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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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본산 추리소설을 별로 보지 않았다. 특히 신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같이 예전부터 많이 읽어왔던 작가들은 왠지 신선하지 않고, 요즘 대세라는 라이트노벨풍 미스터리는 애정이 없어 구매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아키요시 리카코의 <성모>는 출간 전부터 기대할 만하다는 소리를 이곳저곳에서 들은 터라 나오자마자 얼른 구해 읽어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좀 짧기도 했지만) 내린 결론은 모처럼 나온 일본 추리소설의 수준작이라는 것이었다. 여기다 요약하기도 좀 뭣할 만큼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 연속되어 (좀 끔찍하긴 했지만) 독자의 눈을 계속 잡아끄는 효과가 확실했고,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줄거리를 진행시키는 구성이라 조금 질릴 만하면 화자가 계속 바뀌니 읽으면서 지루할 새가 없었다. 특히 수준급이라는 반전은 확실히 인상적이라 이 정도면 그간의 일본 추리소설 가뭄(?)을 확실히 해갈시켜줄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흔히 반전이 중요한 추리소설은 줄거리를 비롯해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읽는 게 가장 재미있는 법이라서 내용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면, 우리나라의 일산 같이 애 키우기 좋은 신도시에서 유치원 남학생들이 연속해서 유괴되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모두 초비상 상태로 특히 난임으로 아주 어렵게(처절하리만큼 어렵게) 딸아이를 가진 한 엄마는 당연히 거의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엄마가 '주인공1'이고, 남아 연쇄유괴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두 남녀 형사가 '주인공2' 격이다. 마지막으로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적당히 잘하고 검도부로 활동하며 후배들도 잘 이끌어 학교에서 인기가 아주 높은 학생이 있다. 특기인 검도로 지역 어린이들에게 검도 가르치기 봉사활동도 하는 이 쿨한 학생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특정 아동에게 살인의 충동을 느끼면 멈출 수 없다는 것. 즉, 신도시를 공포에 물들게 한 이 사건의 범인이 분명한데 이 녀석이 바로 '주인공3'이다. 한마디로 사건의 관찰자, 수사관, 범인의 삼각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마지막 20페이지에 하나로 합쳐진다.

 

책표지에 적혀 있는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반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책의 결정적인 홍보 포인트로 내세우는 부분이기도 해서 반전이 너무 궁금했다. 서둘러 뚜껑을 열어보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부 두 개였다(독자에게 다가올 충격파의 비중으로만 보면 2:8 정도). 흥미롭게도 첫 번째 반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반전의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끝나기 60페이지 전쯤에서 나오는 첫 번째 반전이 공개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반전으로 연결되는 구조인데 이런 방식은 별로 본 적이 없어 제법 신선했다. 나 같은 경우 첫 번째 반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막상 첫 번째 반전을 알게 되자 어렴풋이 최종 반전은 이렇지 않을까 짐작이 갔고, 그 짐작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대개 동의하겠지만 첫 번째 반전을 넣지 않고 독자들에게 범인과 관계되는 모종의 사실을 처음부터 오픈했더라면 분명 난이도가 많이 낮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심 끝에 첫 번째 반전을 넣은 다음 책이 끝나기 직전에 터뜨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일본에서 언페어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 번째 반전 쪽에서 독자들이 눈치챌 만한 공정한 단서가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다). 참고로 두 번째 반전에서는 별로 걸리는 구석이 없었다. 작가는 우타노 쇼고의 팬이라고 하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히트를 쳤던 모 작품의 핵심 트릭과 닮았다. 다만 우타노 쇼고의 그 작품이 무리수에 가까운 트릭이라도 대단히 교묘하게 설계해서 결국 독자들을 굴복시켰다면, <성모>는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들의 입조차도 싹 다물게 만들 만한 교묘함이 아주 조금 부족했다고나 할까. 물론 80년대에 데뷔해 수십 편의 추리소설을 쓴 노장과 이제 서너 편을 쓴 신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테고, 리카코 작가도 매우 선전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요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고래로 세상에 안 나온 트릭이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트릭에는 힘을 덜 기울이고, 드라마적인 완성도나 힐링 요소 등의 분위기로 때우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성모>와 아키요시 리카코 작가는 본격 추리소설의 재미는 역시 세상이 뒤집히는 트릭과 반전에서 나온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밀어붙여 그럴싸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예의 인상적인 활약에 앞으로도 나를 비롯한 추리소설 팬들의 주머니가 좀 더 엷어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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