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바지는 항상 민망한 부분부터 해지는 걸까?


한 3주쯤 전에 여름에 주로 입던 청바지가 찢어졌다. 뒷주머니 바로 옆 엉덩이 부분, 허옇게 낡고 닳았던 부분이 뜯어졌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구멍이 나 있었다. 분명 이러고 돌아다니면서 남들에게 팬티가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이 옷을 다시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는데, 살펴보니 가랑이 부분도 여러군데 해져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예전부터 청바지는 대부분 가랑이 부분이 해지면서 못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 오래 입지 않았음에도 그 부분은 금방 닳아 찢어졌다. 팬티도 조금 오래 입으면 항상 그 부분이 해져서 구멍이 났다. 예전에 좋아했던 청바지는 다른 곳은 멀쩡했기 때문에 옷수선집에서 천을 덧대어 꿰매 입었는데, 착용감도 좋지 않았고, 금방 그 주위 부분이 다시 해졌다.


이번에 찢어진 청바지는 한 6년쯤 전에 동네 구제샾에서 샀다. 살때부터 제법 낡은 상태였다. 비교적 얇은 천이라 여름에 입기에 딱 좋았다. 하나 흠이라면 앞부분이 지퍼가 아니라 단추로 되어 있어서, 옷을 입고 벗을때와 화장실 다녀올때 불편했고, 가끔 앉을 때 단추 틈새가 벌어져서 주위 시선이 신경쓰이기도 했다.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사서 몇 년간 잘 입었으니 그만하면 됐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바지가 찢어지고 한 동안 봄, 가을에 주로 입던 청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활동량이 많은 날에는 땀이 나서 힘들었다. 한 일주일쯤 지나서 다시 여름 청바지를 사러 갔다. 신기하게 요샌 청바지도 쿨패션으로 여름에 입기 좋게 얇고 통풍이 잘되는 소재로 나온 옷들이 있더라. 마침 반 값 세일하는 품목들이 있어서 한참을 골랐다. 평소 입던 사이즈를 입어봤더니 허리가 조금 컸다. 확실히 요새 허리가 조금 가늘어졌음을 느낀다. 그보다 한 치수 아래 사이즈를 입어봤다. 허벅지에서부터 꽉 끼기 시작해서 허리가 들어가긴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불편한 느낌이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평소 입던 사이즈를 구매했다.


바로 그 옷을 입고 다녔는데 진짜 청바지를 입은 것 치곤 꽤 착용감이 좋았다. 다만 걷다보면 자꾸 바지가 내려가서 자꾸 끌어올려야 했다. 어디 급하게 뛰어갈 일이 있었는데 바지가 흘러 내려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고민을 시작했다. 한 치수 작은 것으로 바꿀 것인가? 허리띠를 찾아서 계속 입을 것인가? 바꾸러 다시 가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한 번 입었던 옷을 쉽게 바꿔주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허리띠를 찾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결혼할 때 허리띠를 산 기억이 있는데, 이 집 어느 구석에 박혀 있을텐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허리띠를 사용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주 가끔 정장을 입을 때만 썼던 것 같은데, 한동안 정장 입을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며칠동안 흘러내리는 바지를 끌어올려가며 그 옷을 입고 다녔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한 치수 아래 사이즈를 살 걸하고 후회를 하기도 하고, 바로 바꾸러 갔어야 했는데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책 정리를 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리띠를 발견했다. 방 한 켠에 쌓여있던 책 더미 사이에 구겨져 숨어 있었다. 이제 더이상 바지가 흘러내리지는 않는데, 옷 맵시와 착용감이 좀 아쉽다. 그리고 허리띠 무게만큼 바지가 무거워진 것도 아쉽다.


'늙었다' 와 '어려보여요' 사이에서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한 사람을 만났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일상을 지켜보던 사이라, 한 5~6년만에 만났음에도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본 후로 시간이 지났만큼 서로 외모가 제법 변했다. 그 분은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이었다. 살도 좀 빠졌고, 얼굴에 생기가 느껴졌다. 페이스북을 보고 있으면 예전에 비해 활동이 더 많아졌는데, 그래서 더 젊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를 보더니 첫 마디가 늙었다 였다. 근육은 다 어디갔냐며, 예전의 그 몸짱 청년을 찾더라. 그래서 그 몸짱 청년은 배 나온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분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이 직설적이다. 돌려말하지 않는다. 뭐 시간이 지난 만큼 늙었다는 건 어쩔수 없으니 인정하는데,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반면 난 더 젊어졌다고,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칭찬을 마구 던졌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도 많았다. 한 4시간 가량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처음에 그렇게 섭섭하게 해놓고는 나중엔 또 나에게 남자로서 매력이 있다고 자심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이 나이가 좀 더 어리고, 싱글이었다면 분명 나에게 관심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속으로 선배처럼 직설적인 분이라면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던 어느 마을기업 대표님께서 나이를 물으셨다. 바로 답을 했더니, 인상을 확 바꾸면서 진짜냐고? 농담하지 말고 다시 말하란다. 맞다고 했더니, 그렇게 안 보인다고 했다. 자신은 20대로 봤다고, 많이 봐도 30대 중반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본인 큰 아들이 지금 30대 중반인데, 오히려 아들보다 내가 더 어려보인다고 했다.


이 반응은 대체 뭘까? 며칠 전 누군가는 나를 보자마자 늙었다고 했고, 오늘은 또 20대로 보인다는 소리를 듣다니. 물론 나와의 친밀도와 유대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가끔 처음 만났거나,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서 나이에 비해 어려보인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 대표님과는 작년부터 잊을만하면 한번씩 같이 밥을 먹었는데, 나이 얘기는 처음이었나보다.


뭐 누군가에게 늙어보이거나, 젊어보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나이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비가 쏟아지니 술 생각이 난다. 벌써 일주일째 하루도 안 빠지고 술을 마셨건만, 대낮부터 일은 때려치고 전 부쳐놓고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싶다.


오늘도 책 이야기


한동안 일과 관련한 책만 읽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소설을 좀 찾아 읽었다. 사놓고 안 읽었던 책들, 선물받고 안 읽었던 책들이 잔뜩 있었다. 소설을 몇 권 읽었더니,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침 책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서 오래전 써놓은 습작노트도 발견했다. 제법 오랫동안 차근차근 읽어봤다. 분명 내가 쓴 글이 맞는데, 무척 낯설었다. 대체로는 미숙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고, 가끔 이렇게 표현했구나 싶게 잘 썼다 싶은 부분도 있었다. 습작노트를 덮으며 내린 결론은 소설을 쓰려면 아직 멀었구나 였다. 아마 소설에 대한 욕심이 좀 더 컸다면, 당장이라도 시간을 쪼개어 글쓰기 연습을 할테지만, 그 보다는 지금의 삶에 좀 더 충실하다가 나중에 변화가 생기면 해보고 싶다는 정도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번 주부터 읽기 시작한 책. 열심히 읽고 소개글을 남기리라 결심한 책이다. 내일 장거리 출장을 다녀오면서 거의 다 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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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23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속으로 선배처럼 직설적인 분이라면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이 부분 읽는데 저 왜이렇게 웃기죠? ㅎㅎㅎㅎㅎ 읽다가 웃었어요. 직설적인 여자는 감당 못하시겠습니까, 감은빛님? ㅎㅎㅎㅎㅎ 음.. 물론 제가 그 분을 본 건 아니지만, 그리고 `직설적`인 것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저는 액션과 리액션이 확실한 사람이 좋더라고요. 빙빙 돌리거나 마음 숨기거나 해서 혼자 속 끓이지 말고 `너 너무 좋아!`라고 말해주는 쪽이 나을 것 같아요. 물론 상대가 `난 아니야`라고 했을 때 `오케이 여기까지` 하고 그만둘 수도 있어야겠지만요. 왜 영화 [광식이동생 광태]에서 이요원이 그러잖아요.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라고. ㅎㅎ 여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만으로는 움직이기 힘드니까 앗싸리 똭- 말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라고 생각해봅니다.


음..
짐작만으로 움직였다가 처절하게 부숴졌던 저의 아픈 경험이 떠오르네요 ㅠㅠ

감은빛 2016-06-23 20:56   좋아요 0 | URL
그게 사실 그 선배는 `직설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게 딱 맞는 표현을 못 찾겠더라구요.
안 그래도 글 쓰다가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포기하고 저 단어만 쓴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돌려 말하는 스타일 보다는 바로 말하는 스타일이 더 좋지요.
저 때 제가 느낀 생각은은 `직설적인` 점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어떤 불편함이었습니다.

저도 짐작만으로 행동했다가 처절하게 부숴졌던 아픈 경험이 있어요.
아니 많아요! ㅠㅠ

루쉰P 2016-06-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감은빛님과 저는 바지가 헤지는 부분이 비슷하네요. 전 제가 정력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어요 ㅋㅋㅋ 저도 가운데가 그렇게 헤지더라구요 ㅎ 전 허리띠를 매번 착용해요. 바지가 흘러내리는 걸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소설 한번 쓰셔야 하는데 술술 읽혀서 재미나게 읽었어요.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젊어 보인다고 하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요. 저 늙은거죠 ㅠ.ㅠ

감은빛 2016-07-04 20:50   좋아요 0 | URL
많은 남성들이 그 부분부터 바지가 해지는 것 같아요.
어쩌면 청바지 회사들이 고의로 그 부분을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정장이 아니라면 허리띠를 하지 않는 편이예요.
옷 입을때 그만큼 시간이 더 들기도 하고, 더 무겁기도 하구요.
옷 맵시를 고려해도 허리띠가 뽈록 튀어 나와 보기 싫더라구요.

비가 자주 오니 그만큼 자주 술이 땡기네요.
오늘도 한 잔 하고 자야겠어요.

카스피 2016-06-2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감은빛님처럼 엉덩이 뒷부분 포켓밑이 헤어지더군요.게다가 양무릎도 훤하게 찢어져서 여름에 아주 시원하게 다닙니다만,역시나 엉덩이쪽에서 팬티가 보일까봐 아무래도 검정색상의 팬티를 입게 되더군요^^;;;
개인적으론 청바지 원단이 워낙 튼튼해서 너무 오래 입기에 청바지 회사들이 일부러 워싱을 심하게 해서 원단자체를 약하게 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용.

감은빛 2016-07-04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카스피님과 같은 의심을 늘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리 오래 입지 않았는데도, 가랑이와 엉덩이는 금방 해지더라구요.
 

마감은 괴로워!


지역 시민신문의 편집위원이라 돈 안되는 일을 제법 한다. 한 달에 두 번씩 회의에 참석해서, 발행한 신문을 평가하고, 발행할 신문을 기획하고, 면 구성과 발행 일정까지 조율한다. 가끔 글도 써야 한다. 원고료는 없다. 지역의 행사 스케치 기사를 쓰기도 하고, 책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일과 관련해서 조금 전문적인 내용을 쓰기도 한다. 지난 회의에서 나는 초미세먼지와 관련한 사설의 초안을 쓰기로 했다.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시기에 맞는 주요 이슈를 다루는 사설의 초안을 써서, 여러 편집위원들이 글을 다듬어 신문에 싣는다. 딱 정해진 순서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쓸 때가 되었고, 마침 초미세먼지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에 초안 쓰기를 맡았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이틀 동안 퇴근 시간 이후에 자료를 찾았다. 알고 있던 내용 외에도 전문적인 내용들을 공부해가며 글의 얼개를 머릿속으로 그려 봤는데, 쉽지 않았다. 수요일과 목요일 밤에는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계속 술 약속이 잡혔다. 저녁에 글을 쓰다 말고 나가고, 새벽에 술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잘 써지지 않았다. 지역 신문 사설로서 글의 얼개가 잡히지 않았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자니 사설의 성격에 맞지 않고, 또 대부분의 내용은 이미 중앙 언론에서 다룬 것들이었다. 미세먼지 혹은 초미세먼지와 관련한 지역의 이슈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쓰려고 했던 것들은 대부분 지역 신문에서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사설로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편집장과 통화해서 이러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죄송하지만 이번 사설은 못 쓰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편집장은 그래도 써보라고 여러차례 권했고, 난 자신없는 목소리로 노력은 해보겠다고 했다. 지난주는 주말까지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결국 마감일이 지나도록 글을 쓰지 못했고, 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엊그제 퇴근 무렵, 편집장이 신문 교정교열을 도와달라고 연락을 했다. 편집위원을 맡은 죄로 마감 시기에는 종종 교정을 도와주러 간다. 오탈자를 찾는 건 기본이고, 비문을 다듬고 흐름을 살리기 위해 글을 고치거나, 아예 다시 쓰는 경우도 있다. 지역 신문의 열악한 재정 상황 때문에 취재기자도 모자란 판에 편집 기자를 두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글을 분량에 맞게 줄이는 일도 주로 내가 맡는 일이다. 직접 글을 쓴 기자는 보통 자기 글을 줄이지 못한다.


이번에는 아직 경험이 적은 기자의 기사 두 개를 맡았다. 하나는 기사의 흐름이 완전 엉망이고, 중복된 내용이 있는데, 편집장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다고 나에게 맡겼다. 편집장의 말처럼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기사였기 때문에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기자에게 취재한 소스를 달라고 했더니, 따로 취재내용을 기록한 것이 없다고, 보도자료와 유인물을 건네왔다. 어쩔수 없이 취재도 하지 않은 내가 인터넷 검색과 보도자료와 유인물만 갖고 기사를 다시 썼다. 편집장은 내가 다시 쓴 기사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썼냐고 놀랐다. 본인은 이 기사를 어쩌지 못해 몇 시간동안 스트레스만 받고 있었다고 했다. 편집장은 한 두 군데 표현을 다듬고, 만족한 얼굴로 기사를 디자이너에게 넘겼다. 기사의 마지막에는 처음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이 들어갔다.


두번째 받은 기사도 같은 기자가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핵심 내용은 조금 밖에 없고, 주제와 관계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는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측정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설을 쓰기 위해 공부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 기사의 근거가 되는 감사원 감사 결과 보고서를 찾아 팩트를 확인했다. 팩트 자체는 간단했는데, 이걸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단어나 개념 자체가 워낙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기자가 쓴 원문은 다 날리고, 처음부터 글을 다시 썼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렸고,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다시 쓴 기사를 보고 편집장은 짧은 시간에 잘 쓴 기사이긴 한데, 우리가 과학 전문지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자세한 내용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 내가 긴 시간 심혈을 기울여 쓴 핵심 부분을 다 날려버렸다. 속으로 좀 아깝긴 했지만, 편집장의 판단이 맞는 것 같아 반박하지 못했다. 편집장은 전문적인 용어나 설명 부분을 좀 더 줄인 후 나에게 다듬어 달라고 했다. 내용을 조금 더 줄이고 전체적으로 다듬은 후에 기사를 넘기면서 넌지시 말했다. 이 글은 기존 기사와 달리 완전히 새로 쓴 글인데, 내 이름을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편집장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편집장이 내 이름만 넣고, 원문을 쓴 기자 이름을 넣지 않길래, 처음 기사를 썼던 기자 이름도 넣어야 한다고 다시 말했다.


첫번째 기사는 글을 다시 쓰긴 했지만, 원문의 내용을 대부분 살려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쓴 것이라 기자 이름만 들어가도 상관이 없지만, 두번째 기사는 원문의 내용 중 극히 일부만 들어가고, 대부분 새로 쓴 것이라 내 이름도 함께 들어가는 것이 맞는데, 원문을 쓴 기자의 노동은 당연히 인정해야 하므로 공동기사로 올리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비록 초미세먼지를 주제로 사설은 쓰지 못했지만, 관련한 기사를 다시 썼으므로 그 노력은 인정해주겠다는 편집장의 말을 들으며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밤새 원고를 더 볼 예정이었고, 난 술을 한 잔 마시고 잘 예정이었다.


강의가 너무 길어!


최근 강의를 두 차례 했고, 강의는 아니지만 비슷한 내용을 설명해야 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두 차례의 강의는 지역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더운 날씨에도 학생들이 집중해서 잘 들어줘서 고마웠다. 가끔 경로당 어르신들 대상으로 하는 강의나, 초등학생, 중학생 강의는 하지만, 고등학생 강의는 참 오랫만이다. 아주 오래전 학원 강사 시절에 고등부 수업했던 기억이 났고, 그 후 환경단체 활동가 시절 여고생들과 숲 생태 강의했던 기억이 났다.


이어 떠오른 생각은 역시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학원 강사 시절에도, 활동가 시절에도 여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나면 연락처를 묻고, 친해지려고 하는 학생들이 꼭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이성에 대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한 선생님에 대한 호감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암튼 그랬다. 생태 강의 이후 꾸준히 연락했던 학생 때문에 당시 여자친구가 질투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나 이번 두 차례의 강의에는 열심히 관심을 갖고 듣는 학생들은 있었지만, 강사인 나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당연하겠지. 아직 파릇파릇한 20대 청년이었을 때와 이미 아저씨가 되어버린 지금을 비교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난 옛 생각이 자꾸 떠올라 조금 서글펐다.


앞서 두 차례 강의했던 내용을 압축해서 주민들에게 설명할 일이 있었다. 여러모로 긴장이 되는 자리였다. 방송국 카메라도 비추고 있었고, 낯선 사람들은 낯설어서 부담이 되었고, 잘 아는 사람들은 혹시 실망할까 두려워서 또 부담스러웠다. 일단 집중을 시켜놓고 나니 많은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데, 긴장해서 머릿 속이 하얗게 변했다. 잘 아는 내용이고, 여러번 설명했던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든 말을 떼야겠다 싶어서 일단 시작은 했다. 다행히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내용이 연결되었다. 초반에는 긴장 때문에 조금 발음이 불명확하게 나가기도 했지만, 뒤로 갈수록 여유를 되찾아 발음도 괜찮아졌다. 여유가 조금 생겨 말을 하면서 주욱 둘러보니 사람들이 집중해서 듣고 있음을 느꼈다. 속으로 어디서 끊어야 할까,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까가 고민이었다. 되도록 짧게 끝내는 것이 좋긴한데, 하지만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이렇게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비록 강의는 아니지만, 이 기회에 확실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 사실 좀 더 여유가 있었으면 농담도 섞어가면서 분위기를 조절했을 텐데 마음이 급해서 빠른 말투에 설명이 좀 많았다.


역시나 끝나고 나를 잘 아는 선배가 이렇게 평가했다. 중반까지는 설명을 잘 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제법 성과가 있었다. 다만 조금 길었던 게 흠이다. 다들 집중해서 들으니까 설명이 계속 길어졌는데, 적절하게 끊었어야 했다. 나 역시 마지막에 설명이 좀 길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정확하게 짚어줬다. 단점을 파악했으니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할텐데, 문제는 이걸 극복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떠올려보니 설명이 길었다는 지적을 꽤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언젠가 지역 녹색당 총회에서 의장을 맡아 안건을 설명하고, 당원들의 질문에 답을 했는데, 혼자서 두 시간 넘게 떠들었다고, 잘라낼 부분은 잘라내고, 시간 조절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언젠가는 10분 발표를 맡았는데, 15분 이상을 마이크를 잡고 있어서 지적 받았던 적이 있었고, 5분 발표를 맡아 얘기중이었는데, 5분이 다 될 동안 얘기해야 할 내용의 절반도 못해서 절망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기억이 점점 더 많이 떠올랐다.


말이 느린 편은 아닌데, 핵심이 아닌 도입부에서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보니 글도 마찬가지다. 주제보다 도입부에서 더 많은 분량을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 이건 정말 고치기 쉽지 않겠다. 특히 이번 처럼 즉흥적으로 설명해서는 절대 고칠 수 없다. 미리 설명할 내용을 준비하고, 시간을 재가면서 분량을 조절해야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또 다음에 발표나 강의가 예상보다 길어져서 곤란한 경우를 겪겠지. 뭐 인생이 다 그렇지. 또 글을 써도 주제보다 도입부가 긴 글을 쓸 것이고, 늘 마감 시간에 쫓겨 글을 쓸 것이고, 결국 마감을 넘기고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을 보내겠지. 뭐 그렇겠지.



디스크는 있다? 없다? 


한 이 주 전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고 일어났는데 허리가 너무 아파 깜짝 놀랐다. 잠을 잘 못 잔 것일까? 생각해보니 야근이 잦았고, 그만큼 컴퓨터 앞에 거북이 자세로 앉아 있었던 시간이 많았고, 제법 오랫동안 스트레칭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런지 유독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관절을 다치거나, 아파서 문제가 된 적이 많았다. 군대에서 무릎을 다쳐 제법 오랫동안 고생했고, 역시 군대에서 어깨를 다치기도 했다. 둘 다 인대가 늘어났는데, 한번 망가지고 나니 다치기 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아직도 다쳤던 무릎과 어깨는 움직임의 폭이 좁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몇 년 전에는 골반 통증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때 괜히 큰 병인줄 알고 지레 겁을 먹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생각해보니 몇 년 전부터 허리 통증이 간혹 있었다. 증상은 대부분 지금과 같았다. 아마도 나쁜 자세 탓일 것이고,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아프다. 하루종일 계속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 한번씩 통증이 오면 깜짝 놀랄만큼 아프다. 그래서 요 며칠동안 디스크에 대해 알아봤다.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길래 이런게 디스크인가 싶어서다.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 읽고, 동영상도 여러 편을 찾아봤는데, 내가 느끼는 통증은 디스크와는 달랐다. 한편 안심하면서도 한편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디스크가 아니라면 내가 느끼는 통증은 대체 뭘까? 뭘 어떻게 해야 통증이 사라질까?


분명 나쁜 자세 때문일텐데, 그래서 자세를 바로 잡고 앉아서 일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러고 앉아 있으면 일에 집중이 잘 안된다. 그리고 막 집중해서 일을 하다가 보면 어느새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목을 쭉 내민 거북이 자세로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이거 생각보다 답이 잘 안 나온다.

















작년 연말에 나온 현직 정형외과 의사 황윤권 선생의 책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일리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철 선생의 책 역시 읽어보진 않았지만, 예전에 김철 선생의 다른 책들과 글을 읽었기에 어떤 내용인지 대체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의학과 과학 때문에 점점 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의사나 과학자가 우리 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존재여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기대어 혹은 그들의 말만 믿고 우리 몸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발언하지 못하는 시대. 의사와 과학자가 전문가인 것은 맞지만, 과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까? 비록 전문적인 지식은 부족해도 내 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내가 아닐까? 이를테면 비가 오기 전에 무릎에 미약하게 통증이 오는 이유를 어느 의사나 과학자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군대에서 무릎을 다쳤을 때, 연대 의무대에서도, 사단 의무대에서도 군의관들은 뼈가 툭 튀어나온 무릎을 보고 놀라기만 할 뿐 아무런 진단도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나중에 육군 통합병원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군의관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휴가를 받아 나가서 MRI를 찍어 오라고 했다. 어깨 뼈를 다쳤을 때, 휴가를 받아 나와 정형외과를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정형외과 의사 역시 어깨 뼈가 이렇게 툭 튀어나온 이유를 알 수 없다며 그저 물리치료를 받고 가라고 했을 뿐이다. 골반 통증 때도 비슷했다. 유명하다고 소문난 큰 정형외과 의사는 X레이 사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MRI를 찍자고 했다. 함께 동행했던, 내가 의심했던 병을 이미 오래전부터 앓아 왔던 큰 처남이 아니었다면, 속는 줄 알면서도 MRI를 찍을 뻔 했다. 통증이 생각보다 오래갔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릎도, 어깨도, 골반도 병원의 아무런 도움 없이 저절로 나았다. 물론 스트레칭을 자주 하고, 해당 부위 주변 근육을 단련하기 위한 노력 등을 하긴 했다. 덕분에 완전히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저절로 통증이 사라지고, 일상 생활도 가능할 정도로 돌아왔다. 지금 이 허리 통증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고, 또 시간이 더 지나나면 나쁜 자세와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이 아니라 관심일 지 모른다.(이건 질병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근육이나 인대나 관절이 아플 때에 한정해서) 몸을 잘 못 쓰면 아플 수 밖에 없다. 몸을 잘 쓰기 위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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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2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역신문 기자 얘기를 읽으니 예전 잡지사 기억이 나네요 ㅋ 저 역시 편집 봐줄 사람도 없고 해서 혼자 쓰고 교정하고 ㅋㅋㅋ 엄청 고생했죠 ㅎ 지역신문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실 지역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꽤나 중요한 신문입니다. 사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적어주는 신문은 거의 없어요. 그러기에 진짜 지역신문은 필요해요.ㅎ

감은빛님은 30대 시절 강의하실 때는 인기가 많으셨나봐요 ㅋ 전 20대도 지금은 완전 아저씨고 ㅋ 관심을 1도 받아 보지를 못해서 ㅋㅋㅋ

강의에다가 신문사 다니시고 정말 바쁘시네요. ㅎ 그래도 전문가로서 활동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ㅋ

다만 허리는 진짜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ㅠ.ㅠ 허리 아픈 건 진짜 힘들어요...

감은빛 2016-06-10 13:31   좋아요 0 | URL
루쉰님 바쁘실텐데 댓글도 달아주시고 고맙습니다! ^^

저 전문가 아니예요.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에 자주 불려다니는 활동가일 뿐입니다.

허리는 다 낫지는 않았지만, 이글을 썼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루쉰P 2016-06-18 23:04   좋아요 0 | URL
전문가세요(무척이나 단호한 표정 -.-)

진짜 허리는 아프면 답도 없습니다. 후~~ 진짜 물리치료나 이런 거 꾸준하게 받으셔서 더 안 아프셨으면 해요.

전 살이 쪄서 무릎관절이 아팠어요. 유비가 유표의 회식에 참여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살이 찐 자신의 허벅지를 보며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무얼 하였는가라고 슬퍼했다는 구절이 있는 데 저는 이 나이가 되어 무릎관절이라니 하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ㅠ.ㅠ

전 요즘 챔픽스 먹고 금연 중이에요. 담배가 인생의 낙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성피로 때문에 공부도 힘들더라구요. ㅠ.ㅠ

지금 4일 됐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푸하 우리 건강해요~~~

cyrus 2016-06-0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는 학창 시절에 농구를 좋아해서 저랑 주말에 농구를 뛸 정도로 체격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군대 갔다 오고 나서 허리 디스크에 시달리더니 함부로 뛰지 못하고, 농구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병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상생활이 크게 달라졌고, 평소에 친구와 함께 즐기는 놀이가 추억으로 남게 돼서 서글픕니다.

감은빛 2016-06-10 13:39   좋아요 0 | URL
저런! 좋아하는 운동을 하지 못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인 것 같아요.
시루스님의 친구분께서 다시 농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전부터 잊을만하면 어딘가 관절에 통증을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몸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그때 이상하다고 느꼈던게, 평생 이 몸으로 살아야 하는데,
왜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까 생각했어요.

요즘 저는 자주 몸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그 전에는 몰랐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종종 깨닫습니다.
왜 좀 더 젊을 때 이런 생각을 못 했던가 안타깝더라구요.
 


남녀차별


여성과 남성의 차별 문제를 처음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할머니가 통닭을 사와서 다리 두개를 모두 내 앞접시에 놓은 후에, 나머지를 여동생을 비롯한 사촌동생들에게 먹으라고 내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었고, 당연히 옛날 사람으로 살았다. 손자들 중에서 남성이고, 맏이였던 나를 엄청 챙기셨지만, 나머지 손자, 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내 여동생은 할머니의 차별을 늘 당하며 자랐다. 조금 말다툼이 있어도 할머니는 여동생에게만 "어디 기집애가 오빠야한테 대드냐!"고 호통쳤고, 앞서 통닭의 사례처럼 사소한 것도 무조건 남자이고, 맏이인 나부터 챙겼다.


역차별


반대로 여동생을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무뚜뚝하고, 말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없고, 뭔가 일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유독 내게 무뚜뚝하고 엄하셨던 아버지는 여동생에게는 가끔 장난도 치고, 웃어주기도 하고, 예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외탁(외모가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가쪽 사람들과 닮았다.)을 해서 좋아하지 않고, 비교적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쪽 사람들과 닮은 편인 여동생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계층차별 / 지역차별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도시 변두리 지역에 살았다. 달동네, 산동네, 촌동네 등등으로 불렸던 그 동네들은 다른 말로 우범지대라고 불렸다. 늘 폭력이 만연한 동네였다. 골목을 걷다보면 언제 어디서 폭력에 노출될 지 몰라 늘 두려웠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가 욕을 퍼부으며 돈을 뺐거나 모욕을 줄 거라는 두려움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걸어야 했다.


비록 덩치는 작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 편인 나는 비록 속으로는 두려웠지만 늘 그런 상황에 당당히 맞섰다. 뺏길 돈을 갖고 다니지도 못했고, 옷이나 학용품 역시 변변치 못한 것들 뿐이라 별로 뺏길 만한 것이 없기도 했고,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두들겨 맞고, 맞서 싸워도 두들겨 맞을 거라면 맞서 싸우고 맞는게 더 낫다는 생각에 힘없고, 싸움을 못 했어도 늘 맞서 싸웠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동네에서 한창 키가 큰 형들에게 늘 맞고 살았고, 한번은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에게 맞섰다가 크게 맞은 적도 있었다. 맞아도 맞아도 또 일어나서 덤비는 편이었고, 그들은 결국 때리다 지쳐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지만,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또 덤볐고, 그들은 오히려 나를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10여년을 맞고 살았더니 청소년기의 나는 폭력 상황에 많이 익숙해졌고, 수많은 경험 덕분에 싸움을 어느 정도 잘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폭력 상황은 늘 두렵다. 익숙하기에 잘 알 수 있는 그 분위기. 상대방이 먼저 주먹을 날리기 직전의 그 느낌을 잘 알 수 있고, 그 느낌이 드는 순간이면 늘 두려웠다. 이젠 예전과는 달리 싸우면 자주 이기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보니 우리 동네는 정말 유명한 우범지대였더라. 그 동네 출신이라고 하면 웬만하면 눈을 깔고 고개를 숙이는 걸 봤다. 하나 밖에 없는 그래서 나도 거길 다닐 수 밖에 없었던 중학교는 유명한 폭력조직 두 곳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곳이었다. 학교에 경찰차 여러 대가 들어와 폭력조직에 속한 학생들을 연행해가기도 했다.


다른 동네에서 온 아이들의 태도에서 또 다른 차별을 느꼈다. 그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 이른바 흑인 거주지역 사람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할까? 너넨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맨날 싸움만 하는 한심한 놈들이야 라는 뜻이 담긴 시선과 몸짓들.


여성차별


고등학교에서도 어김없이 몇 차례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 누군가 건드리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맞서다보면 어김없이 나도 문제아로 낙인이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더 반항적으로 변했고, 싸움은 더 자주 일어났다. 그러다가 공부를 아예 포기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우린 친구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밖에서 놀았다. 술을 마시기도 했고, 근처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만나기도 했다. 인문계 여고생들을 만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신 자주 만나는 아이들은 상업계 여고생들이었다. 그것도 야간반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때 여상 야간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들, 즉 차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놀라운 것은 자주 어울렸던 그 아이들도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받아들여 순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문계가 아닌 상업계에, 그것도 야간으로 들어온 순간 이후 갈 길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한편 당시 가끔 만났던 인문계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적이 좋아도 여성이기 때문에 멀리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가기보다는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권유(혹은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여럿 보았다.


역차별


대학에 들어갔더니 우리 과에는 여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여자 선배들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신입생환영회라고 갔더니 새내기 남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기발랄하고 어여쁜 남자애들이 많이 들어와서 기쁘다"거나 "옆에 앉아서 술 한 잔 따라봐라" 등 보통 회사에서 남자 상사들이 여직원에게 할만한 언행을 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사회의 여성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학과 내에서는 남성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문제는 몇몇 여자 선배들의 도가 지나친 성희롱이 마치 아무 문제 없는 듯 혹은 당연한 듯 여기는 분위기였다.


당시 나는 1학년 학년대표를 맡아 전공 강의때 출석부와 마이크 등 강의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했다. 여성학 강의를 맡아 일주일 한 번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가 있었다. 이 분은 강의시간에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마치 모든 남성들이 사라져야 이 사회의 여성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우리 과는 남성이 몇 안되는데, 그 중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가끔 그 과도한 남성 혐오를 직접적으로 나에게 퍼부어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난 조교의 명을 받아 출석부와 마이크와 분필을 준비해주고, 수업 전에 칠판을 닦아두고, 수업이 끝나면 또 칠판을 닦고 강의실을 정리해주는 사람인데, 그 보답은 남성에 대한 혐오 발언과 비아냥이었다. 한 학기 내내 출석부와 마이크를 건네주면 의례적으로 건넬 법한 "고마워요!"라는 말 한 마디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운동권 내 여성차별


학생운동을 짧게 경험했지만, 그 조직의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에 운동의 전체적인 흐름에는 함께했지만, 직접적으로 학생운동 내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제일 화가 났던 것이 수배당한 남성 선배들의 속옷과 양말을 여성 후배들이 빨아주는 등 뒤치닥거리를 맡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문제를 지적하면서 당장 바로잡으로 화를 냈지만, 그들은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결국 그들과는 함께 운동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후 환경운동, 시민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등 여러 운동단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면서 운동권 내부의 여성차별 문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존재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하고 살지만, 생활의 영역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차별적인 언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늘 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차별


이 나라의 결혼 제도는 무조건 여성에게 불합리한 방식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혼을 할 때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시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1년에 한 두번 만났고, 평소에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불효자인 나에게 익숙해진 탓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기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가정에 비해서는 비교적 차별을 덜 당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물론 차별이 없었을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그래서 늘 미안했고, 뭔가 바꿔주고 싶었다.(이젠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지만)


한 3~4년 전쯤 동네에서 아내를 비롯해 몇몇 동네 사람들과 여성문제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책도 읽고, 경험담도 나누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동네 여성 선배들은 평소 아이들을 잘 돌보는 나를 자주 칭찬했다.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를 돌보기도 했고, 이후에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모임에서는 그런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자꾸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읽은 책에도 사례 나열 중심으로 평소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이 느끼는 부당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책임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 남성으로서 답답함과 한계를 많이 느꼈다. 당시 몇 차례의 공부모임에 계속 참여한 남성은 나 혼자였는데, 가끔 한 두 번 참여했던 다른 남성은 나와는 달리 그 모임의 분위기 자체에 질려버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결혼은 생활이다. 남녀는 생활 속에서 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최대한 잘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그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태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혼할 당시 주례를 맡아주셨던 대학 은사님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반반씩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은 은사님의 영향이 크다. 그 분은 주례를 부탁하려 우리가 찾아뵈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좁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셨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깨달았다. 개인의 실천과 의지와는 달리 감정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크고 작은 갈등이 감정적인 상처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명하게 생각하고 노력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도 아니며, 누가 더 노력하거나, 덜 노력하거나의 문제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게 '여혐'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접하고 있었지만, 나의 일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단어라고 여겼다. 대신 늘 여성과 남성의 차별과 평등 문제를 일상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은 갖고 살고 있다. 이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정당 내의 성차별과 해결하기 위한 노력


녹색당은 모든 선출직 대표를 서로 다른 성 두 명 이상이 맡도록 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까지 배려한 조항이다. 여남동수의 공동대표는 녹색당에서는 기본이고 상식이다. 녹색당은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 당원이 다수인 정당이고,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성 운동을 하는 당원이 많은 정당이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성차별 문제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나는 선거운동에 참여한 여성 당원이 일부 몰지각한 남성에게 당한 성희롱을 비롯한 폭력적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지점이고, 또 하나는 선본 사무실에서 식사를 비롯한 음식을 준비했던 사람이 주로 여성이었던 점에 대한 지적이었다.


첫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같이 선거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 화가 났고, 또 한편 미리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잘 설계하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했다. 두 번째 지적에서는 사실 깨닫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거론해서 다른 방식을 풀자고 제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뜨끔한 면도 있었고, 한 편으로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기에 약간 억울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우선 주로 식사를 준비했던 분은 당시 선본의 최고 결정권자였고, 늘 그 분이 스스로 본인은 직접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그 역할을 자청했다. 그가 만약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었다면 논의를 통해 공평하게 나눠서 하자고 제안하거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나도 한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건 성차별 문제 이전에 직위에 따른 권력관계가 먼저 작동한 지점이 있다. 다만 그럼에도 처음부터 식사 문제를 성차별 문제를 고려해 공평하게 설계하지 못한 점은 역시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선거 이후 이러한 평가가 나온 것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이후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기존 정치와 다른 녹색당 만의 정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본다.

 


여남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아무 죄없는 청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살해당하는 엽기적인 사고가 벌어졌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이 사회에서 여성은 평소 늘 크고작은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미 많은 폭력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참담한 사태를 겪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은 부차적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보다 근본적인 어떤 해답과 대책이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무엇이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함께 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한 소통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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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의 날 10개의 질문
◇ 질문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 시간, 장소에 상관없이 책 읽는 건 좋다. 다만 제법 오랫동안 바빠서 책을 자주 읽지 못했다. 제일 좋은 장소라면 당연히 집. 거실을 뒹굴거리며 밤새 책 읽을 때가 좋다.
 질문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 종이책만 읽는다. 전자책은 시도해 본 적도 없다. 매일 컴퓨터로 문서를 비롯한 온갖 텍스트를 읽는 것도 피곤하다.
예전에는 책에 메모도 하고, 접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은 깨끗하게 읽고 감상이나 메모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은 노트에 따로 기록한다.
 질문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 침대가 없어서 머리 맡에는 책이 없다. 주로 읽는 책은 책상 위에 쌓여 있는데, 한국 근대사 관련 책들과 환경 관련 책들이 대부분이다. 소설이 아닌 경우 한 번에 책을 읽지 못하고, 여러 권의 책을 두고 읽다 말다를 반복하는데 요즘 읽는 책은 아래와 같다.







◇ 질문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 책의 주제에 따라 문학, 역사, 과학, 사회과학 등으로 분류해두려고 애쓰는데, 지금은 거의 아무런 체계없이 엉망으로 섞여 있다.
책 욕심이 많아서, 웬만하면 책을 계속 보관해두는 편이다. 책에 실망했거나,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경우에만 중고샵에 팔거나, 기증하기도 한다.

◇ 질문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 지금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려서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철가면』이다. 뒤마의 작품이 아닌 부아고베의 작품이다. 어려서는 문고판(축약본)으로 읽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완역본이 나와있다.














◇ 질문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 지금 책장에는 놀랄 만한 책은 없을 것 같다. 예전에는 아버지 책인 [대망]과 [후대망] 시리즈(세로판본)를 다 읽겠다고 갖다 둔 적이 있었다. 결국 [대망]도 다 못 읽고 다시 집으로 돌려놓았다. 그 시리즈가 있었다면 좀 놀란 만했을지도.

◇ 질문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 호메로스를 만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본인이 다 쓴 것인지 묻거나, 세익스피어를 만나 그토록 많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비결이 뭔지 묻고 싶기도 하지만, 만나도 말이 안 통할 것 같다. 단순히 만나서 뭘 묻기 보다는 가끔 만나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되면 좋겠다.

◇ 질문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 많다! 집에 쌓여있는 읽지 못한 책이 몇 권인지 셀 수도 없다. 여러번 도전했던 책은 앞서 언급한 [대망] 시리즈와 [토지] 등이다.


◇ 질문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 소설이 아니라면 대개 완독을 목표로 하지 않고, 조금씩 생각날때마다 읽거나, 아예 일부만 읽기 때문에 대부분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아예 읽다 말고 다시 읽지 말아야지 했던 책은 최근에는 없다.

◇ 질문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 딱 세권이라니. 무인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식물을 찾을 수 있도록 『한국식물생태보감1』(참고로 1,200쪽으로 분량도 어마어마하다), 무인도에서도 술은 담궈 마셔야 할텐데, 술 담는 법은 따로 배워가기로 하고, 술을 홀짝이며 읽을『술의 세계사』, 그리고 술 안주로 잡을 해산물을 고를 때 참고하기 위해『내 술상 위의 자산어본』이렇게 3권 가져가면 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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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4-25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안주! 선생님 책보다 저는 선생님을 모시고 무인도로 들어가고 싶어요 ㅎㅎㅎ

감은빛 2016-05-20 15:32   좋아요 0 | URL
한창훈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 아마 책은 한 줄도 못 읽을 것 같아요.
그 인생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작년에 한창훈 선생님 강연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어요.
끝나고 술도 한 잔 나눴는데, 정말 말씀을 잘 하시더라구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라임69 2016-04-2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요! 이왕이면 갈때 한자리 더 만들어 주세요 ♡♡

감은빛 2016-05-20 15:3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이렇게 무인도 갈 때 가져갈 책을 물으면,
책이 아니라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답하곤 했죠.
여럿이 함께 들어가면 더이상 무인도가 아닌거 아닐까요? ^^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페크pek0501 2016-04-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인 구절은 노트에 따로 기록한다˝
- 저도 요런 노트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하는 즐거움이 있지요.

˝술을 홀짝이며 읽을『술의 세계사』˝
- 멋지십니다. ^^

감은빛 2016-05-20 15:34   좋아요 0 | URL
독서 기록 노트를 몇 권이나 갖고 계시다니!
저는 꾸준하지 못해서 어디 구석에 박혀 있는지 모르겠네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oren 2016-05-1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감은빛 님도 어린 시절에 <철가면>을 좋아했었군요. 저 역시 그 책을 무지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그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답니다. 방금 다른 책 속에서 우연히 그 책을 다시 발견할 때까진 말이지요...
* * *
「그럼 잉크는 무엇으로 만들어준담?」
「대부분의 죄수는 쇠녹에다 눈물로 잉크를 만들지만 이건 흔해빠진 방법으로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최고의 권위자는 자기 피를 사용하는 거야. 짐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리고 자기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짧고도 흔해빠진 소식을 온세계에 알리고 싶다면, 양철 접시 아래에다 포크로 써서 창 밖으로 던뎌버리는 거야. <철가면>은 언제나 그렇게 했어. 그거야말로 멋들어진 방법이지」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중에서

감은빛 2016-05-20 15:36   좋아요 1 | URL
오렌님도 그 책 재밌게 읽으셨군요.
아주 오랜 기억이지만,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납니다.
다시 완역본을 읽어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두긴 했는데,
요즘은 일이 바빠 통 책을 붙들 여유가 없네요.

답글이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yamoo 2016-05-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감은빛 님 어린 시절 철가면 좋아하셨네요~ 저는 어린 시절 별로 책을 읽은 적이 없는지라..ㅎ
인상적인 책에 대한 답변들 잘 봤습니다!ㅎ

감은빛 2016-06-01 17:56   좋아요 0 | URL
네, 저 책을 어릴때 읽었는데
이상하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네요.
꽤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
 

10년 전의 좌절과 허무


열심히 달렸건만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런 상태를 좌절이라고 표현하던가? 어제 환경운동연합이 낸 '새만금 방조제 완공 10년, 새만금을 다시 이야기하자'라는 성명을 읽었다. 그래. 벌써 10년이 지났구나. 아니 2003년 6월 정부가 아직 2~3개월 더 남은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밤낮없이 덤프트럭으로 바위와 흙을 퍼날라 4공구를 막았던 날로 부터 13년이 지났다. 2006년 4월 21일은 새만금 끝물막이 공사가 끝난 날로 2공구가 완전히 막힌 날이다. 하지만 방조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방조제는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나 2010년 4월 27일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방조제가 완성되고도 6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새만금 사업은 더 진행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 해수유통이 되지 않아 바닷물과 갯벌은 썩어가고 있고, 갯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던 수많은 생명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새만금 싸움의 실패와 연이어 벌어진 고속철도 싸움의 분열과 실패는 나에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때 나는 좌절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실망했다. 허무했다. 환경활동가로서 나에게 더이상 어떤 전망이 있을까 절망했던 것 같다.


녹색당의 도전과 허무


녹색당의 세번의 도전 실패 역시 허무했다. 2012년 당시 단번에 국회의원을 낼 거라고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저조한 득표율은 너무 허무했다. 비록 비례후보 밖에 없었기에 선거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진보신당(현 노동당)과 청년당과 녹색당 이렇게 3당이 비공식 선거평가와 뒷 이야기를 나누는 선거 뒷담화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진행을 맡았었다. 3당의 당원들이 한결같이 했던 얘기가 주위 사람들은 다 우리당 찍었는데, 어떻게 이거 밖에 안 나올 수 있냐는 얘기였다. 그나마 경험이 좀 있었던 진보신당 당원들은 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청년당과 녹색당 당원들은 정말 멘붕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좁은 틀 안에 갇혀 살고 있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그래 현실 감각을 익힌 소중한 기회였다고 볼 수 있겠다.


두번째 도전 지방선거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역구 후보와 광역비례 후보를 내어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말 될 수도 있겠다 믿었던 과천과 구미가 모두 안 되어 결국 한 석도 얻지 못한 것은 충격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녹색당이 정당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으로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이 두 번의 실패는 나름 힘들었고, 조금 허무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떤 지점에서는 더 독하게 다음을 준비해야 한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이번 세번째 실패는 그간 축적해온 노력과 성과에 비해 득표율이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해 참담한 기분이다.


그렇지만 녹색당의 선거운동은 과거 두 번에 비해 훨씬 진화했고,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녹색당 당원은 짧은 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지지자도 가파르게 늘어났다. 이것은 녹색당이 준비해왔던 노력을 인정받을 만한 성과로 볼 수 있다.


한편 나는 이성적으로 이 땅의 정치 현실을 깨닫고 허무하게 주저앉기보다 즐겁고 신났던 선거운동의 기억을 통해 또 하나의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다.


선거운동 이야기


#1

하루종일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건 중노동이다. 거기에 마이크도 없이 생목으로 녹색당을 외쳐야했다. 미세먼지 경보는 계속 '나쁨'으로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물라고 했건만, 매연과 미세먼지를 마셔가며, 온갖 소음에 맞서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소리를 냈더니 목이 완전히 가버렸다. 선거운동이 끝나고 10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목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2

그런 와중에 사람들의 호응은 정말로 큰 힘이 된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차량 한 대가 서행으로 다가오더니,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녹색당 화이팅!"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떠났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온 한 시민이 역시 "화이팅"이라고 외쳤을 때, 당원인데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너무 반갑다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을 때, 여성 두 분이 "녹색당에 투표하겠다"고 말하고 지나갔을 때, 또 한 여성이 웃으며 "수고 많으세요! 고맙습니다!"하고 지나갔을 때 몸은 힘들지만, 기분이 좋아 잠시나마 피로가 가시는 경험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들고 있던 피켓을 더 힘껏 높이 들어올리고, 허리를 꽂꽂이 세워 당당하게 시민들을 만났고, 좀 더 힘차게 녹색당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3

재미있었던 건 한 고등학생이 나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던 일이다. 당시 난 어깨와 팔이 좀 뻐근했지만 피켓을 높게 들고 있었는데, 그 학생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웃음을 짓는 일이 좀 힘들기도 하고,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학생과 대화를 좀 해보고 싶었는데, 뭐라 말을 걸어볼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사진을 찍어준 친구와 함께 저 쪽으로 사라졌다. 그때 멀리서 들린 사진 찍어준 친구의 말. "너 취향 참 독특하다!"


#4

신촌은 정말 사람이 많은 공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차없는 도로로 운영하는 주말 저녁이면 어마어마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이미 많이 지쳤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조용히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곤 했다. 주로 연인들이 많았지만, 친구들끼리 온 경우도 많았다. 그 젊음의 거리 한 가운데에서 나는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은 저런 옷을 주로 입는 구나. 요즘 사람들은 저런 말을 하는 구나. 마치 나는 요즘 사람이 아닌 것처럼(물론 좀 옛날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서 있었다.


#5

신촌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았다. 우리 청년들과 함께 다니는 외국인도 많았고, 외국인들끼리 다니는 무리도 제법 있었지만, 외국인 커플도 제법 봤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점심무렵부터 선거운동을 했는데, 지하철 역 앞에서 한 커플을 만났다. 여성은 금발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였고, 남성은 짧은 곱슬머리에 아주 짙은 고동색 피부였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내 앞쪽으로 걸어왔다가 멈춰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필 내 바로 앞에 서길래 내가 뒤로 두어발짝, 옆으로 두어발짝 물러서야 했다. 가까이 있는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들이 피켓을 가리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그쪽으로 갔는데,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철 역 바로 앞, 그 사람 많은 공간에서 딥키스를 나눴다. 두 사람의 혀가 섞이고, 서로 상대의 입술을 쪽쪽 빠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갑자기 내가 그들의 침실에 침범해서 엿보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성이 몸을 돌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려는 걸 남성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또 키스가 이어지고, 여성은 아마도 늦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다시 몸을 돌리고, 또 남성은 끌어당기고 또 키스가 이어졌다.


그날 오후 늦게 또 다른 외국인 커플을 봤다. 이번에도 밝은 갈색에 창백한 피부의 여성과 모자를 써서 머리는 보지 못했지만 조금 어두운 갈색 피부의 남성 커플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서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는데, 남성이 내가 든 피켓이 뭔지 여성에게 물었던 것 같다. 여성이 내 바로 옆에 있어서 정확하게 들었는데, 이렇게 답했다. "Mmm I guess something about nation." 그리고 뚫어져라 내 피켓을 쳐다보았는데, 잠시후 어깨를 으쓱 올리며 "I don't know" 말했다. 곧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나와 피켓에 시선을 주고 길을 건넜다. 아마 여성이 '녹색당을 국회로' 라는 문구의 '국'자를 읽고 'nation'을 떠올린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6

신촌에서는 외국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청년들도 사람들 앞에서 애정행위를 벌이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만큼의 딥키스를 하는 연인을 본 적은 없지만, 가볍게 입을 맞추는 행위는 여러번 보았고, 꼭 끌어앉고 있는 모습도 제법 보았다. 상대방의 뺨을 어루만지거나, 상대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보았다. 뭐 문제라거나 그러면 안된다는 의미로 언급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저 아래 따뜻한 남쪽 도시(그 도시도 작은 도시는 아닌데)에서 올라온 서울 사람들이 대중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7

사람이 많은 만큼 신촌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끊임없이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 취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녹색당 선거운동원 중에 젊은 여성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해서 뭔가 말을 걸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운동원들은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평소처럼 단호하게 행동하거나 회피하지 못했다. 이들은 아마 그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보면 선거에 나온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함부러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다가와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모욕을 주려고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 당원들이 그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위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우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붙어 있지 않고,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이런 부분은 당 차원의 공식 선거평가에도 언급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다.


#8

내가 함께했던 서대문 선본의 후보는 인디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녹색당의 대표적인 정책들을 곡으로 만들어 선거운동기간 동안 매일 저녁마다 정책 콘서트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중 '녹색당을 국회로'(앨범에는 선거법 때문에 '녹색당을 거기로'라고 녹음했다.) 라는 흥겨운 곡에 후보의 아내(이 두 사람은 본선거 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직전에 결혼했다.)가 율동을 붙여 춤을 만들었다. 선본 사람들은 신촌 한 가운도에서 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다. 재밌었던 건 춤을 춘 당원들이 완전히 이 곡과 춤에 빠져들어서 너무 즐거워했던 것. 대중 앞에서 춤을 춘다는 행위가 민망하기도 하고, 쑥쓰러울수도 있을텐데, 한 두번만 춤을 춰보면 대부분 태도가 확 바뀌었다.


난 사실 평일엔 거의 결합을 못해 뒤늦게 춤을 배웠는데, 처음엔 춤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춤을 추는 대신 피켓을 들거나, 명함을 뿌리거나,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보의 아내(자꾸 이렇게 표현해 미안하지만,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상 달리 표현하기 어렵네)를 비롯해 여러 당원들이 자꾸 권해 어쩔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사실 난 몸치로 춤을 춰 본 적이 별로 없다. 물론 술에 취해 막 몸을 움직인 적은 있겠지만, 그건 춤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몸부림이다. 대학 시절부터 몸짓이나 율동이나 춤 같은 건 거의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당원들과 함께 몸을 움직여보니 즐거웠고, 용기를 내어 어색하고 못 추는 춤이지만, 녹색당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서라면 까짓 춤 따위 못 추겠나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춰보니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 잘 추는 것도 아니었다. 다들 자기만의 개성어린 동작이 있었고, 틀린 동작도 있었고, 각자의 분위기가 있었다.


춤은 하루에 두세번 가량 췄는데, 저녁이 되고 바람이 불면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추워서라도 다들 춤을 추고 싶어했다. 나 역시 한 두번의 어색함을 극복한 뒤론 누구보다 열심히 그 춤과 노래를 즐겼다.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춤을 춰봤다고 말했는데, 내게 춤 출 것을 권했던 안무를 만든 당원이 그 말이 인상적이었는지 나중에 언급하기도 했다. 


이 춤 덕분에 내가 참 재밌게 읽었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책 제목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전까지는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이젠 몸으로, 감각으로 그 느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뜻이었구나! 춤 춘다는 건 바로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는 소중한 감각을 배웠다.


#9 

녹색당은 2011년 창당준비를 시작해, 2012년 초에 정식 창당했고, 곧바로 총선을 치뤘다가 득표율 미만으로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다시 재창당 과정을 거쳐 '녹색당플러스'란 당명으로 창당했는데, 우리 의도는 '녹색당+' 였는데, 선관위의 오락가락하는 입장 덕에 선거용지에 한글 여섯 글자가 기재된 이상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우린 득표율이 낮다고 정당 등록을 취소해버린 악법에 저항해 헌법소원을 제기해 다시 '녹색당'이란 당명을 되찾았다. 그리고 득표율이 낮다고 정당등록을 취소하던 악법도 없앴다. 만약 아직 그 법이 남아있었다면, 노동당, 민중연합당, 녹색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당들이 모두 등록이 취소되고 같은 이름을 쓰지 못하는 뭐 같은 경우를 또 당했어야 할 것이다.


암튼 그렇게 녹색당은 나름의 시간을 거쳐 성장해 온 정당이다. 활동하는 정당중에 가장 오랫동안 같은 이름을 유지해 온, 다른 말로 오래된 정당이며,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 중에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이 가장 많은 정당이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더 많은 정당이며, 국내 최초로 전면 추첨식 대의원제도를 운영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 짝퉁 녹색당이 하나 더 나타났다. 녹색당의 공식 색깔보다 약같 옅은 연두색에 가까운 녹색을 쓰는 안모씨의 정당이다. 선거운동을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녹색당이 아닌 비슷한 색깔의 다른 당으로 오해했다. 자주 안모씨와 녹색당의 관계가 뭐냐고 질문을 받았고, 심지어 녹색당이 무슨 당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녹색당은 그냥 이름 그대로 녹색당이라고 말해도 계속 더민주냐 국민의당이냐 뭐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응원한다고 했던 사람 중에 가까이와서 자세히 보더니 왜 번호가 3번이 아니고 15번이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원조 녹색당 당원으로서 참 화가 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결국 우린 거리에서 안모씨의 정당 선거운동을 해준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짝퉁 녹색당은 하나 더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의 표를 많이 가져가버린 '국제녹색당'이다. 이 정당은 거의 활동이 없어 어떤 당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지난 지방선거 당시 정책을 보면 분명 녹색당과는 거리가 먼 정당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름처럼 국제적인 정당도 아니었다. 우리 녹색당은 전세계 90여개 국에서 함께 하는 국내 유일의 국제정당이다.(세계 녹색당은 글러벌그린스 라는 네트워크로 묶여 있으며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가짜 국제 정당이 가나다 순으로 우리보다 앞 번호를 받아 녹색당으로 와야 할 표를 많이 먹었다. 당시 '녹색당'에 투표해달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중에 선거 이후 만나보니 "네가 시키는 대로 찍었어. 국제녹색당 맞지?" 하는 얘길 엄청 많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은 이번에 이 가짜 국제 정당은 선거에 나오지 않았다.


#10 

이번 총선을 통해 명확하게 깨달았다. 방송과 전국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원외정당, 소수정당인 녹색당은 대중 인지도도 지극히 낮고, 정권심판의 논리, 진영의 논리, 사표 논리 등 현실 정치 지형 안에서 힘을쓰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 헛된 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답을 찾지 않는다면 앞으로 녹색당에게 기회가 오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끼리 즐겁고 행복한 것도 한 두번이다. 계속 선거에서 참패한다면 정당으로서 제대로 된 꼴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고민 또 고민이다!


#11

선거운동 첫날과 마지막날이 가장 힘들었다. 엄청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사실 난 평일엔 일 때문에 거의 결합하지 못하고, 주말과 가끔 시간이 나는 저녁에 함께 했고, 마지막 날은 월차를 내고 아침부터 함께 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한 편 미안하다. 더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던 후보와 선본의 다른 당원들은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운동을 함께 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부터 만나 홍제천을 한강 방면에서 홍제까지 걸었다. 노란 개나리꽃이 예쁘게 핀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지독한 날이기도 했다. 홍제역에서 정책콘서트를 짧게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무악재를 넘어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까지 걸으며 선거유세를 했다. 몇몇 당원들은 다음 일정 때문에 빠져서 택시나 버스로 이동했는데, 선거차량으로 쓰고 있던 세발 자전거와 두 명의 당원은 서대문에서 다시 충정로, 아현, 이대 앞을 지나 신촌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날은 그간의 피로가 쌓여 더 힘든 날이었다. 매일 선거운동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일터 일 때문에 야근을 하기도 했고, 하루는 거의 밤을 새기도 했기 때문에 몸이 엄청 피곤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쉬지 못한 채 마지막 날을 보냈다. 막판에는 정말 온 몸이 다 아프고, 특히 발목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한편 주변의 젊은 당원이 비교적 여유있는 모습을 보면서 난 이제 정말 늙었구나 하는 낙담을 하기도 했다. 다음 선거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체력을 더 길러 놓아야 겠다.


#12

마지막날 11시까지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린 10시까지 흩어져 선거운동을 하다가 신촌 광장으로 모였다. 빙 둘러 앉아 시민들과 당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서대문 선본과 비례후보 1명과 청년 선본이 결합해 인원이 제법 많았다. 감동적이었다. 제각각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 하는 일도 다르고, 다른 이유로 당에 들어온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모두 자발적으로 녹색당을 알리기 위해 여기 서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선거운동을 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13

광란의 뒤풀이가 이어졌다. 거의 빌려쓰다시피 했던 지하의 펍은 녹색당의 열기로 꽉 차 있었다. 실내에는 후보의 앨범을 계속 틀어놓아서 2주 동안 함께 선거운동을 하며 노래를 다 외운 당원들은 계속 노래를 따라 불렀고, '녹색당을 국회로' 노래가 나오면 앉은 자리에서 혹은 일어서서 일제히 춤을 추었다. 아! 이 사람들 모두 미쳤구나. 단 한 명 미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반쯤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함께 선거운동을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당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난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밤을 지새웠다.


하나 아쉬웠던 건 막판에 술에 취해버렸던 점. 물론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지만, 술에 취해 몇몇 청년 당원들에게 꼰대짓을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사실 자꾸 나이가 들면서 아는 척하고, 가르치려고 들고, 잘난 척하는 꼰대짓을 하는 걸 느낀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 지키고 해버린 거다. 한심한 아저씨의 쓸데없는 말을 받아주고 있었을 청년 당원들께 죄송한 마음이다.


다음 선거를 기다리며


선거 운동은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선거 결과는 참담했지만, 그래도 선거를 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누군가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 부르던데, 나에게는 당원들의 축제였던 셈이다. 아마 다른 정당이었다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물론 그들에게도 그들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나는 그랬을 거라는 뜻) 다시 돌아올 선거가 어떤 양상일지, 어떤 후보와 어떻게 치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힘들겠지만, 즐거울 것이고, 어렵겠지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 지방 선거에서는 '녹색당을 지방 의회로' 보내고, 다음 총선에서는 꼭 '녹색당을 국회로'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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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6-04-2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녹색당 파이팅! 입니다.

감은빛 2016-04-25 15: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이 납니다! ^^

나와같다면 2016-04-2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수고를 압니다..
그 씨앗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감은빛 2016-04-25 15: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열매를 맺으리라 믿습니다.

수이 2016-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응원! 다음 지방 선거때는 말로만 응원 관둘게요, 고생하셨어요.

감은빛 2016-04-25 15:59   좋아요 0 | URL
야나님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납니다.
말로만 응원이 아닌 직접 응원?
늘 고맙습니다! ^^

2016-04-23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5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4-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감은빛님, 수고 많으셨어요...
녹색당 파이팅!!!

감은빛 2016-04-25 16:0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고맙습니다!
응원에 힘입어 더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2016-04-25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1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