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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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이 신간을 냈다. 꾸준하게 들려오는 그의 신간소식이 반갑다. 이제 유시민에게 '작가'라는 호칭은 낯설지 않다. 몇 년 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본업을 작가로 갈음한 그였다. 당시 자신을 작가로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정서와 감회가 있었다. 이후 그는 성실한 집필과 강연으로 대중에게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어필해왔다. 그간의 비블리오그래피는 작가 유시민으로서의 안정된 아우라를 잘 담아내고 있다.

   유시민의 신간 <표현의 기술>은 글쓰기 관련 책이다. 전작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도 전업작가가 된 저자가 대중에게 글쓰는 방법론을 안내한 책이다. 이번 책은 글쓰기 자체에 관한 안내서라기보다 여러 형태의 글을 쓰면서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담론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담았다. 유시민 특유의 쉽고 간결한 서술은 독자를 편안하게 자신의 논증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해서 다양한 얘기들을 들려준다. 자기소개서, 논문, 보고서, 회의록, 비평 등 각기 다른 형태의 글들이 갖는 구조와 성격,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저자 자신만의 노하우를 여러 예시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특히 글 곳곳에 배치된 공저자 정훈이의 만화는 글의 본류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유머와 풍자를 선사한다. 유시민의 글과 정훈이의 만화는 교차적으로 편집되어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다. 두 공저자의 콜라보레이션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바를 맛깔나고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표현의 기술'이 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맑이 읽어야 한다는 저자의 조건은 합당하다. 많이 읽어야 문장 쓰는 기술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등의 다양한 글감을 무리없이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책읽기'보다 '느끼는 책읽기'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시, 소설, 에세이 등의 문학장르뿐 아니라 기사와 비평 등의 모든 형식의 글을 감상함에 있어 글쓴이의 주관과 목적을 헤아리기 위한 고민과 탐구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수한 독자가 되어 텍스트 속에 담긴 의미를 깊이 느끼려는 노력은 거꾸로 자신이 온전한 필자가 되었을 때 자기 글을 읽을 독자에게 유의미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양방향적 피드백이라는 측면에서 저자의 조언은 경청할 만하다.

   잘 읽히지 않는 난해한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도 동의한다. 저자는 칸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을 예시로 들어 '텍스트(text)-콘텍스트(context) 관계'에 대해 자신의 논증을 풀어낸다. 위선과 허영은 좋은 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책읽기와 글쓰기에도 겉멋과 허세가 작용한다. 글쓰는 능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문장을 자주 다듬다 보면 글을 화려하게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지곤 한다. 사유의 추출물이 아닌 현란한 기교로서의 글쓰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유혹받고 함몰된다. 자기자신조차 무슨 뜻인지 모를 애매한 문장으로 겉멋을 부리는 건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칸트의 명저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다양한 담론에 대해 언급한다. 악플에 대한 입장과 태도, 표절에 관한 견해와 해석, 베스트셀러의 조건, 훌륭한 글쓰기에 전범이 될만한 작품 등 저자는 글을 쓰면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종류의 고민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풀어낸다. 특히 7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직면해 자신의 감정을 언급한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저자는 당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됐다고 기술한다. 바로 그때 소설가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을 만났고 그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그 길었던 여름을 견디게 됐다고 고백한다. 가슴 짠한 대목이다.

  
나는 과거의 여러 글을 통해 유시민에 대한 따뜻한 긍정을 피력한 바 있다. 다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시민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내재적 아우라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렵지 않게 말한다. 또한 쉽고 간결하게 쓴다. 그의 글에서는 지적 허영심이나 과잉된 좌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민하고 난해한 지식을 명료하게 재구성하여 대중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인 유시민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신간 <표현의 기술>은 작가 유시민의 발군의 역량이 잘 반영된 책이다. 유시민이란 이름 석자에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글쓰기에 고민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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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깨우는 33한 책
송복.복거일 엮음 / 백년동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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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하는 책을 좋아한다. 좋은 책은 많이 소개되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인간의 수명은 세계의 모든 책을 읽을 만한 능력을 담지 못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책은 무한하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좋은 책을 골라 인간의 유한성 안에서 녹여내야 한다. 반드시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깨우는 33한 책>은 여러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자신만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 입문서 33권을 소개한 책이다. 송복 교수와 복거일 작가가 33편의 리뷰를 엮었고 그외 많은 지식인들이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유를 바라지만, 자유주의가 싫은 당신이 진짜 자유와 가짜 자유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이 시대 최고의 자유주의 입문서'라는 부제는 매력적이다. 각 저자마다 다른 개성과 문체로 안내하는 총 33편의 책들을 소개받는 건 독자로서 큰 기쁨이다.

   이 책은 제작년에 출간된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가 여러 공저자의 자유주의로의 여정을 담은 책이라면 <나를 깨우는 33한 책>은 저자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되는데 큰 보탬을 준 책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렇기에 두 책 공히 공저자가 서로 겹치며 엇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기도 한다. 두 권을 같이 읽으면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국내 자유주의 지식인의 현재적 계보를 훑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유주의 입문서를 표방한 책이기 때문에 여러 자유주의 고전들이 눈에 띈다.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과 <노예의 길>, 바스티아의 <법>,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와 <자본주의와 자유>,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오웰의 <1984> 등은 전체주의의 악마성을 고발한 자유주의의 명저로 꼽히는 책들이다. 각 공저자는 본인이 소개하는 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 각자의 입장과 방식으로 리뷰한다. 각기 다른 시각과 개성으로 책을 소개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맛보는 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백미다.

   소개된 책 중에서 눈에 띄는 책들을 몇 권 소개한다.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역사>는 해방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를 다룬 현대사 책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있게 수록한 명저이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 비판의 교과서로 불리는 불멸의 저작이며,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저작들도 경제적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 명저로 꼽힌다. 오웰의 <1984>는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며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도 스미스 경제학을 일반인 수준에서 읽는데 가장 적확한 책으로 꼽힌다. 주옥같은 책들의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주의 향연으로 점철될 수 밖에 없는 책의 존재적 한계는 특정사상의 어느 일면만을 다루는 오류를 포함한다. 집필 사정상 공저자 대부분이 우파 경제학자와 교수인 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에만 일관한 점은 아쉽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대한 도전이 어느때보다 맹렬한 시점에서 이에 대한 문제점과 그림자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부재한 점은 씁쓸하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소위 미국식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어느 한 사상의 일면만 부각한 한계를 제외하고는 이 책의 매력은 꽤 유효하다. 선술했듯이 주옥같은 명저들을 소개받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책임을 다했다. 자유주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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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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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베스트셀러를 집었다. 일본 철학자 겸 작가인 기시미 이치로가 쓴 『미움받을 용기』는 올 한 해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동시에 최장기 베스트셀러 기록을 경신하며 지금도 1위에 올라 있다. 주변에서 이 책에 대한 내 호오를 묻는 질문들이 적지 않이 쏟아졌다. 신념적으로 자기계발서를 멀리해온 나에게 이 책은 이러한 주변의 화려한 요소를 배경으로 들어왔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이라는 부제를 단 『미움받을 용기』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야기 형식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책 속의 '청년'과 '철학자'는 저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단 두 명의 화자다.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는 식으로 구성된 이야기 구조는 독자에게 친근함을 준다. 삶의 저변에서 힘든 싸움을 하는 어느 청년이 아들러 심리학의 전도사인 한 철학자를 만나 여러 인생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배우는 내용이 이 책의 기본 얼개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에서 기존 프로이트 학문의 보편적 속성을 재단한다. 심리학계의 정론으로 보편화된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인간의 삶을 과거에 예속시키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반면 아들러의 '목적론'은 오직 현재에 충실한 개념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삶을 추동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타자의 평가에 구속되지 않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책 속 철학자의 목소리를 빌어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곧 인생의 과제임을 제시한다. 철학자가 인생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목표로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을 강조하는 대목은 되새길 만하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 제목이
마치 외부의 사회적 관계와는 무관한 '절대적 나'로서의 삶을 촉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위험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좋은 책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내용은 좋은데 A4용지 두세 장이면 설명할 것을 지나치게 길게 써놓았다.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화 형식의 구도를 취한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청년과 철학자 둘만의 대화에 사실성이 결락되는 측면이 있다. 이에 작위적이란 느낌이 몰입을 방해한다. 근래에 자존감이 깍인 채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조아리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따뜻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인간 삶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지는 못한다.

   설득의 부재로 인해 단선적 주문에 머무는 전달력도 아쉽다. 공동체 정신이 곧 행복이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대가 없이 공동체에 기여하고 복무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의 묵자의 가르침과 같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맹자는 묵자 사상을 두고 듣기에는 좋은 소리로 들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 세상의 질서가 없어지고 실질적인 사랑은 도태될 것이라며 경계한 것이다. 이상세계에 대한 당위를 모호한 선언으로 희석하여 디테일의 결핍을 초래한 현실인식은 과잉된 자아만 부추기는 꼴이다. 이러한 현실도피적 경향은 이 책이 심리학의 탈을 쓴 자계서라는 비판을 받는 가장 적확한 논거다.

   이 책에 대한 소원한 평가는 평소 자계서를 멀리해온 내 태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책을 감수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책의 첫 장을 여는 '감수 및 추천의 말'에서 "어설프게 위로하고 빤한 인생과 꿈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는 질색"이라며 이 책은 그런 부류와는 구분된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동의할 수 없다. 이 책도 자기계발서의 구조적 모순에 자유롭지 못하다.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점에서 여느 자계서와 본질의 차이는 없다는 게 내 총평이다.

   얼마전에 교회 후배가 나에게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적인 주관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사람마다 책을 고르는 기호는 다른 것이며 혹자는 계발서 한 권으로 유의미한 삶의 긍정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접근은 독서의 질을 하향평준화로 몰아가는 기제다. 모든 가치기준에 자신만의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다양성의 환원으로만 후퇴하는 방식은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비겁하고 치졸한 짓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꼭 읽어야 할 책을 고르고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책읽기의 밀도 차원에서 『미움받을 용기』는 그리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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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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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건국이념이 성리학이었고 518년 동안의 지배사상으로서 단 한 번도 공격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집권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만들려는 꿈과 의지가 가득했다. 정도전이 그랬고 조광조가 그랬다. 그렇기에 조선시대를 심도있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 이해는 꼭 필요하다.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보를 훑고 있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조선시대 문묘종사 논쟁 읽기'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하고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즉 문묘종사란 공자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 문묘의 중앙에 공자가 있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자·증자·자사·맹자 등 4성(四聖)을 배치한 후 수제자들인 십철(十哲)과 주희·주돈이·정호·정이 등 송나라 6현(六賢)을 좌우로 배열했다. 여기에 함께 종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공자와 같이 종사된다는 건 엄청난 영예이다.

   저자 김용헌 교수는 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묘종사의 논쟁사를 통사적으로 기술한다. 주지하다시피 고려 충신 정몽주는 조선건국을 반대하여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작 정몽주를 복권시킨 건 태종 이방원 본인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삼는 것에 대해 당시 사대부들은 이견이 없었던 듯하다. 결국 정몽주는 조선 최초로 중종 대에 문묘에 종사된다. 이후 선조 대에 대대적으로 집권한 사림세력은 '오현종사운동'을 펼치며 문묘종사에 대한 논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광해군 대에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을 문묘에 종사하게 된다.

   조식과 이황의 라이벌 구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황과 이이 철학의 차이 등등. 흥미로운 주제가 책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사단칠정 논쟁의 의미와 주기론과 주리론의 차이는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흥미롭지만 난해한 주제로 꼽힌다. '사색당파', '예송논쟁'과 같이 조선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면서도 머리속에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테마인 것이다. 거침없이 서술한 저자의 요약은 명료하고 깔끔하다. 저자는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의 차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책의 말미를 갈무리한다.

   선술했듯이 이 책은 조선사를 성리학의 계보로써 관통한다. 문묘종사에 대한 사대부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조선사를 훑고 있다. 그렇기에 기초적인 조선왕조사의 흐름을 개괄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어내는데 벅찰 수 있다. 성리학에 관한 기본 이해가 전제되면 더욱 쉽게 탐독할 수 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문묘종사라는 줄기만으로 기술한 책이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지적 맥락은 확보하고 읽는 게 풍요로울 것이다. 서평의 구조적 관점에서 책의 말미를 급하게 끝맺는 분위기는 아쉽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와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는 건 불가할 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하다. 나 또한 조선의 패망원인을 교조화된 성리학 체제에 매몰되어 종국적으로 애민(愛民) 없는 세상을 만든 조선 집권세력의 무능에서 찾는다. 사실 조선왕조의 붕당사와 후기의 패망과정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풍성하게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성리학은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개괄해야 할 숙명적 과제이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 성리학사를 조망하는데 보탬이 될 책이다. 조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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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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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지웅을 싫어한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변 등은 상당히 불쾌한 것들이다. 특히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진영논리적 주제에 대해 강한 자기확신으로 질타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언제나 비호감이다. 작년 그는 모 종편 방송에서 "드라마 <정도전>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드라마 한 편의 시청여부를 놓고 인생의 보편성을 훈계할 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사회의 여러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마치 전투하듯이 대중에게 훈계하는 그의 어법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다. 본인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자아상은 외면한 채 남도 나와 같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현존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추태가 꼴사납다. 옥소리의 부정(不貞)을 비판하는 대중의 자유와 그 양상을 비판하는 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유권에 속한 것이다. 누가 감히 자유의 과잉과 한계를 말한단 말인가.

   허지웅은 '옥소리 간통 논쟁'에서 '공인(公人)'의 개념을 전근대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공인'의 의미를 '공적에 적을 둔 사람'이라는 좁고 사전적인 의미로 걸러낸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대적 공인의 개념에 무지해 있다. 미국의 '공인이론'과 한국의 법원 판례를 한 번이라도 훑어봤는가. 근래의 공인 범위 논쟁은 명예훼손과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연예인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정치적인 공인으로 분류된다. 모든 명예훼손법이 이 기준에서 적용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더이상 무식한 얘기를 하지 말라.

   허지웅은 싫지만 그의 글은 읽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공인은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쓰는 허지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의 텍스트만큼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간의 말처럼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작용했다. 그랬다. 허지웅의 신간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저자는 인생을 '버티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인간 삶의 고단함을 인정한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내재된 잘못된 전제를 나와 비슷한 논지로 규탄한다. 인생은 피곤하고 가난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사회적 합의와 제도로써 천국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인물은 아니다. 제목 '버티는 삶'은 박수 쳐 줄만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반갑다. 시대가 변해도 책읽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책 읽는 개인과 청춘, 국민 들이 역사를 추동했다. 저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말만큼은 진실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진 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책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한 인류 지성의 거대한 용광로다. 책읽기의 소중함을 설파한 부분 또한 박수 쳐 줄만하다.

   그러나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보인다. 저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어법을 가감없이 구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저자의 주장에 새로울 건 없다. 무엇보다 20대를 천착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장 불편하다. 저자는 현재의 20대를 부정적으로 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세대의식'이 전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20대는 주위의 문제의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돈에 미쳐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원인은 IMF 체제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세계 전부로 경험했고 급격한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무한경쟁의 순환고리 안으로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건강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게 잘못된 걸까. 돈을 모으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 시대는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는 다른 시대적 소명을 요구한다. 21세기는 더하다. 지금의 20대가 80년대의 20대처럼 광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를 외칠 세대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87체제의 아비투스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느 시대의 20대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20대는 꼭 마르크스주의자여야만 하는가.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공부하며 땀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결하고 자생적인 인간의 행위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건 위선이요 거짓이다. 저자는 뒷골목에서 짓까불며 덤방거리는 유럽의 얼빠진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비호감이다.

   이밖에도 책 내용 곳곳에서 비판할 대목은 많다. 다만 뒷부분의 영화리뷰는 인상적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영화잡지사 경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리뷰만큼은 수준급이다. 리뷰어로서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해 논설에 여유가 느껴진다. 정치색과 정파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영화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저자의 뇌는 정말 섹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 타자의 존재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 지금 입고 있는 허지웅의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외연적으로 에세이의 평균은 유지한다. 허지웅은 말보다 글이 낫다. 앞서 그의 지력과 태도를 모두 꼬집었지만 글에서는 태도적 문제가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영화 해설을 소개한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천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아무런 대안없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조소를 던지며 마치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선 위트인양 지껄이는 모습은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다.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수정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동갑이라서 조언하겠다. 방송에 나와 떠들려면 공부 좀 더하고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라. 그게 공인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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