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목요일에 있을 독서 모임을 위해 오랜만에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소설을 읽었다. 독서 모임 선정도서는 파묵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건 파묵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민음사)이다. 엉뚱한 선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파묵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의 첫 번째 작품부터 봐야 한다. 파묵 본인이 자신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 오르한 파묵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민음사, 2012)

* [읽을 예정인 책] 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 2017)

 

 

 

파묵은 1979년에 발표한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문학상에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터키 문단에 데뷔했다. 내년은 파묵이 터키 문단에 등단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지게 된 그에게도 무명 시절이 있었다. 파묵이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발표했을 당시 터키 문단은 농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선호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의 공간적 배경은 농촌이 아니라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었고, 작가의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일종의 ‘교양소설(Bildungsroman)이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문학상을 받은 지 3년이나 지나서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펼쳐지는 동 · 서양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을 주제로 작품들을 써왔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세계화라는 서양 중심의 거대한 흐름과, 그 속에서 점점 주변부화해 가는 터키의 사회적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다. 파묵은 첫 소설에서 시간적 배경을 아주 넓게 설정하는 대범한 시도를 하는데, 오스만 제국이 점점 몰락해가는 시기인 1905년부터 시작해서 터키 공화국으로 들어서는 과도기의 1930년대를 거쳐, 고속 성장기에 접어든 1970년대 터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파묵은 3대째 이어지는 제브데트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얽힌 격동기 터키 사회의 모순과 갈등까지 고스란히 그려낸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한 가족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터키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하소설’ 또는 ‘역사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19세기 유럽의 교양 소설 형식의 틀로 쓰였기 때문에 ‘교양소설’로도 볼 수 있다.

 

 

 

 

 

 

 

 

 

 

 

 

 

 

 

 

 

 

 

 

 

 

 

 

 

 

 

 

 

 

 

 

 

 

* [아직 안 읽은 책]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민음사, 1999)

* [아직 안 읽은 책] 헤르만 헤세 《데미안》(민음사, 2000)

* [아직 안 읽은 책] 토마스 만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민음사, 2001)

 

 

 

 

교양소설은 한 인간의 전인적인 ‘교양’이 어떻게 완성돼 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교양’이란 소설 속 주인공이 스스로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독일에서 시작된 교양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괴테(Goethe)《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토마스 만(Thomas Mann)《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데미안》등은 독일의 대표적인 교양소설이다.

 

교양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분명히 인식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도전적으로 대응하는 젊은이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은 격변하는 현실 간의 대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 · 외적 갈등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묵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모델로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썼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부에 제브데트의 둘째 아들 레피크와 그의 친구인 외메르무히틴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생활환경, 직업, 사회적 지위는 달라도 모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내면적 혼란을 겪는 인물들이다. 레피크는 자신만의 뚜렷한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무히틴은 시인이지만 제대로 된 시집 한 권조차 펴내지 못한다. 불투명한 앞날과, 자신의 재능에 대한 회의, 경제적 궁핍함 등에 둘러싸여 발버둥치면서 생활한다.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 서구화와 경제 성장에 가려진 터키 청년들의 고뇌를 생생히 재현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을유문화사, 2010)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열린책들, 2009)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민음사, 1999)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읽어 보면, 파묵이 유럽 교양소설을 오마주(hommage)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와 명예를 원하는 외메르를 발자크(Balzac)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라스티냐크와 닮았다고 언급하는 대사가 있다. 《고리오 영감》은 시골 청년 라스티냐크가 파리에 살면서 내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점에서 교양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아직 《내 마음의 낯섦》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 보여준 파묵 문학 세계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이스탄불 중산층 가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면, 《내 마음의 낯섦》은 이스탄불 하층민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하나로 이어진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1900년대, 1930년대, 1970년대 이야기고, 《내 마음의 낯섦》은 1960년대에서 2012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두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터키 근현대사를 관통해 살아간다. 그리고 첫 소설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내 마음의 낯섦》에서도 ‘전통-전근대-동양’과 ‘현대-근대-서양’의 사회적 · 문화적 충돌에서 빚어진 갈등과 그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Trivia

 

 이 작품이 구체적 사실로 구성된 역사소설적인 면이 다분히 있지만 이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한 점에 대해, 파묵은 “역사는 순수하고 순결한 상상력을 부여해 준다.” 라고 밝히면서 이후의 작품에서도(예를 들면 《내 이름은 빨강》, 《하얀 성》등) 실제 역자와 허구를 버무리는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권에 ‘작품 해설’이 실려 있다. 543쪽에 ‘실제 역자와 허구를 버무리는 작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역사’의 오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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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도 노벨문학상 작가가 나올만한데 안타깝네요...

cyrus 2018-11-22 17:00   좋아요 1 | URL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없다는 게 아쉽죠. 그런 작가가 되려면 ‘한국적인 색채가 있으면서도 서양적인 색채도 띄고 있는 문학 작품’을 써야 할 것입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인데도 직접 읽어보면 서양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이 나는 작품인 거죠. 파묵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가 쓴 대표작들은 터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서양문학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입니다. 아마도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터키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었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

카알벨루치 2018-11-22 17:06   좋아요 0 | URL
그렇게도 볼수있겠군요 사이러스님 글을 읽으면서 터키출신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왜 우리나라 출신작가는 못 받았을까 이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더랬어요! ...역쉬 Sㅣ루스 박사님이십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11-21 15: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이 정도 퀄리티를 뽑아내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알라딘에서 사이러스 님 월급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boooo 2018-11-21 17:19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ㅎㅎ

카스피 2018-11-22 11: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공감합니다2 ^^

cyrus 2018-11-22 17:11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ㅎㅎㅎㅎ 요즘 알라딘/북플에 깊이 있는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그런 분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