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지 그래 - 남정욱이 청춘에게 전하는 지독한 현실 그 자체!
남정욱 지음 / 인벤션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개인의 환경과 개별성을 무시한 채 출세와 성공의 방법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 계발서의 부조리는 정말 밥맛이다. 오래전부터 계발서를 비판해왔다. 동시에 깊이있는 책읽기를 멀리하고 계발서만 죽도록 파고드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독서기호를 꾸짖기도 했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계발서의 내용과 구조를 살펴보면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힐링 서적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래서, 정말 싫다.

   그간 여러 매체에서 보수적 담론을 쏟아낸 숭실대 문예창작과 남정욱 교수는 이러한 내 입장을 지지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자기계발서를 바라보는 기준과 신념만큼은 그와 내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아예 책까지 출간해서 자기계발서의 모순을 공격한다. 그의 신간 『차라리 죽지 그래』는 "자기계발서에 파괴당하는 청춘들을 위한, 남정욱 교수의 잔혹 감성 어드바이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단 명확한 존재성을 가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법 쎈 표현과 방식으로 계발서가 가진 내·외재적 모순을 가차없이 재단한다.

   저자 특유의 단단한 문체와 익살스런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거침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과잉된 힐링과 호도된 멘토링을 강하게 질타한다. 또한 거짓 멘토에 의해 위험한 인생관을 권유받고 있는 불안한 청춘성의 회복을 탐색한다. 저자는 역설한다. 청춘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며, 사는 일은 정말이지 뜻대로 되지 않는 굴절과 실망의 연속이 바로 청춘의 실재임을 일깨운다. 누구도 쉽게 거론하지 못해왔던 청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가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평소 젊은이에게 번쩍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온 몇몇 멘토들에 대해 가차없는 매질을 가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난도 교수를 '착한 어른'이라 조롱하며 두들긴다. 또한 최근 메스컴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다. 저자는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강신주의 다상담』을 마치 회를 떠서 도려내듯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하고 있다. 강신주와 그의 어록에 대한 저자의 칼날은 집요함과 디테일 면에서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냉소적이며 날카롭다.

   실명을 거론하면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논지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강신주처럼 포스트모더니즘 흉내를 내는 소위 '강단 좌익'의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무언가 비틀고 뒤집어서 보려고 하는 그들의 지적 변태행위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마치 사탄의 사술(詐術)인양 비아냥거리며 요란을 떠는 그들의 무지와 착각이 불편하다. 그들의 주장(논리)에서 새로울 건 전혀 없다. 러셀의 반복이고 라캉의 연장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소환일 뿐이다. 오래전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흉내내며 덤방댔던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더 짜증나는 건 이런 방식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실재를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연역적 결정론(決定論)대로 뒤집고 비틀어 사회적 구성물로 치환하려는 사조가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 본질은 동일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머문다. 과학적 지식과 귀납적 사실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조체로 대체시킨다. 종국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병(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풍토를 가르치고 선동하는 지식인들이 가장 큰 문제다. 강신주는 그중 최전선에 있다. 그가 쓴 『다상담』이나 『감정수업』을 읽으며 나는 충격을 넘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일하지 말고 노는데 힘써야 하고, 올해 안에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하며, 부모님을 반드시 우려먹어야 하고,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강신주의 인생관은 도대체 무슨 개똥철학이란 말인가. 그것도 철학인가. 이러한 거짓 멘토와 쓰레기 철학을 시원하게 씹어준 것만으로도 저자의 노고는 결코 녹록지 않다.

   물론 이 책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모순을 비판하면서 결국 저자마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신주와 김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계발서'라는 자신만의 계발서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은 '진짜'라고 하기에는 진부하고 별 것 없다. 새로운 게 없다.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험적 통념과 겹치기 때문에 굳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후반부 '농담수업'이라는 코너는 책의 앞뒤 맥락의 연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불필요하다. 지면을 채우기 위한 장치로 오해를 받을 만하다. 더 많은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의 텍스트를 해부하면서 청춘의 고된 일상성을 진지하게 천착하는 것으로 갈무리했다면 좀 더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삶은 고단하다. 천국은 없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본래 추악하고 고단하며 가난한 것이다. 비루한 현실을 견디고 책임지는 여정 위에 인간 삶의 원형이 놓여 있다. 자기 삶은 철저히 자기 방식대로 본인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멘토와 힐링은 필요한 것이되, 비본질인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소망이 샘솟을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남정욱의 『차라리 죽지 그래』는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계발서가 지닌 부조리의 민낯을 살펴보고 질적으로 우수한 독서를 여망하는, 무엇보다 모호한 인생관 가운데 삶을 둥개는 고된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