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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1. 이런 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겁니까? 아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태연한 듯이 사실과 섞어서 얘기하는군요. 그게 아주 매력적입니다. 주인공은 연인이 선물한 분홍색 장미를 꼭 껴안고 가시에 찔려 피를 흘려서 그걸 빨간 장미로 만든 후, 그 장미잎으로 요리를 만듭니다. 그 요리는 한 여자의 감정을 폭발시켜 그녀는 자기의 열기로 목욕통을 불태우고(비유가 아니고 진짜로 말입니다) 발가벗고 들판으로 나가 한 남자를 만나 말을 달리며 사랑을 나눈 후(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창녀가 되었다가 혁명군 장교가 되었다가. 이런 얘기를 별다른 수식도 변명도 없이 어제 옆집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한두번이 아니고요, 시도때도 없이 그런다니까요. 주인공 티타가 태어날 때 흘린 눈물이 마른 후 말라붙은 소금을 쓸어모았더니 5kg 푸대자루로 한가득이었다, 티타가 결혼준비를 하면서 뜨게질로 뜨기 시작한 담요가 20년 후에 3헥타르나 되는 농장전체를 한바퀴 두르고도 남았다, 성냥을 먹고 뜨거웠던 추억으로 성냥에 불을 붙여 불타 죽었다, 언니와 결혼한 자기의 연인 페드로의 아이가 태어나자 처녀인 티타의 가슴에서 젖이 흘러넘쳤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리얼한 감정묘사 중간중간에 태연자약하게 등장합니다.
제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요,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사실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너무도 적절하다는 사실입니다. 늙은 엄마의 노후를 보살피기 위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아야하는 막내로 태어나면 누구라도 5kg이 아니라 5톤은 되는 짠 눈물을 쏟아내고 싶을 것이며, 열몇살 때 부푼 가슴을 안고 혼수를 마련하고자 시작한 뜨게질로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기다림을 표현하자면 3헥타르가 아니라 지구를 한바퀴 두르고도 남을 것이고, 사랑하는 남자와 그의 아이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처녀의 가슴에서 젖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생산할 수 있지 않겠는가요.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에로틱이란 이런 것입니다.
페드로의 눈길이 티타의 가슴에 머무를 때까지 두 사람은 황홀경에 빠진 채 서로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티타는 맷돌질을 멈추고는 페드로가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꼿꼿하게 세워서 자랑스럽게 가슴을 펼쳤다. 이 뜨거운 탐색전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바뀌었다. 옷을 뚫는 듯한 강렬한 시선을 나눈 후로는 모든 게 전과 같지 않았다. 티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 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페드로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서도 티타의 가슴을 순수한 소녀의 가슴에서 관능적인 여인의 가슴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에로틱이라니, 너무나 높은 경지 아닌가요? 읽다보면 정말 '섹시하다'고 느끼게 되는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노골적인 표현도 없이 말이죠.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이야기의 처음부터 여러가지 음식에 대한 얘기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그런 것들은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음식과 섹스'라니, 남들은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연결이 되더군요. 난 몰랐지 뭡니까.
3. 근데 참 이 간악하게도 현실적인 아줌마는 이렇게 불타듯 뜨거운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티타의 인생의 나중에 등장하여 그녀를 구원하여 주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며 모든 것을 알고도 이해하고 청혼하는 존이란 의사선생님을 보며 "티타, 존이 더 나아. 페드로랑 맺어져봤자 고생길이야. 존을 선택해!"라고 부르짖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