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 - 상 십팔사략 1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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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 풍경을 보며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잠시 넋을 잊을 때가 있다. 중국 역사가 그렇다. 방대한 영토와 그 영토 속에서 세워졌다 사라지는 수많은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보면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잊을 때가 있다. 이런 중국 역사는 여러 권의 책들로 출간되어 부분적으로나마 우리가 접하게 된다. 삼국지나 초한지, 또는 열국지 같은 인기 있는 시대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어 읽힌다. 그러나 정작 중국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책은 드물다. [십팔사략]은 바로 방대한 중국 역사를 한 권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십팔사략]은 송나라 말엽과 원나라 초에 살았던 증선지(曾先之)가 원나라 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칩거하면서 지은 역사서이다. 중국에서 전설로 알려져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살았던 송나라와 원나라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함께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많이 읽혔던 책이다. 아쉽게도 [자치통감]이 잘 알려진 반면 [십팔사략]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인간사랑에서 원문을 번역하고 그곳에 해석까지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1,2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합치면 1400페이지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러나 단순히 페이지를 넘어서 그 속에 방대한 중국 역사가 담겨 있다.

 

[십팔사략] 1권은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해서 은,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통일과 혼란시기를 거쳐 서한과 동한, 삼국시대와 위 진 남북조시대를 다루고 있다. 2권에 비해서 더 혼란했던 중국의 역사를 다루며 보설(補說)이라는 형식을 통해 십팔사략에 대한 저자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다.

 

먼저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삼황오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삼황오제는 원래 중국의 민간설화로 이어지다가 사마천의 [사기] 때부터 역사로 편입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최근에 중국 신화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는데, 삼황오제와 관련된 전설들이 많이 있다. 반고와 여와에 의한 창조설화와 관련되어 복희씨의 언급이 많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해설을 통해 중국 역사에서 삼황오제가 역사로 편입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원래 황제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등장한 것은 전국시대 이후다. 황제 신화 및 숭배가 전국시대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그 내용도 훨씬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전국시대 후반기에 들어와 천하통일에 대한 염원이 높아지면서 황제에게 패한 뒤 전신(戰神)으로 숭앙된 치우는 살벌한 전쟁을 상징한데 반해 황제는 통일을 상징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P 58)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한족의 역사가 끊어질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 증선지와 같은 사람에들에게 삼황오제의 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허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신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신화와 전설은 나름대로 선사시대 조상들의 사고와 생활양식을 구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편수하면서 사마천의 [사기]를 전범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와 발해사 등응을 삭제한 김부식의 소행은 사마천이 삼황오제와 같은 신화를 왜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김부식이 신채호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63)

 

두 번째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이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던 이유는 잘 알려진 것처럼 법가 사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진나라가 처음 법가 사상을 받아들인 것을 진효공이라는 사람이 위나라 출신 공손앙을 받아들이면서부터라고 한다. 공손왕은 진효공에게 나라를 통치하는 도가의 무위지치(無爲之治)와 유가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진효공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법가의 법치(法治)와 병각의 역치(力治)를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진효공이 반응을 보였다. 십팔사략에서는 공손왕이 진효공에게 말한 법치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백성을 10가구 내지 5가구 단위로 묶은 십오의 제도로 묶고, 사로 감시하며 책임을 지는 연좌제를 실시한다. 간사한 자를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를 끊는 요참에 처한다. 고발한 자에게는 적을 벤 것과 동일한 상을 내리고, 은닉한 자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내린다. 싸움에 공을 세운 군공자는 각각 그 공에 따라 작위를 받고, 사사로이 다투는 사투자는 각각 그 경중에 따라 형벌에 처한다. 남녀노소가 힘을 다하는 육력으로 본업인 농사와 길쌈인 경직에 열심히 일하며 곡식이나 포백 즉 속백을 많이 생산하는 자는 그 자식의 부역을 면제해 주는 복신을 허용한다. 상공업 등의 말업에 종사하며 고리 등의 말리에 취하는 자와 태만하여 가난한 자는 처자까지 모두 잡아들여 관노로 삼는 수노의 조치를 위할 것이다." (P 190)

 

이렇게 진나라가 엄격하다 못해 잔인한 공포정치를 펼치자 진나라가 부강해졌다. 그리고 진시황에 의해 진나로 천하통일이 될 때까지 이 엄격한 공포정치가 이어진다. 이런 통치는 중국 역사의 곳곳에 드러나고, 한국에서도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멸하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극형들이 이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중국 미학 입문]이라는 책으로 알려지 이택후(리쩌허후)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중국의 사상들이 사회주의라는 얼굴을 쓰고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안에는 중국식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팔사략을 통해 법치주의가 진나라 시대 이후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얼굴을 바꾸면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진나라 이후의 혼란을 통일하고 유가정책을 편 한나라 시대에도 여전히 잔인한 공포정치가 보이는 곳이 많다. 현대에도 중국에서 체육관에서 흉악범들을 공개처형 시키는 등의 공포정치를 펴는 것은 아마 이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된다. 법에 의한 강력한 공포정치는 단기간에 쉽게 효과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반드시 그 피해가 있다. 법치를 세운 공손왕도 자신이 만든 법치로 인해 죽었으며, 진시왕과 그 자손 역시 그 쓰디쓴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관심을 가진 부분은 서한과 동한으로 나누어지는 시기이다. 우리가 흔히 한나라로 알고 있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정확히는 서한과 동한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왕망이 세운 15년간 존속했던 신나라가 있다. 보통 중국 역사에서 신나라는 역적 왕망이 한 왕조를 찬탈해서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십팔사략에서는 왕망을 그렇게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후에 그의 무리한 개혁이 신나라의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전부일뿐이다.

 

또 역자 해설에서 역시 왕망에 대한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다. 그는 서한의 멸망은 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한의 혼란 상황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동양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는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존속기간 15년의 신나라가 있다. 신나라는 국가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왕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탓이다. 신나라의 역사는 중국 정사에 포함돼 있지 않다. 반고의 [한서] 왕망전에서 왕망을 역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반고가 그를 '왕망' 내지 '망'으로 일관되게 부르고 있는 게 그렇다. 최근의 논저들도 그를 두고 기만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한 간신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서에도 왕망이 관직에 들어선 후 신나라 황제가 되기까지 31년의 긴 세월 동안 누군가 왕망을 반대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나라의 패망은 건국 이후의 문제점들로 인한 것임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설령 왕망이 아닐지라도 민란이 일어나 왕조가 뒤집힐 상황이었다. 탈법과 부정비리가 판을 치던 상황에서 그는 뇌물을 탐하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을 매번 부하들과 빈민에게 나눠주었고, 녹봉과 하사받은 상 등도 구제활동에 쏟아부었다. 개인생활 또한 청렴결백했다. 그는 결코 앞에서 푸성귀를 먹으면서 뒤에서 고기를 먹는 이중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P 437)

 

그러나 가장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왕망과 신나라의 멸망에 대한 저자의 평가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십팔사략 원문 자체보다 역자의 해석에서 날카로운 부분들이 더 눈에 띄는데, 특히 왕망의 부분이 그렇다. 왕망이 개혁에 실패하고 신나라가 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는데, 마치 칼에 배이듯이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은 왕망의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해당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면 성공을 거뒀을 공산이 크다. 지식인과 서민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그의 즉위를 반겼다. 그러나 황제의 차원을 넘어 '성군'이 되고자 한 게 문제였다.

당시 근데 퇴직 관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고, 학자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관리 선발의 폭을 넓히고, 관리와 백성의 개별적인 병역 물자를 지급해주고, 대량의 공공시설을 세웠다. 이는 그의 개혁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갖게 했고, 더불어 더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열렬한 지지자들은 곧바로 적대세력으로 돌변한 이유다.

당시 재화는 한정돼 있었다. 그가 추진한 일련의 사업은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돼야 했다. 재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이는 재정파탄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방법을 택했다. 가장 완벽한 개혁을 위해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갈등의 핵심인 토지와 노비 문제에 대해서 그는 시건국 원년인 서기 9년에 이같이 선포했다.

'이제부터 천하의 밭을 개명해 왕전이라 하고 노비는 사속이라고 하고, 모든 매매는 일괄적으로 금한다.'

[맹자]가 역설한 정전제를 겨냥한 조치였다. 성스로운 정전제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은 모두 변경으로 압송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지주 호족의 반발이 거셌다. 이 정책은 실행가능성이 없는 데다 실제적인 강제조치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얼마 후 없던 일이 되자 기대가 컸던 농민들도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토지제도의 실패는 곧 왕조의 패망을 의미했다." (P 440)

 

[십팔사략]의 1권은 특히 중국의 혼란 시기를 많이 다루고 있기에, 많은 왕조가 세워지고 몰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이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는지에 대해 나름 역사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해석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역자의 보설이다. 그는 매 단락의 후반부에 방대한 양의 보설을 통해 십팔사략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해설하고 있다. 어떤 때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어떤 때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그 사건이 가지는 이면의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중국 과거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이 시대의 우리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십팔사략을 비롯해 많은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던 저자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사를 통해 날카로운 통찰을 가진 지식인이 한 명 더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점점 역사적인 통찰이 흐려지고, 시대에 흐름에 생각 없이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대이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에 다시금 역사와 고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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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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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얻는 유익 중에 하나는 소설의 시대와 장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화려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사교계와 조국전쟁으로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처참한 모스크바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는 어둡고 음침한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라스꼴리노코프와 걷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으면서는 치열했던 한국사의 골짜기들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쉽게도 현대 소설에서는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해외 뉴스로만 접하던 역사의 격동기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소설을 만났다. 엘리 스미스의 [가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연작소설이다. 사계절을 나타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소설로 네 편의 소설이 연작으로 발간되었고, 특이하게 [가을]이라는 제목이 첫 권이다. 소설의 시작은 영국 해변가로 떠내려 온 시체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미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만, 생기 넘치는 소녀들의 놀이를 감상하며 잠시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잊기도 한다. 어머니의 품에서의 따스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무슨 소설의 시작이 이럴까?라고 생각하지만, 곧이어 앞의 내용과는 전혀 단절된 것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 바로 본 시대는 브렉시티 투표가 가결된 바로 직후의 상황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민 여성인 어머니와 단둘이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역시 힘겨운 삶을 사고 있다. 그나마 아스 아슬하게 유지되던 삶이 브렉시티 이후 더욱 냉혹한 차별에 던져지게 된다.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 이민 가족의 후예인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당시의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정을 배제한 체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사는 마을의 하이 거리에는 엶 축에를 알리는 깃발이 내걸렸다. 빨간색, 흰색, 파란색의 비닐 조각들이 찌푸린 하늘에 걸려 있다. 당장 비가 내리지는 않고 도로도 말라 있지만 삼각형 비닐 조각들이 맞부딪치게 하는 바람 때문에 하이 거리에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마을의 분위기도 음울하다. 엘리자베스는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을 지나친가. 분에서 시작해 위쪽 창까지 전면에 '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글자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P 72-3)

 

이런 혼란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권을 갱신하려고 한다. 사소한 행정착오와 행정 직원의 냉대, 그리고 여권이나 신분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가 부딪히는 영국의 관료 사회의 냉대는 마치 내가 그런 냉대를 받는 듯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종잇조각 한 장이 대체 멀 증명할 수 있다는 거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접수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깐 실례하겠다면서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수화기에 손을 대고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적절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도록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뒤로 작은 줄이 이어져 있다. 모두 이 접수원을 통해 수속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P 139)

 

소설은 엘리자베스가 겪는 영국 사회의 냉대와 함께 어린 시절 경험했던 대니얼이라는 남성의 따스한 교류의 기억이 교차에서 진행된다. 젊은 시절 많은 예술가와 교제하면서 예술과 인문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대니얼은 나이가 들어 우연히 옆집에 살았던 어린 엘리자베스와 우정을 이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통해 예술과 인문에 대한 지식을 경험하고 그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처음 강변에 떠밀려 와 죽은 시체의 시선으로 영국 사회를 보듯이, 영국 사회에서 냉대를 받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때나마 자신에게 따스한 감정을 주었던 대니얼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엘리자베스 안에, 그리고 영국 사회 안에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을 인간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남기기도 한다.

 

이 소설은 특정한 스토리보다 엘리자베스의 의식과 시선을 따라 이어지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한 영국 사회를 직접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관공서나 도서관, 병원 등에서 당하는 차별 등을 마치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소설의 읽는 사람을 엘리자베스가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실 오랜 시간 뉴스를 통해 영국의 브렉시티 이후의 혼란 상황을 보면서 그 사태에 대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브렉시티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 영국 사회의 결정이 다소 이해가 되곤 했다. 수없이 밀려드는 난민과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의 사회와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게도 느껴 지다가도,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지지도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한심하게도 느껴지도 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일까? 이 책은 이런 혼란 상황을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온 나라에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폭풍에 송전선이 철탑을 부러뜨리고 나무와 지붕과 차량들이 위의 상공을 지져 대듯 그 사건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패배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 사람들은 구굴에서 '유럽 연합이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정당화되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실감과 충격을 느겼다." (P 78-9)

 

이런 묘사와 함께 어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따스했던 감정의 교류의 장면들을 묘사하며 아직 영국 사회에 남아 있을 인간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소설의 말미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대니얼이 의식을 찾는 장면을 묘사하며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은 브렉시티 이후의 영국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간접 체험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과연 이것이 영국 사회만의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 역시 최근 들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과 정치, 남녀 편을 가르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대신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처럼 전혀 다른 상황의 사람들과의 따스한 교류는 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는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다리까지 부수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브렉시티의 혼란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해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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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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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기 초이면 꼭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보통 설문지로 가정의 형편을 적어 내는 것이다.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들을 적어 내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손을 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모두 눈을 감아 보라고 말하며 '집에 텔레비전 있는 집 손들어 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없는 아이들도 친구들에게 가난하게 보이기 싫어 일부로 들기도 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 같다. 내 안에 타인과 비교의식이 생긴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애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런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똑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에 있는 것이 친구네 집에는 없고, 반대로 친구네 집에 있는 것이 우리 집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우리 안에는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으로 대표되는 어린 시절의 내밀한 기억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 작가가 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란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책은 1952년 여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 23)

 

주인공은 그날의 세세한 기억들과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날 입었던 옷, 라디오에서 방송한 드라마의 내용,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들, 그리고 그날의 결정적인 장면들까지.

 

"그릇을 치우고 밀랍을 입힌 식탁보를 걷어낸 뒤에도 어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어 있는 쥐구멍만 한 부엌에서 꿈지럭 거리며 연신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식탁에 묵묵부답 앉아 있었다. 그러다 돌연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붙잡고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이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게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내 어머니의 비명과 함께 "애야!"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실에서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라요!" 어두 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 손에는 나무 뭉치가 박혀 있던 전지용 낫이 들려 있었다." (P 24)

 

그러나 부모님은 곧 화해하고, 그 후 이 사건은 한 번도 가정 안에서 화제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주인공의 의식 속에 남아 있고, 주인공은 그날 이전의 자신과 그날 이후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싸움의 상처가 주인공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이 평생 그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남겨진 것은 트라우마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물론 그 부끄러움의 감정의 실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마치 그날과 그날과 관련된 소소한 일상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전쟁 직후 건물을 부수고 재건축할 때 날리는 먼지, 흑백 영화, 흑백의 교과서 비옷, 짙은 색 외투 때문에 내 눈앞에 떠오르는 1952년의 세계는 과거의 동유럽 나라들처럼 한결같이 회색이다. 하지만 거리의 담장 너머로 늘어진 장미, 등나무 꽃, 어머니 치마처럼 푸른 바탕의 붉은 무늬가 새겨진 옷도 있었다. 식당의 벽지도 장미꽃무늬였다. 그 사건이 벌어졌던 일요일은 날씨가 좋았다. 당시의 세계는 의례적인 정적만이 감돌았다." (P 65)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다녔던 가톨릭 학교 (소설에서는 기독교 학교로 번역되어 있는데, 소설 내용상 가톨릭 학교가 맞을 거 같다)에서 그녀가 흠모하거나 닮고 싶어 하던 선생님이 우연히 그녀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던 장면이다. 가톨릭 학교여서 축제가 많았는데, 그날도 늦게까지 축제에 참여하고 새벽에 선생님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렸고, 마드무아젤 L.이 내가 사는 동네까지 학생을 데려다주는 일을 맡았다. 새벽 1시경이었다. 나는 식품점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게에 불이 켜지더니 구겨지고 얼룩덜룩한(오줌을 누고 옷으로 그냥 닦았기 때문에) 속옷 바람으로, 잠이 덜 깨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산발한 어머니가 현관 불빛 아래에 나타났다. 마드무아젤 L.과 몇몇 학생들이 하던 이야기를 뚝 멈췄다. 어머니가 어물 머물 인사말을 건넸지만 아무도 답례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이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져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졌다." (P 118)

 

주인공에게 있어서 1952년은 단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사건만이 일어난 시기가 아니었다. 단지 그 사건이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해 주인공은 가톨릭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시선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전까지는 당연히 여기던 세계가 그녀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각인시킨 사건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던 사건이다. 그녀가 다른 가정과 친구들에게서 보았던 교양 있고 풍족한 모습과 그녀의 집에서는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그 부끄러움의 실체와 결과를 이렇게 고백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P 137)

 

소설은 저자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내밀한 경험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첫 문장과 처음 묘사되는 사건이 너무 강렬했기에 이후의 소소한 묘사들과의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왜 이렇게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삶과 말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가면서 이런 세세한 것들이 바로 주인공의 내면을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내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부끄러움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흔히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미 치유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랫동안 씨름했던 그 내면의 문제를 이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내어 놓는다. 한때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남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상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와 멀어졌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아니, 그것을 토로하며 가까웠던 사람도 멀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은 더 부끄러움이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담담한 시선으로 이제 그 부끄러움을 글로 이야기한다. 이 소설 이후 작가는 변했을까?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도 자신의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글쎄, 다른 것은 몰라도 이전보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내밀한 이야기들이어서 마치 소녀의 일기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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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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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벗어나기 위해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면 등산복과 배낭을 메고 주변의 산들을 올랐다. 어느 날인가 산을 올라가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내려갈까 하다가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아 계속 올라갔다. 산 중턱에서부터 굵은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했다. 무척 낭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마음의 모든 찌꺼기가 씻어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어서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요즘은 주로 가족과 함께 산을 오른다. 한 주에 한 번 정도 가까운 산을 아내와 4살짜리 아이와 함께 오르고 있다. 아내가 배낭을 메고 아이는 반절 정도는 내가 업고 올라가는 식이다. 정상에 올라가면 아이가 혼자 올라온 줄 알고 사람들이 대견해 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여자들의 등산일기]를 읽으면서 예전에 비를 맞고 산을 걸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을 책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이나 [리버스]와 같은 대표 작품을 통해 만났었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왜 그녀의 작품들이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알만 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아주 날카로운 필치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그동안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소설이다. 마나토 가나에의 소설들을 읽을 때면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치 내가 소설의 인물들과 함께 일본의 여러 산들을 걷고 있는 여유로움과 함께 마음속에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주로 일본의 백 대 명산을 배경으로 등산을 하는 여자들의 8개의 단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소설의 인물과 배경은 다르지만, 단편들을 작가만의 특유의 장치를 통해 연결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점을 찾는 것도 소설의 재미이다.

 

첫 번째 소설 [묘코산]은 백화점에서 리쓰코라는 여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직장 여성인 유미라는 여성과 묘코산을 등산을 하는 이야기이다. 리스코는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성격이라면, 유미라는 여성은 시간관념이나 책임감이 조금 부족한 여성이다. 특히 리쓰코는 우연히 유미가 직장 상사와 호텔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그녀에 대한 반감이 더욱 크다. 우연히 둘은 함께 묘코산을 등산하고, 운동화를 신고 계속 민폐를 끼치는 유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주지 않는다는 유미의 불만에 드디어 리쓰코는 폭발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난 역지사지 정신이나 상대방의 페이스에 맞춘다는 감각이 부족할지도 몰라. 하지만 불륜 중인 사람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네." (P 40)

 

하지만 리스코 역시 결혼을 앞두고 남편 될 사람의 불안정한 미래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계획을 가져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전혀 다른 두 여성을 등산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정신적인 교감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소설 [하우치 산]은 앞서 두 여성의 등산 코스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한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하우치산은 묘코산 옆에 있어서 한 코스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미쓰코는 거품 경제 시대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이 든 여성이다. 조금 과하다 싶은 고급 브랜드의 옷과 액세서리를 하고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접근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러던 중 결혼 상대를 만나는 단체 미팅에서 순박해 보이는 간자키라는 남성을 만나고 몇 번 만난 후 간자키의 권유로 등산을 한다. 간자키는 등산 동호회에서 활동할 만큼 산을 좋아하고, 처음 등산이라고 생각하는 미쓰코를 여러 가지로 신경 쓰면서 배려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겉모습을 통해 서로를 오해하고 있으나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가는 과정을 리스코의 심리를 통해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혹시 간자기 씨도 그걸 노리고 나를 산으로 데려온 걸까? 거품 시절의 잔해를 몸에 두르고 있는 내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줘서 개심시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개심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쿨한 미인이라서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 자체도 좀 어떤가 싶지만 간자기 씨는 거품 시절의 잔해를 두르고 있는 내가 좋은 것이다. (P 85)"

 

이 소설에서만 미나토 가나에 식의 멋진 반전이 나온다. 이 소설만의 여유로운 힐링 분위기와 미나토 가나에 식의 반전이 어울려진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 나오는 단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모두 일본의 산을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일곱 번째 소설인 [통가리로]만이 뉴질랜드의 트래킹 코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던 연인과 함께 오던 코스는 이제는 혼자 등산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0년 전의 트래킹 과정과 지금의 과정이 반복되어 이야기되면서 산을 통해 자신의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크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을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요시다와 나는 서로의 짐을 자신의 해석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P 346)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보게 된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예전에 등산했던 산들을 올라가다 보면 그때의 추억과 그간의 인생이 저절로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름 오랜 등산의 경험을 통해 등산이 주는 가장 좋은 점이 있다면, 인생을 한 발자국 떨어져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것도, 산에 올라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그냥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산은 조금 더 여유롭게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미나토 가나에의 [여자들의 등산일기] 역시 이런 산이 주는 시각과 여유를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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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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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사로 인해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학교별 학력에 대한 경쟁이 매우 심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보고 모의고사별로 학교별 성적을 발표했다. 당연히 학교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것은 다시 반별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시험기간만 되면 담임선생님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교롭게도 내가 전학이 온 날이 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성적이 많이 떨어져 반 평균을 갉아먹었다는 학생들의 명단을 불렀다. 몇 명이 불려 나왔다.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게 했다. 그리고 알몸으로 엎드리게 하고 매를 때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수치와 함께 공포를 느꼈다. 나도 저렇게 친구들 앞에서 발가벗겨져서 매를 맞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으로 인해 중학교 내내 수치와 공포감으로 공부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면 그때의 수치와 공포가 다시금 되살아난다.

한동안 잊혔다고 생각하던 이 기억이 J.M 쿳시의 [야만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쿳시라는 위대한 소설가를 나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소년 시절]로 처음 만났다. 이 책에는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아프리카너로 태어난 쿳시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담겨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쿳시를 지배했던 감정이 바로 '수치감'이었다. 그는 학교의 폭력 앞에서도 매를 맞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폭력 앞에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수치스러워 말을 잘 듣는 학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폭력적인 세상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수치감은 그의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진다.

[야만을 기다리며]에서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치안판사'의 의식의 변화를 보면 마치 쿳시의 어린 시절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국의 변경이다. 그곳은 아프리카가 될 수도 있고, 동남아시아나 남아메리카와 같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제국의 주체가 백인이고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야만인이 흑인이라는 설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남아프리카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배경들이 떠올린다. 소설의 주인공 치안판사는 이곳 제국의 변경의 성에서 30년 가까이 지배자의 역할을 해 왔다. 지배자라고 해서 특별히 야만인들을 억압하거나 학대하지는 않고 그저 질서를 유지할 정도로 통치를 할 뿐이다. 그의 낡은 직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몸을 파는 그 지역의 여성들이나 야만인 여성에게 성적 향락을 제공받고, 가끔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며 일몰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누리는 통치권력의 전부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이 조용히 마감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일에 얽혀들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기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여기에 있는 유일한 관리인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 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P 18)

주인공의 이런 안락한 삶은 '졸 대령'이라고 부르는 비상 지휘권을 가진 인물이 오면서 깨어진다. 졸은 제국 변경에서 야만인들이 서로 연합해서 대규모 반란을 획책한다는 첩보로 인해 제국이 파견한 군인이다. 그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며 야만인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 망상은 주인공이 보기에는 망상이지만, 모든 제국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는 이런 생각에 담겨 있는 제국의 사람들의 교묘한 심리를 어렴풋이 느낀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 꼭 야만인들에게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경에 사는 여자치고 침대 밑에서 야만인의 시커먼 손이 뿔 쑥 나와 발목을 잡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남자치고 야만인들이 집에 쳐들어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법석을 떨고, 접시를 깨뜨리며 커튼에 불을 지르고 자기 딸을 강간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P 19)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졸 대령이 하는 행동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졸 대형은 여행을 하다가 약탈범으로 오해되어 온 할아버지와 아이를 고문하고, 할아버지를 죽게 한다. 또 야만인을 원정한다며 군대를 끌고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야만인들을 끌고온다. 그리고 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다. 치안판사는 이 모든 일이 불편하지만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야만인들의 비명을 애써 외면한다.

"나는 민간인 치안판사가 보통 쓰게 되어 있는,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는 멋진 주택을 마다하고 수년 동안 이곳에서 찾아온 적 없는 군사 지휘관을 위해 마련해둔 창고와 부엌 바로 위에 위치한 어수선한 거처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살면서 불편한 점을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아래 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귀를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뜰은 이제 영구적으로 감옥이 된 듯 보인다.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 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 38)

다행히 졸 대령은 곧 본국의 소환을 받아 떠나고 치안판사는 다시 평안한 일상을 회복한다. 그러나 우연히 길거리에서 졸 대령에게 끌려와 아버지를 고문당해 잃고 고아가 된 여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눈이 멀고, 다리를 절며, 구걸을 한다. 그는 졸 대령이 그녀에게 표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 표시가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결국 그는 먼 거리를 여행에 그녀를 고향에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다시 돌아온 졸 대령에게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쓴다.

이제 주인공에게 평온한 나날은 없다. 그는 야만인처럼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졸 대령의 야만인이 일으킬 전쟁에 대한 광기는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야만인들을 잡아 오고, 더 많은 야만인들을 고문하고, 그들을 살해한다. 치안판사를 이 일을 말리다가 결국 야만인과 같은 수치와 고문을 당한다. 그는 발거벗겨지고, 사람들이 침을 뱉고, 그를 때리고 놀린다. 그리고 지배자에서 거렁뱅이 노인이 된다.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흐름은 제국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야만인을 대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의 목소리를 통해 제국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떤 비열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들춰낸다. 제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야만인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야만인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야만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맞설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국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러기에 제국은 끊임없이 야만인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고, 그 공포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 공포를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사람이 바로 졸 대령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치안판사는 졸 대령의 맞은편에서 선 정의로운 사람일까? 저자는 친안 판사 역시 졸 대령과 같은 선상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 역시 같은 제국이 만들어낸 공포와 광기 전염된 사람이다. 단지 그는 그 광기의 한복판에 들어가지 않고 변두리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곳이 바로 제국의 변경이다. 그는 그 변경에서 적당히 제국에 복종하고, 적당히 야만인들을 통치하며, 적당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기를 원한다.

그런데 상황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계속 사람을 발거벗기고 수치를 주는 제국의 공포를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그 수치와 공포를 외면하려 하지만, 그 수치와 공포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자신의 집무실에서도, 자신의 침실에서도, 심지어는 도시와 떨어진 폐허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수치와 공포에 맞서게 된다.

 

이런 경우 다른 소설에서는 불의를 보지 못하는 주인공의 정의감을 내세우겠지만, 쿳시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도 할 수만 있다면 제국의 수치와 공포에 눈을 막고 귀를 막아서 그냥 따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그의 양심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건 그가 정의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양심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두 감정의 차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후자를 예민함이라고 바꾸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민함이라는 감정이 바로 쿳시의 소설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남들은 그냥 수치심과 공포심에 외면하는 것들을 예민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예민함의 감정은 쿳시의 자전적 소설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감정이었이다. 아마 쿳시도 자신의 예민함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예민한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괴롭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뀐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려면 안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사람에게 저렇게 하면 안 되는 아니야? 이런 감정들이 분노처럼 일어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중학교 때의 경험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정확히 수치와 공포의 감정이 아니었다. 분노의 감정이었다. 왜 사람을 발가벗길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왜 아무도 말하지 못할까? 나는 왜 소리치지 못했을까? 이런 감정은 살면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군대에서 상관이 부당하게 부하들을 대할 때,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이 운영될 때, 세상이 비열한 방식으로 소수자들을 발가벗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도 저들처럼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수치감이나 공포감 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분노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치안판사가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놀림을 당할 때 그제서야 분노한다. 자신과 함께 벌거벗겨지고 놀림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그들을 학대하는 제국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친다. "이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발가 벗길 수 없음을 소리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제국주의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제국주의라는 자신의 삶의 테두리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인간의 내면이 치안판사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치안판사가 쿳시이며, 많은 백인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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