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잘 아는 사람이 조산을 해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헌혈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아기와 내 혈액형이 같다는 걸 알고 연락이 온 것이다. 뭔가 설명을 들었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성은 안되고 남성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어쨌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돕는것이 당연한 일. 하나 조건은 전날 술을 마시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인데, 묘하게도 그 당시 몸이 좀 피곤하고, 일도 많고 해서 일주일째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다. 평소 일주일에 3~4일은 술믈 마시는 내게는 매우 드문, 깨끗한 피를 갖고 있는 시기였다. 또 하나는 헌혈의집이 저녁에 문을 닫기 때문에 바쁜 일과시간 중에 시간을 내야 한다는 점인데, 일이 밀려 야근을 하더라도 이건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었다.
지정헌혈이란 단어는 처음 들었다. 한동안 헌혈을 안했지만, 좀 더 젊었을 때는 자주 했었다. 그래서 헌혈증을 꽤 많이 갖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의 친척이 큰 병에 걸렸다고 헌혈증을 기증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편으로 보내준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그냥 헌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환자를 지정해서 피를 뽑아 보내는 지정헌혈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꼭 지정헌혈이라고 얘기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신신당부를 듣고 헌혈의집을 찾았다.
요즘은 헌혈 전 문진을 전자문진으로 대체하더라. 꼼꼼하게 읽고 답을 다 하고 나니, 대기장소에서 좀 기다려야 했다. 차례가 되어 간호사에게 가니, 아까 전자문진으로 답했던 질문들을 다시 빠르게 물어보더라. 지정헌혈이라 피를 보낼 병원과 환자 정보를 알려줬다. 내 정보를 살펴보더니, 내가 총 몇 차례 헌혈을 했고, 마지막 헌혈이 언제였는지도 알려주더라. 마지막 헌혈 이후로 10년이 넘었더라.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 결혼한 이후로 헌혈을 한번도 안했구나. 총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자리 숫자라는 것에 의의를 두고, 앞으로 가끔 헌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 술을 자주 마셔서 쉽지 않으려나.
자리에 누으니 또다른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꽂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라고 해서 옛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당시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영화표를 준다기에 헌혈을 하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기다리고(아마 체질 때문에 헌혈을 못한다고 했던 듯) 난 헌혈을 했는데, 기다리기 지루하다고 빨리 하라고 해서 엄청 열심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보다 빨리 헌혈을 끝내고 영화를 보러갔던 기억.
이번에도 바쁜 일정 중에 억지로 시간을 뺐던 터라, 빨리 끝내야지 싶어서 열심히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친절한 간호사는 이제 거의 다 되어 간다고,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난 맘이 급했지만, 간호사의 말에 따라 동작을 멈췄다. 선물을 고르라고 하길래, 좀 고민이 되었다. 종류가 꽤 많던데, 딱 이거다 싶은게 없어서 망설였는데, 아까 떠오른 옛날 기억에 따라 나도 모르게 영화표를 선택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뭐였는지 기억도 안난다. 물론 영화표를 받으면서 바빠서 이걸 언제 쓰려나 후회를 하긴 했다.
헌혈은 끝났으나 침대에 7분인가 더 누워 쉬어야 한다고 했다. 맘이 급했지만 어쩔수 없이 기다렸다. 지루했다. 그리고 알람이 울려 내려왔더니 다시 대기실에서 10분을 더 쉬다 가야 한다고 했다. 음료수와 초코케익 과자를 먹고 한참을 기다리다 적당히 눈치를 보고 나섰다. 아까 친절하게 대해주던 간호사가 마침 지나가다가 떠나려던 날 보고 인사를 했다. 혹시 더 쉬다 가야한다고 말하려나 싶어 살짝 걱정했는데, 괜찮은지를 묻더니 함박 웃음을 보이며 배웅하더라. 저 친절한 간호사 때문에라도 다음에 또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일터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데, 이런저런 회의나 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동네 활동가가 나를 찾아와서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더라. 뭐 선지국이라도 사줄까 묻길래, 괜찮다고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거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며칠동안 그런 인사를 여러번 더 들었다. 의료생협의 이사장님은 고맙다고 기프티콘을 보내주셨다.
[허삼관 매혈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집에 있었는데, 늘 읽어야지 생각만하고 결국 손을 대지 못했다. 최근 어느 주말 아이들과 컴퓨터로 [허삼관 매혈기] 영화를 봤다. 거기서 허삼관을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이 피를 팔고 나서는 순대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났다. 퇴근해서 아이들을 만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대를 사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오늘 피를 뽑았으니, 순대를 먹어야 해! 2인분을 사서 아이들과 맛있게 먹어야지. 순대만 먹기 그러니까 막걸리도 한 병 마셔야지. 아까 간호사는 술은 안된다고 했지만, 막걸리 한 병 정도야 괜찮겠지 생각하면서 분식집 앞까지 갔다. 순대를 주문하려다가 혹시 싶어 지갑을 확인했는데, 헉! 돈이 없었다. 어라, 왜 돈이 없지? 그제서야 한동안 현금을 찾아놓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주머니를 다 뒤졌다. 지갑엔 달랑 천원 지폐 한장, 주머니엔 오백원과 백원짜리 동전으로 딱 이천원이 있었다. 이거 정확하게 순대 1인분 값이다. 2인분은 먹어야 제대로 먹을텐데, 그렇다고 분식집에 카드를 내밀 수는 없어서 어쩔수 없이 1인분만 샀다. 막걸리를 살 돈도 없었다. 슈퍼에서는 카드 결제가 가능하지만, 겨우 천원 조금 넘는 막걸리 한 병 사고 카드를 내밀기는 미안했다. 결국 내 계획과는 달리 순대는 겨우 맛만 보는 정도로 끝났고, 막걸리도 마시지 못했다.
헌혈한 날에는 목욕은 안되지만, 가벼운 샤워는 괜찮다고 해서 잠들기 전 몸을 씻는데, 바늘을 꽂았던 곳에 피멍이 들어있다. 어라!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헌혈했다고 피멍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이지? 아마 바쁘다고 너무 빨리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는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 멍은 대략 1주일간 있다가 사라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꼭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러고 다시 며칠이 지나는동안 책에 손도 못댔다. 헌혈을 하고 온 날, 다시 이 책을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다시 일주일 지나는 동안 또 손을 못댔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다짐한다. 이번에는 꼭 책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