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지는 한국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며,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방금 소개말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이, 본지의 유일한 경쟁지는 썬데이 서울.
기타 어떠한 매체와의 비교도 단호히 거부한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 유명한 멘트는, 그렇다. 딴지일보의 대문이다.

딴지일보가 처음 등장했을 때, 얼마나 황홀한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꼈던가. 각종 정치사회적 비리와 억압적인 상황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오로지 비분강개할 줄 밖에 몰랐었다. 그건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80년대는 처절한 시기였기에.

그런데 딴지일보는 <우리가 미워하는 것들>에게 웃으면서 똥침을 날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 시원해. 아, 통쾌해. 딴지일보의 글들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던 것이 한 5,6년 전 일인것 같다.(지금의 딴지일보는 뭐랄까, 곁다리가 너무 많이 붙어서.....)

내가 딴지일보에서 뭐 먹은 것도 아닌데 왜 난데 없이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딴지일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웃었던 유머, 그 때 무릎을 쳤던 풍자와 비유, 그런 것들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 헐크 등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이 세계를 위험에서 구하고(지맘대로 지배하고), 한국은 겉은 동양인, 속은 백인의 바나나맨이 되어 영웅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며(혹은 마운트 당하며) 옆에서 '포즈'만 취한다.

맞는 말이야. 아주 적절한 비유야. 몇백년 후, 혹시라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오면, 교과서에 실릴지도 몰라.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허전하지 않아? 딴지일보의 풍자패러디랑 비슷하기만 하다면, 소설로서는 2% 부족한게 아니겠어? 플러스 알파가, 뭔가가 더 있어야 하지 않겠냐구. 사실 솔직히 말한다면 풍자의 내용도 작가가 처음 생각해낸 아주 새것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플러스 알파가 아주 없지는 않다. 간혹 신선한 묘사가 눈에 띄고(나는 소설의 가장 첫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다가 아닐 거라는 느낌을 언뜻언뜻 받게도 하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호평받는 걸로 봐서 그 느낌이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빨리 <삼미.....>를 읽어 봐야지. 그거 안 읽은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던데. 그리고 지금까지 써 놓은 걸 보니 별로니까 읽지말란 얘기로 들리는데 그건 아니다. 재미있게 읽었는데(우리 자신이 바나나맨인데,사실 이걸 재미있게만 읽을 순 없다. 이건 자조적인 이야기다), 나머지 2%도 채워달란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내가 좀더 어릴 때 -10대나 20대 초반-  이 책을 읽었다면 꽤 감동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자아의 신화를 찾기에는 너무 늙어 버렸는지 별 감흥이 없다.

 

2.

작가가 하려는 중요한 말,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이것을 비롯하여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교훈적인 말들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몇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 아닌가. 나는 나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이 싫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었다면 이야기와 문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훈은 읽고 난 후 내가 다시 곱씹어보며 느낄 수 있게. 소설 시작부터 끝까지 나오는 교훈적인 말들은 마치 생쌀을 씹은 느낌이 들게 한다.

 

3.

세상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세상은 이런 식으로 거하게 신비한 게 아니다. 아주 소소하고, 쩨쩨하고, 보잘것 없으면서 신비한 거다. 자아의 신화란 순례여행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치사한 꼴 다 겪고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을 피워 얻어지는 거다. 작가도 그 점을 모르진 않겠지. 책의 내용은 다만 비유일 뿐일 테니까. 그래도 추함과 더러움이 없는 순수한 주인공의 내면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레져 2004-09-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은 느낌이셨군요. 반가워서 덥석 추천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감동했을 것이다 라는 말씀...동감입니다.
그런 책들이 몇 권 있는데 (언뜻 떠오르지는 않지만...^^;;) 연금술사도 그런 종류였어요.
좀 더 빨리 읽었다면 코엘료 아저씨처럼 멋있을 수도 있었을텐데...ㅎㅎ
보잘 거 없으면서 신비하단 말씀 가슴에 꾹 눌러놓고 갑니다...

깍두기 2004-09-0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한참 전에 쓴 글에 댓글이 달리니 왜 이리 반갑고 감사한 겁니까?^^
근데 내 주변의 사람들은 다 이 책이 좋다고 하여 나는 나혼자 심술쟁이가 된 기분이랍니다ㅠ.ㅠ

돌바람 2005-06-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추천만 누르고 가려다, 저도 플레져님처럼 반가워서 총총 글자 남깁니다. 만두님이 말씀하신 깍두기님이 님인 모양이어요. 헌책방에서 받아본 책 보고 깍두기님은 좋아하실 거라 하셨더랬는데. 역쉬~~. 저도 코엘료의 책이 별로더라구요. 별로(?) 정도가 아니라 유쾌하지도 그렇다고 정면으로 그게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더라구요. 님이 말한 1, 2, 3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기분 좋네요. 후,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또 뵐께요. 첫인사를 대신합니다. 리뷰 밑에 첫인사를 몇 남겨봤는데, 시간 지난 리뷰는 또 안 보는 모양이어요. 괜히 님은 보실 것 같아, 그러면 얼마나 반가울까 인사하고 갑니다.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서평이 좋았고, 내가 산 책을 주위 사람들이 먼저 읽었는데 아주 괜찮다고들 하길래 기대를 많이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지나친 기대는 책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작가의 시도는 아주 새롭고 특히 주인공이 서술하는 형식은 아주 효과적으로 주인공의 경험을 간접경험하게 해준다. 어눌하고 순진한 정신지체자의 말투에서 지적 천재의 말투, 다시 정신지체자로 돌아가는 과정이 내용 뿐 아니라 글을 서술하는 방식, 맞춤법의 변화 등으로 확연히 나타나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가 후기에 언급한 모티브 <나의 교양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벽을 만든다>가 이 책의 주요한 갈등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평소에 한번씩은 해봤음직한 생각, <똑똑하면 행복할까?>에 대한 대답을 작가가 하려한 것도.

<천재는 되었지만 어느덧 찰리는 예전의 찰리가 아닙니다. 그의 순진무구한 마음까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을 느끼고, 의심이 많아지며, 점점 불행해져 갑니다. 세상에는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항상 유쾌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법입니다. 저역시도 자기의 영악함을 선전하는 사람보다는 그런 이들이 훨씬 매력있게 느껴집니다. 이 책은 인간에게 과연 많은 지식의 섭렵만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지 사람들로 하여금 새삼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번역자의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어 찜찜하다. 만일 "행복한 바보로 살래, 고독하고 괴로운 천재로 살래?"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까? 아무래도 난 나중 것을 선택할 것 같아서 말이다.(평소에 아인슈타인이 본 세상을 나도 꼭 한번 보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_-)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함에서 오는 행복'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은데...

역자가 말한 뻔한 교훈을 알려주려 작가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거라는게 내 생각(아니면 바램)이다. 바보인 찰리도 안쓰럽고 가슴 아프게, 천재인 찰리의 고뇌와 의심도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그냥 느껴질 뿐이다. 천재 찰리와 바보 찰리는 둘이 아닌 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찰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변 사람들의 허위, 가식, 기만, 진실을 나에게 대입해보며 인간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떠올려본다.

**원제 <앨저넌에게 꽃을>을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날들>로 바꾼 것에 반대 한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스카와 장미할머니
에릭 엠마뉴앨 슈미트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읽고 난 후, 좋은 작품이라는 건 인정이 되는데 뭔가 2% 부족해.... 그게 뭘까?

자신의 삶을 미화하거나 감상적으로 보지 않는 발칙한 말로 스타트를 끊어 놓고 어쩐지 점점 감상적이 되어간다고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고통에 대해 의연한 듯한 쿨한 시선(어쩐지 나는 그렇게 느껴진다)이 뭔가 부자연스러웠던 것일까?

나는 아직도 죽음, 슬픔, 고통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는 좀 더 악다구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래서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를 좋아하는지도?

잔잔한 유머, 삶에 대한 철학적 관조, 이런 것들에 감탄했고

절실함, 고통과 좌절에 대한 묘사 이런 것들이 2%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생에 미련이 많은 때묻은 어른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라면 이렇게 선선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