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있었던 기억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어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래 살다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일을 겪기도 한다. 가만히 그런 일들을 꼽아보면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진다. 그 모든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려면 1박2일도 모자랄테지만, 아주 인상적인 것만 떠올려보면 다음과 같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 집을 나왔는데, 갈데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밤늦게 친한 친구 집에 찾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끌려간 기억. 그 친구 엄마와 우리 엄마 역시 친한 친구 사이였다. 당시 나로서는 집을 나간다는 행위를 스스로 저질렀다는 것도 무척 의외였지만, 그 친구 부모님들께서 나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시고, 뒤로 우리집으로 연락해 나를 끌려가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물론 지금은 당연히 이해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분단 대항 축구경기에서 MVP로 선정되었던 일도 의외였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무슨 운동이든 잘하는 편은 못되었다. 말하자면 운동신경이 없는 편이라고 할까. 축구를 좋아하지 않고 자란 남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어렸을 때는 축구한 기억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는 축구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많았다. 가장 잘하는 친구는 그 유명한 "스피드가 기술입니다"의 김주성을 연상할 정도로 빠르고 발재간이 뛰어났다. 그런 친구들을 제치고 우승에 가장 기여도가 높은 MVP를 내가 받은 것은 무척 의외였다. 나는 최후방 수비수로서 센터라인조차 넘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한 경기에 몇 골씩 넣었던 친구들보다 공로를 인정받았던 것은 거의 골을 먹지 않도록 상대 공격수를 철저하게 마크하고 결정적인 찬스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겪은 의외의 순간들 중에는 어둡고 아픈 기억들도 많다. 패싸움과 파출소, 경찰서, 검사실, 사회봉사 등 폭력과 연관된 잊고 싶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들도 많다. 맨몸으로 칼을 든 상대와 맞섰을 때의 떨렸던 기억, 여러 명에게 둘러쌓여 두들겨 맞던 기억, 당시 마음에 두고 있던 여성 앞에서 일대 다수 싸움에 휘말렸다가 무사히 빠져나왔던 기억 등,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러고 살았을까 싶은 기억들이다. 학생운동과 환경운동을 겪으며 활동가의 삶을 살면서도 의외의 순간들은 많았다. 아니 역사적인 순간들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할까? 새만금, 고속철도, 방폐장 등 2000년대 초반 국책사업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자연생태계 파괴의 순간들에 맞서 싸워왔다.


문화적인 경험으로는 고등학교 때 잠시 재미로 다녔던 교회 연극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을 맡았던 기억이 의외였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신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믿고 있지만, 당시에는 예쁜 여학생들이 많았고, 맘껏 기타를 치고 놀 수 있어서 교회에 다녔다. 아마 여름 수련회 때로 기억하는데, 고등부 학생들이 연극을 준비했고, 당시 주연은 아니지만 아주 비중이 높은 예수 역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잘 어울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시절에는 동아리에서 흥부전이라는 고전을 영어연극으로 올렸는데, 주연인 흥부를 맡았다. 역시 이유는 잘 어울린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폭력에 많이 노출되었던 내가 늘 착해보인다는 평을 받아, 예수나 흥부 등의 배역을 맡았던 건 지금 생각해도 의외다.


패션쇼!


얼마 전 나는 생애 처음으로 패션쇼 모델이 되었다. 서울시에서 '쿨비즈 패션쇼'를 여는데, 여기에 시민 모델들을 참가시킬 생각이고, 그 대상을 에너지컨설턴트들 중에서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나를 콕 찍어서 모델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사실 시청 관계자의 요청을 구청 관계자가 전달했으므로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다.) 에너지컨설턴트를 해보니 대부분 50대~60대 여성들이었다. 젊은 사람도 드물었고, 남성도 드물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이었다. 콕 찍어서 요청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패션쇼라니! 그런 걸 내가 잘 할수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겼고, 업무 시간이란 이유로 거절했다. 그쪽에서 꼭 해야한다고 부탁을 거듭해왔다. 나는 결제권을 가진 이사장님을 비롯한 직속상관들을 핑계로 다시 거절했다. 그런데 이사장님이 참여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준비과정에서 좀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패션쇼 진행을 맡은 업체 담당자라고 연락이 왔는데, 무척 불친절한 태도였고, 낮에 일하는 사람에게 당일 패션쇼에서 입을 옷을 골라서 사진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그날 중으로 보내달란다. 난 지금 일하는 중이고, 요구하는 적절한 옷이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 옷장을 뒤져봐야 한다고, 난 평소 정장을 입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와이셔츠를 입어본 기억이 아주 오래다. 우리 집에 와이셔츠가 있는지 없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날 중으로 사진찍어 보내달라는 요구는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퇵근을 해야 집에가서 옷을 살펴볼 수 있고, 옷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리니 빨라야 다음날 오전에야 보내줄 수 있다고 답했다. 어쨌거나 난 바쁜 업무시간을 쪼개 억지로 참여하는 것이지만 하나도 얻는 것이 없었다. 전문모델이 아니기에 모델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불친절하고 딱딱한 태도는 도데체 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일 패션쇼가 열릴 무대로 갔다가 한번 더 놀랐다. 시민모델이 여려명일거라는 구청 담당자의 말과 달리 시민모델은 거의 없었다. 특히 에너지컨설턴트 중에는 없는 것 같았다. 50대, 60대 여성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이라는 20대 여성 파트너와 함께 연인이라는 설정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헉! 이건 또 뭔가? 이 나이에 20대 여성과 연인이라니! 그 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그런데 그는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이런저런 연출을 제안했다. 난 조금 당황하고 어색했지만, 내가 뒤로 빼는 인상을 주면 그에게 더 미안할 것 같아서, 열심히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은 면도 있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젊고 아리따운 그의 모습과 기운이 옆에 있는 내 기분도 절로 좋게 만들었다. 무대 워킹도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단 리허설 때는 관객이 없었으므로 부담이 없었다. 무대 총괄하는 담당자도 시민모델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계속 잘 한다고 말해주고, 자연스럽게 부담없이 하라는 말을 해줬다. 내 파트너는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며 몇 가지 설정들을 제안했다. 우린 워킹 도중 무대 한가운데에서 하이파이브를 했고, 손을 잡고 걸어 보기도 했고, 내가 덥다는 몸짓을 보이면, 그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주는 몸짓을 연습하기도 했다. 퇴장 전에는 내가 그의 어깨를 감싸고,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리허설은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끝냈는데, 한참 기다린 후에 본 무대에 오르려니 무척 긴장되었다.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카메라들이 문제였다. 방송 카메라를 비롯한 크고작은 카메라들이 내 몸짓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팔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고, 머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발과 몸과 팔과 머리가 각각 따로 노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침착하자! 이보다 훨 사람들이 많은 무대에도 서 봤잖아. 비록 패션쇼는 처음이지만, 연극과 노래, 연설과 진행 등 다양한 역할로 크고 작은 무대에 섰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긴장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마 몸은 무척 뻣뻣했을 것이다! ㅠㅠ


패션쇼가 끝나고 종편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나와 파트너를 각각 인터뷰했는데, 기자의 질문이 완전 달랐다. 속으로 느꼈다. 아마 나는 통편집 당해 아예 방송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래도 한두마디 정도 나갈 거라고. 그동안 방송 인터뷰를 몇 차례 해보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전문가 인터뷰로 딱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닌 이상 핵심적인 내용을 말하는 사람은 잘 내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별 내용이 없는 말을 해도 비주얼이 되는 사람이 무조건 방송에 나오더라. 종편 따위에 인터뷰를 하지 말걸, 괜히 인터뷰해놓고 기분만 나빴다.


아마도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패션 모델 체험이 그렇게 끝났다. 나는 보상으로 플라스틱 텀블러 하나를 받았다. 5분 리허설하고, 1시간 반 넘게 기다리고, 5분 본 무대에서 걸었던 댓가다. 아, 처음 들었던 것과 달리 시민모델이 거의 없었던 대신 전문 모델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걸음도 시원시원했다. 그래 모델은 저런 아이들이 하는 거지. 나처럼 키 작고 늙은 아저씨가 아닌 젊은 청년들이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동네 몇몇 사람들에게 내가 패션쇼에 나갔다고 소문이 났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나를 비롯해 내 주위에 종편을 보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패션쇼를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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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2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모습이 있는 사진이 없어서 아쉬워요.

감은빛 2015-06-15 17:44   좋아요 0 | URL
키 작고 못 생긴 나이 든 아저씨 사진은 왜 궁금해 하세요? ^^
한편으로는 바빠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편을 찾아보고 싶지 않아서
그 패션쇼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함께 셀카를 찍자고 해서 응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받고 보니 진짜 아저시 티가 팍팍 나서 좀 실망이었습니다. ㅠㅠ
 


동네에 잘 아는 사람이 조산을 해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헌혈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아기와 내 혈액형이 같다는 걸 알고 연락이 온 것이다. 뭔가 설명을 들었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성은 안되고 남성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어쨌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돕는것이 당연한 일. 하나 조건은 전날 술을 마시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인데, 묘하게도 그 당시 몸이 좀 피곤하고, 일도 많고 해서 일주일째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다. 평소 일주일에 3~4일은 술믈 마시는 내게는 매우 드문, 깨끗한 피를 갖고 있는 시기였다. 또 하나는 헌혈의집이 저녁에 문을 닫기 때문에 바쁜 일과시간 중에 시간을 내야 한다는 점인데, 일이 밀려 야근을 하더라도 이건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었다. 


지정헌혈이란 단어는 처음 들었다. 한동안 헌혈을 안했지만, 좀 더 젊었을 때는 자주 했었다. 그래서 헌혈증을 꽤 많이 갖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의 친척이 큰 병에 걸렸다고 헌혈증을 기증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편으로 보내준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그냥 헌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환자를 지정해서 피를 뽑아 보내는 지정헌혈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꼭 지정헌혈이라고 얘기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신신당부를 듣고 헌혈의집을 찾았다.


요즘은 헌혈 전 문진을 전자문진으로 대체하더라. 꼼꼼하게 읽고 답을 다 하고 나니, 대기장소에서 좀 기다려야 했다. 차례가 되어 간호사에게 가니, 아까 전자문진으로 답했던 질문들을 다시 빠르게 물어보더라. 지정헌혈이라 피를 보낼 병원과 환자 정보를 알려줬다. 내 정보를 살펴보더니, 내가 총 몇 차례 헌혈을 했고, 마지막 헌혈이 언제였는지도 알려주더라. 마지막 헌혈 이후로 10년이 넘었더라.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 결혼한 이후로 헌혈을 한번도 안했구나. 총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자리 숫자라는 것에 의의를 두고, 앞으로 가끔 헌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 술을 자주 마셔서 쉽지 않으려나.


자리에 누으니 또다른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꽂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라고 해서 옛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당시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영화표를 준다기에 헌혈을 하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기다리고(아마 체질 때문에 헌혈을 못한다고 했던 듯) 난 헌혈을 했는데, 기다리기 지루하다고 빨리 하라고 해서 엄청 열심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보다 빨리 헌혈을 끝내고 영화를 보러갔던 기억. 


이번에도 바쁜 일정 중에 억지로 시간을 뺐던 터라, 빨리 끝내야지 싶어서 열심히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친절한 간호사는 이제 거의 다 되어 간다고,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난 맘이 급했지만, 간호사의 말에 따라 동작을 멈췄다. 선물을 고르라고 하길래, 좀 고민이 되었다. 종류가 꽤 많던데, 딱 이거다 싶은게 없어서 망설였는데, 아까 떠오른 옛날 기억에 따라 나도 모르게 영화표를 선택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뭐였는지 기억도 안난다. 물론 영화표를 받으면서 바빠서 이걸 언제 쓰려나 후회를 하긴 했다.


헌혈은 끝났으나 침대에 7분인가 더 누워 쉬어야 한다고 했다. 맘이 급했지만 어쩔수 없이 기다렸다. 지루했다. 그리고 알람이 울려 내려왔더니 다시 대기실에서 10분을 더 쉬다 가야 한다고 했다. 음료수와 초코케익 과자를 먹고 한참을 기다리다 적당히 눈치를 보고 나섰다. 아까 친절하게 대해주던 간호사가 마침 지나가다가 떠나려던 날 보고 인사를 했다. 혹시 더 쉬다 가야한다고 말하려나 싶어 살짝 걱정했는데, 괜찮은지를 묻더니 함박 웃음을 보이며 배웅하더라. 저 친절한 간호사 때문에라도 다음에 또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일터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데, 이런저런 회의나 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동네 활동가가 나를 찾아와서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더라. 뭐 선지국이라도 사줄까 묻길래, 괜찮다고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거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며칠동안 그런 인사를 여러번 더 들었다. 의료생협의 이사장님은 고맙다고 기프티콘을 보내주셨다.


[허삼관 매혈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집에 있었는데, 늘 읽어야지 생각만하고 결국 손을 대지 못했다. 최근 어느 주말 아이들과 컴퓨터로 [허삼관 매혈기] 영화를 봤다. 거기서 허삼관을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이 피를 팔고 나서는 순대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났다. 퇴근해서 아이들을 만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대를 사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오늘 피를 뽑았으니, 순대를 먹어야 해! 2인분을 사서 아이들과 맛있게 먹어야지. 순대만 먹기 그러니까 막걸리도 한 병 마셔야지. 아까 간호사는 술은 안된다고 했지만, 막걸리 한 병 정도야 괜찮겠지 생각하면서 분식집 앞까지 갔다. 순대를 주문하려다가 혹시 싶어 지갑을 확인했는데, 헉! 돈이 없었다. 어라, 왜 돈이 없지? 그제서야 한동안 현금을 찾아놓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주머니를 다 뒤졌다. 지갑엔 달랑 천원 지폐 한장, 주머니엔 오백원과 백원짜리 동전으로 딱 이천원이 있었다. 이거 정확하게 순대 1인분 값이다. 2인분은 먹어야 제대로 먹을텐데, 그렇다고 분식집에 카드를 내밀 수는 없어서 어쩔수 없이 1인분만 샀다. 막걸리를 살 돈도 없었다. 슈퍼에서는 카드 결제가 가능하지만, 겨우 천원 조금 넘는 막걸리 한 병 사고 카드를 내밀기는 미안했다. 결국 내 계획과는 달리 순대는 겨우 맛만 보는 정도로 끝났고, 막걸리도 마시지 못했다.


헌혈한 날에는 목욕은 안되지만, 가벼운 샤워는 괜찮다고 해서 잠들기 전 몸을 씻는데, 바늘을 꽂았던 곳에 피멍이 들어있다. 어라!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헌혈했다고 피멍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이지? 아마 바쁘다고 너무 빨리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는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 멍은 대략 1주일간 있다가 사라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꼭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러고 다시 며칠이 지나는동안 책에 손도 못댔다. 헌혈을 하고 온 날, 다시 이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다시 일주일 지나는 동안 또 손을 못댔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다짐한다. 이번에는 꼭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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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6-04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일 하셨어요~^^ 바쁜 와중이라 짬 내시기도 힘드셨을텐데 ㅎㅎ 감은빛님의 아이디의 의미 이제야 깨달았어요 ㅋ

감은빛 2015-06-12 02:32   좋아요 0 | URL
해피북님 고맙습니다!
제 아이디의 의미라면, 블로그 주소에 있는 영문 말씀인가요?
언젠가 어디선가 댓글에서 말한 기억이 나네요. ^^

chika 2015-06-05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빈혈이 심해서 헌혈은 시도해본적이 없네요. ㅠㅠ
그나저나 여전히 바쁘시고 여전히 좋은일은 빼먹지 않고 하고 계시누만요 ^^

감은빛 2015-06-12 02:38   좋아요 0 | URL
앗! 빈혈이 심하시다니!
쉽게 낫지 않는 증상일텐데, 몸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늘 바쁘지만, 의미없는 날들을 꾸역꾸역 보내고있어요. ㅠㅠ

프레이야 2015-06-0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한 일 하셨어요. 쉽지않은 일이지요. 저도 허혈이라 헌혈은 못 한답니다. 정기적으로 헌혈하는 분 봤는데 처음 하게 된 동기도 지인의 어머니 수혈을 위해서였더군요. 허삼관매혈기는 읽어보시면 흡족해하실거에요. 최근 영화에선 다 표현되지못한 부분들이 웃프게도‥

감은빛 2015-06-12 02:35   좋아요 0 | URL
사실 별일 아닌데, 제가 글에 과장해서 쓴 거지요.
헌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죠.
그나마 젊은 시절 몇 번 하다가, 결혼 후 10년 넘게 한번도 안했던 사람인걸요.

허삼관! 하~ 진짜 아직 다 못 읽었네요. ㅠㅠ

양철나무꾼 2015-06-0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한편의 콩트를 보는것 같아요, ㅋ~.
알싸하니 톡 쏘는 것이 삿갓주 맛이 나는 거 아실랑가 몰라여~~~~~^^

감은빛 2015-06-12 02:36   좋아요 0 | URL
삿갓주는 무슨 맛일까요?
한 잔 쏘시죠! ^^

다락방 2015-06-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헌혈을 하러 갔다가 빈혈이라 헌혈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멘붕왔었어요. 이, 내가, 빈...빈혈이라고??? 제가 빈혈이 있다는 걸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아-

순대 1인분, 제가 옆에 있었으면 사드렸을텐데요. 막걸리도 같이요. 안타깝네요.

감은빛 2015-06-12 02:39   좋아요 0 | URL
빈혈이라니!
그런데 의외로 여성들 중에 빈혈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만나왔던 여성들 중에도 몇 명 있고,
아내도 빈혈이거든요.

반면 남성들 중에 빈혈이라는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설사 빈혈이라해도 말을 안 해서 모르는 거겠지요?
 


여행


아무런 계획없이 그냥 훌쩍 떠나는 여행, 참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나는 이런 여행 좋아했었다. 그냥 갑자기 훌쩍 떠나 짧으면 2~3주, 길면 4~5주간 여기저기 떠돌다가 돌아오는 여행을 가끔 다녔다. 그래서 친구녀석은 나를 '바람따라 구름따라 김도사'라고 불렀다. 그땐 결혼 전이었고, 직장인도 아니었으니 그게 가능했었지만,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런 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워크숍이나 출장은 가끔 다녔지만, 일과 전혀 관계없이 그냥 어디 놀러간 적은 거의 없는 듯하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 늦게까지 맥주와 함께 추리소설을 읽다가 잠들기 전, 문득 연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일 아침에는 애들 데리고 어디 놀러라도 다녀올까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주말에 일정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애들과 집에서 놀다가, 집 근처 놀이터에서 잠시 놀거나, 동네 뒷산을 슬쩍 올랐다가 내려왔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연휴인데, 애들 더 크기 전에 같이 여행을 좀 자주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아침에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로 맘먹고 잠이 들었다.


아침, 늦게 잠들었고, 술도 마셨기에 늦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작은 아이가 내 배 위에서 쿵쿵 뛰어서 깰 수 밖에 없었다.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빠랑 같이 어디 놀러갈래?", "어디?", "음, 강이나 산이나 바다나. 가고 싶은 곳으로." 아이들은 조금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몇 해전 놀렀갔던 강원도 평창의 한 펜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 집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고, 거긴 차 없이 놀러갈만한 곳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일단 여행을 가는 것까지는 결정을 했다. 이제 어디를 갈지를 정해야 하는데, 컴퓨터를 켜서 적당한 곳을 검색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만한 곳, 차 없이도 이동이 어렵지 않은 곳, 아주 멀지 않은 곳으로. 검색을 하는 중 레일바이크 타는 사진을 큰 아이가 보고 "저거 타러가자."고 했다. 그 페이지에 나온 곳은 김유정 역이었는데, 검색해보니 김유정 역은 이미 연휴 내내 예약이 꽉 차있었다. 다른 레일바이크를 검색했다. 여러군데가 나왔다. 그 중 비교적 가까운 곳인 양평을 검색해 연락했다. 당일 예약은 안되고, 직접와서 표를 사야 한다고 했다. 현재 오후 3시까지는 매진이라고 했다. 일단 양평 레일바이크를 타는 것을 목표로 결정. 1박 2일의 나머지 일정은 가면서 혹은 거기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간단히 여벌옷과 세면도구만 챙겨 집을 나섰다.


양평은 전철이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한 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서 양평으로 갔다. 아이들은 놀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가면서 양평에 뭐가 있는지, 나머지 시간을 뭐하고 놀지를 검색했다. 용문사라는 절이 유명하다는 걸 알아냈다. 그쪽에 관광단지가 형성되어서 펜션도 많다고 했다. 낮엔 더우니 저녁에 레일바이크를 타고 용문사 쪽으로 넘어가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용문사를 돌아보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대략 세웠다. 나 혼자라면 여기저기 더 많이 돌아다녔겠지만, 아직 어린 작은 아이를 데리고는 무리한 일정을 세울 수는 없었다.



레일바이크


편도 3.2킬로미터, 왕복 6.4킬로미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 갈땐 거의 내리막이라 페달을 안 밟고 쉽게 갔다. 반환점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좀 지루했다. 총 50개의 차 중에 4번이어서 50번이 들어올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오르막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우리 차 앞뒤로는 4인가족이었다. 아이들도 모두 어리지않아 페달을 밟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3명, 작은아이는 발이 닿지 않아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앞 차가 너무 느려 답답함을 느꼈다. 한참 신나게 페달을 밟았더니 앞차가 코앞에 있었다. 큰아이가 브레이크를 잡을까 고민할 정도로.


거의 다와서 다리에 힘이 빠지고 엉덩이가 아팠다. 오르막길. 내가 힘들어하니, 큰아이가 분발해서 페달을 밟았다. 도착점에 거의 다 와서 옆에 세워진 푯말들이 재밌었다. "얘들아, 열심히 밟아라! 엄마 아빠 힘드시다", " 남자는 힘, 지금 힘드시다면 운동부족입니다" 등 재치있는 문구들이 많았다. 덕분에 막판에 힘을 끌어올려 웃으면서 들어왓다.


타기 전에는, 타고나서 많이 지치겠지, 다리가 꽤나 아프겠지 예상했었다. 작은 아이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큰 아이도 무리하면 다리가 아플테니, 쉬엄쉬엄 페달을 밟으라고 말해둔 터여서 그랬다. 하지만 거의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평소보다 하체 운동을 조금 많이 했다 생각할 정도. 


다음날은 혹시 다리가 땡길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크게 신경쓸정도는 아니었다. 타바타 인터벌로 에어스퀏을 했던 다음날엔 거의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거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아이도 용문사를 걸을 때에는 조금 다리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괜찮아 보였다.


막걸리와 편육


용문사에는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은행나무를 보고, 절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한참을 그늘에서 쉬다가 내려왔다. 더운 날씨에 아이들은 무척 힘들어했다. 얼린 생수를 한 병 사줬는데, 얼마 안되는 물을 다 마셔버리고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느라 어쩔줄을 몰라했다. 조금 녹은 물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난리였다.


늦은 오후 용문 전철역 근처로 돌아와 배를 채웠다. 아이들에게는 막국수를 시켜주고, 난 지평막걸리와 편육을 시켰다. 캬~ 막걸리가 정말 맛있었다. 고기도 맛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가지말고 막걸리를 몇 병 더 마시고, 하루 더 놀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음날은 집에서 좀 쉬어야 나도 출근하고, 아이들도 학교와 어린이집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꾹 참고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이번 짧은 여행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제법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맛있게 먹는 모습 등을 보면서 좋았고, 잠시 일상을 벗어나 강과 산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아이들 역시 집을 떠나 새로운 곳을 다녀보고, 낯선 곳에서 자고, 맛난 것들을 먹어서 좋았던 듯하다.


또 자주 여행을 가고 싶지만, 주말 일정이 많고, 주머니 사정도 썩 좋지 않기 때문에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다. 하긴 자주 가면 그게 뭔 의미가 있겠나, 가끔 가야 그걸 바라보며 일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책 이야기















이번 여행 틈틈히 읽은 책, 크기도 작고, 얇아서 여행갈때 넣어가기 딱 좋다.(시리즈 이름이 팸플릿이다!) 하지만 내용은 머리 식히러 떠난 여행과는 썩 맞지 않았다. 제목만 보면 착한 전기에 대해 말할 것 같지만, 사실 정부와 핵마피아가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괜히 읽다가 열만 받았다!


어쨌거나 전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이왕 전기를 쓸 수 밖에 없다면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이 현재 이 나라의 발전(전기 생산)과 송전(전기 운반) 시스템에 대해 가장 쉽고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6월 13일에는 청계천 2가 한빛광장에서 '탈핵시민행동의 날' 행사가 있다. 세월호 문제도 그렇고,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꾸 모여서 소리를 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지들이 잘해서 그런 줄 알고 더 지들 배만 채우게 마련이다. 주말이지만, 좀 덥겠지만 그래도 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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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5-29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낯익은 노란 포스터를 감은빛님 서재에서 보다니 더욱 반갑습니다^^

감은빛 2015-05-29 18:53   좋아요 0 | URL
와! 아른님께서 낯익은 노란 포스터라고 말씀해주시니 정말 반가워요! ^^ 더 많은 분들이 이 포스터를 보고, 참여해주시고 혹 못 오시더라도 지지해주시고, 힘을 실어주셔야 할텐데요
 


쓰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었는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한다. 아직 감정이 남아있어 이 내용을 어떻게 옮겨야할지 잘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잘 옮기는 일은 늘 어렵다. 요즘은 짧은 기사 하나를 쓰는 일도 어렵게만 느껴진다. 보내고도 자신이 없다. 간혹 누군가가 잘 읽었다고 말을 걸어오면,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재미없었다고 생각할까봐 불안하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기획안이나 보고서 류의 글도 이젠 부담스럽다. 욕심때문일거다. 아마도. 잘 쓰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때문에 글쓰기가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글은 계속 남는다. 언젠가 자료를 찾다가 오래전 내가 쓴 글을 발견하고, 급한 일도 미뤄두고 옛날 글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저땐 저렇게 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간혹 '이런 글도 썼구나' 싶을 만큼 괜찮은 글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수준 이하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글쓰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하면 말은 곧 사라진다. 듣는이가 잊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담이 덜하다. 말을 잘 하는 편은 못되지만,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거나, 발표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인터뷰에 응할 때 비교적 부담없이 결정하는 건 그런 이유다. 물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발표를 하면 긴장하고 몸이 떨린다. 준비를 했음에도 내용이 잘 생각이 안나고, 평소 자주 쓰던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순간만 넘기면 괜찮다. 일단 말을 내뱉고 나면 조리있게 말을 잘하지 못했더라도 큰 부담이 없다. 듣는 이가 조목조목 따지고,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끔 일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글을 청탁받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내용을 잘 전달하려면 인터뷰에 응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쓰는 게 훨 낫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터뷰 후에 나온 기사를 보면 내가 말했던 내용과 조금 달랐다. 심지어 아예 촛점이 어긋난 글도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는 대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갖고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전달하려는 의도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그건 나 자신이 인터뷰를 하러 갈 때와 다녀와서 기사를 쓸때 늘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암튼 어떠한 상황에 대해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을 직접 써야할텐데 요즘 그게 두렵다. 과연 핵심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글을 쓸 생각만으로도 벌써 스트레스가 쌓인다.


















글쓰기나 말하기나 왕도는 없다. 그냥 많이 쓰고, 많이 말해야 조금씩 실력이 늘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늘 글을 잘쓰고, 말을 잘 하는 건 아주 먼 나라의 일인것처럼, 아주 먼 미래의 일인것처럼, 아니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인것처럼 느껴진다.


금요일이다. 아주 오랜만에 음주독서나 해볼까? 오늘은 무슨 맥주를 마시며, 무슨 책을 읽어볼까? 집에가면서 고민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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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글들을 보게 되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곤 해요. 용감하게 썼을 때가 더 그립기도하구요. 감은빛님, 지금쯤 어떤 맥주랑 어떤 책을 끼고 계실까요^^

감은빛 2015-05-24 12:27   좋아요 1 | URL
맥주는 클라우드였고, 책은 추리소설 선집이었어요. 새벽까지 읽고 아침에 집을 나서 여행왔어요~ ^^

해피북 2015-05-2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써놓은 오래된 글에 대한 불안감이 저두 있어요 가끔씩 제가 읽은 책에 대한 리뷰 읽다가 이건 도저히 못봐주겠다싶어 삭제한 글도 있구요 ㅋㅂㅋ, 그래두 가끔 조금 변한 모습도 보여서 이땐 이랬구나 생각해보기도 한답니다^~^ 음주독서 한번도 안해봤는데 저도 꼭 해보고 싶네요ㅋ

감은빛 2015-05-24 12:30   좋아요 0 | URL
오래전 글을 읽으면 가끔 놀랄때가 있어요. 저땐 저렇게 생각했구나 그런 부분이요. 음주독서 좋아요. 와인이나 맥주 정도는 그닥 취하지 않으면서 책의 분위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더라구요. 책의 분위기와 잘 맞는 술을 골라야해요 ^^
 

늘 음식 관련 훌륭한 책을 내는 따비 출판사에서 신간이 나왔다. SNS 에서 출간소식을 접한 바로 그날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서 주말 동안 읽었다. 완독을 한 건 아니고, 중간중간 건너뛰어가며 대략 3분의 2 정도 읽었다. 그리고 동네신문에 책소개 기사를 쓰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한번씩 더 살폈다.


다른 음식이 아닌 밥(쌀) 자체를 주제로 한 책이라 재미있었고, 재미있는 사실들이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미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쌀이 다른 곡식에 비해 한반도에 늦게 전파되었지만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었고, 그 뒤로 이어지는 밥의 문화사 부분도 하나하나 놓칠 것 없이 재밌다.


어려서부터 나는 밥만 좋아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난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입맛이 그랬을 뿐이었을 수도 있는데, 늘 도시락을 먹고 나면 반찬은 남고, 밥은 모자랐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보다 두 배는 큰 밥통을 갖고 다녔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은 녀석이 밥은 남들보다 두 배를 더 먹었으니 친구들도 놀라곤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 밥을 다 먹고도 컵라면 하나를 더 먹었다. 친구들은 나와 밥 먹기를 좋아했다. 늘 반찬이 남았기 때문이다.(남들처럼 맛있는 반찬을 싸다닌 것은 아니지만)


대학 시절 동기들과 놀러간 MT에서 내가 밥통을 끌어안고 먹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기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서울에 자취하던 동기 집에 놀러가려고 연락했더니, 그 동기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밥만 많이 해놓으면 되지?"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조선 후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밥 그릇과 국그릇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밥 먹는 양이 많이 줄어든 지금이라서 그런 걸까? 예전이었으면 별로 놀라지 않았으려나? 요즘 나는 그 시절에 비하면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먹는다. 한창 많이 먹었던 20대 후반 시절까지 나는 보통 한 끼에 두 그릇 반, 좀 입맛이 땅기면 서너 그릇 이상의 밥을 먹을 때도 많았지만, 30대부터는 한 그릇 반이 보통이었고, 30대 중반 이후로는 양이 더 줄어서 한 그릇 이상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40대에 접어든 지금은 반 그릇 정도가 적당량이다.
















한편 이 책에서 '구석기 식단'에 대해 언급하는 걸 봤다. 간헐적 단식 이후로 이젠 구석기 식단이 유행이 된건가? 이 구석기 식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설명을 보니 [다이어트 진화론]에 나오는 이보(EVO) 다이어트와 비슷한 것 같다.


이 책은 딱 몇몇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는데, 당시에는 제법 일리있는 주장이라 여겼다. 특히 내가 밥만 많이 먹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서 더 와닿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밥 먹는 양을 확 줄인 것도 이 책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견과 구석기 시대처럼 곡물 섭취는 확 줄이고 수렵, 채집 시대의 식단처럼 먹어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롭다.


작년 가을 이후로 약 6개월간 제대로 운동을 못했다. 늘 바쁘다는 핑계 때문이다. 어쩌다 생각나면 한번씩 집에서 운동을 했지만 규칙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현재 내 몸매를 보면 생각보다 양호하다. 예전처럼 밥을 많이 먹지 않아서 일 것이다.(여전히 술과 안주는 많이 먹고 있지만 ㅠㅠ)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밥을 먹고 살아야 하지만, 많이 먹지 않고 적절하게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밥이 아닌 다른 것을 위주로 먹어야 한다는 의견은 조금 극단적인 느낌이 들어서 별로다. 그냥 먹고 싶은 것을 그때 그때 먹고 살면 좋지 않을까? 과하지 않게 먹고, 필요한 만큼 몸을 움직여서 일하고 운동하면 좋을 것 같다. 내일은 일터 근처 헬스클럽을 찾아가봐야겠다. 여름이 다가오니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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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쌀밥을 씹어 먹으면 특유의 고소한 맛이 느껴져서 어렸을 때 반찬 없이 밥만 먹으려는 오기를 부린 적이 있었어요. 엄마한테 반찬 투정을 했는데 그 반항심에 밥만 먹으려고 했던거죠. 요즘은 쌀밥 대신에 현미가 섞인 잡곡밥을 먹는데 씹어 먹는 버릇이 몸에 배여서 그런지 씹을 때 입맛에 감도는 현미의 맛이 좋습니다.

감은빛 2015-05-12 21:35   좋아요 1 | URL
밥을 오래 씹으면 고소하고 단 맛이 느껴지죠. 그래서 밥만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저도 완전 현미밥을 먹은지 여러해가 되었어요. 물론 저는 밖에서 밥 먹을 일이 많아서 집밥을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현미밥이 진짜 맛있죠!

무해한모리군 2015-05-1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먹고싶은걸로 조금먹자 주의입니다. 저희 딸도 밥만 좋아합니다 ㅎㅎㅎ

나물에 생선이 제일 좋아하는 상차림인데 늘 밖에서 먹으니 현실은 오트밀에 우유 아니면 삼각김밥 뭐 이렇네요...

감은빛 2015-05-14 16:21   좋아요 0 | URL
우리 둘째도 밥만 좋아하더라구요.
저처럼 되지 않도록 반찬도 좀 먹으라고 설득은 해보는데, 쉽지 않아요.

나물에 생선, 좋죠! 근데 나물 나오는 식당은 진짜 찾아보기 어렵더라구요.
생선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로는 먹긴 하지만 꺼림칙하긴 합니다.

암튼 모리님 잘 챙겨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