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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빛을 내리는 사랑은 누군가에게 빛을 가리는 그림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뜨거운 생명은 누군가에게 차가운 사물일 뿐이다. 세상만사란 그런 절박함과 무심함 사이를 모르는 척 오가는 시간과 사건의 병렬인지도 모른다. <p59~60>

흔히 '별처럼 아름다운' 혹은 '별처럼 빛나는'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별은 아름답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의 상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소유욕을 더 불태울 때가 있다. 그것을 억지로라도 꺾고 잡아 감춰두려 한다. 그런데 어쩌나. 별을 따서 집에 가져다놓으면 얼음처럼 차가워지듯. 탐스럽던 대상은 억지스런 소유와 동시에 본래의 의미를 잃는 것을. 혹은 다른 형질로 변해버리는 것을. <p93>

우리를 한계 지우는 조건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조금쯤 암담하게 한다. 나아가 성급한 절망을 끌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모든 선택은, 언제나 홍수처럼 밀려드는 절망을 막아내고 그 자리에 희망의 댐을 세워야만 가능해진다. 세상의 모든 선택이 축복받고 격려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07>

신념은 계산이 없을 때 묵묵히 지켜진다. 그리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p142>

'노동'과 '지성'은 평등한 친구이다. 높고 낮음 없이 서로 마주보며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주는 친구. 두 친구가 생활 속에 고르게 존재할 때 우리는 보다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벽돌공이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돌보는 연구원처럼. <p191>

여행은 그 자체로 훌륭한 마음공부이지만, 이 배움은 궁극적으로 식탁으로 되돌아와 앉았을 때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p217>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겁니다." <p217~218>

이제 나는 행복이 진흙탕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함께 부대끼는 생의 애환 속에. <P252>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 진정한 행복은 누구라도, 꼭꼭 감춰놓아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힘주어 행복을 증명하고 싶은 상태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p263>

"····· 정말 놀라운 건, 아름다운 것으로만 채워놓으니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거야." <p264>

동화란, 다만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한 조각의 희망들이 손잡고 풀처럼 대지를 뒤덮는 세상,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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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고 난 뒤에 바라보는 풍경은 늘 울기 이전과 다르다. 맺혔던 것이 울음으로 대신 터져 가슴속에 후련한 여백이 생기는 까닭이다. 여백을 지닌 가슴으로 바라보면 같은 풍경도 그 흐름이 완만해진다. 완만함 속에 순순히 몸을 맡기게 된다. 그 순간 버리지 못할 것은 없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p. 36>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변상황이 자신을 위해 빈틈없이 봉사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 잘 구획된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보다, 엉성하더라도 스스로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안정과 명성보다는 새로움과 호기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절대 다수가 세상을 존속시킬 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p. 48>

우리가 언제, 무엇을 입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타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등에 따라 풍경은 전혀 다른 정서를 전한다. 풍경은 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으나 작은 변화에도 이리저리 들썩이는 우리의 유동적인 마음이 전혀 다른 해석으로 풍경을 건져올리는 것이다.   <p. 109>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그 순간의 무게만큼만 짊어진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p. 221>

어떤 것이 먼저 오고 어떤 것이 나중에 오느냐의 차이일 뿐, 모든 순간은 동등하다.   <p. 236>

우리가 심장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사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절제'나 '인내'라는 고무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억압'이나 '위선'이란 어두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과정. 그러나 모두가 다 육중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심장에 정직한 이들의 경박함을 만날 때 막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심장에 정직한 이들은 적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은 심장 박동을 '안정'적으로 뛰게 하기 때문이다.   <p. 275>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정의는 단순해진다. 십대에 빚는 사랑의 정의가 거대한 금빛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이십대에는 거기서 금빛을 벗겨내고 날개를 떼어낸다. 그리고 삼십대가 거의 다 끝나는 중년의 지점에 이르면, 천사의 척추만이 남는다. 서로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지고 다시 정중해지며,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을 주고받더라도.   <p. 277>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속에 깨달았다. 그동안 한 번도 '완전한' 세상을 보지 못했음을. 내가 보았던 것은 인간의 세상이었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일정 부분 거세되고 손질되고 격리되거나 치장된 것들의 세상. 그토록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이라는 긴장을 조성하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이 흩어져 거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이 "보기에 참 좋더라" 하셨던 '보기 좋은' 태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p. 318>

지평선이란 우리의 시각적 한계일 뿐, 그 어떤 지평선도 기어이 둥근 지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잇는 그물망의 한 획일 뿐임을. 달리고 또 달린다는 것은 닿고 또 닿아 있는 일임을.   <p. 332>

미래란, 그리로 다가갈 구체적인 수단과 목적이 주어질 때만 존재하는 시제인지도 모른다. 수단과 목적을 찾지 못해 암담한 이들에게 미래란 허공과 다름없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다만 어두운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한줄기 빛을 잡고 나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는 길이다. 발밑에 놓인 단단한 길, 한 발자국이 다음 발자국을 이끄는 길.   <p. 403>

어떤 여행지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반면, 어떤 여행지는 여행자가 정지한 채 기다려야 한다. 이동을 거듭하던 여행자에게 더 차분해질 것을 명한다. 고여 있을 것을 명한다.   <p. 446>

모든 여행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 주기가 있다. 방전될 때 여행자는 길 잃은 미아가 되고 충전될 때 이름 없는 철학자가 된다.   <p. 521>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8997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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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배 질서를 깨는 일에 지식인들은 왜 흥분할 줄 모르는가. 사르트르는 또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갈등은 해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지식인은 이렇게 조용히 죽어 가고 있는가.   <p. 14>

실제 법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 모두 테크노크라트라는 겁니다. 행정 고시에 합격하면 해외 유학도 지원해 주잖아요. 정말 열정을 갖고 공부합니다. 도덕적으로 테크노크라트를 의심하지 않는 편입니다. 밤새 기획안을 짜며 나라를 어떻게 설계하고 디자인할까 하고 애국심에 불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테크노크라트의 지배가 실제로 시민운동까지 장악하고 있고, 지식인 위기의 어떤 중요한 측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표상이나 대의 질서로부터 테크노크라트는 이탈하고 대중은 추방되고 있습니다. 지식인이 서있는 자리는 모두가 떠나 버린, 실제로는 지식인 스스로도 떠나 있는 텅빈 자리입니다.   <p. 37>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p. 53>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라는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p. 54>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p. 56>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대중과 소통해 대중에게 좀 더 나은 진보적 세계관을 이야기해 주고,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대중의 생각과 욕구를 대신 표현해 주는 겁니다. 자본주의로 인해 상실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의 힘입니다.   <p. 83>

현대인은 모두 자기기만의 모순에 빠져 있다. 그래서 단순한 쾌락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가식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벗어던지고 윤리와 총체적 인격 완성으로 이끄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지향하는 것이 시민운동 지식인의 본질이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일정한 발전 곡선을 그리는 역사·계급을 포함한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 본질의 원형 또는, 우주적 실재로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진정한 삶의 본질로서 인간의 존재 의의를 되찾는 근원이다.   <p. 171>

지배계급을 대변하든 피지배계급을 대변하든 나는 이제 그런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대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편에선 곧바로 통치자와 자본가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 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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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말>

소설은, 무대의 이전과 무대의 이후에서 씌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쓰는 이를 영원히 무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다. 무대의 뒤편, 혹은 무대의 한복판. 이 아이러니가 소설가에게 비애인지 쾌락인지 환멸인지 잘 모르겠다.   <p. 33>

누군가를 배신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p. 84>

세상에 같은 바다는 없다. 늘 변함없는 망망대해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오늘 마주하고 있는 이 바다는 어제 지나온 것과는 다른 바다다. 시간의 움직임이라는 마법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바다를 건너는 항해가 닮았다면 소소한 시간의 매듭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디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p. 112>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p. 120>

모든 것은 사라지고 시들고 썩어버리도록 운명지어진 것 같았다. 시작은 아무 의미도 없다. 시작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P. 139>


『풍선』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P. 19>

두고 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P. 21>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크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낙차의 폭이 너무 클 때, 꿈 너머의 실생활에 대한 거짓 믿음과 진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살다 보면 판타지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성찰하게 하거나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판타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P. 47>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   <p. 4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 51>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중에서)   <p. 66>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 '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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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어쩌면 로마 황제 앞에 서 있는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함성과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라고 하면 그는 살 것이요, 죽이라고 하면 죽을 것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강해진 경우도, 히틀러처럼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한 파시스트의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사안들은 이러한 대중들의 함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의 어느 날, 지금의 십대가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친다면, 결국 우리는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더 많은 지금의 십대들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친다면, 우리는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 41>

경제학의 기본 모델에는 "인간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다"라는 하나의 가설만 존재하는데, 최근에는 여기에다 경제학자들이 "가끔은 이상한 짓도 한다"라는 보조명제를 넣기도 한다. 사실 이는 엄청난 고급 이론의 영역이다. 왜 사람들이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지 나름대로 경제학적 설명을 해낸 이들은 지금까지 전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계산 자체가 어려워서 못한다고 얘기했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진즉에 노벨상을 받았고, 명품 라벨에 속아서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애컬로프(George Akelof)도 정보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종교 때문에 가끔 배고파도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도 1990년대 중반에 노벨상을 받았다. 신념 때문에 이상한 일을 한다는 사람으로는 19세기 후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불행히도 그 시대에는 노벨상이 없었다. 사랑 때문에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는 분석은 아직 비어 있는데,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이를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다면 한번 도전해보시기 바란다. 성공하면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단어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증오이다.   <p. 170>

국가와 국가 사이에 '애정'을 얘기하는 것은 일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이보다는 '우정'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이 좀더 사실적이다. 그러나 증오는 다르다. 증오는 구조 안에서 탄생하고, 경제를 따라 확산되고, 문화를 따라 재생산되며, 정치에 의해 폭발한다.   <p. 171>

만약 1세기 전에 발행된 유럽의 신문들과 지금의 한국 신문들을 찾아서 비교해본다면, 놀랄 정도로 유사한 구절이 많다는 데 독자 여러분들도 놀라실지 모른다. 당시의 '새로운 식민지'라는 단어를 지금의 '수출'이라는 단어로, '새로운 자원 개발'을 지금의 '자주 개발'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오페라'를 '한류'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그 당시 신문의 기사들 상당수가 요즘의 기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p. 196>

상투적 수법이기는 하지만, 이즈음에서 나름대로 유용한 질문이 하나 있다. "노아가 방주를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는가, 비가 오고 나서 만들었는가?" 물론 답은 뻔하게도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화라는 매우 특수한 조건 혹은 매우 특수한 '공공재'도 이와 같다.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운 시기에 만들어야 한다.   <p. 223>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단 한 문장을 자신의 파토스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마케팅 사회에서는 아주 어려운 미션이다. 그렇지만 '미션 임파서블'은 아니다. 평화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잘 잊지 못한다. 그래서 평화는 파토스를 요구하고,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특수한 속성을 갖는다.   <p. 261>

한국 자본주의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저질 악마 자본주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평범한 한국 십대의 1년간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디스커버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보다 보존 가치가 훨씬 높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비용 노예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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