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위한 생각이 아닌 생각을 위한 과학 - KOREA《SKEPTIC》창간호
● 어떤 가족의 확신에 대해서
2016년 8월 20일 뉴스 중에 “동생이 애완견 악귀에 씌어서 죽였다”는 기사가 있다. 오빠 ㄱ씨와 여동생, 어머니는 애완견이 악귀가 들었다고 생각하고 죽였고, 이후 그 악귀가 여동생에게 옮겨간 걸로 판단해 두 사람이 그녀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런 구마(驅魔) 행위로 인한 죽음은 콜린 윌슨 《인류의 범죄사》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흔하다. 한국에서만도 한 달이 멀다하고 구마(驅魔) 행위로 인한 살인 뉴스가 검색된다.
정신 병력도 없는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살해할 만큼 확신하는 이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들이 '악귀'라고 판단한 근거가 어디에서 왔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 어떤 사람의 확신에 대해서
최근 <궁금한 이야기 Y>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는 자칭 의학 비평 작가로 활동한 허현회 씨를 다뤘다.
<그것은 알기 싫다> ☞ ‘과학과 허현회’ https://soundcloud.com/xsfm/189b
온라인 서점에 허현회 씨 책이 다수 등록되어 있는데,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 등이 주목받았다고 한다. 사이비 과학이라는 평이 자자한데도 책 내용을 신뢰하는 리뷰가 더러 보여 섬뜩했다.
허현회 씨가 저런 생각을 하고 주장을 내세운 여러 가지 이유를 추정해 봤다.
1. 의술이 아닌 돈벌이로 변질된 한국 의료 체계에 대한 불만과 불신
2. 확증 편향에 빠진 오만함
※ 확증 편향: 자신의 가치관, 기대, 신념, 판단에 부합하는 확증적인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편향된 현실 인식 방식
3. 노이즈 마케팅 효과 : 철저한 검증 없이 '의학 지식'이라고 언론에 발표하고 그것이 논란이 돼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좋든 나쁘든 그의 인지도와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
일명 ‘카레 놀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허현회 씨가 해외 기사에서 'Health Care'를 '건강한 카레'로 해석해 기사 트윗을 올렸고, 트위터리언에게 조롱거리가 된 일이다. 논란이 많았던 허현회 씨 주장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킨 사례였다. 그 사건으로 허현회 씨는 트위터에서 탈퇴했다.
관련 트위터 자료 ☞ http://ppss.kr/archives/11300
결핵과 당뇨를 앓았던 허현회 씨는 자연 치유를 고집하다 얼마 전 사망했다. 문제는 그 만의 죽음이 아니라는 거다. “술과 담배, 성관계를 많이 하고 짜게 먹어도 좋다”라는 황당한 주장에도 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의 죽음이 모두 허현회 씨 탓이라고 할 수 없다. 의학계가 허현회 씨 주장이 너무 터무니없어 논할 거리도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게 더 일을 키웠다. 커뮤니티를 만들기 쉬운 요즘, 자신의 불안과 불만을 달래줄 것을 찾는 사람들은 쉽게 모인다. 건강에 대한 것은 늘 사람들의 관심사다. 정보인지 독인지 검증도 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나쁘다고 생각했던 일을 전문가라는 사람이 좋다고 하니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받아들인다.
너 자신을 가장 의심하라.
● 확신의 긴 그림자
위에서 논한 어떤 가족의 착각이나 허현회 씨의 착각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악령’이라 판단하는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스스로 ‘악령’에 빠져 살인을 저지른 것과 ‘의학은 사기다’라고 판단하는 자신을 의심하기보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일찍 자초한 것이 말이다. 생활에서도 과학에서도 그들의 사례가 최초이자 최후가 아니라는 게 안타깝고 두렵다.
일찍이 토마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 전체에게 ‘확증 편향’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특정 과학 공동체가 인정한 과학적 성취(패러다임)에 확고히 기반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는 정상과학(nomal science)은 새로운 발견이 목적이 아니라 인정받은 정통을 이어받는 성격이라고 말이다.
“18세기 내내, 운동과 중력에 관한 뉴턴의 법칙들로부터 달의 관측된 운동을 유도하려고 했던 과학자들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 결과 일부 학자들은 역제곱 법칙 대신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법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퍼즐을 정의하고, 옛 퍼즐들을 풀지 않아야 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기존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다가 1750년에 마침내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임의 규칙에서 한 가지를 바꿈으로써 비로소 대안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ㅡ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p122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E.H.카《역사란 무엇인가》를 많이 떠올렸다. 두 사람 다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인 '역사'와 그에 대한 '정의'의 모순을 따지는 데 모범을 보여준다.
토마스 쿤이 보여준 ‘합리적 회의주의’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도 곧 읽어봐야 할 거라 생각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그리 합리적인 구조로 이뤄진 게 아니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다시 집중해서 봐야 할 때인지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속에서 큰 불행과 좌절을 느끼지 않고 만족하며 산다면 운일까 복일까. 하지만 우린 개인으로서만 살 수 없다. 사회인, 젠더, 부모, 자식, 친구, 타인 여러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 작은 확신으로만 산다면 낭패다. 우리 조상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과 함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라는 속담도 줬다. 필요한 것만큼이나 경계할 것도 우리 가까이에 있고 신경 써야 한다.
내 앎과 행동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더 치열해야 할 고투라는 게 또 버거운 오늘이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문 독서가 합리인지 독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먼 훗날엔 알 수 있을까.