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지 그래 - 남정욱이 청춘에게 전하는 지독한 현실 그 자체!
남정욱 지음 / 인벤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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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개인의 환경과 개별성을 무시한 채 출세와 성공의 방법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 계발서의 부조리는 정말 밥맛이다. 오래전부터 계발서를 비판해왔다. 동시에 깊이있는 책읽기를 멀리하고 계발서만 죽도록 파고드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독서기호를 꾸짖기도 했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계발서의 내용과 구조를 살펴보면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힐링 서적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래서, 정말 싫다.

   그간 여러 매체에서 보수적 담론을 쏟아낸 숭실대 문예창작과 남정욱 교수는 이러한 내 입장을 지지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자기계발서를 바라보는 기준과 신념만큼은 그와 내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아예 책까지 출간해서 자기계발서의 모순을 공격한다. 그의 신간 『차라리 죽지 그래』는 "자기계발서에 파괴당하는 청춘들을 위한, 남정욱 교수의 잔혹 감성 어드바이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단 명확한 존재성을 가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법 쎈 표현과 방식으로 계발서가 가진 내·외재적 모순을 가차없이 재단한다.

   저자 특유의 단단한 문체와 익살스런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거침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과잉된 힐링과 호도된 멘토링을 강하게 질타한다. 또한 거짓 멘토에 의해 위험한 인생관을 권유받고 있는 불안한 청춘성의 회복을 탐색한다. 저자는 역설한다. 청춘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며, 사는 일은 정말이지 뜻대로 되지 않는 굴절과 실망의 연속이 바로 청춘의 실재임을 일깨운다. 누구도 쉽게 거론하지 못해왔던 청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가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평소 젊은이에게 번쩍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온 몇몇 멘토들에 대해 가차없는 매질을 가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난도 교수를 '착한 어른'이라 조롱하며 두들긴다. 또한 최근 메스컴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다. 저자는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강신주의 다상담』을 마치 회를 떠서 도려내듯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하고 있다. 강신주와 그의 어록에 대한 저자의 칼날은 집요함과 디테일 면에서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냉소적이며 날카롭다.

   실명을 거론하면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논지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강신주처럼 포스트모더니즘 흉내를 내는 소위 '강단 좌익'의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무언가 비틀고 뒤집어서 보려고 하는 그들의 지적 변태행위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마치 사탄의 사술(詐術)인양 비아냥거리며 요란을 떠는 그들의 무지와 착각이 불편하다. 그들의 주장(논리)에서 새로울 건 전혀 없다. 러셀의 반복이고 라캉의 연장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소환일 뿐이다. 오래전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흉내내며 덤방댔던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더 짜증나는 건 이런 방식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실재를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연역적 결정론(決定論)대로 뒤집고 비틀어 사회적 구성물로 치환하려는 사조가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 본질은 동일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머문다. 과학적 지식과 귀납적 사실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조체로 대체시킨다. 종국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병(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풍토를 가르치고 선동하는 지식인들이 가장 큰 문제다. 강신주는 그중 최전선에 있다. 그가 쓴 『다상담』이나 『감정수업』을 읽으며 나는 충격을 넘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일하지 말고 노는데 힘써야 하고, 올해 안에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하며, 부모님을 반드시 우려먹어야 하고,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강신주의 인생관은 도대체 무슨 개똥철학이란 말인가. 그것도 철학인가. 이러한 거짓 멘토와 쓰레기 철학을 시원하게 씹어준 것만으로도 저자의 노고는 결코 녹록지 않다.

   물론 이 책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모순을 비판하면서 결국 저자마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신주와 김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계발서'라는 자신만의 계발서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은 '진짜'라고 하기에는 진부하고 별 것 없다. 새로운 게 없다.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험적 통념과 겹치기 때문에 굳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후반부 '농담수업'이라는 코너는 책의 앞뒤 맥락의 연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불필요하다. 지면을 채우기 위한 장치로 오해를 받을 만하다. 더 많은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의 텍스트를 해부하면서 청춘의 고된 일상성을 진지하게 천착하는 것으로 갈무리했다면 좀 더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삶은 고단하다. 천국은 없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본래 추악하고 고단하며 가난한 것이다. 비루한 현실을 견디고 책임지는 여정 위에 인간 삶의 원형이 놓여 있다. 자기 삶은 철저히 자기 방식대로 본인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멘토와 힐링은 필요한 것이되, 비본질인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소망이 샘솟을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남정욱의 『차라리 죽지 그래』는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계발서가 지닌 부조리의 민낯을 살펴보고 질적으로 우수한 독서를 여망하는, 무엇보다 모호한 인생관 가운데 삶을 둥개는 고된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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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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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의 신간은 항상 구독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탐독했다. 작가 유시민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글 속에 묻어있는 특유의 주관적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빨에는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시민이 전직 장관(혹인 국회의원)이 아닌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그가 현대사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굉장한 기대를 가졌다. 한국현대사는 아직까지 보편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된 바이블이 합의되지 않았다. 유시민의 말대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대한민국은 그 경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우파의 극심한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실례로 지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사태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편적으로 정립시키기 어려운 이 나라 이념 정서의 함몰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의 신간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저자 인생 55년 간의 한국현대사의 기록이다. 전직 장관이었던 저자는 현재의 자신을 '쁘띠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쁘띠부르주아 리버럴 지식인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경험과 주관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운 서술과 개성있는 향기로 한국의 현대사를 흥미진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좌·우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념전쟁의 한복판으로 진단한다. 대한민국 역대 정권의 성격과 그게 상응하는 국민들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분류하면서, 역사는 단지 회고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응당 옳은 얘기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 하여 역사책으로서의 무게가 가벼울 것이라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5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국회의원 경력과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의 경험은 여타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있는 각론들을 추출하는 재료가 된다. 수없이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 당대의 주요 사진들, 꼼꼼하게 표기된 각주와 주석, 적지 않은 인용서적 리스트 등은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저술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과거 어느 책보다 공들인 흔적은 엿보이나 책에 기록된 저자의 견해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저자의 진보주의적 색채, 보다 직선적으로 말해 좌파적 기질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세련돼졌다. 온건하고 차분해진 흔적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동아일보와 조갑제 씨에 대한 긍정적 해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저자의 기준이 아직까지도 자기 편향적 우월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보수주의의 기작을 생물학적 편의성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과거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건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단언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비단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역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였다. 저자는 은밀하면서도 일관되게 인간의 이타적 감응을 이기심 위에 올려놓으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로부터 출발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등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진보의 가치가 우월할 수 있도록 스탠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좌·우파가 갈라지는 이유에 대해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대뇌피질의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기관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는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뇌 구조의 기작 분포로 좌·우파, 혹은 진보·보수를 가름하며 의도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편향된 이념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결구도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기각됐다.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타인과 신뢰·협동의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정합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협동할 때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발전해가는 영지의 동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이 성숙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오히려 사회적 신뢰와 협동이 발달하고 그에 기초한 정신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그러한 정치철학의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자립적 개인이라는 것은 현대 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상의 견해에 있어 저자 유시민이 가진 불편한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의 경험과 일상이 추동하는 평이성과 접근성은 역사에 대한 독자의 탈부담화를 견인한다. 객관적인 수치·도표의 인용과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논지 전개는 역사책이 가져야 할 진지한 무게를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좌·우파 상관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와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인용된 책들을 살피는 것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단 저자의 주관과 해석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현대사 교과서로서의 보편과 권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직 정치인이 쓴 자전적 역사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시민을 봐왔다. 그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유시민은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뺐을 때 멋드러진 지식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작가다. 최근 모정당의 팟캐스트에 고정 출연하여 이런저런 정치적 담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정치를 떠난 만큼 과한 표현을 자제하고 왕성한 저술과 수준있는 강연으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정치적·철학적·이념적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작가로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건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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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휴가철 필독서 코너를 통해 소개한 책이다. 너무 괜찮은 책이라 다시 한 번 밀도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과학적 지식과 객관적 사실이 혼미한 형태로 굴곡되어가는 극심한 형태의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주의에 뿌리를 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공격한 이 책의 존재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겠다.

   작금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나 또한 관련서적을 적지 않이 읽었지만 이에 대해 명확하고 체계적인 정리는 아직까지 요원한 상태다. 주변의 책 좀 읽었다고 하는 독서꾼 가운데서도 이에 대해 자신있게 풀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철학과 현대사상을 전공한 자들 가운데서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만큼 포스트모더니즘은 광범위하고 복잡다단한 사상적 맥락을 가진다. 몇 마디 말과 몇 장의 텍스트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렵다는 얘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를 의미한다.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항으로 발생했다. 엄밀히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속이며 부정이다. 그 본격적 태동은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자 했던 프랑스 68혁명 이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마치 세계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 신세계적 사조로 보이지만 실상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된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 소크라테스가 보면 기겁할 사조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공간 압축성, 즉흥성, 순간성, 파편성의 이데올로기다. 철학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등이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미시성의 담론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 철학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연속하면서 동시에 해체하는 사상사적 맥락에 놓여 있다.

   나는 평소 구조주의 철학서들을 읽을 때마다 심각한 짜증을 발산하곤 했다. 지독하게 난해하고 난잡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의 저작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데리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읽어도 읽어도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철학이나 심리학, 정신분석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 지력의 수준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구조주의는 심오한 학문적 무게를 지닌 경이로운 철학이 아니었다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의 칸트적 난해성과는 성격이 달랐다. 무언가 있기 때문에 난해한 게 아니라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난해한 것이었다.

   <지적 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가 왜 난해할 수밖에 없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공저자 엘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라캉과 보드리야르를 위시한 프랑스 현대 철학의 지적 남용과 학문적 허영을 다양한 논증으로 고발한다. 화려하고 난해한 수식어로 도배가 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대부분 철학자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며 과학적으로 반증되지 않는 허구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일침한다. 사유의 부재를 은폐할 목적으로 난해하게 꾸며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쾌한 고발이 아닐 수 없다.

   진리는 단순하다. 거짓말은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반면 참말은 엉성하다. 독일 사상의 투박성을 유려한 언어로 각색하여 대중적인 호소력을 확보한 게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다. 예컨대 실존주의도 그랬다.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아니었던가. 진지함과 난해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상의 깊이와 무게는 무조건적 난해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허약한 콘덴츠를 난해하고 위압적인 수사로 포장하여 독자를 압박하려는 그들의 내밀한 속셈에 속지 말아야 한다.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쉬운 책은 결코 아니다. 현대사상사에 약간의 조예만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렬하고 통쾌하며 흥미롭다.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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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과 마주친 사랑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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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인간을 위시한 세계 내 모든 생명체의 원초적 갈망이자 기본능력이다. 인간의 사랑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원초적 갈망으로서 이성적 인식을 동반하고 의지에 의해 조종되면서 정감에 의해 깊이 각인되는 신비한 힘이다. 사랑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양면성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거나 반대로, 악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도 이끌 수 있는 두 얼굴을 가진 총체적 기본 능력이다. 사랑의 실천 여하에 따라 인간의 성장이나 성공 혹은 정체나 실패가 결정되는 것은 사랑이 이러한 서로 상반되는 방향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모든 문화·예술의 원천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다룬 꽤 괜찮은 책을 만났다. <사랑의 역사>는 문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여러 고전들을 통해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탐구한다. 저자 남미영 교수는 1597년 출간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2012년 출간된 《사랑의 기초》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대해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사랑이 가진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양면적 속성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폭포수처럼 뽑아낸다.

   34편의 불멸의 고전들을 살피는 것은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우선적인 선물이다. 34편 모두 찬란한 텍스트들이다.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희대의 소설들을 담았다. 저자는 해당작품의 간단한 줄거리와 인상깊은 구절을 담아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를 배려했다. 이미 읽은 독자는 재음미하고 재해석한다는 차원에서, 아직 읽지 않은 독자는 다이제스트 식으로 미리 살핀다는 차원에서 이 책의 구성은 모든 독자를 아우르는 아량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랑을 탐구하는 다양한 시각에 있다. 저자는 첫 사랑, 열정, 성장, 이별, 도덕, 결혼 등 사랑과 연계된 다양한 각론들을 카테고리별로 묶어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 저자의 일방적인 논설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각 고전이 가진 권위를 밑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이 풍성하고 입체적이며 생명력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어느덧 자신이 《첫사랑》의 블라디미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침투할 수 있는 여력을 충분히 제공한다.

   또한 저자의 인문학적 공력과 유려한 문체가 빚어낸 문장은 사랑의 역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좋은 안내자가 된다.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 하더라도 저자 자체의 내공과 결합하지 못하면 매력있는 글은 완성되지 않는다. 문학과 창작, 독서교육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저자의 경험과 이력은 꽤 매력적인 사랑학 리뷰집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인용 하나 어색한 게 없고 문장 하나 군더더기 없다. 근래에 읽은 고전 리뷰집 중에서 단연 손꼽을 만한 수준이다.

   책장을 덮은 후 새삼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왜 불멸의 작가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말하고자 했을까. 인류 예술이 탐구하고자 했던 포괄적 메시지는 왜 대부분 사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을까. 인간의 문화·예술사는 끊임없이 사랑을 천착해왔건만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사랑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삶을 둥개고 있을까. 혹 사랑의 본성이 인간 너머에 존재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자아와 세계의 현존을 넘어 신으로 향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치열한 탐구과정 속에 사랑의 원형질이 놓여있는 건 아닐까. 이 지점에서 사랑은 고귀한 예술을 넘어 귀중한 은혜가 된다. 사랑을 인간이 절대로 임의로 지배하거나 간단히 조종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만에 맘에 드는 책을 만났다. 별점이 짠 리뷰어로 정평이 나있지만 훌륭한 텍스트 앞에서는 호평을 망설이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몇 마디 말로 내려진 사전적 정의로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사랑이라는 원천적 실재를 찬란한 문학작품 속에서 깊이있고 다양하게 탐구한 사랑학 참고서다. 별 네 개 이상이 아깝지 않다. 오랜만의 호평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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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인가 - 정의가 묻고, 권력이 답하다 - SBS <최후의 권력> 21C 권력 대탐사 프로젝트
SBS <최후의 권력> 제작팀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이 시끄럽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로 촉발된 민심의 불편함은 집단감정의 과잉 수준을 넘어 어느덧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 전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식을 줄 모른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이 뒤섞여 있다. 개인의 책임, 부모의 심정, 국가의 역할, 개인과 사회 간의 소통방식, 언론의 수준, 권력의 속성, 현실 정치의 무가치성 등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복잡다단하게 엉켜서 개별 국민의 머리와 가슴을 붙잡았던 것이다. 이는 현재진행 중이고 상당기간 계속해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개인과 국가 간의 거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된 주제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위시하여 세계의 모든 혁명은 이 주제의식 위에서 잉태되고 폭발되었다. '토마스 홉스 - 존 로크 - 장 자크 루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의 계보는 인류가 전제왕정, 입헌군주정, 민주공화정을 거치며 개인과 국가가 어떤 관계로 권력을 분산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앙시엥레짐(구체제)이 붕괴되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는 본격적인 '국민국가'의 출현을 알렸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의 붕괴와 함께 탄생한 140여 개의 신생독립국들은 다양한 형태로 권력의지를 분산시키며 작금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신간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법을 찾아볼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 SBS가 제작하여 작년 한국PD대상 작품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최후의 권력>과 일란성 쌍둥이인 책이다. 당시 방송했던 내용과 방송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다듬고 추가하고 수정해서 기존 방송을 보완한 측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이끌고 가는 힘, 즉 '권력'의 의미와 속성,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21세기인 지금도 왕조사회를 이루고 있는 세 나라를 소개하며 국가권력과 동의어인 '왕'과 개별 국민으로서의 '나' 사이의 거리를 포착한다. 이어서 초강대국 미국이 건국 초기와는 달리 돈과 권력이 융합되는 금권천하의 병든 나라가 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오바마 케어'로 대변되는 미국의 고장난 의료제도의 현실을 고발한다. 다음 장에서는 산마리노 공화국과 스위스 연방의 작은 도시 글라루스에서의 직접민주주의의 예를 소개하며 개별 국민이 국가권력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행사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준다. 마지막 장에서는 결국 문제의 핵심과 출발은 정치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새로운 정치혁명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처음과 마지막을 감곡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장식한다. 감곡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문제와 관련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직접 군수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설득하며, 결국 그것을 성취해내는 과정을 들려준다. 이는 책 속에서 긍정적 예로 글감이 된 산마리노 공화국과 스위스 글라루스의 직접민주주의 사례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공저자 SBS '최후의 권력' 제작팀의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기본인식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수천만, 수억 명이 넘는 현대사회의 초대형국가 속에서의 국민권력 작동방식을 소규모공동체의 메커니즘으로 풀이하려 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고도자본주의 간의 복잡다단한 알레고리에 무지한 SBS 제작팀의 지력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SBS 제작팀은 책 말미 에필로그에서 "우리가 <최후의 권력>과 <최후의 제국>을 통해 현대 마천루가 빽빽이 들어선 워싱턴의 금권정치나 혹은 신문명의 대안이라 주장하는 베이징의 검은 구름에 절망하며 인류의 전통적 권력 형태를 찾아 나선 것은 결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며 안전망을 쳤다. 기본적으로 전통 좌파가 향유하는 루소 식의 잘못된 시간관념에 대한 비판을 미리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보험제도 하나만으로 미국을 금권사회의 병든 사회로 규정하고, 다양한 형태의 촌락공동체와 소규모공화정의 예만을 반복적으로 거론하며 '직접민주주의'의 긍정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데에는 SBS 제작팀이 평소에 가져왔던 정치적·경제적 인식이 어떠한가를 어렵지 않게 엿보게 된다.

   사실 SBS뿐만 아니라 MBC, EBS 등의 공중파에서 반자본주의적 기제를 공유하고 마치 과거가 좋았던 것처럼 시계바늘을 예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 혹은 '자본주의의 그늘' 등과 같은 표어는 이제 지겨울 정도가 됐다. 대안과 대책은 없고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면만을 오려서 비판의 재료로 삼는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유럽에서 전개되는 좌·우파의 정책적 대립도 자본주의의 전제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실례로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을 보라. 두 정당의 정책 차이는 '빈부 격차'와 '경제력 독점'에 대한 문제만으로 집약되어 있다. 그 외에는 간주간성 안에서 서로 간에 포용적이고 공유적이다. 우리나라처럼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며 삿대질하는 진흙탕 싸움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국내 공중파의 역할이 컸다는 게 내 기본 인식이다.

   물론 이 책이 가진 힘은 존재한다. 권력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추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산마리노 국회의원들의 특색을 서술한 대목은 '참 권력'의 진수와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이다. 권력은 권리이기 이전에 책임이며, 직업이기 이전에 봉사라는 사실을 산마리노의 위정자들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관존민비官尊民卑로 대변되는 조선시대 주자학의 쓰레기 유산에 아직까지 함몰되어 있는 한국 정치권력의 현주소는 '국민이 국가의 주권'이라는 이 나라 헌법 1조 2항의 정신을 요상한 방식으로 굴곡시키고 있다. 온갖 특권과 특혜로 얼눅진 이 나라 국회의원의 자화상을 보라. 이런 면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함의된 가장 기초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존재목적일 것이다.

   내일은 지방선거다. '6·4 지방선거'는 유례가 없는 전 국민의 슬픔과 분노 속에서 치뤄질 예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한다. 그러나 실상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한 세월호 참사의 후폭풍은 국가권력의 본질이 국민, 즉 '나'에게 있다는 헌법적 권리가 실상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흐려지고 파괴되는지, 그리고 이런 현상에 분노한 다수 국민의 목소리가 총체적으로 어떻게 결합하여 발산하는지 극단적으로 드러난 아웃풋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선거의 결과가 자못 궁금한 건 비단 나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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