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곽 안내서 - 제137회 나오키 상 수상작
마쓰이 게사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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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에서 이 책을 샀는데, 마침 계산대에 젊은 아가씨가 서 있어 책을 내미는 손이 무지 부끄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유곽 안내서>라는 제목만 보면 영락없이 어디 유곽이 괜찮고, 어디 아가씨가 예쁘고 잘해준다(?)는 걸 알려주는 안내서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인터넷으로 살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서점을 나왔다. 그런데 사실 요즘 우리나라 전통(?) 유곽은 거의 멸종 단계라서 굳이 안내서가 필요하진 않을 듯하다. 내가 쭉 살아왔던 인천에도 전국구로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진작에, 나머지 하나는 동네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영업이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난 도대체 이런 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_-??). 아무튼 전성기 때는 대단했다던 파주나 평택도 최근에는 끝물이라 하니 몸 파는 여인들을 쇼윈도 아래에 전시하다시피 해서 손님을 맞는 속칭 '정육점' 방식의 유곽은 이미 시효를 다한 것 같다. 다만 밑천이 안 드는 이 장사(?)는 유사 이래 인간사회에서 없어져본 적이 없으니 사라진 유곽 대신 오피나 안마방 같은 신종 성매매로 대체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렷다.

 

 

마쓰이 게사코가 지은 이 책의 원제는 <요시와라 유곽 안내서>이다. 지금 제목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요시와라'가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대규모 유곽을 이르는 말이므로 제목만 봐도 시대소설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요시와라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유녀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안내'하는 일종의 교양서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접대나 청년 성공과는 큰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유흥을 접해본 일이 거의 없어 솔직히 이쪽 풍경에 제법 흥미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 다 흥미로워하지 않는가(개인적인 호기심을 남성 일반으로 확대하여 면죄부를 꾸미는 중). 뭐 그런 이유로 대단히 몰입하며 읽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대히트했던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처럼 인터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터뷰어가 요시와라에 직접 찾아가 관련자들을 하나씩 인터뷰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터뷰를 받는 사람 중에는 요시와라의 일급 기루 사장도 있고, 손님으로 찾아간 사람도 있고, 심지어 유곽에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뱃사공도 있다. 모종의 일로 이번에 최초로 요시와라에 발길을 들인 인터뷰어는 이곳에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변하는 존재라서 처음에는 요시와라의 운영 방식이나 유녀들의 등급 체계, 유녀들의 생활상, 손님을 받는 시스템 등 보편적인 정보를 얻는 일부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자들과 스텝을 맞춰주는 것이다. 책이 중반쯤 지나 인터뷰어와 독자들이 어느 정도 요시와라에 익숙해졌을 때 저자는 얼마 전 이곳에 일어났던 '대사건'을 언급하며 슬그머니 분위기를 띄운다. 요시와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녀들을 부르는 명칭 '오이란'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가쓰라기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시원하게 다뤄주지 않으니 독자들은 애가 탄다. 이쯤 되면 요즘 아이돌같이 어마어마한 인기에 카리스마도 대단했던 가쓰라기와 그녀가 벌인 대사건이 알고 싶은 나머지 단숨에 끝까지 독파하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남자로서의 호기심이 이 책을 읽게 한 일등 동기지만 막상 다 읽고 나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대개 집안이 가난해 6-8세에 팔려온 소녀들이 유녀로 키워져 운 좋게 낙적(부잣집에 팔려가는 일)되지 않는 한 살아서 나가기 힘든 곳이 요시와라였으니 말이다사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음속 깊이 원해서 그런 일을 할 여자는 하나도 없을 텐데 오죽 현실이 녹녹치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포기하겠는가. 아무튼 요시와라는 철저하게 여성들을 착취하는 공간. 인기 있는 오이란이 금방 돈을 모으면 나갈 게 뻔하니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놓는데, 그건 요즘도 절찬리에 통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래저래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요시와라를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고, 하룻밤 인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녀와 손님 사이의 야릇한 풍정 등 풍속소설로서의 맛도 충분히 주고 있다. 짧은 분량에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점층시키는 기법을 잘 활용해 가독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재미가 있으니 꼭 일독해보시라. 마지막으로 <유곽 안내서>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유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독서를 포기할 여성분들이 있을까 봐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지면 가쓰라기는 그렇게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그만큼 그녀가 벌인 '대사건'은 남성 위주의 에도사회에 던진 통쾌하고 장렬한 한 방이었다!

 

 

세상은 유곽이 거짓말투성이라고 하네만, 사실 이곳만큼 남자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도 없지. 아하하, 그거야말로 이 세상의 진실인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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