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째서 그를 견뎠을까 [현남오빠에게]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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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 길에는 연극배우 엄지영씨의 미투운동을 유튜브로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늦은 퇴근 길에는 올해는 참 추웠던 2월 이었지, 봄을 상상했다. 곧 꽃이 피겠구나. 그리고 조금은 낙천적이어졌다. 


2월과 함께 시작된 #metoo 운동은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공작에 놀아날 수 있다, 자기 파괴적으로 성과 없이 끝날 것이다, 여러 예언과 걱정이 유행이므로 나도 예언을 해야겠다. 그 치들이 기대하는 모습의 적폐청산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한국사회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제지 당하지 않아 독버섯 처럼 피어오른 사적인 그 폭력들은 오늘의 대대적인 ‘폭로’앞에서 잠시 움찔 한 후, 얼마안가 나름의 연명을 도모할 지도 모르겠다. 100% 그리 할 것이다. 그들은 바뀌지 않겠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변한다. 이미 변했다. 특히 지금을 경험하고, 참여하고 있는 보다 어린 친구들이.

가장 사적인 곳에서 횡행하는 성폭력을 포함한, 인식조차 못했던 위계 폭력, ‘암묵적인 동조’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우리를 침묵하게 했던 일상의 부당함들을 - 느끼고, 인지하고, 말하고, 싸우는. 어쩌면 자신의 존엄이 훼손되는 순간을 절대 참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자라날 지도 모른다.

87년 이후에 자란 우리가 아주 조금의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도 예리하게 감지해 내고 동시에 참지 못하는 것 처럼. (영화로 보면서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국민을 오라가라 하면서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이라니.)

그래서 중요하다. 말해지지 못한 여성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계보를 그리는 일은. 여성운동이 역사를 감각하며 현실을 바라보는 일은.

#페알못의페미니즘책추천 
2번째는 #이민경 의 #우리에게도계보가있다 (접근,난이도 별 ★☆)

사실 쉬운 책이지만 이민경씨의 책이 그렇듯 다분히 실천적 입장에서 씌어졌으므로, ‘아직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인 사람에게는 선동적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별 반개를 추가했다. 부제는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이다. 일제시대 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계보를 그렸다. 문제집처럼 풀어가는 방식이 새롭다.


"(p.85)
항일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가사를 도맡아야 했다. (...)이토록 많은 관문을 넘었음에도, 여성이 이룬 성취는 오직 여성의 성취라는 이유만으로 오롯이 인정받기까지 또 한 번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제주잠녀항쟁은 3대 항일투쟁 중 하나임에도, 여성들의 자주적인 항쟁이라는 이유 때문에 ‘감정적인 판단으로 항쟁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는 남편에게 빨갱이라며 맞아야 했다."


형법은 95년까지 “강간과 추행의 죄”를 “정조에 관한 죄”라고 칭했다. 내가 당한 강간과 추행을 현재 혹은 미래의 남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웩, 후지다. 근데 바뀐지 얼마 안됐다.
93년 신정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성희롱”이라는 말 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럼 그 전까지 성희롱은 뭐라고 불렸냐고?
글쎄.....

몇페이지 안가서 한가지 깨달음이 온다. 아, 그리하여 여성운동을 언어를 획득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뭇 남성들이 미러링에 그토록 민감했으며, 기를 쓰고 “여혐”을 “혐오가 아니다”라며 번역을 잘못했네 어쩌네 딴지 걸고, “한남”이란말 쓰지마 빼액-- 했던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예리한 무의식적 촉수였던 것!! 소오름! 그러므로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여성들의 움직임에 이름 붙이고, 말하고, 쓰고, 그것을 기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작은 승리는 모래 밭에 남는 발자국 처럼, 분명히 존재했으나 금새 지워진다.“

"(p.135-6) 페미니즘은 갓 생겨난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늘 갑작스럽고 놀랍고 새로운 사상처럼 취급받는다. (...)비슷한 이야기로, 여성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혹은 ‘논의가 발전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한계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언제나 돌연하고 당황스러운 존재 취급을 받는다. 혹은 현실을 모르고 공허한 소리를 하는 이, 낯선 불청객으로 여겨진다. 느닷없이 나타나 편안하던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 세상은 분명 변했다. 정말 낯설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덜 낯설어졌다. 여전히 오래전의 그들과 똑같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늘날엔 조금 덜 외로워졌다.

(p.144) 우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간다. .. 상식은 그렇게 때로 천천히, 때로 빠르게 세를 넓혀간다. 운 좋게도 지금 우리는오랜 시간에 걸쳐서야 느낄 수 있었을 그 흐름을 눈 앞에서 압축적으로 보고 있다. 어떤 목소리는 설득력을 잃고 어떤 목소리는 힘을 얻어가는 일관된 흐름을 목도하는 일이, 당장 누구의 목소리가 더 힘이 센지 가려내는 일보다 중요하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전공과 관련 없는 근현대사 공부를 종종 해야할 때가 오는 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공부를 하면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 ‘고마움’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살지 않은 어떤 시기의,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희생과 헌신을 했기에, 이나마라도 지금의 내 삶이 존재하는 구나. 좋든 싫든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구나. 미안하고, 숙연하고, 감사한 마음.

이 책을 읽고 그 고마움이 네 배가 되었다. 역사 책에서는 잘 적어 주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 만으로도 원래의 감사에서 x2가 되었고, 내가 여성인지라 그 기쁨이 바로 내 역사로 느껴져 두배 더 이득인 기분이었다. 언니들! 스스로를 위해 싸워주어 고마워요!

"(p.161-62) 더운 여름에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 대한 소문 하나가 흥미를 끌었다. 이대생들이 구비해둔 물품이 넉넉하고 디저트까지 제공되어 현장이 아주 쾌적하더라는 말이었다. 또한 이들의 시위는 대표가 없이 모두가 함께 참여하느라 의사결정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느린 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무렵에 진행되던 페미니즘 펀딩 프로젝트는 대부분 순조롭게 성사되고 있었다. 여성들끼리 일을 진행하면서 따로 대표를 두지 않았던 다른 경험이 떠올랐다. 이들의 방식이 우연하게도 친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나가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 친숙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뿐 우리는 원래부터 이랬다. 동일방직의 부당해고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해고자들을 응원하며 생리대를 비롯한 필수품을 전달했고, 차미리사가 순회강연을 할 때 여성들은 쌈짓돈을 모아 학교를 세웠다. 찬양회에서 세웠던 학교도 또 다른 학교도, 국가가 지원하지 않았지만 사비를 털어 운영하다가 망하곤 했다.
역사에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언제나 변함없이 열악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여력이 되는 대로 지원했다. 그리고 대표가 없던 것도 역사가 길다. 정해진 규칙이나 대표 없이 게릴라로 행동했던 영 페미니스트의 기록, 대표를 색출하려는 외압에 맞서 주동자는 없다고 소리쳤던 동일방직의 시위를 찾아냈다. 여성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새롭고 낯설고 당황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근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계승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이전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계보를 알지 못한 채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듯 반복되는 우리의 원형을 찾았다. 마치 단 한 번뿐인 듯 계속 이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움직임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
기록 될 기회 조차 박탈 당한 여성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감동적이어서 책을 덮고 울었다. 그렇게, 없는 것 처럼 지우려고 해도, 우리는 있었다.

어제 뉴스에서 엄지영씨가 말했다. “오달수가 그 일을 없던 일 처럼 말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없는 일이 아닌 데, 말하지 못하게 했기에, 정말로 없는 일 처럼 되었던 여성들의 역사와도 맥이 닿아있는 증언이었다. 그녀가 “내가 침묵해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일이 없는 줄 알고 모르고 연극 생활을 하다, 같은 일을 겪게할 수는 없어서 공개했다”며 울먹거릴 때, 나도 같이 울먹거렸다. 아마, 영상을 본 대다수의 여성은 그랬을 것이다. 공감하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저절로 공감한다. 쥐어짜낸 용기가, 그 억 막히는 고백의 순간이 얼마나 아렸을 지.

없지 않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고, 계보가 있고. 움직임이 있었고.
그것이 이어져 오늘의 우리들이 있다.
있었다.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우겨온 자들의 오만한 세계에 천천히 금이가고 있다. 
겨울은 물러나고 봄이 온다. 조금은 견디기 힘들었던 2월이 가고. 3월이다. 꽃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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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3-0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공장쟝님 리뷰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미투운동 정말 좋아요. ㅠㅠ

공쟝쟝 2018-03-02 15:01   좋아요 1 | URL
˝없지 않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고 눈물을 쏟아야 하는 것이 되었는지요. ㅜ_ㅜ 분명히 세상은 더욱더 좋아져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