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허지웅을 싫어한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변 등은 상당히 불쾌한 것들이다. 특히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진영논리적 주제에 대해 강한 자기확신으로 질타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언제나 비호감이다. 작년 그는 모 종편 방송에서 "드라마 <정도전>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드라마 한 편의 시청여부를 놓고 인생의 보편성을 훈계할 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사회의 여러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마치 전투하듯이 대중에게 훈계하는 그의 어법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다. 본인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자아상은 외면한 채 남도 나와 같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현존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추태가 꼴사납다. 옥소리의 부정(不貞)을 비판하는 대중의 자유와 그 양상을 비판하는 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유권에 속한 것이다. 누가 감히 자유의 과잉과 한계를 말한단 말인가.

   허지웅은 '옥소리 간통 논쟁'에서 '공인(公人)'의 개념을 전근대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공인'의 의미를 '공적에 적을 둔 사람'이라는 좁고 사전적인 의미로 걸러낸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대적 공인의 개념에 무지해 있다. 미국의 '공인이론'과 한국의 법원 판례를 한 번이라도 훑어봤는가. 근래의 공인 범위 논쟁은 명예훼손과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연예인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정치적인 공인으로 분류된다. 모든 명예훼손법이 이 기준에서 적용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더이상 무식한 얘기를 하지 말라.

   허지웅은 싫지만 그의 글은 읽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공인은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쓰는 허지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의 텍스트만큼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간의 말처럼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작용했다. 그랬다. 허지웅의 신간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저자는 인생을 '버티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인간 삶의 고단함을 인정한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내재된 잘못된 전제를 나와 비슷한 논지로 규탄한다. 인생은 피곤하고 가난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사회적 합의와 제도로써 천국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인물은 아니다. 제목 '버티는 삶'은 박수 쳐 줄만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반갑다. 시대가 변해도 책읽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책 읽는 개인과 청춘, 국민 들이 역사를 추동했다. 저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말만큼은 진실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진 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책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한 인류 지성의 거대한 용광로다. 책읽기의 소중함을 설파한 부분 또한 박수 쳐 줄만하다.

   그러나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보인다. 저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어법을 가감없이 구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저자의 주장에 새로울 건 없다. 무엇보다 20대를 천착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장 불편하다. 저자는 현재의 20대를 부정적으로 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세대의식'이 전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20대는 주위의 문제의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돈에 미쳐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원인은 IMF 체제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세계 전부로 경험했고 급격한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무한경쟁의 순환고리 안으로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건강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게 잘못된 걸까. 돈을 모으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 시대는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는 다른 시대적 소명을 요구한다. 21세기는 더하다. 지금의 20대가 80년대의 20대처럼 광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를 외칠 세대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87체제의 아비투스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느 시대의 20대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20대는 꼭 마르크스주의자여야만 하는가.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공부하며 땀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결하고 자생적인 인간의 행위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건 위선이요 거짓이다. 저자는 뒷골목에서 짓까불며 덤방거리는 유럽의 얼빠진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비호감이다.

   이밖에도 책 내용 곳곳에서 비판할 대목은 많다. 다만 뒷부분의 영화리뷰는 인상적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영화잡지사 경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리뷰만큼은 수준급이다. 리뷰어로서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해 논설에 여유가 느껴진다. 정치색과 정파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영화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저자의 뇌는 정말 섹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 타자의 존재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 지금 입고 있는 허지웅의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외연적으로 에세이의 평균은 유지한다. 허지웅은 말보다 글이 낫다. 앞서 그의 지력과 태도를 모두 꼬집었지만 글에서는 태도적 문제가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영화 해설을 소개한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천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아무런 대안없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조소를 던지며 마치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선 위트인양 지껄이는 모습은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다.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수정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동갑이라서 조언하겠다. 방송에 나와 떠들려면 공부 좀 더하고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라. 그게 공인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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