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책들 - 진중문고의 탄생
몰리 굽틸 매닝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맥심 사 오랬더니.’ 이 사진의 제목이다. 사진 속에 맥심커피 상자를 들고 있는 군인의 뒷모습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알려진 고전유머 사진이다. 얼핏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진이지만, 그 제목과 배경을 알고 보면 보는 이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다. 이 사진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상상력과 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잡지 맥심은 사병들의 필독서다. 휴가를 나온 후임에게 선임이 잡지 맥심을 사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후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피믹스를 산 것이다.

 

 

 

 

머리 좋은 후임이라면 커피믹스 상자 안에 잡지를 숨겨올 수 있다. 남성 잡지나 성인 잡지는 부대 반입 금지 품목이다. 하지만 사병들은 여자 사진이 많은 잡지를 보고 싶어 한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 볼 수 있었던 교양 잡지는 샘터월간 에세이였다. 입대 전에 평소 책을 안 읽은 사병들이 글자가 많은 잡지를 거들떠볼 리가 없다. 사병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이런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인들은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오는 책을 가장 좋아합니다.” [1]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요즘 부대에 운동시설, 사이버지식정보방 등이 설치되어 있다. 운동과 컴퓨터,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다. 군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아질수록 진중문고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사실 진중문고도 군인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보급된 오락거리다.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지냈다. 옆에서 식사하던 동료 군인이 그다음 날 전사자가 되는 모습은 군인들이 자주 보는 일상적인 장면이다. 적은 내부에도 있다. 향수병은 군인들의 정신력을 감퇴시켰다.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은 군인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든다. 삶에 대한 허무감이 점점 온몸을 휘감는다. 우울 증세는 불시로 군인들을 덮쳤다. 병사들의 사기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진중문고 제도다.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시기에 미국 전역의 사서들이 군인들에게 전달할 수백만 권의 책을 모았다. 전쟁터에서의 상황, 인쇄상황에 맞게 작은 페이퍼백을 찍어 보급하게 되었다. 사서들은 책이 인간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간 책들은 때론 군인들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불안감을 떨쳐주는 어머니의 역할까지 해주었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군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진중문고 중의 한 권이다. 군인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난 뒤, 소중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그냥 잊힐 뻔한 그저 그런 책이었다가 진중문고 제도 덕분에 다시 알려진 책이다. 군인들은 개츠비의 삶을 보면서 부와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이 일반 소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군인들은 외설적인 장면이 있는 소설을 읽고 싶어 했다. 진중문고를 선정하는 미국전시도서협의회는 군인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당혹스러워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진중문고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전역 군인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책들이 진중문고로 선정되었다. 진중문고는 말 그대로 전쟁 중에 읽는 책(陣中文庫)’이다. 책은 전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군인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리고 포탄에 산화될 때까지 군인들의 곁을 지켜준 든든한 벗이었다. 진중문고는 군인들에게 진짜 중요한책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진중문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들을 잔뜩 고른다고 해서 좋은 진중문고라고 할 수 없다. 군인 간부들의 입맛에 맞춘 책은 진중문고가 아니다. 군인들이 읽고 싶은 책이 진중문고다. 진중문고의 가치를 모르는 간부들은 훈련 교본, 뉴라이트 계열의 책들이 장병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시간에도 국군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픈 간부의 마음이다. 이런 간부는 전시 상태에 진중문고를 선정할 때 훈련 교본, 성경 같은 책들을 보낼 것이다. 안 되겠다. 전시 상황에 대비한 나만의 진중문고를 미리 갖추어야겠다.

 

 

 

[1] 전쟁터로 간 책들183

 

[내가 단 주석 1] 캐슬린 윈저의 영원한 엠버는 외설적인 성애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인들이 열광한 인기 도서였다. (전쟁터로 간 책들184) 이 소설은 내 사랑 엠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분량은 네 권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는 90년대 출판시장을 주름잡았던 추억의 이름, 고려원. 당연히 구하기 힘든 책이다.

 

[내가 단 주석 2] 전쟁터로 간 책들243쪽에 던위치의 공포와 그 외의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온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제목만 봐도 책의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미국의 공포소설 작가 러브크래트프다. ‘던위치의 공포는 러브크래프트가 쓴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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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식적인 진중문고는 ㅎㅎㅎㅎ아실 겁니다..그 진부함과 고루함을....

뭐 정권에 잘 맞는 책들까지 포함해서....

cyrus 2016-08-09 19:35   좋아요 0 | URL
미국 정부도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진중문고에 포함시키지 않아서 사서협회의 반발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종북 기준이 모호한데다가 안 읽어놓고선 무조건 금서라고 규정합니다.

오거서 2016-08-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심 박스를 보면서 배꼽을 잡습니다. ㅎㅎㅎㅎㅎ

cyrus 2016-08-09 19:37   좋아요 0 | URL
요즘 군인들도 맥심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0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안에 숨겼을 듯..ㅎㅎㅎ 이 책도 얼른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전장에서의 독서라..뭔가 비극적이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게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낭만의 내음이 피어납니다. 마치 Band of Brothers를 보는 것 같네요..그나저나 한국군에선 옛날이라도 책읽기는 일단 상병정도를 달지 않으면 매우 어려웠을 듯 합니다. 지금은 다른 시설도 그렇지만, 책이라고 해야 어록이나 정치인 자서전 나부랭이나 비치해놨을 것 같아요.. 장군들 수준이 딱 그 정도잖아요..

cyrus 2016-08-10 07:53   좋아요 0 | URL
진중문고에 관한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합니다. 전사자의 옷에 책을 발견하는 장면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제가 입대했을 때 병영 생활 개선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이라서 선임 눈치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

yamoo 2016-08-1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런 페이퍼를 쓸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역시나 사이러스 님이 먼저 선수를...--;;

cyrus 2016-08-11 20:39   좋아요 0 | URL
글을 누가 먼저 쓰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쓰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그냥 쓰는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