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님들! 반갑습니다.

'다윗의 서재'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dvaid_library)을 오픈했습니다.

상기 링크를 클릭하시거나 유튜브에서 '다윗의 서재'를 검색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유튜브 영상을 통해 좋은 책과 작가를 소개하겠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 는 믿음과 도전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낯뜨겁지만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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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오랜만에 아이들과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추가되는 책은 많아지는데 순서에 맞게 꼽아놓지 않아 체계 없는 중구난방의 책장이었지요. 차일피일하다가 아이들이 도와준다고 하여 잽싸게 작업했습니다. 제 책장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침대가 있는 전면은 문학으로 채웠고 장롱이 있는 후면은 비문학으로 채웠습니다. 이마저도 공간이 부족하여 첫째 딸 방에 별도 책장을 설치해 제가 가장 아끼고 영향을 준 명저들, 즉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카뮈, 위고, 폴 존슨의 저작들을 따로 구분해두었지요.

문제가 되는 건 안방 책장의 한국문학이었습니다. 가나다순의 작가명 배열이 완전히 파손되어 공선옥부터 현기영까지 순서대로 맞췄고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 신경숙, 오소희, 김훈 작가는 별도 구획으로 모아놨습니다. 그리고 문학 내에서도 소설과 비소설을 나누어 일반적인 에세이, 즉 여행후기와 산문집 같은 책은 작가명과 무관하게 별도로 묶었습니다. 아이들이 도와주어 금방 끝날 수 있었지요. 이제 남은 건 후면의 비문학 도서―주로 인문학 서적―를 손보는 일입니다. 워낙 책이 많고 먼지도 많아 하루 반나절을 소요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즐겁게 도와주겠지요.

한국문학을 정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구나. 결혼 전 가장 많이 읽은 게 한국소설이었습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김훈의 『남한산성』을 벌벌 떨며 한달음에 읽은 기억은 아직도 선연합니다. 박민규는 한국소설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작가이고, 공지영은 내가 관심 갖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김별아의 에세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힐링'이었고 『달의 제단』을 위시한 몇 권 안 되는 심윤경의 소설은 나에게 하나의 독특한 '브랜드'로 심어졌지요. 신경숙의 문체와 이문열의 무게는 여전히 저를 압도하지요. 한국소설은 여전히 찬란합니다.

고전과 인문학으로 이탈했던 제 독서를 응시하면서 이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한국문학을 만나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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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끝장이자 극한'으로 평가받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작년에 완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10년간의 혼신의 번역이 출판사 민음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는 뉴스를 통해서다.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에 딱 맞춰 완간했으니 무덤에 있을 작가가 손뼉을 칠만한 절묘한 타이밍이다. 잘 알다시피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긴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단어나 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니 과히 노학자(老學者)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반 독자보다 작가와 평단에게 더 박수를 받는 작품이다. 모두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7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이 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한 소년이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을 향유하면서 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T.S. 엘리엇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20세기 2대 걸작으로 꼽으며 "이들을 잃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라고 했다. '타임스'와 '르몽드'는 이 소설을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베냐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소설은 읽기가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소설을 완독한 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완독주의자(完讀主義者)다. 웬만해선 완독하는 편이다. 도중에 그만둔 책은 많지 않다. 지루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완독한 나였다. 읽었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이었던 32권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짧은 시간에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껌이었다. 그러나 정말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있다. 읽다가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루함'이고 다른 하나는 '난해함'이다. 물론 둘을 동시에 갖춘 텍스트는 정말이지 한 장조차 넘기기 힘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기 위해 수차례 도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긴 호흡을 좋아하는 장편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프루스트의 대작은 과히 넘사벽이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스킵 없이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물음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드는 나만의 정신승리였다. 앙드레 모르아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말했다. 모르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아니 못한 사람이다. 

이 소설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냐면 매번 실패하면서도 재차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이 기묘하고 거대한 텍스트는 매력적인 완역본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최근 내 독서는 방향을 잃었다. 기준과 박력, 도전과 일관이 필요하다. 23년에 반드시 읽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다부진 도전의 가슴 뛰는 부담감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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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최근까지 고 이어령 교수의 저작을 두루 탐독했다. 그중 먼저 하늘로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공감이 될만한 부분이 많아 여러 부분에서 실제적인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딸을 향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감성도 좋았지만 딸에게 보내는 편지지에 넘실거리는 아버지의 거대한 지성이 인상적이었다.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여러 인문학적 토막을 인용해 고인 자신의 철학을 딸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하나의 지적(知的) 로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인생 최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이다. 안나의 선택을 진정한 사랑의 용기로 볼 것인지 순간 욕망에 빠진 불륜의 비극으로 볼 것인지. 톨스토이의 작품 속 분신인 레빈의 삶과 사랑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리뷰할 것인지.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천착한 톨스토이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먼저 쓰인 또 다른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소설이 더 뛰어난 작품인지 등. 나눠보고 싶은 얘기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내 로망을 교육적 욕심이나 지적 허례의식의 발로로 보지 않기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서로 간 견해의 차이를 나눠보기 위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빠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고전문학을 딸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동시에 읽은 후 자기만의 사유 속에서 아빠와는 분명히 다를 딸만의 감상을 경청해 보기 위함이다. 삶과 사랑, 연애와 결혼, 정치와 예술, 노동과 경제 등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다루는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초 나에게 영향을 준 양서만 모아놓은 책장 하나를 큰딸 방으로 옮겼다. 본래 거실에 있던 것을 아내의 피아노 레슨을 이유로 마땅히 옮길 데가 없어 딸 방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 책장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찬연한 작품들, 알베르 카뮈 전집,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 폴 존슨의 인문학 저작들, 이근식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총서 5권,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시리즈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찬탄스러운 책들로 가득 차 있다. 내 딸이 그 책장에 꽂힌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토론하고 서로 간의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아빠일까, 생각했다. 

가끔 훗날 딸에게 물려줄 유산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얼마 안 되는 돈.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풍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읽은 거대한 책 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톨스토이와 헤밍웨이, 카뮈와 위고의 세계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서울 도심의 어느 대형서점 입구에 쓰인 글귀처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비전이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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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입니다. 자칭 전집선집특별판한정판 수집가입니다.ㅎㅎㅎ
서가에 꽂힌 1~7권 전집이 무엇인가? 처음보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위에 말씀하신대로 까뮈 전집이네요...전집수집가로서 부끄럽게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제가 뭐 까뮈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 별 관심이 없지만...저 전집은 탐나는군요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한권 한권씩 구입해야겠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절판되지는 않겠죻ㅎㅎ

다윗 2023-02-21 11:01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전집 수집가라 하시니 멋집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카뮈 전집(특별판)이 맞습니다. 당시 마누라 눈치 보면서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관련 블로그 포스팅 참고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gilsamo/90195533140/

붉은돼지 2023-02-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거대한 책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고 하셨는데 저하고 똑 같은 생각이십니다요. ㅋㅋㅋ 하지만 제 딸은 책에는 전현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함정 ㅜㅜ 제가 나름 괜찮은 귀한 책들 많이 모아 놓았거든요..몇 번 이야기했는데 전혀 관심무...ㅜㅜ 안타깝습니다......
 

자식을 키우며 놀랄 때가 많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건 청년 때에는 경험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지혜와 역량을 공급받는다는 것과 동의어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도 성장한다. 아니 성장해야만 한다. 아이의 성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모는 못난 부모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배움의 깊이도 커진다. 자녀 양육을 통해 얻는 지혜는 감미롭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에게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이를 소개하면서 자식 키우는 보람과 감동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나에게는 초등학생 두 딸이 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둘째 딸은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그중 가장 고약한 게 샤워할 때 멍 때리며 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 샤워기로 자기 몸 적시는 것에 중독이 됐다. 우리나라가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고 물과 가스와 같은 자원은 아껴 써야 한다는 걸 거듭 알려주어도 좀처럼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고집과 자존감도 제법 센 편이라 혼날 때는 개선하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다. 아주 골치 아픈 버릇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의 일이다. 이 녀석이 또 샤워기로 물을 몸에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내가 물 잠그고 얼른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몇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도 함흥차사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거실에 있던 내가 나섰다.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다. 나는 매섭게 훈계했다. "왜 계속 물을 틀어놓니. 엄마 말은 왜 안 듣냐"며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제 곧 나가려고 하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눈을 부릅뜨고 말대답하는 모양새가 거슬려 아이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려주었다. 녀석은 아팠는지 울면서 화장실 밖으로 휑 나가버린다.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역시 말 안 들을 때는 혼나야 해"라며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의를 제기한다. "아빠! 근데 서윤이(둘째 딸) 왜 때린 거야?" 어이가 없어 바로 답변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니. 엄마 말도 안 듣고 말이지.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랬더니 첫째 아이가 대응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건 잘못했어. 하지만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라고 해서 손 씻고 수건 준비하는데 아빠가 다짜고짜 와서 꿀밤을 때렸잖아. 서윤이 얘기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한소리 들어서 속상한데 막 나가려고 하는 서윤이를 때린 건 아빠가 잘못했다고 봐." 순간 멈칫했다. 아이 말이 맞기도 맞았거니와 살짝 떤 채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히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그랬다. 둘째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 혼이 난 상황이었고 엄마 지시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중간에 끼어들어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이마에 꿀밤을 갈긴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첫째 아이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용기를 내 아빠를 찾아와 항의한 것이다. 첫째 딸이 눈앞에서 목격한 장면은 정당하지 않았고 납득되지 않았다. 동생이 억울해 보였다. 이런 억울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략 상황이 정리됐다. 순간! 나의 첫째 딸 다인이가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답변을 주어야 했다. 아이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내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방안에 토라져 있던 둘째 아이를 불러 정중히 사과했다. 아빠가 오해했고 방금 전 자초지종도 물어보지 않은 채 이마에 딱밤을 때린 건 아빠의 과오였음을 인정했다. 둘째 아이는 그제야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함지박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첫째도 덩달아 울었다. 나는 두 딸을 안아주면서 아빠가 잘못했음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첫째 아이를 따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방금 전 그 용기 너무 멋졌어. 앞으로 집에서뿐 아니라 학교와 학원에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억울한 사람을 만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장면을 본다면 지금처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지? 첫째는 답변했다. "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감동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갑자기 첫째 아이가 나에게 귓속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아빠.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아빠가 너무 멋있어." 나는 그 순간 일시 정지되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끌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으로 속삭였다. 녀석은 다 알고 있구나. 첫째 아이를 다시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다. 내 딸." 내면에서 솟아오른 작은 눈물이 내 눈에 고여있음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견했고 나도 멋져 보였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주말 오전 우리 가족이 만들어낸 감동의 한 장면이 며칠 동안 내 가슴을 휘어잡았다. 이게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자 묘미구나, 생각했다.

올해 열세 살이 된 첫째 딸은 이제 더 이상 심통과 어리광을 부리던 과거의 그 녀석이 아니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섭다고 말해온 아이였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중무장한 파워블로거이자 회사에서는 영업팀 최고 선임인 사십 대 중반의 아빠에게 공정과 정의(正義)를 질문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의 날카로운 논리에 진땀을 빼야 할 것이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힘과 권위만으로 자식을 제압하던 시대는 종말했다. 두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어떤 핸디캡 없이 평등하게 소통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 너머의 세계로 안정감 있게 나아갈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통해서는 곤란하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절대 권력에 짓눌리는 것 같지만 커서도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 나가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맡아서 기르는 존재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아 실수하고 넘어진다. 오류도 있다. 모순적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었을 때에 동일한 모습을 자식에게 발현할 수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히 부모도 자라야 하는 이유다.

전술한 대로 두 딸은 점점 더 커갈 것이다. 몸이 자라는 만큼 마음의 크기도 자랄 것이다. 논리와 실력으로 부모에게 대항할 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부모 권력을 동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일한 운동장에서 서로 간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두 딸이 나를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상 못난 부모들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국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를 관통하면서 세상과 조우한다. 나와 내 아내가 두 딸의 상처가 되지 않기를, 진심 두 아이의 용기와 자신감의 영감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지난 주말의 한 토막 일화가 생일날의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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