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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이력 - 평범한 생활용품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김상규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8월
평점 :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저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먼저 든다. 스마트폰에 정착된 조그만 카메라 렌즈를 음식 앞에 내미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인다. 매혹적인 음식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그들은 맨눈 대신에 카메라의 액정화면을 통해 사물을 바라본다. 찍는다기보다는 저장한다고 해야 적합하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에 비해 손쉽게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만큼 각자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속에는 수많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숙고해서 셔터를 꾹 누르던 옛 시절과 비교하면 마음에 드는 사진이 오히려 적은 것도 아마 비슷하리라. 특별한 날에만 기념으로 사진을 찍던 그때와 달리 요즘은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고만고만한 사진들을 주로 찍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용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우리의 일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의 발달이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했던 제품과 인간미까지 변화시키며 아날로그의 상징들을 골동품으로 몰아낸다. 과거 CD의 등장으로 LP와 카세트테이프의 입지가 좁아진 것처럼 이 역시 최신 기기의 등장과 온라인 음악파일 다운로드 등으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추억을 되새기는 앨범의 가치도 사라진다. 개인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의 급속한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두꺼운 앨범의 한 페이지를 손으로 넘기며 추억을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똑딱’거리는 마우스 클릭이 사람들의 손을 대신하게 됐다.
당시에는 정말 참신했던 제품들이 어느새 잊혀 사라져 버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는 혁신적이었던 제품이 일용품의 단계를 거쳐 결국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일련의 제품 수명주기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제품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는 것이다. 제조회사는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해 기존에 만들었던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조절한다. 그러니까 소비자가 기존 제품을 오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신상 제품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한다.
세상은 모든 것이 속도 경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예전엔 서서히 낡아가는 것들이 요새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낡아져 버린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아날로그 시대라면 한창 일할 나이인 사람도 요즘은 퇴장을 요구받는다. 낡은 사람들의 경험은 재활용을 거부당한 채 곧장 쓰레기 처리장으로 직행하고 만다.
의자 디자이너이며 디자인학과 교수 김상규는 이미 쓰레기 처리장으로 향했거나 언젠가는 쓰레기 처리장에서만 보게 될지도 모르는 사물의 일대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소개한 사물은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다가 늘 곁에 있어 온 보잘것없는 것이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를 수 있겠다.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백열전구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있다. 백열전구는 호롱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밝았다. 무엇보다 집안에 그을음이 끼지 않는다는 게 획기적 변화였다. 하지만 전력을 너무 많이 먹는 데다 수명이 짧은 단점으로 인해 작년부터 전구 자리에 전력 효율이 뛰어난 LED가 새로 들어왔다. LED의 화려한 불빛이 커질수록 둥그런 유리알이 뿜어내는 전구의 은은한 불빛의 잔상마저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지 마음껏 보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서툰 타자 솜씨로 편지를 작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자기 버튼을 손으로 치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화음을 내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 마냥 손가락 끝에서 섬세하면서도 짜릿한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나오는 스마트폰은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평한 터치스크린 화면만 있을 뿐이다. 사용하려면 화면에 손끝을 살짝 건드리면 된다. 디자인의 변화가 익숙했던 생활 방식을 달라지거나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디자인은 모양을 만드는 기술 이전에 생각을 만드는 기술이다. 우리는 디자인이 만든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디자인 식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삶에서의 발견과 성찰은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다. 디자인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포장술이 아니다. 디자인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면 삶을 멋지게 디자인할 수 있다.
어머니는 인생을 디자인할 줄 알았던 똑똑한 디자이너다. 어렸을 때,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는 교과서에 비닐이나 지나간 달력 한 장을 씌웠다. 달력 숫자가 찍힌 종이가 씌워진 교과서가 무척 촌스럽게 보여서 새 교과서를 받으면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딴 곳에 몰래 숨기고 싶은 생각도 한 적 있다. 교과서를 험하게 다루면 훼손되기 쉽다. 특히 몇 달 지나면 표지에 지저분한 낙서가 덕지덕지 남아있고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어 찢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교과서를 오래 쓸 수 있도록 어머니는 교과서에 커버를 씌웠다. 소박하면서도 일상 친화적 디자인은 투박해 보여도 어머니와 자식 간의 끈끈한 정(情)을 유지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가 있다. 지금의 어머니들은 교과서에 커버를 씌우지 않는다. 자식이 학교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한다. 당연히 이런 관계라면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려면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그 사소한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사소한 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진정한 생활의 발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울수록 그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더욱 감동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는 적어도 나도 모르게 바쁘게 흘러가버리는 그런 하루는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