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김정범 지음 / 비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인생에서 특정한 시기나 장소에서 즐겨 들었던 음악이 있다. 그래서 그 시절이나 그 장소를 기억하면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기타를 치면서 돈 맥클레인이 부른 '빈센트'라는 곡을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가사를 전부 외운 것은 아니고 앞의 '스타리 스타리 나잇~'하는 부분만... 뜻도 모르면서 무언가 고독하고 쓸쓸한 영감을 담고 있는 듯한 노랫말과 곡조에 마음이 끌렸던 기억이 난다. 젊었을 때는 당시 '접속'이나 '쉬리'라는 영화가 유행하면서, 영화 음악으로 쓰였던 'A love's concerto'라든지 'When i dream'라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당시 친구들과 많이 놀러 가던 번화가 거리에 가면 음악을 파는 자판마다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가면 그 노래가 생각난다. 한참 운전을 배우면서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나 쇼팽의 '녹턴'을 많이 들었었다. 지금도 가을날 운전하다 보면 이 음악들이 떠오른다.

김정범 교수가 자신의 인생과 음악을 소개하는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라는 책을 읽다 보니 내 인생과 함께 한 이런 노래들도 떠올랐다. 이 책은 뮤지션이자 교수, 그리고 음악감독인 저자가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한 음악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표지에서 보듯이 오래전부터 LP 음반이나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들었던 음악을 추억과 함께 소개한다. 팝송, 클래식, 재즈, 가요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신이 즐겨 들었던 음악과 그 음악과 관련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처음 소개하는 음악은 유진 프리즌의 'Arms Around you'앨범이다. 저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새벽에 방송되던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카세트테이프에 이 노래를 녹음하며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금세 공감이 되었다. 특히 이 곡 주에 'Remembering You'라는 곡을 추천한다.

가장 공감이 되었던 음반은 글렌 메데이로스의 'Not me' 음반이다. 저자는 이 음반을 소개할 때 소제목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라는 제목을 붙였다. 글렌 메데이로스는 내가 고등학교 때 매우 인기를 끌던 가수였다. 그때는 방송마다 그의 음악인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라는 노래를 틀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부산에 거주하는 저자는 중앙동이라는 곳을 자주 산책하는데, 그때면 이 노래가 생각나고 옛 감성이 생각난다고 한다.

가요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음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노래는 초등학교 시절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가 들었다고 한다. 유재하의 '지난 날'이라는 음악을 들을 때,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누가 부르는 곡인지를 알려고 머리를 깎다 말고 일어났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이런 열정이 있었다니...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보다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곡을 좋아하지만, 유재하의 곡은 대부분 좋아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곡은 이장희의 '안녕이란 두 글자'라는 노래이다. 내가 자라던 학창시절에는 기타 좀 친다는 사람 중에 이장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그가 이혼을 하고 그 아픔으로 절규하면서 부른 이 노래를 듣고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불후의 명곡'이란 프로그램에서 박기영이란 가수가 다시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모습을 보며 옛 기억이 나기도 했었다.

음악을 책으로 읽는다는 것은 조금 낯선 경험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곡들이 대부분 내가 모르는 곡들이 많았다. 물론 읽으면서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야 '아~ 이 음악!'하고 생각나는 음악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음악을 통해 다시금 옛 추억을 많이 떠올리게 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읽는다면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읽은 책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이제 대학생 정도 되었으니 [이방인]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책에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프랑스인 뫼르소가 햇살이 따스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밖에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지금 읽으면 이 책에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남들이 이야기하는 그 실존과 부조리를 나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방인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이방인을 모티브로 한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을 읽었다. 이 책은 [이방인]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뫼르소가 죽인 한 아랍인을 모티브로 한다. 알제리 출신의 작가는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알제리 오랑에서 이유도 없이 죽인 아랍인을 '무싸'라는 이름으로 탄생시키고, 그의 동생 하룬을 화자로 내세워 형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시작은 오랑의 한 반에서 억울한 죽음 속에서도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잊고 있던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하기에 읽으면서 약간의 전율을 느낄만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반세기도 더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 사건은 분명히 일어났었고 그에 관한 얘기도 많았어.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하고 있지만, 단 한 명의 망자만을 떠올린다네. 뻔뻔하지 않다. 죽은 사람은 엄연히 둘이었는데 말이야. 그래, 둘이라니까. 한 명을 빼먹은 이유가 뭐냐고? 그야, 첫 번째 사람은 얘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 그것도 얼마나 잘했던지, 자기의 죄를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네. 반대로 두 번째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지. 신이 그를 만든 것도, 단지 총알받이가 되어 한탄 먼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니까.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였던 거야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재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위에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P 7-8)

저자는 동생 하룬을 통해 [이방인]이란 소설 속에서 이름도 없이 그냥 뫼르소의 실존 찾기에 죽어가는 한 명의 인물이었던 '무싸'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암만 봐도 이 살인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문장, '오늘, 엄마는 죽었다'로 시작할 게 아니라,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 그러니까 무싸 형이 그날 집을 나서기 전에 엄마한테 했던 말로 시작해야 할 거야, '오늘은 좀 일찍 들어올게.' "(P22)

더 나아가 저자는 무싸라는 인물을 프랑스인에게 이름 없이 학대 당하고 사라져가는 알제리인의 전체적 이미지로 묘사한다. 어쩌면 유럽인에게 학대 당하는 아랍인 전체로 묘사하는지도 모르겠다.

"보다시피 나는 만족하고 있어. 내 머릿속에서나 이 방에서 말고는 형의 이름을 진지하게 불러보지 않은지도 벌써 몇 년이나 되었군. 이 지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면 무조건 '모하메드'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거든. 나는 누구에게든 '무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네." (P 38)

"아니, 오늘은 형 얘기를 하고 싶지 않네. 차라리 여기 있는 다른 무싸들을 한 명 한 명 들여다보면서 평소에 자주 하듯이 상상이나 해보는 게 낫겠어. 저자들은 어떻게 태양 아래에서 발사된 총알을 맞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뫼르소 작가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가 궁금해서 말이야. 저런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거든. 정말이야. 독립 이후로 지금껏 발을 질질 끌고 다니며 해안을 배회하고, 죽은 엄마를 묻고, 자기 집 발코니에서 몇 시간씩이나 바깥을 내다보는 자들 말일세." (P42)


이 책은 알제리인의 시각에 쓰였기에 [이방인]에서 죽은 알제리인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학대받은 알제리의 역사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지 민족적이거나 정치적이지만은 않다. 작가는 교묘하게 하룬이라는 인물을 통해 뫼르소라는 인물을 오마주하고 있다. 뫼르소가 어머니와 느꼈던 갈등, 삶에 대해 느꼈던 권태, 그리고 살인의 과정까지... 한마디로 알제리인에 의해 재해석된 [이방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소설이었다.

언론과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언론과 미디어가 주목하는 것만을 보게 된다. 또 수많은 정치적 사건이나 이념, 그리고 철학 이론 등이 이슈화되면 그 이슈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자기 것을 빼앗기고, 내 쫓기게 된다.

이 소설은 거대한 실존주의라는 사상과 위대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의 그늘에 갇혀 있던 아랍인들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하고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의 힘을 이야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센서티브 -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
일자 샌드 지음, 김유미 옮김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독 단체생활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내향적이거나 민감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비난과 개조의 대상이다. 특히 군대 문화의 영향이 강한 남성 문화에서는 내향적인 사람은 사회생활에 부적합 사람으로 취급되고, 고쳐야 할 성격으로 매도된다. 나 역시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비난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 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내가 포기하고 타인에게 맞추어주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이런 성향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부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결국 내 성향을 인정하고, 내 성향은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후, 그것을 맞게 타인과의 관계를 조절해 가는 것이 필요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내 생각에 공감해 주고, 더 나은 길을 조언해 주는 좋은 책을 만났다. 일자 샌드라는 덴마크의 여성 목회자가 쓴 [센서티브]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민감함'이란 주제를 다룬다. 저자 역시 민감한 사람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이 부분을 극복한 후 자신과 같이 민감함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을 섰다.

저자는 민감함이란 남들보다 더 예민하여 더 많은 자극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민감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생활에게 계속해서 자극을 받기에 개인적으로 쉼과 휴식이 필요하다. 즉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특별히 예민한 신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숨어 있는 뉘앙스를 남들보다 더 많이 인식하고, 받아들인 인풋(input)은 더 깊은 곳에 입력된다. 또 풍부한 상상력과 활발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인풋과 느낌이 무수한 개념과 연상,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의 '하드 드라이브(hard drive)'는 빠른 속도로 채워지고, 그 결과 과도한 자극을 받는다.
내가 이런 경험을 하는 건 너무 많은 인풋이 들어와 머릿속에 더 이상 정보를 저장할 공간이 없다도 느끼는 순간이다. 때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게 있을 때 겨우 삼십 분이나 한 시간 후에 그런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억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심지어 그 만남을 즐기는 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어서 결국 완전히 탈진해버리고 만다." (P23)

이런 성향으로 인해 민감한 사람들은 결혼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타인의 비난을 받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약해진 상태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민감한 사람들이 타인보다 외부의 자극이나 스트레스에서 약하지만, 반면 평온한 상태에서는 일반인과 다른 예민함으로 극도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특히 민감한 사람들은 내면의 깊이가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깊이 공감을 하고, 또 예술적이고 영적인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이런 민감함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이런 민감함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민감함을 잘 발휘하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지나친 주변의 자극을 차단시키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과도히 몰입하지 않도록 관계의 선을 지키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남들보다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실제로 소모적이고 과도한 자극을 주는 대화에 쉽게 빠져든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친절하고, 배려 깊고, 수용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민감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능력은 자기 문제를 남에게 떠맡기려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오래 이어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회적인 에너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성격 유형을 현명하게 분별해야 한다. 당신의 에너지 수준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 있고 보상받을 수 있는 관계에 그 에너지는 사용해야 한다." (P 104-5)"

 

내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고 에너지는 얻는 사람들 있다. 대부분 외향적인 사람들이거나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들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기에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활력을 얻는다. 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게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민감하거나 내향적인 사람들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타인들을 배려하는 부분이 강하다 보니 타인과의 만남에서 극도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결국 민감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관리하지 않으면 심리 에너지가 급속히 고갈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이해해 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오랜 친구 역시 나의 성향을 알고 조언해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책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한 내면의 성향을 이야기해 주고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독서만이 주는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민감한 성향을 가지 사람들이나 주변에 이런 민감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와 술 - 작가들의 이유 있는 음주
올리비아 랭 지음, 정미나 옮김 / 현암사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칼 구스타프 융의 그의 책에서 심적 인플레이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심리도 에너지를 통해 움직이는데, 어느 순간 이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심적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잘 방출하면 훌륭한 학자나 작가가 되지만, 방출하지 못하고 쌓아두면 니체나 고흐같이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융이 말하는 심적 에너지가 철학자나 작가를 만드는 예민한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심적 에너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마 작가로서의 역량일 것이다. 문제는 이것은 마치 작가로서의 천형(天刑)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남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뛰어난 작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해 평생 고통 당하고 괴로워해야 할 테니까. 어쩌면 작가는 평생 자신 안의 자신과 처절히 싸우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된다.

 

영국 작가이자 평론가인 올리비아 랭의 [작가와 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저자가 뉴욕에서부터 시애틀까지 여행을 하면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스콧 피츠제럴드, 테네시 윌리엄스, 헤밍웨이,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존 베리먼과 같은 작가들의 삶의 장소를 방문하는 과정이다. 이 작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의 위대한 작가이면서도, 평생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마치 작가와 술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목은 작가와 술이지만, 원제는 [THE TRIP TO ECHO SPRING]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에코 스프링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인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 나오는 대사이다. 술주정뱅이 브릭이 아버지에게 훈계를 들은 후 그의 목발을 달라고 한다. 아버지가 묻는다. '어딜 가려고?' 그러자 브릭이 대답한다. '에코 스프링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려고요.' 여기서 에코 스프링은 브링의 술장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에코 스프링을 위대한 작가들이 몸부림치며 도피하려 했던 공간으로 본다. 그들은 무엇에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어디로 도피하려 했을까?

 

이 책의 초반에서 중반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는 테네시 윌리엄스이다. 저자는 뉴욕에서 테네시 윌리엄스가 주로 활동했던 뉴올리언스로 이동하면서 그의 처절한 삶과 함께 그의 작품의 주옥같은 대사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술독에 빠져서 살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내면을 파헤친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유럽 여행 중에서 강렬한 불안증을 경험했던 그는 일평생 이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극작가로서 성공한 후에도 주위의 기대감에 의한 압박에 시달렸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을 택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술과 함께 호텔방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내면을 그의 작품 [유리 동물원]에서 마술을 보고 온 톰이 누나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대사를 통해 설명한다.

"하지만 제일 신기했던 마술은 관 마술이었어, 마술사가 관에 들어간 뒤에 우리가 못을 박았는데 못을 한 개도 제거하지 않고도 그 마술사가 관에서 나오지 뭐야. 나한테 쓸모 있을 만한 마술이야. 이 비좁은 공간에서 빠져나가게 해줄지도 모르니까." (P 73)

 

마이애미로 이동하면서는 존 치버와 헤밍웨이를 자주 언급한다. 저자는 존 치버에 대해서는 그가 두 개의 자아를 만들고, 끊임없이 중산층적인 미국인의 멋진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고 말한다. 그는 작가로서 명성이 없이 집안에만 있을 때도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양복을 입고 아파트를 나와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글을 섰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행동은 그의 어린 시절의 수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치버가 자신의 선배 작가인 피츠제럴드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의 전기를 쓴 것도 이런 아픔을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두 남자는 자신의 태생에 대해 심한 수치심을 느꼈고, 치버의 경우엔 신체적으로 음낭이 움츠러드는 느낌마저 느꼈다. 피츠제럴드는 외가인 맥퀼란가를 1850년의 감자 기근을 겪은 가난한 아일랜드의 전형이라고 말했지만 맥퀼란 가는 신세계로 이주한 이후 열심히 일해서 중산층 상인으로 자리 잡으며 꽤 성공을 거두었다. 치버도 피츠제럴드도 모두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 또 둘 다 운동을 잘 못했고 학교에서 최하위 빈곤층 학생에 드는 것을 의식하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반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이야기 짓기 재주가 탁월했다. (P 215)

마이애미의 키웨스트는 헤밍웨이가 10년 넘는 세월을 산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명작을 발표했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 이혼과 결혼 등의 과정에서 심한 우울증을 시달렸고, 그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술을 빠져 살았었다.

저자의 종착역은 레이먼드 카버의 고향인 워싱턴 주의 시애틀이다. 저자는 그곳에서 처절했던 레이먼드 카버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어린 시절 메리언과 결혼하고, 작가의 꿈을 꾸기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그럼에도 그는 그는 현실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술에 빠져 산다.

"메리언 혼자만 전력을 다해 일했던 것은 아니다. 카버도 독학을 하고 식비를 벌면서 그 남는 시간을 최대한 쥐어짜 글을 쓰느라 아등바등 살며, 그 시절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이런 궁핍한 환경이었다면 선뜻 이해가 간다. 술을 의지처나, 잠긴 문을 열어주는 열시처럼 여기며 시작했을 만도 하다가, 그의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지루함에서 탈피하고 생존의 압박을 가라앉히기 위해 술을 마셨다. 카버에게도 억눌러야 할 비통함이 있었다. 그는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다는 생각에 자책하며 비통함을 느꼈다.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여전히 잡역부로 일하며 머시 병원의 복도나 걸레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괴로울 만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H 가의 파이어사이드 라운지에 들어가 한잔하며 괴로움을 달래면서, 야간 근무 일인 보일러 제조공 일에 지장이 되는 것까지 감수하며 짐 덩어리 같은 자식들을 부양하며 또 하루를 시작할 마음을 다졌을 만도 하다." (P 386)

예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으며 술에 빠져 스스로와 주변 사람을 파괴하는 인물들을 보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작가의 삶을 통해서 비로소 그의 작품들의 인물이 이해가 된다. 이런 것을 해석학이라고 하지 않을까? 텍스트 뒤에 있는 더 거대한 텍스트를 읽으며, 비로소 그 텍스트를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미국 작가들의 삶과 그의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 주는 고마운 책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라스하우스 2017-03-0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고민하고 잇엇는데 사서 봐야겟네요ㅎㅎ

가을벚꽃 2017-03-04 17:0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저도 술과 작가에 대한 가벼운 책인 줄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단 미국 현대작가들의 인생과 작품에 대해서 깊이 있는 해설을 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중간 중간 저자의 이야기도 가슴 뭉클하구요...미국 현대작가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은 책이네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독 나는 기억에 관한 영화나 책들을 좋아한다.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했었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스파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로버트 러들럼의 [본 아이덴티티]나 조작된 기억 속에서 진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SF 소설가인 필립 딕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이런 소설들을 읽다 보면 과연 '나'란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를 정의할 때 어떤 재료로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나'라는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어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수많은 경험들이 기억이라는 형태로 의식의 창고 속에 저장되고, 그 의식의 창고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기억들을 해석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결국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내 의식의 창고 속에 있는 기억들이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라는 책을 통해 저자의 서재를 탐험하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고양이 빌딩이라고 불리는 저자의 거대한 서재를 저자의 안내를 받아 가며 구석구석 드려다 보면서, 마치 한 사람의 뇌 속에 존재하는 의식의 창고를 탐험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 수많은 책들이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개인을 만든 재료가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그는 고양이 빌딩이라는 건물 속에 자신이 취재하거나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20만 권의 책들을 구석구석 배치해 두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새로운 손님에게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 주듯이 고양이 빌딩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서재의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들이 어떻게 자신의 손에 들어왔고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내내 집주인인 저자를 따라다니면 책과 함께 저자의 인생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양이 빌딩에는 공간별로 주제에 맞게 책들이 배치되어 있기에 저자는 그 공간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게 설명할 때가 많다.

1층에는 주로 과학 분야의 책들이 많이 배치되었는데, 저자는 이 공간을 소개하면서 과학이나 생화학 분야에 대해 설명한다. 특이 요즘 인기가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매우 깊은 식견을 드러낸다. 작년에 알파고로 인해 로봇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졌지만, 저자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뇌세포는 100억 단위인데, 이것은 컴퓨터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단지 컴퓨터는 빠른 계산만이 가능할 뿐이지, 인간의 사고를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과학자들도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연구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대신 인간의 뇌와 기계적 장치를 연결하는 연구가 오히려 활발하다. 뇌와 연결되어 손상된 신체를 대체할 기계적 장치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인공지능에 대한 책들과 함께 저자는 인간의 뇌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2층에서는 인문학 분야의 책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특히 저자는 이곳에서 가톨릭과 기독교에 대해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설명한다. 저자는 성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양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성경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 성경이 유럽 문화,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토착화되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기독교에는 마리아 숭배가 없었는데, 유럽 문화와 라틴 아메리카에 토착화되면서 그 지역에서 섬기던 여신, 또는 귀신들과 결합해서 마리아를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쁜 이야기일 테지만, 저자의 담담히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그 예로 라틴아메리카의 성모로 숭배되고 있는 멕시코의 테페야크 언덕의 성모가 사실은 멕시코 토착 종교의 토난친 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성모 마리아의 현현을 테페야크 언덕에서 보았던 것은, 심리의 심층에서 두신(토난친 신과 성모 마리아)이 오버랩되어 있던 것이 배경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그 둘이 융합되어, 말하자면 토난친이 성모마리아로 환생한 듯한 이미지의 전환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P154)

저자는 이런 종교적인 혼합이 단지 가톨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종교에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유력 종교가 충돌했을 때, 두 신이 사실은 동일한 신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서 두 종교를 합리화하는 현상을 습합(習合)이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은 종교의 역사에 자주 나타납니다. 특히 일본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의 부처는 실은 신도의 신이 모습을 바꾼 것이라고 보는 본지수적설에 의해, 혹은 부처임이 신도의 신이라는 형태를 취하셔서 아주 옛날부터 일본 땅에 독특한 방식으로 현현하셨다는 식으로, 불교와 신도를 일체화시킨 것도 그와 동일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 155)

 

지하층에는 저자가 취재했던 중동과 이스라엘 관련 자료들이 많이 있다. 저자는 이곳에서 책들을 소개하며 직접 팔레스타인을 취재했던 자신의 경험 들려준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자의 입장에서 매우 균형 있고, 깊게 이야기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은 어쨌거나 악한 것은 모두 상대 쪽이라는 자세로 서로 마구잡이 선전을 해왔습니다. 그런 상태로 취재해야 할 경우에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쌍방의 주장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중동 문제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분쟁의 본질을 하고하기 위해서는 한쪽의 주장만이 아니라 상방의 주장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P333)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주장이나 논리가 매우 단순해지고 있음에 놀란다. 술자리에서 술기운에 자신의 주장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주장과 방송 등에서 나와서 이야기하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거의 비슷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대선 주자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 역시 너무나도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런 주장에 열광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단순해졌을까? 아마 독서를 멀리하면서 부터 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책이란 다른 세상을 열어젖히는 커튼이라고 표현을 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하지 않은 세상과 나와 다른 주장과 생각들을 접한다. 또한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을 책을 통해 그 심층부의 지식까지 알게 된다. 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사물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다. 만약 책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과 사람을 이해할까? 방대한 서재만큼이나 그 책을 통해 얻은 다양하고 깊은 생각이 부러워지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