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의 신간은 항상 구독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탐독했다. 작가 유시민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글 속에 묻어있는 특유의 주관적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빨에는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시민이 전직 장관(혹인 국회의원)이 아닌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그가 현대사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굉장한 기대를 가졌다. 한국현대사는 아직까지 보편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된 바이블이 합의되지 않았다. 유시민의 말대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대한민국은 그 경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우파의 극심한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실례로 지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사태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편적으로 정립시키기 어려운 이 나라 이념 정서의 함몰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의 신간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저자 인생 55년 간의 한국현대사의 기록이다. 전직 장관이었던 저자는 현재의 자신을 '쁘띠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쁘띠부르주아 리버럴 지식인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경험과 주관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운 서술과 개성있는 향기로 한국의 현대사를 흥미진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좌·우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념전쟁의 한복판으로 진단한다. 대한민국 역대 정권의 성격과 그게 상응하는 국민들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분류하면서, 역사는 단지 회고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응당 옳은 얘기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 하여 역사책으로서의 무게가 가벼울 것이라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5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국회의원 경력과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의 경험은 여타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있는 각론들을 추출하는 재료가 된다. 수없이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 당대의 주요 사진들, 꼼꼼하게 표기된 각주와 주석, 적지 않은 인용서적 리스트 등은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저술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과거 어느 책보다 공들인 흔적은 엿보이나 책에 기록된 저자의 견해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저자의 진보주의적 색채, 보다 직선적으로 말해 좌파적 기질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세련돼졌다. 온건하고 차분해진 흔적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동아일보와 조갑제 씨에 대한 긍정적 해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저자의 기준이 아직까지도 자기 편향적 우월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보수주의의 기작을 생물학적 편의성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과거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건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단언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비단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역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였다. 저자는 은밀하면서도 일관되게 인간의 이타적 감응을 이기심 위에 올려놓으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로부터 출발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등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진보의 가치가 우월할 수 있도록 스탠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좌·우파가 갈라지는 이유에 대해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대뇌피질의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기관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는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뇌 구조의 기작 분포로 좌·우파, 혹은 진보·보수를 가름하며 의도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편향된 이념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결구도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기각됐다.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타인과 신뢰·협동의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정합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협동할 때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발전해가는 영지의 동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이 성숙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오히려 사회적 신뢰와 협동이 발달하고 그에 기초한 정신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그러한 정치철학의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자립적 개인이라는 것은 현대 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상의 견해에 있어 저자 유시민이 가진 불편한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의 경험과 일상이 추동하는 평이성과 접근성은 역사에 대한 독자의 탈부담화를 견인한다. 객관적인 수치·도표의 인용과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논지 전개는 역사책이 가져야 할 진지한 무게를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좌·우파 상관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와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인용된 책들을 살피는 것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단 저자의 주관과 해석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현대사 교과서로서의 보편과 권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직 정치인이 쓴 자전적 역사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시민을 봐왔다. 그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유시민은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뺐을 때 멋드러진 지식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작가다. 최근 모정당의 팟캐스트에 고정 출연하여 이런저런 정치적 담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정치를 떠난 만큼 과한 표현을 자제하고 왕성한 저술과 수준있는 강연으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정치적·철학적·이념적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작가로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건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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