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이맘때, 올해는 어떤 일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좋은 소식, 기쁜 일들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유감스럽게도 2009년은 늘 우리 곁에서 밝게 빛나고 길잡이가 되어주던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를 아주 떠나간 슬픈 기억이 유달리 많은 것 같다. 고통받는 서민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노무현 대통령이나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 신의 영역과 맞닿은 음악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우리 지구와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심은 마이클 잭슨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비록 지금 언급한 위인들만큼 유명하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을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희망과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삶과 죽음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듯하다.

 

전쟁통인 1952년에 태어나 올해 5월 9일 별세한 장영희 교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다(과거형으로 써야 하는 게 못내 가슴 아프다). 하지만 헌신적인 부모님의 보살핌 덕에 국내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서강대 영문과를 무사히 졸업했다. 지금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불편한 구석이 너무 많은 대한민국이거늘 하물며 아직 전혀 사회 전반이 정비되지 않았던 1970년대에 그런 성취를 얻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뉴욕 주립대와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아 수많은 학생들을 길러냈다. 그러는 틈틈이 장미같이 화려하진 않아도 들꽃처럼 은은한 문장과, 장애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유쾌하고 진솔한 필치의 수필을 잡지에 기고해 당대의 문장가 중 한 명이라는 친사도 받았다. 하지만 좋지 않은 운명이 이대로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인지, 유방암으로 3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했고, 겨우 이겨냈다 싶더니 이번엔 척추암으로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내 탓, 네 탓, 심지어 부모 탓까지 하며 현재의 암울한 현실에 그저 좌절만 하기 일쑤인 요즘의 나약한 사람들 속에서 장영희 교수는 희망과 용기의 전도사로 칭송받아 마땅한 '슈퍼 히어로'인 것 같다. 남들이 천형이라 부르며 안타까워 하는 온갖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고 재주가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써내려간 글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데 자신이 왜 불행한 사람이냐고 되물었던 장영희 교수. 매일매일 바다 냄새를 닮은 아침 냄새를 맡고, 하트 모양 비슷한 푸르른 나뭇잎과 꽃을 볼 수 있어 자신은 천형이 아닌 천혜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진심을 담아 토로하는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온 천지를 순식간에 밝게 비추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유성처럼 짧아서 더 아름다웠던 사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이런 장영희 교수의 유고 수필집이다. 어제까지 있던 건물이 오늘 사라지고, 어제 인사했던 친구를 오늘 볼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풍파가 많은 세상을 그동안 무사히 살아낸 게 이미 기적이니, 앞으로도 그 기적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암투병 동안에 쓴 글들이라지만 어느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찾을 수 없고, 한 사람의 선생님으로서, 누군가의 이모나 딸로서, 그리고 수필가로서 평소에 겪고 느꼈던 소소하고 정겨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룬 문인인데도, 약속에 잘 늦고, 가끔 퉁명스럽게 구는 게 고민인 그녀의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만큼 아, 나도 그러는데 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고 마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들의 끝에는 힘든 삶을 이겨낸 그녀만의 깊은 지혜와 통찰, 용기와 희망 등이 오롯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흥을 준다.

 

수필가로서 장영희 교수의 글은 수필을 쓰고 싶어하는 분들께 꼭 추천드리고 싶은 미덕으로 가득하다. 일단 쉽게 쓴다는 것. 영미 문학의 권위자면서도 전혀 어려운 비유나 비비 꽈서 멋부리는 문장 등을 쓰지 않는다. 물리, 수학 등 모르는 게 없는 석학부터, 힘든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뭐 읽을거리가 없나 찾는 주부, 삶이 힘들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수까지 누가 읽어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진리 중 하나가 바로 알기 쉽게 쓰는 게 난해한 문장 쓰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거다. 장영희 교수는 이 진리를 알고 쓰는 글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미덕으로 그녀의 솔직함을 꼽고 싶다. 대학 교수로서의 체면이나 사회적 명사의 위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쪼잔하고 때로는 뒤틀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도 가감없이 종이 위에 담아, 보다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솜씨에 감탄하고 말았다. 먼저 자기가 속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어차피 그저 그런 교훈담을 늘어놓을 거잖아" 하며 굳게 닫힌 불량독자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외에는 잘 읽지 않지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분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게 바로 기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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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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