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공부 -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조윤제 지음 / 흐름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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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큼 계발서가 가진 구조론적 모순에 대해 차갑게 비판해온 리뷰어도 드물 것이다. 내가 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계발서의 형태적 구조가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를 예외없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러나 가끔 그럭저럭 읽어볼만한 실용서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물론 달콤한 이야기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다른 계발서와 별반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주제를 추출하는 방식과 내용을 전개해가는 수준에 있어 가볍지 않은 밀도가 포착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된다. 대개 인문학적 재료와 방법을 적용한 책들이 이들 부류에 속한다. 즉 같은 계발서라 하더라도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는 내용상의 내공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조윤제의 <말공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분명한 계발서지만 인문학적 콘덴츠를 적절히 융화시켜 꽤 괜찮은 실용서를 만들어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한 저자의 경험이 실용적인 텍스트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뻔한 얘기지만 지루하지 않게 글을 쉽고 유려하게 뽑아내는 저자의 공력이 눈에 띈다.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쉽고 실용적인 계발서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말(言語)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말 공부'라는 강력한 책 제목은 이 책이 인문학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을 홍보한다. 『논어論語』, 『맹자孟子』,『사기史記』 등 동양사상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불멸의 텍스트를 통해 '말 공부'의 각론을 훑는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고전의 가르침과 예화를 통해 관통한다.

   이 책의 매력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동양고전 속에서 한 토막의 글감을 추출하여 재미있게 버무려낸 데 있다. 본격 실용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서술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치도 않은 적정선을 잘 포착한다. 여기에 매끄러운 문장이 결합되어 책의 주제와 카테고리에 맞는 적확한 힘을 지니게 됐다. 온갖 자극적인 미사여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서점가의 대부분의 계발서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세태에 대한 시의성에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언어의 홍수 시대다. 작금의 대한민국도 소통의 중요성이 화두가 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말이 통하지 않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작게는 부부 사이에서 크게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까지, 현실 한국은 극심한 소통부재로 적지 않은 피로를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의 공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며칠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했다. 짧지 않은 분량에 눈물까지 흘린 담화였지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나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소통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담화에 엄청난 조직 개혁과 눈물의 사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은 '꼭 해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이토록 극심한 소통부재에 직면한 본질적인 원인도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데서 온 후유증이 아닐까. 청와대 참모진은 이 책을 대통령에게 추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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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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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불특정다수가 읽는 서평이기 때문에 존칭은 생략)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 있을까. 동시에 많은 욕을 받은 정치인이 또 있을까. 지극히 나이 드신 분을 제외하고 한 번쯤 좋아했을 법한 정치인이 바로 노무현이다. 좋아할 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졌고 동시에 실망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존재했다. 그가 서거한 지 어느덧 5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영화 <변호인>으로 그를 재인색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만 최근의 어지러운 시국 탓도 있겠다. 그 어느 때보다 주변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많이 회자된다.

<그가 그립다>는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수필집이다. 노무현 5주기 추모집의 성격을 띤다. 많은 저자들이 참여했다. 자칭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었던 작가 유시민을 위시하여 총 22인의 글을 담았다. 집필에 참여한 22인의 이력은 가지각색이다. 작가, 평론가, 교수, 방송인, 연극인, 이발사, 요리사 등 우리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다양한 빛깔을 담았다. 한 권의 소설집처럼 독립된 에세이들은 주제와 문체가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개별성을 가진다.

그중 몇몇 글이 눈에 띈다. 당선 전부터 인연이 되어 청와대 전속 이발사와 요리사가 된 두 저자의 글은 순박하고 따뜻해서 좋다. 이들의 글은 재임 당시 권위와 허례허식 없는 노무현의 소박한 인간미를 잘 소개한다. 특히 퇴임하는 날 함께 기차를 타고 사저로 가는 도중에 필요한 도시락을 준비한 요리사의 애틋한 일화는 훈훈하고 애잔하다. 결국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실린 글이 모두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몇몇 저자들은 이 책의 존재목적인 노무현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아닌 개인의 정파적 입장을 토로하는 함몰성을 보인다. 곱게 읽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저자 중 어느 정신 나간 교수는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국민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대통령이었고, 그로 인해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책을 읽고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는 명확한 진리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한 능력과 잠재력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진다.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도 우리사회는 역사와 인물을 천착함에 있어 극단적인 진영주의에 함몰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동시에 놓고 입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지력과 판단력이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을 완전무결한 신의 연역성 위에 올려놓고 모든 비판과 반론을 굴곡시키는 행태는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도 옳지 않은 짓이다.

나 또한 노무현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과 한계까지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가진 명암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거리두기가 결여된 정치인 팬클럽은 교조적 신격화의 경향을 띠게 되고 종국적으로 보편 국민과 반대세력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은, 노무현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한다.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한 얼빠진 교수의 지성과 현실인식에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사랑과 그리움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다.

내가 노무현을 좋아했던 건 그가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행동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땅의 어렵고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마치 자기 일처럼 관통하려 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과 패기를 사랑했다. 또한 그것을 뚫고 나가는 소신과 용기도 존경했다. 적어도 '좌파'를 하려면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을 가진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지고한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따뜻한 박애주의야말로 진보좌파가 가져야 할 핵심가치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 노무현의 진심과 열정을 나는 한없이 사랑한다.

물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많이 실망했고 미웠다. 그러나 그에 대한 향수는 내 가슴 한 구석의 작은 방 안에 오롯이 보관돼 있다.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우리에게 이토록 인물이 없는가 하는 푸념을 하게 될 때, 가끔 나는 가슴속 작은 방 안 노무현의 얼굴을 그린다. 신간 <그가 그립다>는 이 그리움을 애틋하게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몇몇 저자의 정신 나간 주장으로 맥이 빠지는, 그래서 부득불 선택적으로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책이다.

그러나, 나도, 노무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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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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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문학이 이슈다. 너나할 것 없이 인문학을 얘기한다. 인문학을 배우고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난리통이다. 특히 서점가는 '인문학'이라는 문구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이 위기라느니 빈곤이라느니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던 만큼 작금의 인문학 열풍은 다소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사실 말은 바로 하자.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인문학을 중요시해왔던가. 외적인 열풍 현상과 내적인 중요시함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오직 대학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 나라 중등교육의 현주소는 궁극적으로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철학과 역사는 전공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외된 분야였다. 일반인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나 칸트의 인식론의 체계를 머릿속에 담고 있기란 여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환경 탓이다. 이런 배경에서 TV와 신문, 서점에서 오버스럽게 인문학을 외쳐대고 있는 풍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좋은 것이다. 위기이자 빈곤인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질(質, quality)'에 있다. 과연 서점가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도서가 진정한 인문학을 다루고 있는 책들일까. 즉 인문학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에 담을 만한 내용이냐 하는가다. 서점에서 인문학을 전면에 내세운 다수의 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맹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컨덴츠의 질과는 무관하게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을 인문학으로 포장해놓은 출판사들의 카피문구는 그야말로 못 봐줄 코메디다.

   인문학은 자기계발이 아니다. 처세술은 더더욱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언어학ㆍ문학ㆍ역사ㆍ법률ㆍ철학ㆍ고고학ㆍ예술사ㆍ비평ㆍ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의 포괄적 집대성이 인문학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필히 지력의 무게와 깊이를 내재한다. 인문학의 보편성 안에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을 무리하게 적용시키려는 일부 저자와 출판사 들의 행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더이상 인문학을 남용하거나 농락하지 말라.

   베스트셀러에 인문학 도서가 몇 권 올라 있다. 그중 광고 카피라이터 박웅현의 <여덟 단어>가 눈에 띈다. 오랜만에 베스트셀러에 재진입했다. 최근 TV와 영화에서 소개된 이유 때문인 듯하다. 저자 박웅현은 이 책에서 '인문학'을 얘기한다.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자못 진지한 부제를 책 전면에 배치했다. 여덟 단어를 주제로 하여 젊은이들에게 강의했던 저자의 강연 내용을 묶어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저자는 자존自尊ㆍ본질本質ㆍ고전古典ㆍ견見ㆍ현재現在ㆍ권위權威ㆍ소통疏通ㆍ인생人生 등 살아가면서 꼭 생각해봐야 할 여덟 가지 단어를 제시하며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조언한다.

   이 책의 강점은 어렵지 않다는 데 있다. 책의 태동이 되는 저자의 본래 강의는 2~30대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주제의 포괄성과 내용의 전달방식이 상당히 평이하다. 대학생보다는 오히려 중고생이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의 경험, 예술작품 관련 예화, 고전의 소개, 작가의 명언 등을 저자 자신의 사유로 뒤집고 비틀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존어체는 강의의 현장감을 살렸다. 기술적으로 내용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전달방식이 따뜻하다. 독자는 마치 학생이 된 것인양 저자의 강의 속에 포근하게 안길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의 공허함이 문제다. 저자가 선택한 여덟 단어는 모두 묵직하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 내용에 있어서는 어디서도 들을 수 있을 만한 뻔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인문학이라면 태동적으로 소유해야 할 최소한의 지적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고 미지근하며 평범하다. 특색이 없다. 사유의 밀도와 지력의 중량이 포착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자기계발서와 다름 없는 가벼운 맥락이 자주 확인된다. 보다 신랄하게 말해서 이 책은 인문학과 자기계발 사이에 어중간하게 위치한, 텍스트로서의 자아의 정체에 몰이해적인, 지극히 개성 박약한 강연집이다.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이 아닌 '변혁'으로 설파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식인의 힘은 해석과 반영을 넘어 변혁에 다다를 수 있는 지력과 용기에서 나온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외연만 요란한 인문학 타령은 불필요하다. 지적 소음이자 종이 낭비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관통하는 속이 꽉 찬 컨덴츠가 필요하다. 이를 텍스트로 풀어내는 힘은 오직 저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해석'에 머물러 있는 저자의 역량은 아쉽다. 서두부터 정황하게 언급한 인문학의 위기, 혹은 빈곤에 직면한 현실 한국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요컨대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인문학의 정수를 느끼기에는 역부족인 딱 고만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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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언어 - 한국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사상 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서
양동안 지음 / 북앤피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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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심한 사상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못지않은 좌·우익의 극렬한 사상 전쟁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치열한 방식으로 전개되며 국민의 삶을 옭아매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대한민국을 사상 전쟁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는가.

   물론 사상의 균형있는 대립과 절제된 토론은 건강한 사회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균형과 절제와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객관적 지식이 호도되고 역사적 사실이 굴곡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좌든 우든 극단적인 것은 반드시 악의 결과로 귀결된다. 2차 세계대전의 교훈이 명징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스탈린과 히틀러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사회에서 사상 대립과 담론 구조가 극단화되면 될수록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중용적 지성과 건강한 양심은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

   양동안 교수의 <사상과 언어>는 바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다. 용어 탄생의 역사성과 현재의 통용 상황의 국제성을 논증으로 각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알려준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지식인마저도 사상과 언어 사이의 괴리가 많은 만큼 이 책이 교정해줄 수 있는 대상은 꽤 폭넓다.

   사상과 언어는 왜 일치해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사상과 관련된 용어들은 사물인식과 사유의 핵심적 기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물인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성과 정파성에 유독 예민한 국내 여론의 특질을 감안할 때 사상·정치용어들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찾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힘있고 건강한 언어생활의 첫 출발은 '바른 말'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담론을 구성한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올바른 언어생활이 사회의 건강한 담론문화를 형성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대한민국 만큼 '좌파·우파'와 '진보·보수'의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회도 드물다. 그러나 문제는 좌·우파의 개념도 정확하게 모른 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매체들과 지식인 사회에서 '익翼: wing - 당黨: party - 파派: faction'로 일목요연하게 단위를 구분하여 사용되던 합리적인 정치세력 호칭법을 무시하여 사용해온 결과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진보'라는 용어가 좌익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좌익(파)=진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공식이 우리사회의 여론 구조 속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의 'liberal'을 국내에서는 'progressive'와 동일하게 '진보적'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무지의 횡행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conservatism)는 개념화가 확립되어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갖춘 사상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가능하다. 그러나 '진보주의'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의 뜻은 '보다 좋은 상태로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보편적 명사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지 어떤 하나의 객관적인 사상체계로 지칭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 저자는 이러한 오용 사례를 풍성하고 깊이있는 설명으로 바로잡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자유주의·신자유주의', '민주주의·시장경제', '반공·메카시즘', '사회주의·공산주의', '민족해방·민종민족주의' 등 국내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정치용어들을 해부한다. 정치인 중에서도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와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다수인 한국의 현실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각 용어의 중요성을 감안한 순서적 배치가 돋보인다. 매 장마다 깔끔한 설명을 통해 잘 정리했다. 정치학 교수다운 저자의 흠 잡을 데 없는 기술과 객관적 설명이 강점인 책이다. '바르고 고운 말'을 위해서라도 일독이 필요한 책이다.

   어느 누구보다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분들이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력과 무관하게 지력 자체가 미달되는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사전 시험을 쳐서 합격자에 한해서만 국회의원 입후보 자격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마냥 반가운 보물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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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복거일 엮음 / FKI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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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는 우리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自由主義者, liberalist)의 고백집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당연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를 의미한다. 총 스물한 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소설가 복거일을 위시하여 <대한민국역사>의 저자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번역한 김이석 박사, 전교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명지대 조전혁 교수(전 국회의원) 등이 눈에 띈다. 공저자 대표는 복거일이 맡았다.

대부분 대학 교수로 구성된 공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각기 다른 자유주의에 이른 배경과 원인이 소개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진화적'으로 자유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주의의 허구를 학문적으로 깨달은 후 자유주의로 전향한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유사성을 파헤치며 논증한 사람도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가지각색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유주의의 숭고한 정신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집단주의의 허구를 생생하게 경청할 수 있게 된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첫 장의 서울대 이영훈 교수 편이다. <수량경제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위시하여 평소 그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녹록지 않은 내공을 갖춘 학자라는 인식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는지는 나에게 자못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학자답게 실증적인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탈했다. 그는 18~19세기 농민들의 계층별 동향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열되는 게 아니라 표준적인 경작규모의 소농 계층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한 양반가의 15~16세기 상속문서에 적힌 노비들의 수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깨달음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세밀한 실증으로 연구해가면서 그는 사적 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뼈대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교수뿐만 아니라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학문적 입장에서 범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다. 미제스(Ludwig Mises), 하이에크(Friedrich Hayek),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뷰캐넌(James Buchanan) 등 저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사상도 각 편마다 몇 토막씩 간략히 소개된다.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을 가볍게 훑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오해한다. 아마 자유주의의 밑바탕인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교권으로 속해 있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군사적 집단주의에 함몰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개별 인간에 대한 철학을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집단(공동체)'으로 묶어 사고하는 습관이 은연 중 몸에 배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서구사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밀(John S. Mill)이 주장했듯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로 구분되어 정의된다. 17~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룬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포함해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 명칭한다. 20세기가 되어 자유주의는 앞에 '진보', '질서', '신新' 등의 이름을 붙이며 그 형태와 의미를 변화시켜갔다.

21세기에 당도한 지금의 시점에서 자유주의를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토론이 불가한 보편적 통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성 속에 선언적으로 녹아있다. 문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프리드먼이 강조했듯이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런 전례가 없다. 즉 정치적 자유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새 정치'를 주장하며 신당을 창당한 모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명명했다. 그들이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19세기말 밀을 중심으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자유주의 1세대로서의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 = 사회적 자유주의, social liberalsim)'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본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 부자연 관계다. 역사적으로 용어의 혼선이 있다. 본래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정치학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20세기 들어 서구사회에 많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liberalism'의 개념은 'progressivism'과 혼용됐다. 그 결과 요즘에는 아예 진보를 '리버럴(liberals)'로 부르고 있다. 즉 'liberals'의 의미 속에 함의된 '보수'와 '진보'의 성질이 혼용되면서 복잡성을 띠어왔다. 그래서 이와 구별하기 위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용어 전환의 역사성을 전제한다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자유지상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단언컨대 나는(도) 자유주의자다. 철학적이고 체질적으로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를 싫어한다. 특히 사회주의의 원뿌리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과히 증오하는 수준이다. 숭고한 개인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어줍잖은 평등의 논리로 재단하여 결국 집합주의(集合主義, collectivism)로 귀결시키고야 마는 사회주의적 논리와 사상은 치를 떨 정도로 거리감을 둔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복무할수록 이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20세기 세계사를 유심히 탐구하다보면 '사회 역할의 강조'와 '개인 자유의 보장'은 정확히 반비례로 등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개입주의자들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사회공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플라톤과 데카르트 식으로 환원하면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와 '설계주의(constructivism)', 그리고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구조론적으로 병합된 세계다. 이러한 병합구조는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바와 같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사회의 전체주의적 기작을 생산해낸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히 증명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시 천국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위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불완전하다. 인간 이성에 대한 교만은 밀부터 뷰캐넌까지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외쳤던 경고였다. 그렇기에 개입주의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조차도 '하아비가의 전제'를 가정했던 게 아닌가. 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매우 불완전하게 본 하이에크의 입장에 동의한다. 또한 "인간의 인식은 의식의 주관적 산물이므로 인간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Immanuel Kant)의 인식론을 적극 지지한다. 인식을 '형식(능력)'과 '내용(재료)'으로 구분하여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강조했던 칸트 철학이 현대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명언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이성의 긍정과 부정을 양립시키며 경험을 통한 끊임없는 인식 능력의 발전을 주장했던 칸트의 견해는 충분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는 물론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개별 시민 모두에게 말이다.

자유주의를 이러한 칸트주의(Kantianism)의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로 꼽히는 빈부 격차, 환경파괴, 독과점, 공공재 부족 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궁핍한 자에게는 정부가 따뜻한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해줘야 하고, 기업거래에 있어 명확한 법치를 세워 독과점을 규제해야 하며, 균형을 잃고 파괴되는 환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각론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기본 철학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는 결국 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로서 내 철학은 분명하다. 내 밥은 내가 해먹는 것이고, 자식 우유는 부모가 주는 것이며, 노후는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그게 안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돌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현실의 각론에 치열하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내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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