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괜찮은 연구서가 아닌가 한다. 한국의 자살률 보도는 하도 많이 들어서 뭐 신기할 것도 없는 세상이다. 오늘 하루도 뭍혀 지나가는 수많은 목숨들. 그들도 다 이유와 사연이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들 '끈기가 없다'느니, '생의 의지'가 부족하다는 말들만 반복할뿐 문제의 밑바닥은 보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자살, 차악의 선택"은 아무도 보려하지 않은 '밑바닥'을 보려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특히나 자살자들의 유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후 자살의 유형을 8개로 남긴 것은 지금까지 뒤르껭의 자살 연구에 기댄 자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이제는 저자의 연구 결과물로 옮겨질 듯 하다. 서재의 공간 부족으로 내려진 아내의 책 구입 금지령을 어겨야 될 듯 하다. 이 책은 빨리 사서 읽고 싶다. 아울러 집에 모셔진 뒤르껭의 자살론도 끄적거려 봐야 겠다. 그리고 책 구입하는 김에 예전에 페이퍼에 쓴 자유죽음도 사야 겠다. 이렇게 한권 사려 하다보면 꼭 2-3권 이상 사게된다. ㅋㅋ 

 

한겨레신문 2010. 5.22 자살은 ‘소통’을 위한 마지막 몸짓? 

405건 유서로 자살 의도 분석…고발·회피·비난형 등 8개 나눠
‘부도덕’ ‘정신 질환’ 통념 비판…삶의 포기 아닌 과정으로 봐야 

    

2008년 9월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한국인 자살자 수는 10만명당 24.8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이 수치는 한참 낮춰잡은 것일 수 있다. 2000년 한국인 자살자 수는 통계청 집계로는 6460명이지만 경찰청 집계는 이보다 82.6%나 많은 1만1794명이었다. 2001년엔 경찰청 집계 1만2277명으로 통계청 집계 6933명보다 77.1%가 많았다. 통계청 집계는 관청 사망신고서에 토대를 둔 것으로 여기엔 자살을 사실대로 밝히기를 꺼리는 문화적 금기(터부)가 작용한다. 자살인데도 ‘병사’나 ‘교통사고’ 등으로 거짓 신고됐을 죽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타살인지 자살인지부터 밝혀내야 하는 경찰청 통계 쪽이 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하루 평균 35명.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대책은 없을까?

2007년 6월6일 74살의 남성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지난 4월15일 교통사고 이후 병원입원 15일, 통원치료 1개월 해 보았지만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는 호전되지도 않고 통증만 가중될 뿐이다. 내가 왜 이 자식들을 욕되게 하면서 이 길을 택했는지에 대해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철학이 있다. 내가 가족에게 폐가 되고, 사회에도 폐가 되고, 국가에도 아무 도움이 안 되면, 하루빨리 생사를 결정해야 된다는 나의 소신.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하서방한테는 아버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해라.”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한테는 알리지 말아라. 7월8일 2일간 시험이란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자살, 차악의 선택> 서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유서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자신의 자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짧은 몇 줄의 당부 내용이었다. 그 노인은 자신의 죽음을 손자에게 특정 일 이후에 알리라고 당부했는데, 그 이유는 손자의 기말고사가 그날 끝나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비록 짧은 몇 줄에 불과했지만 자살이 단순히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이후 많은 유서에서 자살자들의 다양한 의도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여러 자료를 구성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었다.”

지은이는 서울과 수도권, 비수도권 3개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일어난 자살사건 1321건 수사기록과 거기에 첨부된 405건의 유서들을 면밀히 읽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살을 8개 유형으로 범주화했다. 74살 노인의 자살은 이 가운데 ‘배려’형 자살의 예. 

1998년 3월25일 14살의 동갑내기 여중학생 4명이 20층 아파트 옥상에서 함께 뛰어내렸다. 유서와 수사기록을 통해 자살방법, 자살자들의 문제상황, 상황에 대한 자기 인식, 욕구, 죽음의 선택과 자살 의도 등을 차례로 살핀 지은이는 이들의 자살 유형을 소통과 주변 사람들의 정서적 이해를 추구한 ‘이해’형으로 분류했다. 뇌출혈로 지체장애인이 돼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50살 남성이 부정한 아내를 원망하며 2000년 10월24일 음독자살한 것은 ‘고발’형.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다 20여억원의 빚을 남기고 2003년 2월23일 투신자살한 43살의 남성, 도박벽 있는 무능한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까지 빼앗긴 뒤 재혼했으나 생활고와 지병 때문에 2001년 4월13일 음독자살한 33살 여성은 자살을 도피처로 삼은 ‘회피’형. 바람피우면서 1억2000만원의 카드 빚을 남긴 난폭한 남편에게 끓는 식용유를 부어 중화상을 입힌 뒤 13살 딸과 함께 아파트 9층에서 뛰어내린 49살 여성의 저주는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영구적 상처를 안기려 한 ‘각인’형. 유서에 날것으로 담긴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런 사례들이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이밖에 해결, 비난, 탄원형까지 포함한 모두 8가지 자살 유형은, 자살을 사회구조와 여러 상황적 요인에 의해 야기된 ‘실패’와 아노미라는 ‘좌절’을 거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뒤르켐적 자살연구의 기본적인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중요한 사회학적 매개변수들을 부가한다. 구조적 요인이나 경제 등 문제상황이 자살 고려의 주요 계기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직접 자살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에는 성찰과 의미부여라는 매개변수가 작용한다. 지은이는 이를 ‘소통적 자살’로 개념화한다. 소통적 자살은 자살자가 자신의 문제상황을 해석하고 자기 삶을 평가하면서 이를 주관적으로 내면화한 뒤 죽음을 준비하고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는 ‘성찰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출된 ‘메시지’,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타자 지향성’을 구성요소로 삼는다. 이 요소들에 자기 귀책적 평가와 타인 전가적 평가, 정서적 메시지와 문제지향적 메시지, 일방적 소통방식과 상호적 소통방식이라는 대립적 범주들을 섞어 조합한 것이 소통적 자살의 8개 유형이다.

지은이는 자살을 실패한 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나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행위로 보는 통념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언론도 자살을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고, 학계조차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논의하면서 자살을 선험적 사회문제로, 자연스럽지 않은 비정상으로, 그저 예방하고 관리하고 처리해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소통적 자살 개념에 따르면, 자살은 단순한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으로 구성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요 전략이요 기획일 수 있다. 자살자들은 자살을 결코 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현실의 고달픈 삶이 최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할 뿐이다. 말하자면 ‘차악의 선택’이다.

국내 최초의 유서 심층분석서라 할 <자살, 차악의 선택>은 그러니까 기존의 자살이론에서 소홀했던 자살자의 성찰과 의도를 중시하고, 구조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행위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행위 지향을 유형화하는 공을 세웠다. 이것이 ‘소통적 자살’ 개념의 이론적 의의라면, 이 개념적(언어적) 도구를 통해 자살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각 과정별로 그것을 막기 위한 단계적 개입전략을 효과적으로 수립할 수 있게 한 것은 그 실천적 의의라 할 수 있겠다. 개념이 없으면 이해도 없고, 이해가 없으면 실천도 없다.
 

■ 지은이와 함께
 

“금기·은폐가 문제 더 키운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 가장 높은 이유를 굳이 물어봤더니 박형민(39)씨는 외국과의 비교사례들이 없기 때문에 뭐라 얘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통적 자살은 전체 자살 가운데 몇%나 되겠느냐고 또 물었더니, 이번에도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표본추출 작업이 필요한데 내 자료는 편의표집이어서 한국 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 하긴 힘들다. 따라서 몇%라고 얘기하는 건 무모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현상 포착을 위한 언어적 도구를 마련”하고 “(분석)틀을 제안한 정도”라며 따로 검증작업, 후속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이처럼 깐깐한 박씨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자살 연구로 200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살, 차악의 선택>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를 일반 독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해서 펴낸 것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2002년 들어갔는데, “쫙 깔린” 검찰청 기록조사 자료를 보고는 감격했단다. “사회과학자들은 자료 욕심이 많다. 자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때 자료에 파묻힌 내 모습에 스스로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지금까지도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자살 주제로 논문을 쓰자니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점이었다. 조사 대상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어서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 미수자나 유가족, 통계청의 ‘공식 통계연구’ 등을 생각했으나 그것들은 아무래도 자살에 대한 간접적인 접근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도덕적으로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연구를 방해했다. “무슨 기관 자살예방센터인가 하는 데서 발표회를 하면서 나를 토론자로 부르기에 갔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조차 ‘어찌 제정신으로 자살을 한단 말이냐’는 식의 황당한 얘기를 했다. 은폐가 문제를 키운다.” 그러니 자살 관련 사회학적 연구가 국내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그 돌파구를 경찰의 수사기록과 유서에서 찾아냈다. “유서는 자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데다 작성 과정에 연구자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도 적합한 연구자료다.”

물론 유서도 일률적인 틀로 분석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유서를 남기는 자살자는 전체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돼 표본의 대표성에도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박씨는 ‘질적인 접근’을 통해 극복했다. 개인을 구조의 일방적 피해자로 보는 ‘양적인 접근’과 행위자의 주관적·주체적 평가와 해석과 선택을 중시하는 질적인 접근. “확률적 표본추출에 의한 통계적 일반화를 지향하는 양적 분석에 비해, 범주의 다양성과 새로운 사실을 지향하는 질적 분석은 표본의 대표성 문제를 완화할 수도 있다.”

문제발생 단계, 성찰과 해석 단계, 문제의 내면화 단계, 행위선택 단계, 자살실행 단계로 개념화한 ‘소통적 자살’의 단계마다 개입해서 이를 저지하는 실천적 개입전략과 관련해, 박씨는 환경도 개선하고 전문인력도 양성해야 하지만 예컨대 너무 많아 헷갈리는 각종 응급전화를 상담과 신고, 두 가지 정도로 통합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ps : 기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문뜩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조차도 폄훼하고 깍아내리며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한낫 치기어린 개인의 한풀이로 이해하는 저질스러운 세상에 이 책은 문제 해석에 조금 도움이 될 듯 하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이다. 어제 저녁 민노당 당원 및 당우란 이유로 전교조, 전공노 회원 200여명이 무더기 파면, 해임 당했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다시 한번 6월2일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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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법으로 유명한 조벽교수의 강의법이 나온다. 중간에 교사의 '복장'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난 동의하기 어렵다. 조벽교수는 매 첫강의때는 정장을 입는단다. 정장과 같은 교사의 '복장'에서 교사의 권위를 세워 준단다. 물론 그럴수도...하지만 권위를 찾아주는 복장에 검정색 '정장'에 국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겨레신문 2010.5.24 ‘3A 시대’에 맞는 눈으로 보라 

높다랗게 지은 백화점, 엘리베이터는 늘 고객들의 불만을 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줄은 늘 길기만 했다. 당황한 백화점 사장은 기술자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지어진 건물, 엘리베이터를 많이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속도를 높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너무 빠르면 사람들이 멀미를 하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온갖 첨단 기술을 끌어들였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청소부였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과 네 벽면에 거울을 달았다.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느라 지루함을 잊었다. 엘리베이터가 느리다는 불평도 훨씬 줄어들었다.

기술자들은 이토록 간단한 해법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기술자들은 모든 문제를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쉽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면 해결 방향도 외곬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를 공학자이자 강의기법 전문가인 조벽 교수는 ‘문화적 장애’라고 부른다.

문화적 장애는 교육에서 특히 심하다. 우리 교육은 ‘학력신장’과 ‘학업부담 경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갈팡질팡이다. 과연 공부를 덜하면서도 성적은 잘 나오는 방법이 있을까? 우리 국민 대부분은 십수년 넘게 학교를 다니며 입시에도 길들여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장애’는 당연해 보인다.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면 화끈한 해결책이 쉽게 나올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벽 교수는 학교에서 모범생을 가리는 잣대부터 과감하게 던져 버린다. 요새 학생들은 더럽고(dirty) 힘들며(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 이른바 3D 업종을 싫어한다. 인내와 끈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던 어른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을 헤쳐가려면 학생들은 이런 일을 싫어해야 옳다. 그래야 깨끗하고 쾌적하며 안전한 일을 늘리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겠는가.
또한, 요새 젊은이들은 흥미 있는 것 외에는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 좋아하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정보의 바다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방법이라 해도 좋겠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가 관심 있는 일만큼은 밤낮 안 가리고 매달리지 않던가. 앞으로의 세상은 이런 열정을 갖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새 시대에 맞는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강제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재미를 느껴서 배움에 빠져들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육에 강제가 없을 수는 없다. 윽박지름 없이 스스로 알아서 깨우침을 얻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루소의 교육소설 <에밀>은 이 물음에 답을 준다.

루소는 절대 학생들을 야단치지도, 매를 들지도 말라고 말한다. 그냥 자기가 한 짓의 결과만 깨닫게 해도 학생은 변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장난치다가 유리창을 깼다고 해보자. 이때도 교사는 다그쳐서는 안 된다. 깨뜨린 창문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 보라. 찬바람이 들이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피해를 낳았는지를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누구나 착하고 성실하다. 상황이 되면 억지로 끌어내지 않아도 선한 심성은 저절로 튀어나온다.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하지 않아서 고민인가? 학생들을 야단쳐 봤자 교실 분위기만 싸늘해질 뿐이다. 먼저 자연스럽게 교사의 권위를 세울 방법부터 고민해 보자.

조벽 교수는 학기 초에는 늘 정장을 입는다고 한다. 복장은 교사의 권위를 지키는 효과적인 ‘소품’이다. 아무리 교사와 친하다 해도, 학생들은 정장에서 ‘선생님’의 권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곤 한다. 그러나 한 명 한 명 성의 있게 대하기에는 학생 수가 너무 많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벽 교수는 ‘매스-커스터미제이션'(mass-customization)이라는 방법을 일러준다. 한 시간에 5~6명씩 이름을 부르고 관심을 보여 주자. 교사의 관심을 제대로 느낄 만큼 한 명 한 명의 눈을 충실하게 바라봐 준다. 한 학기가 지나면 교실의 학생들 대부분은 교사의 오롯한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큰소리로 강제하지 않아도 학생들을 배움으로 이끄는 좋은 방법들이라 하겠다.

예전 시대에는 지시를 잘 따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인재가 필요했다. 공장을 돌리려면 정해진 규율에 따라 시간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중요한 시대다. 우리 사회는 3D의 시대를 지나, ‘언제나’(Anytime), ‘어디서나’(Anywhere), ‘누구라도’(Anyone) 자기가 원하는 일에 빠져드는 ‘3A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학교 모습은 여전히 공장과 비슷하다. 학교는 꽉 짜인 일과에 따라 학습 ‘할당량’을 반복해서 던져준다. 이런 가운데서 창의력 있는 인재가 나올 수 있을까? 문제를 푼다며 내놓는 방법들도 여전히 ‘공장 시스템’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교과목을 줄이고 주요 과목 위주의 학업 성취 수준을 높이는 데 매달리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쌓으라고 재촉한다. ‘효율성’에 매달리는 생산라인과 ‘상품성’을 강조하는 마케팅 부서가 다투는 모습과 비슷하다.

“내 배움이 멈추었던 유일한 시기는 내가 학생일 때였을 뿐이다.” 소설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지금 학생들도 비슷한 하소연을 하지 않을까? 교문만 벗어나면 세상은 온통 ‘맞춤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대량생산 체제’다. 그러나 불평을 늘어놓기만 해서는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시대 흐름에 발맞추면서도 학생 한 명 한 명을 배려하는 좋은 교육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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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3스타 음식점이 이렇게 희소성이 있는줄은 미처 몰랐다. 근데 생각해보면 미슐랭 3스타 음식점 음식이 내 입맛에 맞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3스타야 미슐랭 입맞에 3스타지 내 입맞은 아니니깐..ㅋㅋ 하여튼 세계적인 요리사가 한식의 매력과 힘을 알게 됬다는 것은 참 좋은 일 같다. 아직 멀었지만 PBS에서 다큐가 나오면 우리나라에도 방영했으면 좋겠다.

 

한겨레신문 2010.5.20 [매거진 esc]
13부작 한식 다큐 제작 위해 방한한 세계적 요리사 장조르주 

   » 요리사 장조르주 

프랑스의 권위 있는 맛집가이드 책인 ‘미슐랭 가이드’ 별점 3개(최고 맛집)를 받은 식당을 평생에 한번이라도 가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지난해 기준으로 파리에 10곳, 뉴욕에 5곳, 도쿄에 11곳 등 전세계 85곳뿐인 이들 식당을 짧게는 한두달 전에 예약을 하거나 심지어 1년 전에 예약을 해도 가기 어렵다. 뉴욕의 ‘장 조지’ 역시 그런 곳이다.

‘장 조지’의 오너셰프인 프랑스 출신의 장조르주 봉게리히텐(54·사진)은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 폴 보퀴스 등을 사사한 뒤 젊은 시절을 방콕·홍콩 등 아시아에서 보내고 뉴욕에 입성해 ‘동서양 퓨전 요리’로 뉴요커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스타 요리사다. 1997년 미슐랭 가이드 별점 3개를 받은 뒤 뉴욕에만 ‘장 조지’ ‘조조’ ‘스파이스 마켓’ 등 9곳, 파리와 상하이 등 전세계에 15곳의 식당을 둔 ‘요식업 재벌’이기도 하다.

맛 칼럼니스트 예종석씨는 “요리뿐 아니라 인테리어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천재 요리사이자 혁신적인 푸드 스타일리스트이며 뛰어난 식당경영자”라고 평가했다. 전세계 유명 식당을 섭렵한 책 <세계의 별을 맛보다>의 저자 안휴씨는 “동서양의 식재료를 프랑스 요리에 녹여 넣었는데 그걸 20년 전에 했으니 그야말로 요리업계의 개척자”라고 말했다.

‘한식 세계화’가 현재 화두인 지금, 장조르주가 13부작 한식 다큐멘터리 ‘스톱 앤 밥 코리아’(Stop and Bap Korea·가제)를 찍겠다고 한국을 처음으로 공식방문한 지난 12일, 기자회견장은 60여명의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날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응대한 장조르주는 <한겨레>의 추가적인 서면 인터뷰에도 친절한 답변을 보내왔다.

갑자기 왜 한식 다큐인가?

장조르주가 한식과 인연을 맺게 된 걸 설명하자면 우선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장조르주가 99년 첫눈에 반해 6년 열애 끝에 결혼한 부인 마르자(34·한국명 말자)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이다.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마르자는 3살 때 고아원을 통해 미국 가정에 입양됐다. 20대에 생모와 해후한 마르자는 그때부터 한식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엄마와 처음 만나던 날 먹었던 게 국수였어요. 영혼이 따뜻해지고 한국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후로 집에서 김치도 직접 담가 먹어요. 그런데 아직은 만들 때마다 김치 맛이 달라요. 하지만 육개장과 매운탕은 잘 만들어요.” 이들 부부는 한달에 4~5번 우래옥 등 뉴욕의 한식당을 찾는 것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지난해 9월 유엔 세계정상회의 당시 열린 한식세계화 행사장을 직접 찾아 ‘파전’ 등의 요리를 직접 만든 걸로 미국 언론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걸 계기로 음식 다큐를 전문적으로 찍는 프로덕션 ‘프라페’가 이들 부부를 주연으로 한식 다큐멘터리를 기획했고 이는 내년 1월부터 미국 공영 피비에스(PBS)에서 전파를 타기로 결정됐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자마자 서울 남대문시장의 갈치집을 들른 것을 시작으로 두레·용수산·산촌 등 이름난 한식당을 방문한 이들 부부는 식당에서 음식을 맛보는 건 기본이고 요리를 직접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약재전문인 경동시장도 들러보고, 제주도에선 직접 장을 봐 토속음식을 만들어봤다. 춘천에선 막국수, 안동에선 안동소주, 초당에선 순두부를 경험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선 자신의 집과 식당에서 여기서 배운 한식을 만들어본 뒤 가을에 다시 방한해 전주 등지에서 김치 등 발효음식을 집중적으로 배울 예정이란다.
다큐의 13개 편이 각각 다룰 주제는 ‘김치’ ‘국수’ ‘채식’ ‘사찰음식’ ‘길거리 음식’ ‘국과 찌개’ 등이다.

장조르주에게 한식이란?

“한식 중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는 장조르주는 한식의 매력으로 “소화가 잘될 뿐 아니라 지방이 적어 살이 찌지 않는 영양적인 균형식”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한국인 ‘사위’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며 “아직은 내 식당에 한식을 응용한 메뉴가 없지만, 앞으로 연구해서 한국맛을 조합한 메뉴를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식의 세계화에 있어서 한식을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내놓을 것이냐,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 내놓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80년대 초반 처음 타이에 갔을 때 타이 음식에 감동받았다. 하지만 미국에 돌아와 타이 식당을 가보니 타이 음식들은 그 맛이 아니었다. 다양한 타이의 향신료를 전부 설탕으로 대체해 모든 음식이 달달한 맛으로 변형돼 있었다. 그게 타이 음식이 미국에서 실패한 이유였다. 스시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유는 전통을 지켰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도 마찬가지다. 혹시 똑같은 식재료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요리법은 똑같아야 한다.”

장조르주의 성공비결은?

요리에 대한 영감을 “여행을 하며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 얻는다는 그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맛본 음식들도 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재작년 발생한 금융위기로 세계적으로 요식업계가 위기를 겪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식당의 가격은 합리적인데 특히 점심식사 가격이 부담이 없다. 그래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식당은 점심때 20달러대의 세트메뉴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성공비결로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놀고 결혼을 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경쟁자로 “현재로선 아내 마르자”라고 말했다. “지금은 아내가 나보다 한식을 더 잘 만들기 때문에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이 끝날 즈음에 내가 그녀와 실력이 동등해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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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5.18 [예종석의 오늘 점심] 설농단, 슐루탕, 설렁탕  

우리나라 대중음식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개의 주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선농단(先農壇) 연관설로,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매년 음력 2월에 대신들을 이끌고 동대문 밖에 있던 선농단에 나가 제사를 지내고 몸소 밭을 가는 시범을 보이며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었다고 한다. 그런 뒤에 제단에 바쳤던 소로 현장에서 국을 끓여 귀천에 관계없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선농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설을 <조선요리학>의 저자 홍선표는 좀더 드라마틱하게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서 촌보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에 못 견디어 친경 때 쓰던 농우를 잡아 맹물에 넣어 끓여서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른 견해는 몽골어 영향설이다. 몽골말로 고깃국을 ‘슐루’라 하는데 고려시대에 이것이 전래되어 ‘슐루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음운변화 되었을 것이라는 해설이다. 조풍연에 의하면 옛날의 설렁탕집에서는 소 한 마리를 우피와 오물만 제하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끓였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끓인 진국은 “오늘날의 뜨물국 같은 설렁탕의 맛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며 “투박스럽고 거칠지만 소라는 짐승의 맛을 이보다 더 한꺼번에 느끼는 방법은 달리 없다”고 극찬한 바 있다.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을지로4가의 ‘문화옥’은 설렁탕을 옛날 방식에 가깝게 끓여 내는 집이다. 좋은 양지와 사골 등을 반나절 정도 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한 뒤 장시간 푹 고아낸 국물은 잡내가 없으며 진하고 구수하다. 설렁탕에 빼놓을 수 없는 김치도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것이 조화롭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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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아파트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사실 아파트가 10억을 한다고 해도 그 가치는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소득 없는 자산인 것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퇴직연령층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것 중 하나가 자산의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에 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산은 10억인데, 정작 아파서 병원비를 낼 1000만원은 없어 고생한다는...물론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돈의 가치라는 것이 이렇게 허무맹랑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사에 나오는 모든 이들의 공통점은 집(아파트)이 편안한 나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나도 이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아주 잘 순응(?)한 평범한 인간이긴 하지만 매번 가슴 한 곳이 찔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경향신문 2010.4.7 [주거의 사회학]강남 2주택 60대 은퇴부부 vs 내집 꿈 이룬 30대 신혼부부  

■ 강남 2주택 60대 은퇴부부
- 90평 ‘돈먹는 애물’ 팔기도 곤란, 세금·분담금 등 월 700만원 적자-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사는 서모씨(60)는 1가구 2주택자다. 반포에 35억원짜리 297.521㎡(90평짜리) 아파트 한 채, 잠원동에 15억원짜리 148.76㎡(45평)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다. 부동산 합계로는 시가 50억원.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냐”며 부러워하지만 서씨에게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요즘엔 ‘집값이 미국·일본의 버블붕괴 직전과 비슷하다’는 뉴스로 밤잠을 설칠 지경이다.

“비싼 집이 있으면 뭐합니까? 난 은퇴해서 수입도 없는데 종합부동산세며 세금이 지난해 1000만원 나왔고, 재건축 추가분담금 등 금융비용만 한달에 175만원씩 나가요. 생활비까지 포함하면 한달에 700만원 정도 적자가 납디다. 몇 억 떨어졌다는 얘기는 나오는데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서씨가 아파트로 골치를 앓게 된 것은 2000년. 그가 살던 82.645㎡(25평)짜리 주공아파트가 재건축 지정된 이후다. 당시 그의 가족은 살던 집을 전세주고 현재의 잠원동 ‘ㅎ’아파트를 구입해 이사했다. 9년 만인 지난해, 낡은 5층 아파트를 허문 자리에 초고층 ‘ㅈ’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는 재건축단지 평형 추첨에서 중소형 평수는 다 떨어지고 90평형대에 당첨됐다. 당시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지만 괜히 큰 평수가 되는 바람에 부담만 커졌다.

“왜 안 파냐고요? ‘ㅈ’아파트에 7억원짜리 전세를 놨는데, 아파트를 팔자니 7억원을 내줘야 해요. 또 재건축 때 추가분담금으로 낸 돈이 8억원입니다. 세무사를 구해서 계산을 해봤더니 지금 1가구 2주택자라서 양도세가 7억원에서 8억원에 달한다고 합디다. 35억원에 아파트를 팔아도 10억원 정도밖에 안남는다는 계산이 나와요. 게다가 팔려고 내놔도 사려는 사람이 나설지도 알 수가 없어요. 강남 부동산 시장이 요즘 예전같지 않아요.”

 현재 살고 있는 45평 아파트를 팔기도 망설여진다. 양도세는 90평짜리에 비해 한결 적은 3억~4억원 정도로 예상되지만, 당장 서씨 가족이 살 곳이 없어 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세를 살아야 할 형편이다. 그는 “투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살고 있던 곳이 재건축되고, 또 어쩌다보니 축구장만한 평형의 아파트를 갖게 된 것”이라며 “얼른 아파트 하나는 처분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또다른 자가보유자 김모씨(51)는 투자 목적으로 집을 샀다가 은행융자를 갚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그는 ‘반포주공아파트가 재건축되면 거주민들이 가까운 방배동에 집을 얻을 것’이라는 지인의 ‘투자정보’를 입수하고 3년 전 4억원을 융자받아 297.521㎡(90평형) 빌라를 12억원에 구입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반포의 대형평수는 재건축이 막막한 상황인 데다, 주변의 아파트 시세는 올라도 빌라는 별반 오르지 않았다.

그는 “집은 팔리지도 않고 이자하고 원금을 갚느라고 살림이 팍팍하다”고 말했다.

경기 과천에 거주하고 있는 한모씨(42)도 지난해 대출을 받아 집을 한 채 더 산 뒤로 원금상환 때문에 쩔쩔매고 있다. 7억원짜리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던 한씨는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3억원을 대출받아 아파트 한 채를 더 샀다. 그러나 새로 산 5억원짜리 아파트의 시세는 전혀 오르지 않았고, 가격이 떨어질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매달 금융비용만 200만원이다.

일본의 부동산버블이 붕괴했을 때 주택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졌다는 전례는 한씨에게는 애써 무시하고픈 이야기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거뜬했던 ‘강남불패’의 신화가 있고, 해방 이래 집값이 그렇게 하락한 적은 결코 없으며, 경기가 풀리면 예전보다 더 오를 것이라고 한씨는 굳게 믿고 있다.

■ 내집 꿈 이룬 30대 신혼부부
- 월 160만원 상환, 둘이 벌어도 허덕, 커피값도 없는데… 출산 엄두 못내 -

 

 지난해 초 결혼한 임상윤씨(35·가명) 부부. 집이 있고 두 사람의 월소득을 합치면 400만원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늘 쪼들린다. 한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즐겨마시던 원두커피를 끊고, 좋아하는 술은 한달에 한번 날을 잡아서 마신다. 월급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무섭게 모기지론 상환금으로 월 160만원씩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시 행신동에 장만한 85.95㎡(26평)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받은 대출금이 1억2000만원. 원래 갖고 있던 전셋방 보증금과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합쳐서 2억6000만원이 들었다.

모기지론 상환금에다 건강보험료와 연금보험료 80만원을 빼면 통장 잔액은 180만원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임씨와 국책연구소의 비정규직 연구원인 부부의 교통비와 점심값, 휴대전화료, 식비, 관리비, 수도요금 등 각종 공과금을 빼면 여윳돈이 없다. 극장 가본 기억이 흐릿하고, 점심 후 커피전문점에서 입가심하던 습관도 접은 지 오래다.

부부가 무리해서 집을 산 것은 셋집살이를 벗어나고 싶어서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2년 동안 이삿짐을 싸는 데 질린 데다 전셋값 오를 때마다 속을 끓이느니 차라리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내 집 한칸을 장만해보고 싶었다.

어렵사리 ‘내집 장만’의 꿈을 이루고 나니 또 다른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출금 상환이다. 집값은 1년 사이에 오히려 2000만원이나 떨어졌다. 집값 최정점에 물건을 사는 ‘상투 잡은 꼴’이 된 것 같아 내심 불안하다. 비정규직인 아내는 재계약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혼자 벌어서는 영락없는 마이너스 인생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은 속도 모르고 “아이 언제 갖느냐. 아기는 자기 밥숟가락 갖고 태어나니까 쑥 하나 낳으라”며 참견해올 때면 임씨는 말없는 웃음으로 응대할 뿐이다.

또다른 신혼부부인 박영한씨(34·가명)의 경우 주택구입 대출을 받았다. 원금상환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달 이자만 갚아나가고 있다. 월세를 내야 할 대상이 집주인이 아니라 은행인 ‘은행 월세’의 신세다. 재작년에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76.033㎡(23평)짜리 아파트를 2억4000만원에 사면서 은행대출을 1억원 받았다. 부모에게 9000만원, 직장생활로 모은 돈 5000만원을 합쳐봐도 집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중은행에서 연리 5.77%로 돈을 빌렸다. 이자가 비싸다고 해도 어차피 집값이 오르면 충분히 상쇄가 가능하다고 주판알을 튕겼다. 주변에서는 “앞으로 집값이 더 올라서 이번에 못사면 영영 무주택자가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신혼 초에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박씨와 학원강사인 아내 소득이 적지 않았던 덕이다. 아내가 임신으로 학원을 그만두면서 사단이 났다. 월 수입은 절반으로 줄고, 매달 이자 50만원에다 양육비까지 생기면서 남는 돈이 없다. 저축은 꿈도 못꾼다. 아내는 이웃들이 육아강좌를 들으러 문화센터에 같이 가자고 채근할 때도 적자 상태인 통장잔액 숫자를 생각하면 발을 쉽게 뗄 수가 없다. 아내는 다시 학원강사로 나설까 고민 중이다.

아이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거나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생각이다. 그렇잖고서는 내집 마련과 아이의 교육 모두 무너질까 두렵다. 이들 부부의 희망은 집값이 다시 오르는 것이다. 중대형 집값은 떨어져도 소형아파트는 강세라는 뉴스를 들으면 왠지 기대가 된다. 집값이 오른다면 지금 사는 집은 팔고 근처의 30평형대 아파트로 옮길 계획이다. 하지만 장래 계획을 세울 때마다 ‘집’ 문제가 가장 큰 변수다. 집값이 떨어진다면, 집이 ‘돈먹는 하마’가 된다면, 전 재산이 허공으로 날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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