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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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의 일이다. 이륙하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비행기는 순식간에 구름 위에 닿았다. 지면은 한참 멀어졌고 건물은 조그맣게 보였다.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지상 모든 것이 작게 변한 것 같았다. 아니 세상 자체가 소인국이 된 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저렇게 작은 존재들인데 뭐 그리 급하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왜 그리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는지를.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고 하는 것에 우쭐대며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행기 창밖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중국 장가계나 미국 그랜드캐니언을 거론하며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었음을 회자하는 경우가 있다. 해외 관광명소는 정말 크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을 감상하고 있으면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소소한지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세계와 비교하면 장가계나 그랜드캐니언도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기준을 우주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는 클지 몰라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작다. 규모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지구 밖으로 나가면 압도적으로 큰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작은 행성이다. 태양계의 한 식구인 목성은 지구보다 1,300배가 크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알파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4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지구에 있는 모래알보다 5~10배가 넘는 별들이 우주에 있다. 우주의 지름은 대략 950억 광년 거리로 추정된다. 그것도 관찰 가능한 우주에 한해서 그렇다. 지구가 속한 은하와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만 해도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우주 공간 전역에 수백억에서 수조 개의 태양을 거느린 은하계가 2조 개가량이나 있다. 어디 감히 스케일을 말하는가. 지구와 인간은 작아도 너무 작다.

20세기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이 처음으로 쓴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삶과 사랑과 우주를 다룬 에세이다. 유명한 과학자를 아버지로 둔 딸의 이야기이면서도 인간 세계를 면밀히 탐구한 인문학 산문집이다. 칼 세이건과 작가 앤 드루얀의 딸인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우주적 시각과 과학적 통찰로 삶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법을 체득했다. 과학자의 딸답게 증명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회의론자가 되었다. 저자에게 사실이란 과학적으로 발견되고 입증된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대인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이다. 책 곳곳에 회의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인 저자의 입장과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많은 주제를 다룬다. 딸을 출산했을 때를 회고하며 '태어남'에 관한 폭넓은 천착을 시도한다. 신을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이 주는 유용함을 긍정한다. 우주의 탄생과 외계인의 존재 등의 흥미로운 과학적 담론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종교적 시각을 벗어난 과학자의 입장에서 죄와 오류의 문제를 다룬다. 성장과 어른의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고 결혼 제도와 섹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한다. 역사와 신화의 흥미로운 토막들을 소개하고 이를 과학적 접근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의 가장 큰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깊이 있는 탐색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과학적 사고와 국문학 전공의 유려한 글발이 돋보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자의 자기 주관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령 결혼 제도, 여성 인권, 성소수자, 섹스 관념 등 여러 민감한 이슈에 관한 개인적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게 서 있다. 글의 논조가 흔들림 없이 일관적이다. 평소 자기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명확히 세워놓은 듯하다. 이는 오롯한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지 오랜 공부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가로서는 훌륭한 장점이라는 점이다. 가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저자(작가)가 자신감 없이 마치 독자의 눈치를 살피며 써 내려가는 듯한 글귀를 만날 때면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명확하고 단정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철학을 전달하는 작가적 자신감이 멋지다.

저자는 책 서두에 부모님으로부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인간과 세계를 과학적·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되 삶 자체만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우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시선은 의외로 우주가 아닌 자기 주변에 머물러 있다. 저자의 부모들이 지구의 바깥 우주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사고를 펼쳤다면 저자는 그 시선을 가족과 삶으로 돌린다. 일상 속 작은 의식들이 얼마나 삶의 순수한 기쁨을 일깨우는지를 담담하고 미려한 문체로 들려준다.

책 전체에 흐르는 고요한 기저가 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거의 모든 장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저자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리운 대상이다. 아버지의 언어, 지성, 가르침, 인격, 태도 등 그 모든 것이 저자에게 흘러내렸다. 저자는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 주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욱이 저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코스모스』를 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란 존재에 구속되지 않았다. 짓눌리지 않았다. 완전히 독립된 자아로 만개했다. 그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낸다.

책을 읽으며 두 가지 도전이 생겼다. 하나는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를 제대로 읽고 싶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딸에게 '코스모스'와 같은 거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쉽다. 이미 두꺼운 개정판을 질렀다. 올여름에 천천히 탐독할 계획이다. 후자가 문제다. 아버지로서 거대한 영혼의 자산을 딸에게 물려준다는 건 과히 기적 같은 일이다. 쉽지 않다. 노력하겠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겠다.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훗날 이 블로그도 딸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의 목록 중 하나일 것이다. 말과 행동, 성실과 정직, 도덕과 신앙 등 딸아이에게 흘러내릴 모든 것들을 살피고 가다듬겠다. 그래서 칼 세이건처럼 딸이 그리워하는 아빠의 표본이 되겠다. 이 비전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평을 정리하자. 책 제목은 진실이다.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들이다. 위대하면서도 한낱 작은 존재다. 이 책은 이 명제에 관한 과학적·개인적·인문학적 통찰이다. 칼 세이건의 유일한 소설 『콘택트』의 명언을 소개로 서평을 끝맺음 한다. "우리와 같이 자그마한 생명체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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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 여행자 오소희 산문집
오소희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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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책에서 확인하는 것이 리뷰어에게 기쁨이라면, 리뷰어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리뷰에서 확인하는 것 또한 작가에겐 큰 기쁨이다."

 

그렇다. 작가 오소희는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북리뷰어로서 내가 얼마나 자신의 글과 생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실 그랬다. 14년 전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떠난 그녀의 터키 여행기(『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획으로나 내용으로나 여행 에세이 분야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첫 에세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정치·사상 관련 서적에 함몰되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오소희의 산문은 촉촉한 밀크티와 같은 것이었다. 내 리뷰를 보고 인상적이라며 만남을 요청한 그녀의 제안으로 광화문의 큰 서점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이후 차곡히 쌓인 서로 간의 '평가와 우정의 양립'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위 전작주의(全作主義)를 통해 한 작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작가의 변모 혹은 성장과 같은 발전 단계의 흐름을 포착할 때가 있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하면 소설가 공지영은 '산문성의 축소에 따른 소설력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하루키는 '개별 사랑을 우주적 관점으로 확대해가는 시각'이란 측면에서 작가적 세계관을 확대해갔다. 반면 작가 오소희는 '떠남'이란 소재를 '보편 인간성의 찬란함과 비루함'이라는 코드로 풀어내면서 그 장르와 문체를 끊임없이 변화시켜갔다는 점이 독특하다. 에세이로, 소설로, 동화로, 육아서로, 페미니즘으로. 다양한 형태(외연) 속에서 생명력 있게 뽑아내는 작가의 사유와 텍스트는 그 특유의 울림과 진폭을 통해 독자의 가슴을 적셔왔다.

 

오소희의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은 '여행'에 관한 사색을 그 대척점인 '집'의 재발견으로 아름답게 연결한 산문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떠나지 못할 것을 명령했지만 역설적으로 새삼 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떠남에 익숙한 작가에게 코로나19는 느닷없는 불청객이었을 게다. 그러나 작가는 여행작가로서의 자신의 실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떠나지 않고도 보이고 사유할 것들이 있었다. '떠남'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들이었다. 바로 '머묾'이었다. 작가는 이번 신간을 통해 '떠남'과 '머묾'이라는 서로 배치된 개념을 대구적(對句的)으로 양립시키며 여행의 의미를 탐색한다.

 

은 여행과 집에 관한 사유와 통찰이 대구를 이루는 구조로 쓰였다. 작가는 수시로 우붓(발리)과 부암동(서울)을 오가며 서로 다른 시공간의 차이와 조화를 꾀한다. 가령 부암동 집 옥탑방에서 동쪽 창밖을 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느덧 파리 시내에서 종일 신문을 돌리다 옥탑방으로 돌아온 신문팔이 소년에게로, 가로등 하나 없는 필리핀 팔라완의 바닷가 마을로, 콜롬비아 보고타의 산기슭 빈민가의 미로로 옮겨간다. 옮겨진 시선은 자못 진지하고 차분한 사색을 거쳐 여행자의 내면 속으로 잠입한다. 세상 모든 여행자의 '운명적 형벌'에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작가는 선언한다. "맘대로 떠났다 돌아온 자, 너는 연옥에 머물라." 독자는 작가의 해석을 통해 여행자의 본질적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면은 작가가 책 곳곳에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고백한 부분이다. 책은 크게 2개의 방(챕터)으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방이 여행과 집에 관한 작가 내면의 사색이 주를 이룬다면 두 번째 방은 작가 주변 사람들, 대부분 가족에 관한 작가적 고백이 다수를 차지한다. 남편, 아들, 아버지, 오빠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특히 남편 이야기가 상당히 감동적이다. 작가의 부부관계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무려 열아홉 장을 할애해 오랜 시간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부부애의 발전사를 아름답게 기록했다. 어느덧 안정 궤도에 오른 수십 년 차 중년 부부의 영혼의 아우라가 잘 담겼다. 각자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걸 문장 곳곳에서 느낀다. 매일 손잡고 부암동 골목을 걷는 작가 부부의 현재상이 멋지다. 작가의 말대로 부딪힘도 간절한 소통이다. 연마되고 버려진다. 작가보다 한참 인생 후배지만 행복한 부부관계는 반드시 이 대목을 관통한다는 걸 알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감상은 집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해보게 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모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과거에 비해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집의 의미를 지나치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해왔다. 지역, 층, 평수, 가격, 인테리어 등 한국적 의미에서의 집은 크기와 가격이라는 수학적 가치에 함몰되었다. 나도 그랬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우리 부부가 우선적으로 고려한 건 멋진 전망과 인테리어 퀄리티였다. 좋은 집이란 외적인 미(美)의 화려함이 극한까지 확보된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사 심방을 온 목사님의 일갈이 있기 전까지. 진리는 전혀 달랐다. 좋은 집을 결정하는 건 집주인이었다. 좋은 집은 좋은 주인이 사는 곳이었다. 좋은 집에 대한 작가적 정의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작가가 직접 짓고 꾸민 부암동의 새 집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타자와의 나눔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살롱이었다. 여성들의 문화 공간 '부암살롱'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을 통해 작가는 '엄마들을 옭아맨 역할억압을 하나씩 해체하는 처방들'을 공유했다. 그것은 '언니공동체'로까지 확장되어 '구덩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고 싶어 한 여성들'의 영혼의 항구가 되어주었다. 좋은 집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신간 또한 감사와 행복의 테마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즉 여행의 외재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는 여행은 성립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분이다. 과거의 책들이 떠남으로써 머문 곳을 사색했다면 이 책은 머문 곳에서 떠남과 머묾을 동시에 천착한다. 그래서 둘은 단절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피드백하는 관계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깨운다. 결핍이든 풍요든 결국 행복의 문제는 해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오래고 낡은 세상 모든 종교와 지혜의 키워드 '감사'가 항상 그 앞에 붙는다는 것을.

 

서평을 정리할 시점이 왔다. 내가 오소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에 관한 입체적 천착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소희는 사랑꾼이다. 그녀가 쌓아올린 십수 권의 책 더미는 한결같이 인간 사랑의 실재적 디테일을 주목하고 관통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말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은 완전히 평등하고 고결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 그녀가 떠남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것까지. 이 숙연한 인식과 감동의 최전선에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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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 세상의 아이들이 투명하게 알려준 것들
오소희 지음, 김효은 그림 / 북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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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힘든 시기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중력은 무거운 법인데 작년부터 힘들다는 곡소리가 더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고단한 삶의 각론이 폭포수처럼 넘쳐흐른다. 고독과 우울은 덤이다. 예기치 못한 국제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사회는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상을 겪어내고 있다. 걷는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는 위협받고 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말수를 줄이며 홀로 집에 있는 인간상은 지난 1년 동안 일관되게 지향되고 있다. 사회는 위축되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많은 사람이 정신과를 찾는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 사회의 행복의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이슈였다. 일각에서는 다른 나라의 행복지수를 거론하며 우리 사회가 불행하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경제적 외형의 확대가 해답이라며 정체된 이 나라의 GDP 성장률을 꼬집었다. 하지만 정작 행복의 최소단위이자 주체인 '개인'의 존재를 천착하는 건 부족했다. 그렇기에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상대적 우월주의를 행복의 개념으로 등치시키는 고약한 착각에 오랫동안 침잠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적인 행복 체감도가 하향평준화되면서 삶과 만족에 관한 보다 냉철한 탐구가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오소희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의 글을 전한다. '아릿하고 순도 높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매혹적인 띠지를 두르고 있는 오소희의 신간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집이다. 작가는 각 나라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고된 삶에 번민하고 허덕이는 이들을 토닥이고 격려한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한 『나는 달랄이야! 너는?』을 일부 수정한 개정판이다. 글의 구성과 디자인이 전체적으로 달라졌다. 출판사가 바뀌었고 책표지를 흰색으로 변경했다. 표제작을 제목으로 한 예전 판과 달리 보다 웅대한 제목을 전면에 배치했다. 적확한 순간을 잘 포착한 김효은의 그림은 여전히 훌륭하다.

총 다섯 편의 동화를 담고 있다. 동화라고는 하나 픽션과 팩션의 경계에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작가가 여행지에서 직접 만난 아이들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들을 그리워하는 과정에서 작가적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쓰였다. 주인공 아이들은 가난과 질병, 전쟁과 약탈에 노출된 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 기준에서는 행복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이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과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채워나간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행복의 조건을 가늠하고 규정짓는 우리 시대의 많은 보편 어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라오스의 아농과 통은 배고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엿본다. 우간다 소녀 바바라는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슬픔과 보육원장의 지난한 핍박 가운데서도 불평 없이 달님을 친구 삼으며 누군가 돕는 일에 헌신을 다한다. 시리아의 누르와 이라크의 달랄은 전쟁과 종교로 피폐화된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작은 목소리라도 용기 내서 말해야 함을 알려준다. 아마존의 꼬마 뚜미는 자원 약탈로 점차 황폐화되고 있는 고향 숲을 배경으로 진정한 공감과 화합이 무엇인지 아름답게 들려준다. 필리핀에서 만난 타이손과 재인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가짐과 서로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섯 편의 동화는 각기 다른 이야기로 서로 다른 메시지를 말하려는 것 같지만 포괄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면 결국 삶과 행복의 문제를 관통한다. 행복은 외부 조건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관점의 문제이며 행복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정작 자기 내면에 존재해야 할 '태양처럼 빛나는 힘'에 있다는 걸 일깨운다. 작가는 책 속 우간다 편(바바라 이야기)의 서설에서 "정말로 경이로운 힘은 '사랑'과 '감사'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자기 자신을 시작으로 타인과 세계를 사랑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할 때에 비로소 '매일' '스스로' 내는 경이로운 힘이 우리 삶을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이 행복을 주제로 한 동화로 갈무리되는 걸 원치 않는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 아이들이 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이라고 후술한다. 행복보다 강한 것. 보다 근본적인 것. 그것은 바로 '삶'이다. 그렇다. 작가의 말이 옳다. 누구나 행복을 정의하고 갈망하지만 정작 그것이 펼쳐지는 트랙과 같은 우리네 일상, 즉 삶의 실재와 엄연성에 관해서는 놓치며 살아간다. 어쩌면 행복이란 찰나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행복보다 삶이 더 진실하다. 짧고 추악하고 고단한 삶을 그냥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전면에 보이는 것 같다. 능력보다 사람이 보이고 물질보다 정신이 보인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보이고 기쁨보다 슬픔이 보인다. 거짓보다 진실이 보이고 나보다 너가 보인다. 불평보다 감사가 보이고 티끌보다 들보가 보인다. 빠름보다 느림이 보이고 채움보다 여백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독서 무드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독서 속도는 더 느려졌고 독해 태도는 더 겸허해졌다. 책 읽기의 기술적인 부분은 과거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꾹꾹 가슴에 누르며 읽는 태도는 더 함양된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몇몇 대목이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데 오래 걸린 이유다. 오소희의 글은 언제나 좋다. 따뜻하고 정갈하되 나를 현실 자존의 직면으로 견인하기 때문이다.

작가 오소희를 만난 지 어언 14년이 되었다. 언젠가 광화문 앞 커피숍에서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을 기억난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다윗님의 솔직한 마음대로 살며 사랑하라고. 그렇다. 나의 나 되는 것은 내 모습 진본 그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 참된 지혜를 재차 곱씹는 지점에 오소희의 신간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가 놓여 있다. 오랜만에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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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문화권력 3인방 - 백낙청·리영희·조정래 비판
조우석 지음 / 백년동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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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탄핵 이후 한국 보수는 피폐했다. 멸망 수준까지 망가졌다. 과거에는 보수정권이 아무리 헛발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35% 전후의 고정 팬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끄러웠던 '최순실 게이트'는 절대 부동의 35% 팬심을 와해시켰고 한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문재인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집권 4년 차인데도 여전히 실력(성과)보다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국회도 넉넉히 과반수를 넘겼다. 법원도 기울었다. 언론도 바뀌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보수는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나는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북한과 분단의 영향으로 우익(右翼, right)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공산주의 자체가 풍기는 썩은 냄새가 역겨울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꾸준히 헛짓거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최소 30%의 국민은 고정된 보수·우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한국 사회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상당히 왼쪽으로 기운 운동장이었다. 한반도 상황에서의 자연스러운 반공 정서만 생각했지 문화와 지식 권력에 스며든 단단한 진보·좌익적 세계관을 낮게 평가한 것이다.


조우석의 『좌파 문화권력 3인방』은 이러한 나의 뒤늦은 인식에 적절한 말미를 제공해 준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우뚝 서 있는 문화·지식 권력의 좌경화를 신랄하게 꼬집고 고발한다. 큰 틀에서 지식인 세 명을 대놓고 두들겨까는데 그 논증과 문체가 흥미롭다. 출판사 '창비'의 설립자이자 발행인 백낙청, 진보 계열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로 모셔온 리영희, 『태백산맥』의 저자 소설가 조정래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대부분이 그들을 향한 비판과 분노로 가득하다. 탄탄한 증거와 일관된 맥락이 뒷받침하고 있어 책 자체는 어설프거나 조악하지 않다.


저자의 첫 타깃은 백낙청이다. 백낙청이 누구인가. 1966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아닌가. 저자는 그 영향이 절대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창비」와 백낙청은 한국 문단을 구조적으로 좌편향하여 본질적 수준에서 황폐화시킨 주범이다. 그 방식이 상당히 악질적인데 선호하는 작가를 전진 배치해 문학사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선호하지 않은 작가를 뒤로 밀쳐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띄운 작가가 대표적으로 시인 김수영이다. 저자는 상당히 많은 지면으로 김수영과 그의 작품을 비판한다. 또한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과 시인 고은의 성추행 사건 때 백낙청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를 위선적이고 치졸하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고 리영희 교수를 '종북 지식인 1호'로 명명한다. 리영희가 1970년대에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고 질타한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이 리영희의 명저로 꼽히는데 세 권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도 이 책들이 왜 좋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가. 어설픈 반미와 조악한 반 대한민국 내용으로 일관하는 쓰레기 같은 내용이다. 더욱이 모택동과 현대 중국의 찬양과 숭배는 과히 못 봐줄 수준이다. 훗날 전향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시선만 바꿨을 뿐이다. 끝까지 비겁한 지식인으로 남은 리영희는 백낙청보다 더 나쁜 숙주다.


소설가 조정래는 저자에 의해 '남로당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규정된다.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포괄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즉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낱권 기준 1,55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많이 팔린 만큼 대중의 한국 근현대사 통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저자는 조정래의 소설은 '문학의 옷을 걸친 반역 소설'이라고 기각한다. 이를 논증할 만한 소설 속 여러 장면과 상황을 소개하는데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오래전 『태백산맥』을 완독한 내 감상도 저자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태백산맥』이란 작품은 순수 문학적 관점에서 수준 높은 소설로 평가하기 힘들다. 소설은 캐릭터와 우연성을 다루는 장르이다. 『태백산맥』 속 캐릭터는 작가에 짓눌려 작품 속에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빨치산을 낭만적 전사로 그린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주인공들의 매력과 생명력은 만화 캐릭터처럼 굳어 있다. 더욱이 역사소설은 사실의 명백한 토막 사이에 작가적 상상력을 붙여야 한다. 그러나 자주 발견되는 역사적 오류는 큰 흠이다. 박경리의 『토지』보다 한참 못하다.


저자는 세 지식인 외에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몇몇 아류의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철학자 김용옥(도올), 소설가 한강,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 등이다. 개신교·천주교 등의 일부 종교권의 좌익 현상과 현 집권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심각한 좌경화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끼친 한국 사회의 해악에 대해 분노에 찬 필치로 서술한다. 반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할 참 지식인을 소개한다. 저자가 추천한 참 지성 2인은 소설가 복거일과 교수 양동안이다. 그들의 저작과 일갈을 인용하며 한국 지식계가 마냥 죽은 건 아니라고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부정과 긍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읽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비판 대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파고들어 공격한다. 얄짤없다. 시원시원하다. 언론인이며 문화평론가인 저자의 필력은 돋보인다. 사실관계의 정확한 편재 위에서 자기 주관을 덧붙이니 문장에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진영적으로 다분히 오른쪽에 있는 저자의 이념 지도를 모르지 않는다. 평소 저자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게 평가해오고 관련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력이 저자의 논리를 기각하지는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주관은 주관이며 입장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할애하여 거침없고 일관되게 쏟아내는 저자의 좌파 비판은 충분한 힘과 논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보수·우익이란 게 서글퍼졌다. 보수라 하면 마치 똥 쳐다보듯이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나라 대부분이 보수의 세상이 됐다고 떠들썩한데 한국의 보수는 거의 파멸 직전이다. 사실관계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개인과 가족을 강조하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능력과 효율을 언급하면 물질만능주의자가 된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파묻혀 악한 것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얘기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며 비웃는다. 반미, 페미니즘, 동성애는 세련됨의 아이콘이 됐다. 운동장은 기울어진 게 아니라 뒤집어졌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나. 우리의 선배 세대가 쌓아올린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디 갔나. 그 원인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연장선상에 이 책이 놓여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스며든 좌익적 세계관의 뿌리를 천착한다는 차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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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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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픈 사람은 달라진다. 아파본 사람은 삶의 깊이를 밀도 있게 천착한다. 죽도록 아파본 사람은 삶과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를 웅숭깊게 깨닫는다. 아픔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새삼 강렬히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성숙해졌다. 현명해졌다. 겸손해졌다. 글에 살기가 덜하다. 분노와 비난은 절제되었고 자기주장은 정제되었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조롱도 사그라들었다. 타인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함양됐다. 방송인 허지웅 얘기다.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가 암 투병을 극복하고 쓴 첫 번째 에세이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그를 평소 얼마나 싫어하고 비판해왔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 서평에서 그의 두 권의 에세이(2014 『버티는 삶에 대하여』, 2016 『나의 친애하는 적』)를 매우 신랄하게 기각한 바 있다. 내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 세대를 향한 조롱과 기존 권위를 경멸하는 그의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어설픈 지식 몇 토막으로 선배 세대가 힘겹게 쌓아올린 공()과 업적을 불인정하고 조롱하는 그의 언행은 과히 역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간에서는 그의 그런 기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의 에세이 중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향한 분노와 시기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텍스트다. 암 투병이라는 삶의 극한의 '바닥'에서 정신의 단련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는 성숙한 젊은 방송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 곳곳에 자기 자신에 관한 객관적 성찰, 과거 자신의 부적절하고 온당치 않은 언행의 후회, 삶의 여러 맥락에 관한 진지한 감사 등이 고백됐다. 허지웅이 맞나.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지. 그의 바뀐 태도 때문인지 문체까지 온화하게 다가와 책 곳곳을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내려갔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곳곳에 철학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니체를 다시 읽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와 기독교를 사멸시키려 한 서양 근대 철학자가 어색한 조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ㅡ저자는 '권력의지'로 표현했다ㅡ를 제외한 채 '운명애'와 '영원회귀'만을 떼어내 자기 삶의 긍정의 모멘텀으로 치환하는 건 어색하다. 니체적 삶의 희망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힘에의 의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맹목적인 것인데 비해 니체는 '힘(권력)에의 의지'를 통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우리 삶을 충만하게 넘쳐흐르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딴죽을 걸자는 게 아니다. 저자의 바뀐 태도를 긍정하며 진심으로 응원하기 위해 덧붙여보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을 인용한 건 저자의 바뀐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p. 191)라는 니부어의 기도문은 소위 '평정심(평온)의 기도문'으로 불리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과 씨름하며 살아갈 때 '현실-기적' 사이의 아이러니를 가장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명문장이다. 이를 오스카 와일드의 소송 이야기와 니체 철학의 '위버멘쉬'와 연결 짓는 건 다소 어색했지만 저자가 결국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는 니부어의 입장에서까지 추출해낸 대목은 흥미롭다. 아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모순과 한계의 발견,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충만한 감사가 저자의 삶에 흘러내린 것이니라.


바뀐 저자의 태도 때문인지 책은 술술 잘 익힌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자기 삶을 긍정해내려는 방송인 허지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응원한다. 저자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저자에게 무조건적인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었던 기성세대는 '가면을 써서라도 웃어야 할 존재'로 바뀌었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건 소중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준에 이르렀다. "가면을 벗고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해야 한다"는 조언도 첨가한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권위와 기존 질서의 틀은 분노와 투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악의적인 게 아니라면 웃음과 설득, 소통과 여유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가 바뀐 만큼 세상도 바뀔 것이다.


과거 저자를 비판할 때 저자의 영화 리뷰만은 까지 않았다. 저자의 영화 해설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수준급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 장르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은 물론 각 영화를 풀어내 우리의 삶과 사유에 적용시키는 각론화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일테면 책의 말미 영화 <스타워즈> 리뷰는 높은 통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스타워즈>를 "재능 있는 젊은이를 질투하거나 두려워할 것인지, 아니면 축복하고 응원해 줄 것인지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충격이다. 시리즈 전편을 다 본 나에게 영화 <스타워즈>는 그저 화려한 CG로 그려낸 광활한 우주 광경이나 스펙터클한 광선검 격투신이 전부였다. 그것이 축복과 응원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최근 주변에서 능력과 다름에 관한 시기와 반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기에 <스타워즈> 리뷰에 담긴 저자의 달견과 통찰은 시의적절하게 내 마음을 훔쳤다.


책 제목을 생각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제목을 지었는지는 책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살고 싶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게 농담이란 걸 선언하는 것인지, '살고 싶다는 농담'을 툭 던져보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건 책 곳곳에서 저자의 살고 싶은 의지만큼은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는 건 저자에게 진심이었을 게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까. 결국 저자는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 "살아라."(p. 274)


서평을 정리하자. 금번 허지웅의 신간은 읽어볼만했다. 좋은 느낌으로 따뜻하게 읽었다. 과거의 악평과는 독립적으로 호평이다. 분명 허지웅은 변했다. 과거의 날선 문체가 아니다. 분노와 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겸허한 소회도 엿보인다. 자기반성이 보인다. 정치 얘기는 일절 없다. 암 투병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 사유와 마음의 크기가 더 확장된 것 같다. 물론 그만 변한 건 아니다. 동갑내기인 나도 변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슴의 온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정서적 무드도 변했다. 40대 중반을 향하니 왜 그리 감사할 게 많은 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으로 보일 정도다. 그렇다.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 변화의 하모니에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이 놓여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려는 독자들에게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을 추천한다. 내가 허지웅의 책을 추천할 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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