손된 가정에 대해 사회에서 보내는 부정적인 시선이 사람들에게 더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지금보다는 가볍게 취급되고, 지금보다는 좀더 다양한 가족관계가 용인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TV에서, 어이없는 남자들이 성매매 단속법이 관습법 및 남자들의 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는 둥 말도 안되는 발언을 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걸 볼 때는 현재의 일부일처제란 안보이는 곳에서 얼마든지 딴짓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얽어매기 위해 신주단지 모시듯 미화하고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성에>에서 작가는 나에게 지고지순한 사랑도, 꿈꾸는 이상사회도, 우리가 믿고 있는 영원한 그 무엇도 사실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호히 말해 주었다. 주인공 연희가 십몇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치열한 사랑의 기억도 실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며, 연희의 친구가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던 짝사랑의 추억도 알고 보면 '사랑에 대한 사랑'에 불과했고, 주인공 남자인 세중이나 월남 귀순자가 평생 꿈꾸어 왔던 것도 결국은 이룰 수 없는, 만일 이룬다면 오히려 더 절망해 버릴 환상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혁명가가 꿈꾸는 이상사회도 역시. 환상이란 환멸의 다른 이름이다. 이루고 나면 환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걸 확인한 것이 슬프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그걸 안다는 것은 인생이 참 안심되고 차분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도 말했듯이 그것이 환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걸 버려야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신기루가 신기루인지 모르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득도한 자의 수련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는지.

그러나, 알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4-11-2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가족이 해체되면....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 경직된 사회에 대한 일침입니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의 말도 안되는 구조에도. 다른 부분도 좋은데, 제 눈엔 왜 그것만 크게 들어오는지..ㅋㅋ 추천임다.

깍두기 2004-11-2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냐님, 님도 일부일처제가 싫으시군요? 우리 좀 더 개방적이고 나은 가족제도를 같이 생각해 보아요^^

그동안 리뷰 쓰기 싫어서 몸부림치다가 정말 간만에 리뷰를 써올리고 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참, 누가 쓰라했나 저도 왜 이러는 걸까요?^^

로드무비 2004-11-2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 지어다--말지어다

띄어쓰기^^

로드무비 2004-11-2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리뷰 참 재밌게 읽었어요.

김형경 씨도 제가 포기한 작가인데(사랑을 선택하는...을 마지막으로 읽고)

이 책은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깍두기 2004-11-2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홋, 고칠게요^^


2004-11-21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11-2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지금까지 김형경 씨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는데, 만약 조만간 읽게 된다면 깍두기님 덕입니다.

플레져 2004-11-2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 저리가 되었다는 님의 말씀에 공감해요. 사랑을 선택하는... 을 일고 나서 저두 한동안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김형경씨를 좋아해요. 올해가 가기 전에 헤치워야 할텐데. 저두 추천 누릅니다!

하얀마녀 2004-11-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깍두기님 리뷰가 후련하던데요. ^^

깍두기 2004-11-2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제 안목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플레져님/김형경이 노력하는 작가임은 분명한 것 같아요. 공부한 흔적이 보이거든요. 하지만 진짜 아는 사람은 아는 티가 잘 안나는데 그게 좀 아쉬워요^^

마녀님/저는 마녀님의 페이퍼가 후련하던데요^^

진/우맘 2004-11-2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우아, 제가 느낀 것과 굉장히 흡사한 경험을 하신 듯 하여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야밤에 읽고 흥분해서 난해한 신파 리뷰를 양산했는데, 깍두기님은 차분하고 정연하게 정리를 잘 하셨네요.^^

성에는, 맞아요, 탐구적인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그 치열한 탐구의 끝에 얻은 성찰 하나가 제 마음에 쏙 들었기에, 몇 개의 흠에도 불구하고 여섯 개라도 별을 붙이고 싶었답니다.^^

깍두기 2004-11-2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이 쓰신 리뷰 읽었어요. '난해한 신파 리뷰' 좋던데요^^ 감정이 팍팍 느껴지고.... 그리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네요, 정말로. 저도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