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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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벽두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 중 한 편이 출간되었다. 2005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제5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빛나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가 바로 그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6년작 <용의자 X의 헌신>처럼 그해를 대표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작가는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군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이 작가의 작품은 그간 국내에서는 단편 몇 개만 겨우 소개된 데 그쳤는데, 특히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도시전설 퍼즐>과, <계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이퀄 Y의 비극> 같은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 비해 아주 재미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는 기억이 난다. 참고로 <도시전설 퍼즐>은 제55회 일본추리작가협회 단편상을 받은 바 있다. 이 두 단편을 비롯해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은 추리소설가 노리즈키 린타로로 실제 작가와 같은 이름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를 빛나는 작품들로 수놓았던 작가 엘러리 퀸(프레드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 사촌형제의 합작 필명)이 주인공 탐정의 이름을 역시 엘러리 퀸으로 한 것과 같은 설정이라 흥미롭다.


아마도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 엘러리 퀸의 대단한 팬인 모양인지, 엘러리 퀸(추리소설가, 탐정)과 리처드 퀸(엘러리의 아버지, 경감) 부자가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플롯도 그대로 빌려왔다.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추리소설가, 탐정) 또한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경찰 내부의 정보를 입수하곤 한다. 코난 도일 사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 이야기를 다른 작가들이 이어 쓰듯(이런 장르를 '패스티시'라고 한다고), 엘러리 퀸을 일본을 배경으로 새롭게 부활시켰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추리하는 스타일도 비슷한데, 노리즈키 린타로도 엘러리 퀸처럼 번뜩이는 천재성에 의거한 추리가 아니라, 엄정한 논리에 따른 소거법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범행 시간에 A는 빨래를 널고 있었으므로 제외, B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님, 그러므로 범인은 알리바이가 없는 C. 대충 이런 식으로 가능성이 없는 용의자를 하나하나 제거시켜 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범인임이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엘러리 퀸'을 표방하는 또 한 명의 유명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와 매력적인 여대생 에치카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알고 보니 에치카의 아버지는 유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 그는 실제 사람의 몸에 석고붕대를 감아 그 사람의 외양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라이프캐스팅 조각 기법의 명인이다. 이사쿠는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딸 에치카를 본뜬 마지막 작품을 제작 중이다. 필생의 걸작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완성과 동시에 생명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다. 이사쿠의 장례식이 끝나고 에치카를 비롯한 유족의 슬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사쿠의 유작, 즉 에치카를 그대로 본뜬 조각상의 머리만 잘려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에치카는 고등학교 시절에 저질 사진가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사쿠의 위세가 만만찮을 때라, 다시는 사진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는데 이제 이사쿠가 가고 없으니 걸릴 것이 없다. 혹시 그 사진가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에치카의 머리를 잘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에치카를 꼭 닮은 조각의 머리를 잘라 가져가는 것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는 에치카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는데, 결국 에치카는 누구도 보지 못한 사이에 실종되어 버린다.

 
보통 애거서 크리스티나 밴 다인 등의 작품을 보면 탐정은 사건이 이미 벌어지고 나서 범행 현장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벌써 일어난 살인 사건의 현장을 발생 후에 조사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해 점차 증거가 쌓이면 그걸 추리의 재료로 삼아 진실에 도달하는 게 본격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린타로는 사건다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에치카를 알고 있었고, 사건의 시작점부터 이미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설 만한 강력 사건이 벌어진 것도 작품의 중반을 지난 무렵이라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진행과는 무척 다른데, 실제로 사건은 그 시점에서부터 벌어진 게 아니라 책의 맨 첫 장부터 서서히 그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범행-탐정 도착-조사-추리-범인 도출의 순서대로 착착 흘러가는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진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의 범죄와 수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나 일의 순서에 따라 구획되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인간의 행동이니만큼 이 범죄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범행 당사자, 수사관 등)의 의지와 실수, 악의와 오해 등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돌아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를 무 자르듯 가볍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실제적인 범죄의 양상과 흐름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의 탁월한 구상은 깊은 고민의 산물인 듯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나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처럼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본격 미스터리는 그만큼 소구점이 명확해 집중이 잘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장소 한 군데서만 모든 일이 벌어져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단점도 분명하다. 반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탐정 린타로가 사건과 관련된 곳곳의 장소를 방문하고, 제법 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청취하는 과정이 비중있게 묘사되어, 흡사 하라 료나 작중에서도 가끔 언급되는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를 읽는 기분이었다. 특히 로스 맥도널드의 모 작품과는 줄거리도 아주 비슷해,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마디로 관련자 D의 증언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다른이 E의 증언에 따라 그 가설의 헛점이 노출되면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등 탐문이 중요한 수사 기법으로 사용된다. 덕분에 본격 추리소설에 더해 하드보일드의 재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실은 '하드'까지는 아니고 '소프트'보일드에 가깝다). 작가의 문체는 비교적 유머도 적고 문장도 담백한 편이라 확 읽히는 맛은 적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증언을 듣고, 가설을 세우고 허무는 과정이 자주 반복되어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 또한 사건의 암부에 불륜과 배신 등 일그러진 가족 관계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시쳇말로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다소 꺼림칙한 재미도 충분하다. 이래저래 재미만큼은 확실한 소설이라고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면, 추리소설 작가이면서 평론가이기도 하단다. 신본격 미스터리를 제창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같은 교토대학교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으로, 유키토와 마찬가지로 걸작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시마다 소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 작가들이 줄줄이 데뷔하면서 신본격 미스터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었는데,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작가로서 한창 때인 20대의 아야쓰지 유키토가 다소 무리한 아이디어나 트릭이라도 이거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맹장 타입이었다면, 평론 활동을 주축으로 미스터리의 존재 의의나 구성 원리 등을 이론적으로 파고들며 가끔 한 번씩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는 노리즈키 린타로는 후방에서 신본격을 뒷받침하는 책사 정도가 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도 10년만에 발표한 소설이라는데, 다음 작품은 좀더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 야마구치 마사야, 아시베 타쿠 등 신본격 작가들이 국내에 제법 소개된 이때, 처음으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미지의 대표 장편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린타로 탐정이 잘린 머리 석고상에 얽힌 모든 비밀을 밝히는 마지막 30페이지는 아껴 읽을 만큼 흥미진진했고, 린타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인물이 진실을 알고 나서 느끼는 깊은 회한은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때때로 우리의 삶을 슬픔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해라는 괴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진실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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