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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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여러 책 속의 명문장을 끄집어내 통찰력 있는 해설을 덧붙인 에세이일 것으로 기대했다. 외연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지만 정작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고만고만하고 말랑말랑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무게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자기계발서의 오류와 한계로 지적받는 '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 등이 책 곳곳을 메우고 있다.

 

저자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채널을 통해 책 속의 좋은 글귀를 소개하며 매주 150만 명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인문 고전, 철학, 역사는 물론,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려 뽑은 130여 편의 ‘인생의 문장들’을 작가 개인의 진솔한 경험담과 함께 전한다"라는 모 인터넷서점의 홍보문구에 혹해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위로는 전혀 받지 못했고 몇몇 책 속 명문장을 소개받는 선에서 내 독서는 갈음되었다.

 

책의 구성은 심플하다. 고전 속의 여러 문장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것에 대한 저자의 사유를 풀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일관적인 구조로 쓰여 있다. 평가하자면 인용과 해석 둘 다에 문제가 있다. 고전 속 여러 문장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와닿지 않는 평범한 문장들이 많아 호감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녹여내는 저자의 해설에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울림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라는 제목은 왜 갖다 붙였는지 책 내용과 괴리적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에 '인문학'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인다는 게 조악하고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자기계발서들이 범람하고 있다. 읽어보면 분명 자기계발서인데 책의 띠지와 출판사의 광고 카피는 '인문 에세이'라며 독자를 호도시킨다. 괴테나 프루스트의 글 몇 줄을 인용한다고 해서 인문서적이 되는 건 아니다. 저자(작가)만의 인문학적 콘텍스트가 그 재료들을 견인하고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문장 자체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사유와 울림 있는 전달력이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나 일기장에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수준 이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내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저자의 위상을 책 한 권으로 재단하는 게 아닐까 저어된다. 하지만 이 글은 서평이며 솔직하고 냉정하게 책에 대한 평가만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힐링서적 중에서 이 책은 최하위급에 속한다. 위로에도 수준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이한 말과 글로 타자(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용기가 가상하고 그런 위로에 따뜻함을 느끼는 독자의 수준도 안타깝다. 책이란 모름지기 차가움과 따뜻함을 혼용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멘토와 힐링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권의 책이 인간에게 본질적 위로를 줄 수 있을지에 답하기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위로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 책들은 대개 '진짜'였고 탁월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이 세상에는 굳이 시간을 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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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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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가 김연수는 어려운 존재다. 한국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유독 김연수의 소설만은 잘 읽히지 않았다. 주제나 소재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싫어한 이유는 오직 문장 탓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이 문장을 이유로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장 때문에 그의 소설을 멀리한다. 관찰과 사유의 깊이는 제법인데 그것을 문장력이 못 받친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그의 문장을 읽는 내 평가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소설가의 일』은 2014년에 출간된 김연수의 소설론을 정리한 산문집이다. 작가의 창작론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 속에는 국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쓴 중년 작가의 집필 내공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의 구조, 플롯, 인물, 주제 등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거의 모든 설명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 오르한 파묵 등 작가가 평소에 좋아하고 영감받아온 세계적인 소설가들의 명문장이 곳곳에 소개되며 작가의 주관을 돕는다.

김연수에게 소설 쓰기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쓰는 일'이다. 초반부터 완벽히 와꾸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소설의 길이 열린다는 게 김연수의 논리다. 그가 이 깨달음의 절정에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을 통해 글쓰기(특히 소설 쓰기)에 대한 운명론적 견인을 엿본다. 그리고 자신을 소설가로 이끈 다음 문장을 소개하는 대목은 일류 소설가 다운 걸쭉한 집념을 확인하게 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를 '캐릭터'와 '플롯'의 견인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본격소설이고, 사건 중심의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 장르소설이라는 얘기다. 작가는 전자(본격소설)를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소설에서 사건보다 인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인물의 전형성이라는 측면과 맞닿아 있는데 외부 상황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물보다 자기 내면의 천착과 성찰을 통해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 더 매력적이고 생명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바로 그것이 본격문학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소설의 시점을 얘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소설을 써야만 하며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을 써야 한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일인칭 소설이라 해서 작가가 일인칭 안에 구속돼서는 안 된다. 일인칭 안에는 일인칭의 시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인칭 시점에는 이인칭 시점이 숨어 있다. 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과 균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궁극의 힘이라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 된 것을 가장 좋은 예로 소개한 작가의 설명은 탁월하다.

작가의 말을 계속해서 빌리자면, 종국적으로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시점이 '너-나'의 관계를 넘나드는 공간적 관점의 입체성을 부여한다면 전지적 시점이란 소설 안팎의 구분을 넘어서 절대적인 시간의 차원을 확보한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신(神)의 존재와 등치시킨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전지적 작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객관적 예술성을 확보하는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레오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한 일,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이다,라고 끝맺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다.

이제 이 서평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나는 서두에서 작가의 문장력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교정되지 않은 난잡하고 장황한 장문장에 대한 거부감을 발산해왔다. 작가는 이 책에서 생각(사유)보다 문장이 우선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일단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라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도 이 세계를 감각하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유독 생각이 많은 소설의 전형을 발견해왔다. 화려하고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문장 자체는 제대로 잘 읽히지 않는 역설이랄까.

많은 독자들이 김연수의 문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문장에 대한 대중적 찬사에 동의하기 힘들다. 김연수의 문장은 확실히 현란하다. 하지만 그 현란함은 문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언어와 사유가 철저히 호혜적인 관계를 이룰 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사유의 빈곤을 감추려는 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연수의 문장에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은 우선 의미 파악이 쉽게 안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영일은 이에 대해 '문장이 사유에 짓눌렸다'고 비평했다. 즉 생각이 너무 많아 문장을 억누르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영일의 입장에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연수의 문장에 관한 내 개인적 호오와는 별개로 『소설가의 일』은 탁월한 산문이다. 오직 '소설 쓰기'라는 창작론을 주제로 이만큼 실제적이고 집중력 있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플롯 포인트, 불안과 무기력, 욕망(혹은 사랑)과 결핍이 채워주는 핍진성, 퇴고의 중요성, 캐릭터와 플롯 중심 소설의 차이,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 등등 작가의 20년 내공이 담긴 많은 충고들이 돋보인다. 소설을 위시한 창작 글쓰기를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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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소설집은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에세이와 소설 문장의 온도 차 무엇...
 
눈물의 생각
김호랑 지음, 김리연 그림 / 바른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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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시집을 만났다. 신간 『눈물의 생각』은 작가 김호랑의 따뜻한 시선과 화가 김리연의 수준 높은 그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시집이다. 책에 실린 시는 작가가 대학생 때부터 쓴 습작시를 묶은 것이라 한다. 책 곳곳에는 삶과 자연, 인간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하고 낭만적인 통찰이 가득하다. 작가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포착되는 평범한 소재들로 아름다운 시를 읊어준다. 

 

누군가 시인을 '천상의 영역에서 글을 쓰는 자'로 정의했던가. 그렇다. 시는 언어를 넘어선 세계이며 언어 이상의 우주이다. 세상의 수많은 소설가와 수필가들은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범상함을 한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엉덩이의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 문학에 계급은 없지만 시는 모든 글쟁이들의 이상이자 로망이다. 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소설 쓰고 소설 쓰지 못하는 사람이 비평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러한 시의 위상을 증명이라 하듯이 작가는 몇 개 되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즉 극한의 압축으로 독자의 마음을 노크하며 농밀한 감동을 선사한다.

 

수록 시 중 가장 탁월한 시는 단연 「그리움」이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라는 후렴구를 가진 이 시는 '그리움'에 대한 작가의 심원한 통찰을 의도된 산문체로 들려준다. 함께 있어도 알지 못하고, 멀리 떠나와도 모르며, 아무리 그리워도 보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사색은 그리움의 본질을 관통하는 놀라운 천착이다. 이 시를 통해 작가의 과거를 엿본다. 작가 스스로 그리움의 끝장을 겪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무언가 '부재(不在)'한 것이 있었던 걸까. 부재는 '비존재(非存在)'와는 달라서 자신 곁에 없이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기에.

 

표제작 「눈물의 생각」도 인상적이다. '눈물의 생각'은 기묘한 제목이다. 눈물도 생각할 수 있을까. 눈물에도 생각이 있을까. 여러 사유가 쌓인다. 시를 곱씹으며 나름으로 풀이했다. 눈물과 눈물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미라는걸. 눈물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눈물과 눈물 사이의 여백과 시간까지를 담아낼 때 그 눈물은 관찰자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눈물 자체만을 보려 하고 눈물 앞뒤로 존재하는 시공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는 인색한 존재일지 모른다. 눈물과 눈물 사이를 탐색할 때 눈물 자체의 순도는 더욱 농밀해진다. 

 

이 시집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화가 김리연의 수채화들 덕분이다.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풍경과 자연을 대상으로 했는데 화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릴 수 없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징하고 생동하다. 시집 절반의 생명력은 김호랑의 시를 발군의 터치로 수식한 화가 김리연의 내공에 있다. 시와 그림이 시집 안에서 정겹게 조화한다. 시집 『눈물의 생각』은 김호랑의 시가 김리연의 그림을 견인하고 김리연의 그림이 김호랑의 시를 재해석하는 관계로 아름답게 포개져 있다.

 

고백하지만 시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시가 가진 고밀성과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텍스트에 관한 개인적 호오 탓으로 시를 멀리하는 편이다. 시의 운명론적 구조, 즉 압축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시는 무겁고 억압적이다. 반면 산문은 가볍고 자유롭다. 소설가 황순원은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문학적 감성은 다분히 늙은 것일까. 고뇌 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일까. 이 진지한 정체성을 질문하게 한 것만으로도 시집 『눈물의 생각』은 탁월하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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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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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유신론자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작중 인물인 무신론자 이반을 완전히 극복한 것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반이 쓴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도전한다. 이는 자유와 빵의 문제로 주제화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긴요한 건 빵의 문제이지 자유의지에 관한 감당할 수 없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는 걸 무신론자 이반은 짧은 액자소설을 통해 강하게 웅변한다.

 

「대심문관의 전설」편이 기독교에 대한 역설적인 패러디라는 세간의 일반된 평가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함에 있어 내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모두 도스토옙스키를 애정 있게 차용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보다 정통 기독교 교리(및 신학)에 더 가깝게 읽히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생 사이에서 탐독이 권장되는 작가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더 찬양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니체, 마르크스와 함께 기독교를 가장 고약하게 기각하려고 한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에 견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라는 아이로니컬한 찬사를 남겼다. 기독교를 허구와 망상으로 조롱한 프로이트가 도스토옙스키를 찬양했다는 점은 나에게 아이러니다. 사르트르의 선언 이후 독자의 해석권이 작가의 창작권을 압도하는 세계가 되었지만 작품의 핵심에 관한 이 다양한 해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현대 신학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은 앞서 말한 나의 고민을 충족시키기 충분한 책이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쓰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소개가 눈에 띄었다. 그전까지 저자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 강렬한 소개 문구에 혹했고 더불어 출판사 '포이에마'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또한 평소에 좋아하고 신뢰하는 석영중 교수의 추천사도 한몫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석 교수의 여러 저작과 강의를 통해 러시아 문학의 조예를 넓히고 강한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다. 순수 분량만 따지면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하는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본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을 사전에 읽어두어야 진도가 나갈 수밖에 없고 저자의 문체가 문학과 신학을 동시에 담아내는 독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한 유려한 주석으로 읽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은혜로운 기독교 철학 에세이로 읽히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고 아름답다. 명언의 나열이며 아포리즘의 향연이다. 이런 책을 이제서야 만났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 가령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의 신학론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말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웅대한 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라고 해설한다. 저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에 대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라는 편을 아예 별도의 장으로 꺼내 32페이지에 걸쳐 구체적으로 해설한다.

 

나는 기존까지 「대심문관의 전설」을 '기독교 제도권 내의 오류와 모순을 은유한 작품'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이반을 발칙한 무신론자로 인정한 뒤에 그가 쓴 패러디 안에서 기독교의 허실이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소설 속에서 이반이 상징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명확히 해설한다. 이반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음이다. 그 어떤 인생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박한 질문,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애써 외면함이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장난이요,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저자는 정리한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인생이 곧 지옥이라는 것을.

 

「대심문관의 전설」에서 이반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사상을 총망라하여 기존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가장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한다. 문제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현실 속으로 구속시키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반이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님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이반은 절대악을 대표한다. 이반은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의 스타보르긴과 키릴로프, 『백치』의 로고진과 같이 지옥을 은유하는 인물이되 이들의 정신 파괴와 자기모순을 대표하고 집대성하는 악의 화신이다. 이에 배치되는 인물로 동생 알료사가 있지만 그는 이반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의 2부를 알료사의 이야기로 채우려 했다는 건 이 공백의 의미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준다. 요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미완이기에 여러 다양한 해설(결론)이 난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의 완벽한 묘사로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자상하게 끌어들이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등장인물 간의 장황한 대화에 거의 대부분의 묘사를 할애하는 도스토옙스키 식의 소설 전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3년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도 그러했는데 무언가 교정이 되지 않는 문장, 인물의 과한 표현과 언행, 어색한 상황 설정 등에 '이거 대문호가 쓴 위대한 역작이 맞아?'라고 의문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자는 나의 이러한 감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의 소설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데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과격한 부정(否定)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부정에서 나온 훨씬 위대한 긍정 때문이다."라고 강변한다. 계속된 서술에서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월등한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소개하고 해설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 도전받은 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것이다. 3년 전 허리 수술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삶의 녹록함에 지쳐있을 때 읽었던 소설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읽기 어려운 시기였다. 차분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고된 도전의 동기로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라는 보물 같은 책이 존재한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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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지음 / 미래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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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왜 논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완독한 지금 시점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의 과거 저작들에 비해 과히 대담하고 도전적인 서술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무역보복이 개시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이 종료되는 등 최악의 한일 관계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을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론이 적지 않은 입장이다. 특히 마지막 위안부 관련 장은 상당히 대담하고 거칠어서 평소 비이성적 반일 정서를 비판해온 나조차도 굉장한 긴장감과 반발심으로 읽어내려갔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종족주의(種族主義)'라는 용어는 처음 접한다. 이영훈 교수는 종족주의를 명확히 정의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집단, 즉 집단에 몰아(沒我)로 포섭되며 집단의 이익과 목표와 지도자를 몰개성으로 수용하는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러한 집단을 기초 단위로 한 정치가 곧 '종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동력은 한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내재된 '샤머니즘'이며 '거짓말', '물질주의', '육체주의'가 그 현실을 이루는 축이라고 비판한다. 즉 종족주의란 한국적 민족주의의 독특성을 부정적으로 비꼰 개념인데 한민족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이고 권위이고 신분으로 발흥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종족주의적 민족성이 비이성적인 반일감정과 뒤섞여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를 만들어왔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를 위시하여 총 6인의 공저자가 집필했다.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주제로 일제 시대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다. 엄밀히 말해서 뒤집는다기보다 역사를 사실 있는 그대로 추적하자는 취지에서 여러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객관적 인식을 촉구한다. 책에 나온 대부분의 내용들은 과거 수차례 학계에서 토론된 것들이다. 예컨대 '쌀 수탈론'과 '쇠말뚝 신화' 등은 이미 학문적으로 사실관계가 정리된 것들이다. 잘못된 팩트를 바로잡기 위해 이 교수를 위시하여 소위 뉴라이트로 불리는 공저자들이 그간 얼마나 땀 흘리고 노력해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려 한 것 같다. 평소 주장해온 일제 시대의 여러 담론들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 범위를 더 넓게 확대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민감한 이슈라 할 수 있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평소 나는 이영훈 교수의 책을 즐겁게 탐독해왔다. 그가 다른 공저자와 함께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기존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후 쓴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어느 학자도 엄두 내지 못할 실증적 연구를 꾀하였고, 두 권으로 출간된 『한국 경제사』는 기존의 서양식 도식을 벗어던지고 사실의 귀납적 결과로서의 한국사의 전 흐름을 추적했다. 또한 『대한민국 이야기』와 『대한민국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데 훌륭한 저작들이다. 특히 『대한민국역사』는 내가 읽어본 근현대사 책 중 가장 정확하고 대중적이라 할 정도로 탁월하다. 그래서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오해와 편견 없이 탐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라고 소개하며 추천하고 있다.

 

이런 내 평가와는 별도로 이영훈 교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입체적이다. 이 교수는 그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 왔다. 그의 책과 논문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무조건 '친일파'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욕먹는 이유는 간명하다. 통계와 사료를 통해 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한다는 그의 실증사관이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민족 정서와 괴리가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사실 이 교수가 실증사학자로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여러 고문서와 통계자료를 통해 추적한 학자적 연구활동은 과히 찬연하기 그지없다. 그 유명한 허수열 교수와의 '벽골제 논쟁', 박현모 교수와의 '세종 토론'을 흥미롭게 바라본 내 입장에서 최소한 객관적인 자료와 실증적 연구에 있어 국내에 이 교수와 맞설 자가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조차도 이 교수가 수년에 걸쳐 발굴하고 연구한 '조선총독부 1차 자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인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점에서 나는 이 교수의 학자적 실력과 양심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굉장히 멀리 나갔다. 기존 논조에 비해 훨씬 더 과격하고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다. 물론 이 교수 혼자 집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논설의 맥락과 구심력이 책 전체의 통일성 면에서 흐트러진 측면이 있다. 각 공저자들이 제시한 통계와 자료에 대해 내가 반박할 입장(수준)은 아니다. 중요한 건 서술의 관점과 논리의 전개 방식이다. 책의 일부 대목에서는 사실 확인과 논리 전개가 상당히 거친 부분이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는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의 상징」라는 제13장이다. 이 교수가 직접 쓴 이 글은 사실상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 일본이 먼저 영토로 편입했고, 한국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인 1952년 1월 평화선 발표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고 기술한다. 이 교수는 '우산도(于山島)' 사료나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爭界)'와 관련된 사항은 모두 기각하는데 그 논리의 수준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다. 무엇보다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로 꼽히는 1877년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와 같은 일본 측 사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실증과 사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자로서 가장 핵심적인 반대 증거를 누락한다는 건 불성실 혹은 고의적이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위안부에 관한 서술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3부 전체를, 전체 책 분량의 1/3을 할애하는데 전개하는 논지와 서술의 방식, 제시된 논거와 결론 도출이 상당히 부적절하고 매끄럽지 않다. 이 교수는 일제의 위안소 운영은 조선의 기생제와 1870년대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를 토대로 생겨난 것이라 주장한다. 이어지는 주익종 교수의 글과 함께 정리해보면 위안부는 자율형 혹은 기업형 매춘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일제의 강제 만행으로써 '성노예(sex slave)'로 끌려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고 6·25 전쟁 시 한국군 위안부도 존재했던 것인데 1937~1945년 역사만 달랑 떼어내 일본군의 전쟁범죄라고 몰아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또한 20세기 말의 기준을 20세기 전반에 투사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뒤 점령국 소련군에 의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의 독일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일본군 위안소 문제를 등가시키는 주 교수의 논지에는 기가 찰 정도다.

 

이 교수와 주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군(軍)에 의해서 운영된 공창제의 부분집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통계와 자료를 인용한다. 그러나 자료 인용의 폭이 좁고 근거가 일면적이다. 관련 장을 두세 번 정독해봐도 김학순 할머니를 위시하여 기존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복할 만한 귀납적 설득력이 포착되지 않는다. 이 교수가 제시한 사료를 부정한다는 게 아니다. 연구자가 필요한 사료만 선택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중에서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가능성은 왜 단언적으로 배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즉 자발적으로 갔던 분도 있고, 혹은 속아서, 돈 벌게 해주겠다, 공부 시켜주겠다, 그래서 속아서 가신 분도 있고, 강제로 끌려간 분도 있을 텐데, 이 여러 층위의 양립 가능성을 재단한 채 "위안부는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단언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대담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만큼의 보편성을 띤 논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자료가 부족하고 논증이 불성실하다. 일부의 부분 오류가 있는 것을 끌어와 전체 오류로 연결 짓는 논리 전개 방식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아 아쉽다.

 

위안부와 관련해 몇 마디 더 하겠다. 평소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중요시했다. 그는 역사를 이끄는 동력을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으로 분석했다. 응당 맞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23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발견한 공(功)이자 공산주의를 누르고 자본주의(자유시장체제)가 승리한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교수에게 묻겠다. 일제 시대에 자유를 말살당한 채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며 '내가 증거'라고 외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에 대해서는 왜 높은 실증적 가치를 두지 않는가.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새로운 기억이 가공됐다"라고 말하는 건 상처에 대한 인간의 기억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존재다. 일본군으로부터 자신의 성(性)을 유린당했다고 일관되고 애절하게 고백해온 수많은 원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교수가 평소 강조해온 '자유로운 개인'이 지금 이제서야 쏟아내는 절규의 목소리다. 그 숭고한 증언이 책 속에 소개된 몇몇 사료에 비해 무가치한 것인지 정말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다.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이영훈 교수가 인간과 역사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실존이 결여되고 무시된 채 일정량의 실증만으로 역사를 천착해서는 곤란하다. 숫자와 기록의 양이 반드시 사실을 확정하는 건 아니다. 더욱이 연구자의 연역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취사선택된 사료라면 더욱 위험하다. 역사학자라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성찰을 전제로 사실관계를 연구해야지 경제와 경제관계라는 수리적 공식만으로 한 시대를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이 같은 시도는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은 칼 마르크스와 같은 사회과학자나 하는 행위이다. 역사에서 실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실증만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목적에 따라 일부만 남은 사료를 사용한 오류, 잔존하는 사료의 무리한 일반화, 사료의 잘못된 해석, 다른 사료의 이해 부족 등의 역사 실증주의가 갖는 오류 가능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역사가들의 고민이었다.

 

총평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책을 쓴 취지와 일부 주제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긍정할 수 있다. 작금의 한국인은 극단적 형태의 분노심으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지나치게 우습게 보고 깔보는 경향이 한국인의 태도에 마치 전염병처럼 옮아 있다. '반일'이 마치 민족적 도덕성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징표가 될 정도다. 영원한 아·적군이 없는 국제사회의 복잡한 힘의 전장에서 무엇이 국익과 민족을 위하는 길인지 냉정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반일주의에 함몰된 작금의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낙후성을 신랄히 고발하는 이영훈 교수의 경고를 나는 오롯이 주목한다. 또한 일제 식민시대를 민족적, 정서적, 감정적 덩어리로 애매하게 보지 말고 통계와 자료를 통해 그 이면을 탐색해보자는 것에도 동의한다.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하게 쌓아올린 그의 투혼과 신념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이 책의 일부분을 긍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많이 나갔다. '사료의 편파 선택'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자주 눈에 띈다. 평소의 이 교수라면 하지 않았을 논리의 과잉과 반증 가능성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는 이 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 많은 내용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쉽게 쓰려다 보니 애매하고 산만한 책이 되었다. 또한 지극히 예민한 주제를 공저자 여럿이 다루다 보니 논리와 표현의 통일성이 결락되어 편집과 구조 면에서 지저분한 책이 되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은 비과학적이고 비역사적이다"라는 주장이 불과 10장 남짓한 분량으로 도출될 수 있는 주제인가. 주장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합리적이고 성실하게 제시해야 독자에게 설득력을 얻는 법인데 제한된 지면에 논거 몇 개 툭 던지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바람에 힘을 잃었다. 또한 외부 곳곳에 존재하는 여러 반론들을 일체 외면(무시)했다는 점에서 비겁한 면도 있다. 충정은 이해하나 내용은 역부족이다. 학자로서 확신이 있다면 전술한 바 있는 몇몇 예민한 주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개정증보판을 출간해주기를 제안 드린다.

 

서평 말미의 이러한 혹평은 나의 순수한 애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영훈 교수가 한국에서 가장 연구를 많이 한 최고의 경제사학자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조선시대와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 그가 쌓아올린 실증사학의 성과는 너무나 찬란한 것이어서 일정 부분의 경외심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책 리뷰어로서 책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으로서 『반일 종족주의』는 많이 부족하다. 총론은 일부분 성공했을지 몰라도 각론에서는 상당히 실패했다. 다른 공저자는 차치하더라도 이영훈 교수만큼은 많이 아쉽다. 그의 내공과 지력을 평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크다 하겠다. 차후 공개석상의 토론회나 후속 저작을 통해 이 책의 빈약한 논증을 보완·수정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책의 평가와는 별도로 서평의 첫 문단에 기술한 바와 같이 『반일 종족주의』는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유야 어떻든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관심과 정서를 반영한다. 동시대적 고민은 설사 그것이 오류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아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한국사에 관한 기본적인 맥락만 잡고 있다면 여기저기에 경도되지 않은 채 자기 주관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비판도 읽고 나서 하기 바란다. 유독 힘든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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