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슐러 르귄처럼 고요하고 우아한 SF를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SF라 하면 스페이스 오페라 정도를 상상하고 광선총이 난무하는 격전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이 작품을 읽으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강물처럼 흐르며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소곤거리는 문체로 인간심리를 집요할 정도로 파고드는 글을 접하면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귄 초기 단편집이라 하는데, 단편집이라고 만만히 볼 것은 절대 못된다. 다 읽고 나서도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르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어스시 시리즈나 어둠의 왼손을 먼저 볼 것을 권한다. 이 단편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루할 만한 글들이 꽤 되고 완성도도 다 각각이니 말이다.




 <셈레이의 목걸이><겨울의 왕>



광속 여행. 그로 인한 시간차, 내가 광속으로 여행하고 돌아오면 나는 늙지 않으나 내 고향 지구는 몇백년의 나이를 먹어버린다는 물리학의 명제를 가지고 이렇게 우아하며 우수어린, 슬픔으로 가득찬 환타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세계의 전설과 사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 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는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을 어두은 광기가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위의 두 이야기들은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신기해하며 들었던 전설이나 동화, "그곳에서 일주일 잘 보내다 왔는데 돌아와보니 70년이 흘렀다"는 이야기 같은. 우주시대의 전설 같은.





<아홉 생명>


 


복제인간에 대한 소설은 여러번 접해 봤지만 르귄의 아홉 쌍둥이는 과학적 사실과는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설정만을 빌려왔을 뿐. 르귄은 여기서 인간의 태생적인 고독(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줄 파트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은 원래 혼자라는)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나는 느꼈다. 그런 인간이 보기에 이 아홉쌍둥이는 너무도 완벽하다. 그들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설명이 불필요하며 능률적이다. 태어나서부터 쏘울메이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 때문에 자멸한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존해 온 것이다. 고독은 인간에게 저주이면서 축복이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렘의 장편 <솔라리스>와 같은 이야기이다. 행성 전체가 하나의 생명인 것,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 간여하는 것,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감정을 반사하는 것. 인간이 그 존재를 만나 의심과 공포를 발산하였기에 그 존재는 그 감정을 그대로 인간에게 반사한다. 인간은 낯선 자(혹은 미지의 것)에게 신뢰와 호감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의 불신과 의혹은 결국 항상 제 발등을 찍어오지 않았던가?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 마음 속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숲이, 아직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끝이 없는 숲이 있다. 우리 각자는 매일 밤 홀로 그 숲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처럼 미지의 것이다.





<땅 속의 별들>



이 이야기는 땅 밑 어둠 속에서조차 별을 발견해 낸 한 창조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 대한 찬사일까? 아니면 어떤 현상에든지 자신의 모습을, 기대를 투영해 내는 인간정신에 대한 연민일까?




<시야>


 


인간이 전 우주를 관통하는 진실(‘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을 깨닫게 되는 것(‘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다)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단편에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눈을 뜨고 신의 얼굴을 보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지 한 인간의 얼굴을, 나무 한 그루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내 인생 전부를 버릴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나는 내 삶이 다시 돌아오기를, 내 원래 죽음을 원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여러 방면으로 탐구하고 질문해 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해답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질문거리가 없는 삶이란, 언뜻 생각하기에도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이 이야기를 읽고서 마음 깊이 속울음을 울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이것은 인류가 살아온, 지금의 문화를 이루어 온 과정에 대한 슬픈 우화이다. 너무나 적나라한. 우리는 오멜라스에 살고 있으며, 거기 살고 있는 행복하고도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 눈 닿는 도처에는 오멜라스의 한 지하실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고통이 나머지 모든 인류의 행복을 보장한다. 우리는 그 아이를 위해 깊이 슬퍼하고, 참회하며, 고통스러워 하나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진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연민은 그대로 우리의 자양분이 되어 우리의 문화예술을 이룬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도스도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에서 격정에 차 이야기한 ‘희생양’ 이야기가 여기서 너무나도 처연하게 변주된다. 우리는 그걸 보고 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진 않는다. 거길 떠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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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2-0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요... 근데 줄이 좀....알라딘의 버그겠죠?

로드무비 2004-12-0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연민은 우리의 자양분이 되어 문화예술을 이룬다

고작 연민, 문화예술 질료의 그 어이없음이라니!

근사한 리븁니다. 추천!

깍두기 2004-12-0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그러게요, 이 줄간격 좀 빨리 해결해 주세요. 마태님이 알라딘 대주주 아닌가요?^^

로드무비님/맨날 근사하대. 창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