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임슬립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다준 과거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 부분만 바꾸면, 오랜 기간 자신이 겪었던 불행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눈앞에서 바로 그 사건이 펼쳐진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되지만, 이상하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연을 가장한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 사건이 그냥 일어나도록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운명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과거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철학적인 주제보다 내가 타임슬립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 인생을 바꾼 끔찍한 사건인데, 그 시점으로 가서 다시 그 사건을 바라보니 그냥 꿈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감독 특유의 솜씨로 몽환적이고 모호한 아름다움을 가진 장면으로 비치기도 한다.

 

[커먼웰스]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영화는 타입슬립과 관련된 소설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가족 소설이나 성장 소설, 자전적 소설 정도가 될 것이다. 경찰관인 픽스는 아름다운 아내인 베벨리와 살고 있다. 두 딸인 캐롤라인과 프래리 라는 두 딸을 키운다. 지방 검사보인 버트는 테레사라는 아내와 함께 캘, 앨비, 홀리, 저넷이라는 네 남매를 키우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버트가 우연히 픽스의 파티에 갔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픽스의 아내 베벌리와 키스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키스가 두 가정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 막장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오릴 것이다. 둘 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고, 각각 배우자에게 들켜서 물건을 때려 부수는 싸움을 하고, 여자들끼리 만나서 머리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개된다. 이런 시끄럽고 끔찍하고 지저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묘한 분위기로 회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두 가정이 베벨리와 버트의 키스 이후 파탄이 난 후 50년 후의 상황에서 진행이 된다. 픽스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상황이었고, 픽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프래리의 시각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소설의 처음은 프래리의 세례 파티 때 초대받지도 않은 버트가 방문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왁자지껄한 파티 분위기가 묘사되고, 그 분위기 속에 진을 들고 생뚱맞게 서 있는 버트가 묘사된다.

 

"앨버트 커즌스(버트)가 진을 들고 나타나면서 세례파티의 분위기는 딴판으로 달라졌다. 픽스는 미소 띤 얼굴로 문을 열고,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그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앞쪽 포치의 시멘트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앨버트 커즌스였다. 픽스는 지난 삼십 분 동안 문을 족히 스무 번은 열어주었는데 커즌스는 그를 놀라게 한 유일한 존재였다." (P 9)

 

버트는 픽스와는 업무상으로 경찰서에서 몇 번 스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파티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동료 한 사람뿐이었다. 그 동료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픽스의 파티에 갈 거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다. 주 중에 온갖 복잡한 사건에 시달리고 주말에는 임신한 아내와 세 명의 아이가 북적이는 전쟁통 같은 집을 벗어나기 위해 버트는 파티를 떠올리고 방문한다. 그냥 가기 멋쩍어 세례 파티에는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는 진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세례 파티는 술 파티로 바뀌고, 술 파티에 오렌지가 섞이고, 분위기는 금세 이상한 분위기로 바뀐다. 그리고 그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버트와 비벌리는 키스를 한다. 6명의 아이들과 두 병의 배우자, 그리고 본인들의 인생을 끔찍하게 바꾸어 버릴 이 사건을 저자는 이렇게 매우 모호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아름다움의 발명지가 되어온 이 도시에서 그녀는 아마도 그가 대화를 나눠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을 것이고, 단연코 부엌에서 옆에 서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핵심은 그녀의 아름다움이었고, 그 사실은 분명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오렌지를 하나씩 건넬 때마다 그들이 손가락 사이에 작은 전류가 흘렀던 것이다. 그는 매번 그것을 느꼈고, 그 찌릿한 불꽃은 오렌지 자체만큼이나 생생했다." (P 30)

 

어쩌면 당사자들이나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회상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때 버트가 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가 진을 가지고 오지만 않았어도, 진에 오렌지를 넣지만 않았어도, 둘이 같이 오렌지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둘이 닫힌 공간에 있지 않았어도... 이런 상상을 수없이 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 아픈 과거를 매우 아름다운 색깔로 묘사하고 있다.

 

6명의 자녀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정은 이혼을 하고 비벌리는 두 자녀들을 데리고 버트와 함께 버지니아로 가서 산다. 그리고 버트의 전 아내인 테레사는 4명의 자녀들을 키우다가 여름이면 그 네 명의 자녀들을 버트에게 보낸다. 결국 6명의 자녀는 여름이면 함께 시간을 보낸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8명의 식구의 여름 날들을 저자는 묘한 분위기로 묘사한다. 8명이 시장통과같이 북적이면서 보내던 여름 어느 날 버트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8명은 왜건에 끼어 타서 호숫가의 모텔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버트와 비벌리는 다음날 점심까지 잠을 자고, 아이들끼리만 남자 6명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호수로 여행을 간다. 캐롤라인이 아빠에게 배운 옷걸이로 차 문을 여는 기술로 버트의 차를 열고, 아이들은 거기서 총과 술을 꺼내서 호수로 간다. 호수로 가는 무더운 길을 걸으며 캘은 자신이 챙겨온 알레르기 약을 나눠주고, 아이들은 알레르기 약을 술이나 콜라와 함께 먹는다. 다른 가정의 6명의 아이들, 낯선 호수길, 총, 알레르기 약, 진과 콜라. 이런 단어들과 묘사들이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뜨거운 오전 태양 아래 베나들릴 네 알과 크게 꿀꺽한 진 한 모금만큼의 잠을 자게 될 앨비 옆에 그들이 마신 캔을 내려놓았다. 캘은 홀리와 새 여동생들에게서 나머지 약을 받아 비닐봉지에 넣고,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초코바가 녹기 시작했고 총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그들은 그것들을 전부 다시 종이 봉지에 넣고 호수로 향했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그들 다섯은 부모와 함께 왔다면 허락받았을 만큼보다 더 멀리까지 헤엄쳤다. 프래니와 저넷은 동굴을 찾으러 갔다가 해안 작은 숲에서 서로 뚝 떨어져 있던 두 남자에게 낚시하는 법을 배웠다. 캘은 미끼 파는 가게에서 호호스 과자 한 봉지를 훔쳤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봉지에 든 총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P 122)

 

이 여름날의 경험 뒤에 프래리의 시각에서 이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 여름 내내 그런 식이었다. 그들 여섯이 함께한 매년 여름이 그런 식이었다. 그 나날이 늘 재미있었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나날이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뭔가를, 진짜 뭔가를 하고도 결코 들키지 않았다." (P 123)

 

어떻게 이런 묘한 시선으로 폭풍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시절들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은 소설의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조금 풀렸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이고, 작가인 앤 패칫 역시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속의 이야기의 화자인 프래리가 바로 앤 패칫의 또 다른 자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한 시절을 작가 역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경험했을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는데 한참을 애를 먹었다. 과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 분위기를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모호하면서도 담담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과거의 묘사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인생을 후회나 원망이 아닌, 그렇다고 긍정적인 시선도 아닌, 참으로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과거도 돌이켜 보면 마치 꿈을 기억하듯 모호하고 담담하며, 어떤 때는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학을 좋아해서 자주 읽다 보니 자주 오사카나 간사이 지방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간사이 지방이나 오사카라는 지명이 많이 언급된다. 오래전에 읽은 [예스터데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역시 간사이 지방 출신인데, 도쿄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도쿄 출신이면서도 간사이 사투리를 아주 멋들어지게 구사하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는 간사이 사투리로 '예스터 데이'라는 노래를 개작해서 부르기도 한다. 왜 간사이 사투리를 사용하냐는 질문에 한신타이거스의 팬이어서 함께 응원하고 싶어서 사투리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소설을 읽으며 간사이 사투리가 어떤 느낌일까? 또 간사이 사람들에게 한신타이거스는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느낌을 조금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책을 만났다. 한국에 비교적 유명한 만화가 겸 에세이스트인 마스다 미리의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오사카 출신인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는 오사카 사람들의 특징과 오사카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일본 문화를 잘 모르기에 오사카 사람들의 특징은 잘 모르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오사카 사람들은 매우 붙임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디 가서든지 쉽게 이야기하고 친해지는 분위기이다. 만화와 함께 진행되는 에세이에서 오사카 출신의 어머니와 함께 옷 가게를 가서 점원과 쉽게 친해져서 이야기하는 모습이나. 가게에서도 주인과 쉽게 친해져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작가는 일찍이 도쿄로 올라와서 표준말을 사용하는데, 물건을 깎을 때며 저절로 간사이 사투리를 사용하게 된다고 말한다.

 

점원이 샐러드를 담은 용기를 보여 주면서 확인한다.

"고객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같은 값이라면 더욱 그렇잖아, 이 대목에서 내 뇌세포가 오사카 사투리를 긴급 소환했다.

"쬐금 더, 앞쪽의 큼직한 놈들도 넣어주면 안 될까요?"

점원이 흠칫 내 어굴을 쳐다 보았다.

내친 김에 연달아 공략하는 나

"어째 자투리가 많아 보이는데, 200그램이나 사니까 뭐냐, 좀 먹음직스러운 쪽도 넣어주셔야죠."

스스로도 우어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말, 오사카에 살던 시절엔 해본 적 없으니까.

- P 33

 

이 장면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마트나 시장에서 흔히 보는 장면들이 연상되었다. 사투리를 써가며 물건을 깎아달라고 하면 점원도 웃으면서 그냥 수긍해 주는 경우가 있다. 사투리라는 것이 인간의 계산적인 논리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무언가 강력한 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사카 하면 역시 한신 타이거즈인가 보다. 이 책에서 한신 타이거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한신타이거즈가 우승을 하면 오사카 사람들은 에비스바시라는 다리 위에서 도톤보리 강에 옷을 벗고 뛰어내린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다리 무너지겠네, 할 정도로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도톤보리 강에 뛰어들 집단과 나를 포함해 그걸 굳이 보러 온 집단. 에비스바시는 그야말로 할 일 없는 인간들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다이빙하러 온 집단도 다시 두 그룹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뛰어들 작정으로 온 그룹, 분위기에 취해 우쭐해서는 얼떨결에 뛰어들게 된 그룹. - 중략-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뛰어들 작정으로 온 사람은 티셔츠에 바지, 비치 샌들 같은 가벼운 복장이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에 휩쓸린 즉흥파는 퇴근길에 동료들과 구경 삼아 들른 정도니까 양복 차림이다. 양복이가 난간에 올라서면 구경꾼들이 당연히 대대적인 환영이다. '바-보, 바-보, 바-보'하는 열화와 같은 합창이 터지고, 양복입은 남자는 모두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일념으로 귀중품을 동료에게 맡기고 다리 밑으로 사라진다. 대체 젖은 양복으로 집에 어떻게 돌아갈 셈이었을까? 그 순간에는 뒷일 따위 안중에도 없었으리라" (P 39-40)

 

나 역시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기에 이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 책은 여러 가지 오사카 사람들의 성향과 사투리 등을 이야기한다. 글과 그림으로 오사카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한국에서는 특정 지역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투나 유머들이 많다. 그 지역 사람들은 항상 ~~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나마 신사적이고, 악질적인 단어들을 붙이며 특정 지역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어떤 가수가 어느 지역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은 뿔이 난 줄 알고 있었다는 말로 인해 시끄럽다. 그만큼 한국 특정 지역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심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에는 이런 것들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도쿄 사람들이 오사카 사람들을 대할 때 비교적 친근감 있게 대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자신과 다른 상황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하는 내용들이 많이 언급된다. 일본보다 훨씬 작은 한국에서도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대하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 21세기 비판이론
스튜어트 제프리스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 시간 내가 가장 공감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의 인물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김범우라는 인물이다. 태백산맥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렬했던 해방공간에서 중도적이고 민족적인 시각을 가진 김범우라는 인물의 시각을 통해 좌우익의 극단적인 사상과 그들의 만행을 바라보고 있다. 김범우는 미군 특수 요원이라는 높은 지위로 해방공간에 들어왔지만, 우익들의 지나친 만행과 학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좌익들의 테러나 여순 반란 사건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좌우익이 함께 사는 이상적인 한반도를 꿈꾼다. 그로 인해서 우익에게는 빨갱이로, 좌익에게는 반동분자로 몰린다.

 

나 역시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혼란의 시대에 청춘에 이어서 중년까지 보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차례씩 광풍이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논리로 반대편을 짓밟고 자신들의 사상에 온갖 것을 억지로 끼어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한 방향으로만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나는 그런 극단성과 획일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한 쪽 편의 사람들에게는 색깔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또 다란 편의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편하게 세상을 사는 방법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에 철저하게 순응하면 앞장서서 반대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가장 힘들게 사는 것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 속에 담긴 광기와 폭력을 지적하며 그들이 폭주하며 세상과 사람을 학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여기 태백산맥의 해방공간보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보다, 더 격렬하고 치열했던 시대를 날카로운 사상으로 돌파하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들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프랑크푸랑크 학파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의 학 건물에 모여들었던 당대의 학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호크하이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 하버마스, 호테트 등 주로 이어지는 이 사상가들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와 해방 후의 냉전시대, 그리고 흔히 신좌파 운동으로 불리는 1960년대의 극한 혼란을 지나, 신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현대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까지 그들의 사상으로 세상의 광기와 폭력과 맞섰다. 주로 유대인들이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주장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시오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이들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배하는 획일적인 사상의 폭력에 맞서 그 폭력의 실체에 대한 냉철한 탐구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배세력에게서는 유대인이며 사회주의자들이란 비난을 받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책 서론에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카치의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틑 학파가 마르크스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며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분개했다. 철학자 게오그르 루카치는 아도르노와 프팡크푸르트 학파의 소위 '그랜드 호텔 어비스(Grand Hortel Abyss)'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루카치가 이름 붙이 이 아름다운 호텔은 '각 종 편의시설로 가득했지만 허무와 모순, 심연이라는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벼랑 끝에 선 호텔에 묵었던 손님 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있었다. 루카치는 소펜하우어의 철학이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을 사색한다고 지적했다. '매일 최상의 만찬을 즐기고 예술 감상을 하면서 틈틈이 심연을 성찰하는 일은 그저 섬세하고 안락한 여가생활을 극대화시켜 줄 뿐이다.'라고 루카치는 비아냥거렸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루카치는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처럼 벼랑 끝 호텔에 투숙한 새 고객들은 고통에 대한 도착적 쾌락을 즐겼다고 그는 비판했다. 이들의 경우 물론 쾌락의 대상은 호텔 테라스에 앉아 굽어본 저 심연 밑바닥에서 인간 정신을 파괴시키고 있는 독점 자본주의의 거대한 장관이었다. 루카치가 보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연결고리를 포기해버렸다." (P 24)

 

대부분 부유한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로서 돈벌이를 위해 힘들게 노동을 하거나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적 없이 부유한 사업가나 부모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사색만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혁명가들이 보기에는 신선놀음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과 사유의 과정은 결코 여유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사상가의 사상이 이처럼 치열하고 처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이들은 사상뿐만 아니라, 삶 역시 치열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1920년대에 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의 문제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독일의 후방에서는 노동자들과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앞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에 비해 쉽게 사그라들고, 다양한 계급들이 연합된 바이마르 정부를 탄생시킨다. 대부분 아드르노와 벤야민 등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왜 독일에서는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목을 했던 것은 루카치로부터 언급된 '포드주의'라는 당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론의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포드에 의해서 처음으로 자동차 조립공장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생산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대량생산의 문화는 노동자들에게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소비자로서의 한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착취의 개념을 가지던 소비자는 이제는 자신도 소비의 욕망을 가지는 존재로 바뀐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가 주는 무한한 쾌락과 환상의 꿈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쾌락과 환상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예술로 본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통렬히 비판했던 이유이다.

 

"조립라인은 생산과정을 가속했지만 노동자는 나약해졌다. 그들은 갈수록 기계의 부품이 되어가고 더 나쁜 경우에는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낡은 것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가령 포드의 자동차 공장은 보잘것없는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동적으로 부품을 찍어낼 수 있는 기계가 비치되어 있었다. 인간은 생산적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생산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 그들이 사용하는 이론과 어휘 일부에 이런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 존재론적인 비극으로 보일지 모른다. '내가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차 한 대씩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에게 말했다. 인간은 단지 기계가 되거나 기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들의 정체성은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수동적 소비를 통해 정의되어 있다." (P 132)

 

"문화의 차원에서 포드주의는 세상을 현대화했다. 대량생산제품은 T 모델뿐 아니라 찰리 채플린 영화도 포함된다. 기계화는 산업화를 혁명화할 뿐 아니라 예술을 산업화해서 생상과 분배의 가능성을 가속화하고 새로운 예술형식 - 영화와 사진 - 을 가능하게 만들고 예술형식의 - 소설, 회와, 연극 - 활기를 없앤다. 속도, 경제, 찰나의 순간 그리고 오락은 대량생산 문화의 특징이다. - 중략- 베버의 자본이라는 철의 교도소는 일하는 시간 동안 인간을 억눌러 왔다. 이제 문화산업이 여가시간에도 인간을 억압한다. 그들은 생산적 존재에서 소비자로, 창조적 활기로 넘치는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꿈으로부터 모든 똑같은 것을 보고 낄낄거리는 무감각한 영화 관객으로 바꾸어버렸다." (P 132-3)

 

이 책은 초반부터 벤야민의 '구운 사과 향기에 대한 기억'과 '카이저 파노라마'라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장치 등을 언급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싸우려고 했던 대상이 단순히 자본주의가 아닌, 그 자본주의 뒤에서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주며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단지 욕망하는 존재라 바꾸려 하는 거대한 힘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가치와 대항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1930년대 1940년대를 지나면서 그 사상이 바뀐다. 바로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제 새로운 질문에 직면한다. 왜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할까? 1940년대에 이르러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등은 자본주의의 횡포 대신 나치나 파시즘적인 야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야만에 동조하는 대중들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된 사상인 '비판이론'이 정립되게 된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머에게 이렇게 쓴다. '내 생각에 우리가 관례적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연결해서 생각했던 그 모든 고통이 아주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유대인에게 집중적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 같다네. 비판이론을 낳게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사회 연구소의 토대이자 공식적인 목적인 되어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이 이제는 학파의 관심 대상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1947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프롤레타리아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목적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존재 상황으로 진입하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P 307)

 

이 연구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그 야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역사철학테제]나 미완성이지만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대작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주로 미국에 피해있던 이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보고 경악한다. 그들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개인주의에 강력한 반감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더욱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목표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하버마스 등에 의해 이어진다.

 

이렇게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의 광기와 그 사상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뒤에 있는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항상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았다.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 때 마르크스주의자와 유대인으로 공격을 당하고, 프랑스로 망명 와서는 독일인으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미국에 건너와서는 지독한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받다가,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로 돌아가서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중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1960년대의 신좌파 운동이 극렬할 때는 그들로부터 극심한 모욕과 핍박을 당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폭력에 반대하다가, 학생들이 강단을 점검하고 그를 조롱하고 모욕을 당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일화에 의하며 여학생들이 강단에 올라가 브래지어를 벗고 가슴을 보이며 그를 조롱했다고 한다. 결국 그 충격으로 강의를 관두고 등산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어찌 보면 발터 벤야민의 죽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왜 아드로는 자신의 사상과 뿌리가 같을 수도 있는 신좌파 운동의 폭력에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책의 핵심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서론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1969년에 아드로노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 히틀러 시대에 창궐했던 권위주의 성격과 그에 따르는 순응주의 정신이 신좌파와 학생운동에서 되살아나 활보하는 양상에 주목했다. 학생운동과 신좌파는 반권위주의적인 듯 행세하지만 자신들이 전복의 목표물로 지목한 억압적 구조를 그대로 복사하고 있었다.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일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성찰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라고 아드르노는 섰다." (P 27)

 

우리는 흔히 어느 학파나 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그 학파나 학자가 주장한 사상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그 사상의 내용보다 그 사상을 완성하기까지의 사유의 과정이 중요할 때가 있다. 과연 그 사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그 사유의 과정의 핵심을 이 시대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회가 야만과 폭력성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다.

 

이제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치며 조금 위험한 마무리를 하려 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흔히 보수주의냐 진보주의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놓고 싸운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하면 어쩌면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의 탈을 쓰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려는 야만성과 폭력성이 우리가 바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 순간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가면을 바꾸어 쓰고 우리에게 접근한다. 우리가 주목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가면이 아니라, 그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바로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다. 아쉽게도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 점점 우리 사회의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도 우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배우고, 그들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소설을 읽으면 글에서 작가의 생(生)이 녹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암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섰다는 박경리 작가나 사형 직전까지 같던 죽음의 공포와 가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던 도스토옙스키, 온갖 전쟁터와 오지를 다니며 자신의 경험을 녹여 글을 쓴 헤밍웨이같이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 그들의 생의 일부분을 녹여서 부어 만든 작품을 보는 듯한 경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런 소설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의 단편소설 중에서 '치숙'으로 불리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 있다. 치숙은 평생 크게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생을 부어서 치열한 글을 쓰고 생을 마치는 인물이었다. 오래전에 읽었어도 치열하게 자신의 생과 싸우며 글을 쓰는 치숙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런 치숙과 비견되는 인물을 다시 만났다. [대소설의 시대]라는 소설 속의 '장두'라는 여인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김탁환 작가가 계속해서 쓰고 있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백탑파 소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백탑파란 조선 시대 실학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에서는 실존했던 실학자들이 등장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특히 화광이라는 호로 불리는 꽃을 그리는 화풍으로는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김진'이라는 인물과 표창 던지는 솜씨가 당대 최고인 의금부 도사인 이명방이라는 두 명의 중심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다.

 

[대소설 시대]에서 김진과 이명방은 사라진 소설가인 '임두'를 찾아 나선다. 소설의 배경은 18세기 정조시대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소설이 유행했다. 대소설이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편소설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보통 200-300권의 분량의 소설들이 유행을 했다. 백성들로부터 궁궐의 여인들까지 소설을 읽고, 또 스스로 소설을 쓰던 시대였다. 그중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은 [산해인연록]이란 소설이었고, 이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임두라는 인물로 설암당이라는 대저택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23년간 소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명방은 김진의 부탁으로 임두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임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며 노인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몇 가지 더 알게 된다.

 

그녀가 쓰고 있는 [산해인연록]은 사실 자신의 남편 사도세자를 잃고 비탄에 빠진 혜경궁 홍씨가 그 비탄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 그녀에게 짓도록 한 것이며, 지금은 정조의 빈이자 세자의 어머니인 의빈이 [산해인연록]의 열렬한 독자이나 후원자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200권을 앞두고 이제 소설을 마무리해야 할 단계에서 그녀가 매병으로 불리는 치매에 걸렸다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도 200권을 이어지는 동안 펼쳐 놓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기억하며 소설을 마무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녀가 그녀는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자신과 싸우며 소설을 마무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매병(?病, 치매). 정녕 이야기의 신이 몹쓸 병에 걸렸단 말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힘들 것이다. 수십만 개의 단어로 수천 개의 사건을 만들며 유유히 23년을 흘러온 소설가가 '휴탑'에 적은 구상도 잊고 또 그 '휴탑'을 둔 곳까지 잊은 것이다. 기억의 제왕에서 망각의 노비로 전락한 꼴이었다. [산해인연록]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바람이 없다면, 진작 불행한 최후를 택했을지도 몰랐다." (P 142)

 

그런데 그런 임두가 어느 날 사라진다. [산해인연록]과 함께 모진 세월을 견뎌 온 혜경궁 홍씨와 의빈은 김진과 이명방에게 어떻게든 그녀를 찾으라는 엄명을 내린다. 처음에는 단지 소설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그녀의 과거와 [산해인연록]에 얽혀있던 비밀이 풀린다.

 

이 과정에서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은 임두로 불리는 한 여인의 소설에 대한 열정이다. 일찍이 결혼을 했지만, 25에 남편을 잃고, 겨우 키운 유복자마저 며느리와 함께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다. 그녀는 오로지 소설을 쓰며 그녀의 일생을 보낸다. 그리고 노년에는 오직 [산해인연록]을 쓰며 자신의 일생의 모든 것을 소설에 바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을 하는 부분은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당대의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대소설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김진과 이명방의 대화 속에서 매 장마다 당대에 인기를 얻었던 대소설들이 등장하고, 그 대소설들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 당시 보통 2-300권의 분량을 가지는 이렇게 많은 대소설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대소설들을 읽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정말 작가가 이 시대의 또 다른 임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장편소설이 유행이었다. 특히 역사소설이 유행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서재에서 월탄 박종화나 나림 이병주 등의 역사소설을 읽으며 자랐다. 조금 커서는 김주영의 [객주]나 박경리의 [토지] 등을 읽었다. 대학시절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었었다. 그런데 [태백산맥] 정도가 끝이었던 것 같다. 점점 장편소설이 인기를 잃어가더니 이제는 3권 이상의 장편 소설의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모두들 짧고 단편적인 소설들만 즐겨 읽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한 편의 소설에 인생을 불어 넣는 작가들도 사라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시대이건 치열하게 소설을 써 온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소설이 위대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인생이 녹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역사 추리 소설의 형식을 가졌지만, 조선 시대의 문화와 소설에 대해서 매우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개 새 아시아 문학선 22
메도루마 슌 지음, 곽형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일본과 관련하여 주의 깊게 본 두 개의 뉴스가 있다. 하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이다. 아베 총리가 관광 가이드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극진하게 트럼프 대통령을 모시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또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에 2만 명 이상 함몰되어 있는 한국인 중 자신의 부모나 형제의 이름을 빼달라는 5년간의 한국인 가족들의 탄원을 일본 재판부가 2초 만에 거절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일본 법원은 5년간 피나게 노력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주의 문장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왜 이렇게 일본은 미국과 한국에 대해 두 개의 극단적인 태도를 보일까? 태평양 전쟁 패전과 원자폭탄 투하라는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게 미국은 보기만 해도 움츠려드는 트라우마가 있는 강대국일 것이다. 반면 한국은 35년 동안 자신들이 철저하게 짓밟았던 경험이 있는 만만한 나라일 것이다. 강자에게는 철저하게 약하고, 약자는 철저히 짓밟는 속성은 다만 일본인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의 근원적 본성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폭력성이 인간의 약육강식과 닮은 점이다.

 

오키나와 출신은 작가 메도루마 슌의 [무지개 새]는 바로 이런 인간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가였다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지금은 미군 기지가 있어서 일본에서도 가장 차별을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작가의 고향인 오키나와 북부는 오키나와에서도 더욱 차별을 받는 곳이다. 메도루마 슌은 바로 이런 오키나와의 문제점을 소설로 지적하는 작가이다.

 

[무지개 새]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미군이나 미군 기지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유라는 어린 여성과 그 어린 여성을 이용해 남성들을 갈취하는 포주 역할의 가쓰야의 이야기를 다룰 뿐이다. 마유가 당하는 성적 학대와 그런 마유를 관리하는 가쓰야의 내면의 갈등이 담담하게 그려질 뿐이다. 초반에는 너무 잔혹한 성적인 표현으로 인해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쓰야는 마약에 취해 동물처럼 사육당하는 마유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만, 그 감정에 끌려다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 역시 히가라는 남자에게 학대를 당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쓰야와 마유가 어렸을 때부터 당했던 폭력과 학대가 드러난다. 가쓰야는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선배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당하고 돈을 갈취당한다. 그리고 그 조직 위에 '히가'가 있었다. 히가는 특히 가쓰야에게 집중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행하고, 가쓰야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말도 못 하고 하가의 폭력을 당해야 했다. 결국에는 히가의 심부름꾼이 되어 돈을 갈취해서 상납하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가쓰야는 동급생들에게도 배척을 당하게 된다. 마유가 당하는 폭력은 더 끔찍했다. 같은 여중생들에게 끌려다니며 성적인 학대까지 당하다가 결국 가쓰야에게 끌려와 마약에 중독되어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있었다. 가쓰야와 마유에게 히가는 어릴 때 당한 폭력으로 인해 극한 트라우마를 느끼는 존재였다. 그러기에 그가 행하는 잔혹하고 끔찍한 폭력에도 소심한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순응을 한다.

 

"그 후 3개월 동안 심호흡을 할 때마다 늑골이 아파 운동도 할 수 없었다. 뼈에 금이 간 것 같았지만, 폭력을 당한 사실을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꼭꼭 숨기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가쓰야는 그때 자신이 피하지 않았아도 히가가 정말로 얼굴에 돌을 떨어드렸을지 생각했다. 히가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이후 그와 계속 만나면서 그렇게 확신했다. 첫 대면에서부터 깊이 각인된 히가에 대한 공포심은 가쓰야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P 64)

 

소설 중반이 갈수록 가쓰야와 마유가 당하는 폭력과 함께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당하는 폭력이 묘사된다. 미군 기지를 통해 생활을 이어가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에게 순응적이다. 미군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강간하고 살해해도 그것에 데모만 할 뿐이지 격렬히 저항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유의 모습이 중첩이 된다.

 

"육교에서 바라보니 적어도 1000명은 넘어 보이는 데모대와 비교해 경찰의 기동대와 제복 경관은 다 해도 100명 정도뿐이다. 그런데도 데모대는 어디까지나 얌전하게 도로 끝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잘 보니 빠른 걸음으로 육교 아래를 지나가는 데모대 안에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기지의 철조망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온통 둘러쳐져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지를 철거해라, 범인인 미군 병사를 넘기라고 외치는 구호를 듣고 있자니 짜놓은 대본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여름 해변가에서 강제로 위를 보고 눕혀져 미군 병사 3명에게 팔 다리를 제압당한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얼굴 전체를 거의 뒤덮을 정도로 검고 커다란 손으로 입을 틀어 막힌 소녀의 눈이 공원에서 가쓰야를 보고 있던 소학생 시절 누나의 눈으로 바뀌었다. 온몸에 땀이 쏟았다. 부릅뜬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쓰야의 가슴을 도려냈다. 응시하는 눈은 어느새 마유의 눈으로 바뀐다. 몸 깊숙한 곳에 비틀어 박힌 돌의 감촉에 가쓰야는 숨을 깊이 내뱉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다." (P 114)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히가의 폭력은 더 잔혹해지고, 가쓰야와 마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까지 간다. 그럼에도 가쓰야는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하기의 폭력을 그대로 감당한다. 이 정도이면 폭발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폭력과 학대에도 가쓰야는 빨리 그 폭력이 지나가기 만을 바랄 뿐 사소한 반항 한 번 못해 본다. 폭발한 것은 가쓰야가 아니라 마유이다. 마유의 반항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고 그들은 히가에게서 해방 아닌 해방을 맛본다.

 

이 소설의 제목인 '무지개 새'는 오키나와 전설에서 오키나와 숲속에 살고 있는 새라고 한다. 베트남 전이 한창일 때 미군들이 오키나와 숲속에서 극한 훈련을 하다가 무지개새를 만나면 그는 베트남에서 살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나오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가쓰야는 중학교 때 오키나와 숲을 여행하면서 무지개 새를 만나기를 빌었다. 자신이 하기의 폭력에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하기의 폭력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또 어떤 피해를 입을지 두려워 그 폭력에 묵묵히 순응해 갔다.

 

폭력이 무서운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사람의 인격과 내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한 폭력은 가해자에 대한 공포와 함께 폭력에 대해 무기력하게 순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은 가쓰야나 마유가 당한 폭력을 통해 오키나와가 일본과 미국에 당하고 있는 폭력을 묘사한다. 그리고 폭력 앞에 무기력한 가쓰야와 마유의 모습을 통해 오키나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하기에, 두렵기에 잔혹한 폭력 앞에서도 순응하는 모습을 잔혹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모습을 떨쳐 버리고 일어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요즘 시끄러운 학교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학교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한 아이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그 폭력에 대한 처벌에 너무나도 소심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어려서 폭력을 당하는 아이는 그 폭력과 함께 철저하게 인격이 파괴되어 폭력 앞에 길들여지게 된다. 반대로 어려서 폭력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누리게 되는 아이들은 커서도 그 폭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다. 이것이 폭력 앞에 우리가 단호해져야 할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